LOGIN첫 대면에서는 하지율이 우위를 점했다.남시온은 더 이상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저와 용화, 그리고 소현이까지. 저희 세 사람은 10년 전 한 선발 대회에서 처음 만났습니다.”남시온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참가자는 총 100명. 그중 무인도에서 살아남아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 사람만이 최상위 엘리트 양성 과정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었죠.”그는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당시 저희 셋 모두 각자 가문에서 썩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소현이는 영나라 소속 가문 출신인데, 어머니가 동아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었죠.”남시온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용화 역시 가문 내부 문제 때문에 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그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그 선발전은 각 가문에서 밀려난 자식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같은 거였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죠.”남시온은 짧게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하지만 그 섬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섬 전체에 함정과 위험 요소가 깔려 있었고, 참가자들끼리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요. 말 그대로 목숨 걸고 버티는 게임이었습니다.”그러다 문득 하지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용화는 처음부터 그 안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 실력이면 굳이 선발전에 참가할 필요조차 없었죠.”남시온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그런데 그 자식은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왔다고 하더군요. 원래 자극적인 거나 목숨 걸어야 하는 위험한 상황을 좋아하는 성격인 건 하지율 씨도 아실 거예요.”하지율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맞아. 내가 아는 화야 씨도 그런 사람이지...’그녀 역시 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남시온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저희는 그 섬에서 한 달 동안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독충과 맹수를 상대하는 건 기본이었
이번 하지율과 계약을 체결한 회사는 해외의 유서 깊은 가문 소속 기업이었다.그런데 정작 총괄 책임자로 나타난 인물은 예상과 달리 동아국 남자였다.게다가 꽤 젊어 보였다. 많아 봐야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듯한 나이로 보였다.정돈된 짧은 머리에 양쪽 귀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피어싱이 박혀 있었다.하지만 또렷하고 잘생긴 인상에는 어딘가 거칠고 비뚤어진 분위기가 묻어났다.하지율은 눈앞의 남자를 조용히 바라봤다.“화야 씨 친구분인가요?”남자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친구라고 할 수도 있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하지만 저는 ‘전우’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전우?’하지율은 속으로 그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전우는 친구보다 훨씬 무거운 의미긴 하지...’목숨이 오가는 순간을 함께 이겨내고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도 등을 보일 수 있는 사람, 그 정도 관계가 아니고서는 쉽게 붙일 수 없는 표현이었다.주용화는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없을 리도 없었다.남자는 그런 하지율의 반응을 가만히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개가 늦었군요.”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제 이름은 남시온입니다. 현재 로이 가문 가주를 맡고 있습니다.”하지율은 속으로 짧게 생각했다.‘또 한 명의 가주... 역시 화야 씨 주변에는 평범한 사람이 없네.’하지율은 예의를 갖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하지만 남시온은 악수할 생각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고압적이었다.“죄송하지만 저는 아무에게나 친절을 베풀지 않습니다.”남시온은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적어도 같은 수준의 실력과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과만 친분을 쌓는 편입니다.”그는 하지율을 똑바로 바라봤다.“이번 계약 역시 용화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진행한 겁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소현이 역시 용화에게 빚진 게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딱히 갚을 방법이 없다 보니
주용화는 단순히 하지율에게 길을 열어준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하지율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하지율이 가장 위태롭고 흔들리던 시절, 곁에서 그녀를 지켜줬던 사람 역시 주용화였다.그는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하지율을 지켜주며 하지율이 상처 입지 않도록 자신의 품 안에서 천천히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줬다.만약 주용화가 없었다면 하지율은 지금까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지금의 자리에 올라서고 나서야, 하지율 역시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주용화 이야기가 나오자, 유소린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내가 뭐랬어. 화야 씨 같은 남자는 절대 놓치면 안 된다니까. 연정미 주변에 남자야 많지. 그런데 제대로 된 남자는 한 명도 없잖아. 화야 씨 하나로 다 상대되는 거 봤잖아.”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빛을 반짝였다.“지율아. 너랑 화야 씨...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은 거 아니야?”하지율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뭐가?”“결혼 말이야.”유소린이 능청스럽게 웃었다.“화야 씨 요즘 집 알아보던데? 나한테 네가 좋아할 만한 인테리어 스타일까지 물어봤어. 분위기 보니까 거의 신혼집 준비하는 것 같던데? 너희 벌써 거기까지 얘기 끝난 거야?”하지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 나랑 화야 씨 아직 사귀는 사이 아니야.”그 말을 들은 유소린이 황당하다는 듯 바로 말을 받았다.“너 요즘 SNS 안 봐?”“바빠서 한동안 못 봤어. 왜?”유소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하지율을 바라봤다.“화야 씨가 이미 SNS에 다 올렸거든? 거의 공식적인 커플 선언 수준인데, 아직도 안 사귄다고?”유소린의 말을 들은 하지율은 그제야 휴대전화를 꺼내 주용화의 SNS를 확인했다.그리고 화면을 보는 순간 손에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하지율의 지인이라면 누구든 단번에 사진 속 손의 주인이 하지율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손형서가 입을 열었다.“오빠가 어떻게든 하지율과 한동안 같이 지낼 기회를 만들면... 하지율도 오빠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몰라. 오빠랑 하지율은 공통된 취미도 있고 할 이야기도 많잖아. 참, 맞아. 하지율이 오빠한테 고양이도 보내 줬잖아. 그 고양이를 오빠가 이렇게 잘 돌보고 있는 걸 보면 하지율도 오빠를 다시 보게 될 거야. 하지율처럼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원래 동정심이 많잖아. 주용화도 용서했는데 오빠라고 끝까지 용서 못 하겠어?”손형원의 깊은 시선이 손형서에게 내려앉았다.“넌... 내가 하지율을 납치하게 만들고 그 틈에 네가 주용화와 엮일 기회를 만들 생각이지?”그 말에 손형서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역시 들켰네.’더는 숨기지 않기로 한 손형서는 손형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오빠는 그게 싫어? 정말 싫다면 왜 매일 하지율을 지켜보고 있는데? 하지율이 주용화한테 그렇게 해 주는 걸 보면 오빠도 하지율이 자기한테 그렇게 해 주길 바라지 않아?”손형원은 동공이 미세하게 굳었다.손형서에게 향한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다.손형서는 더 부추기려 했지만 손형원의 눈빛에 찔린 듯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연경 그룹, 하지율의 사무실.유소린이 서류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보고했다.“연재영은 아직도 우리 쪽을 막는 데 정신이 팔려 있어. 연정미한테 몰아줬던 자원들이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건 전혀 눈치 못 챘어.”하지율은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연재영이 우리가 연정미의 자원을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안 돼. 소린아, 프로젝트팀의 매니저 몇 명을 보내서 계속 주요 협력사들과 접촉하게 해. 성의도 충분히 보여 주면서 연재영의 시선을 흐려야 해. 그리고 해외의 가문들과의 협력도 절대 소홀히 하면 안 돼. 견제받는 상황이라면 보통은 외부 채널을 넓히려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이야. 연재영은 연경 그룹의 미래 후계자야.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 작은 빈틈도 보여선 안 돼.”유소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율은 자기 전남편이랑 같이 잔 게 몇 번인지도 모를 텐데,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잖아. 그런 하지율이 어떻게 오빠한테 어울려...”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형원이 차갑게 말을 끊어냈다.“닥쳐.”손형서는 멍하니 굳었다가 본능적으로 손형원을 바라봤다.그러자 손형원은 음산한 얼굴로 손형서를 쳐다보고 있었다.손형원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손형서, 네 입에서 하지율을 깎아내리는 말이 한 번만 더 나오면 그땐 내가 너를 여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손형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오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잖아. 그런데 그런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때문에 이제 동생까지 버리겠다는 거야?”그러자 손형원이 말했다.“너도 아무 상관 없는 남자 때문에 나를 몇 번이나 팔아넘겼잖아.”손형서가 분해서 소리쳤다.“나는 오빠 친동생이잖아!”손형원이 차갑게 말했다.“네가 내 동생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서서 나랑 말할 수 있었을 것 같아?”그 순간, 손형서는 확실히 깨달았다.손형원은 이미 연정미에게 향하던 감정을 하지율에게 옮겨 버렸다.손형원이 연정미를 좋아했을 때는 기껏해야 연정미에게 이용당하는 정도였다.하지만 하지율을 좋아하게 되면 정말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다.그냥 주용화만 해도 이 일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주용화를 떠올리자 손형서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주용화가 하지율을 좋아한다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손형서는 주용화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행복했다.적어도 주용화에게 자신은 쓸모가 있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게다가 주용화는 작정하고 자신을 해치려 든 적도 없었다.그랬다면 주용화의 실력과 머리라면 손형서는 이미 몇 번이나 죽었을 것이다.손형서는 하지율이 미웠다.하지만 지금 하지율의 위치를 생각하면 손형서는 하지율에게 뭘 할 힘이 없었다.괜히 건드렸다가 주용화에게 들키면 손형서는 완전히 끝장이었다.이제 손형원까지 하지
손형서도 손형원의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손형서도 알고 있었다.손형원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원래 원칙도 선도 없었다.‘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예전에 연정미에게 잘해 줄 때도 손형원한테 돌아오는 건 별로 없었다.그래도 연정미는 가끔 손형원의 파트너가 되어 주고 함께 식사도 하고 생일도 챙겨 줬다.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좀 나았다.하지만 하지율과 손형원은 완전히 원수였고 게다가 손형원은 직접 하지율의 손까지 망가뜨렸다.생각할 것도 없이 하지율이 손형원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연정미가 손형원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줄곧 이용해 온 건 맞는 사실이었다.하지만 연정미와 하지율 중 하나를 고르라면 손형서는 차라리 손형원이 연정미를 택하길 바랐다.하지율과 손형원 사이에는 뼛속 깊이 새겨진 원한이 있기 때문이었다.손형서가 생각에 잠긴 사이, 손형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조만간 같은 노선으로 물건을 한 번 더 보내.”비서 송지한은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이미 노선이 노출됐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물건을 보내라니... 이건 대놓고 더 빼앗아 가라는 뜻이 아니야?’상황이 이상하면 반드시 꿍꿍이가 있는 법이다.하지율도 오히려 함정일까 봐 쉽게 다시 털지는 못할 것이다.송지한은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송지한이 나가려던 순간, 손형원이 다시 그를 불렀다.“내가 찾으라고 한 명의는 찾았어?”‘명의?’손형서가 곧장 손형원을 바라봤다.“갑자기 명의는 왜 찾아? 오빠 어디 아파?”그러자 송지한의 표정이 묘해졌다.“그게... 손 대표님이 아프신 건 아닙니다.”송지한은 난처한 얼굴로 손형원을 바라봤다.“하지율 씨의 손은 단 어르신도 고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단 어르신보다 더 뛰어난 명의를 찾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합니다.”그러자 손형원이 말했다.“단 어르신의 의술이 뛰어난 건 맞지만 정형외과와 신경외과 전문은 아니야. 세상은 넓고 사람 위에 사람은 있어. 단 어르신보다 뛰어난 의사도 분명 많을 거야.”
해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시야에 들어온 건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음습한 창고였다.해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렸다.“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며칠째 해리는 술에 절어 살았다. 하지율이 그에게 남긴 충격 때문에 하루 종일 고통 속에서 헤맸다.하지율이 준 모욕만 떠올리면 해리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마음에 걸린 무거운 짐을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결국 해리는 몰래 킬러까지 알아봤다. 하지율을 없애버리려고 말이다.해리는 하지율만 사라지면 이 고통도 끝날 거라고 믿었다.
하지율 팀이 못해서가 아니라, 문제는 따로 있었다.“하지율, 진짜 너무 대단하네. 해리랑 같은 급인 거야?”“현성 대가가 일부러 해리를 불러 임채아를 받쳐 준 건데... 이런 상황에서는 둘 다 만점이라고 해도 결국 임채아는 하지율을 못 이긴 거야.”“현성 대가는 무슨 생각일까? 임채아랑 하지율 사이에서, 하필 임채아를 제자로 받다니.”“그러게. 실력, 외모, 기품, 재능. 다 봐도 하지율이랑 비교가 안 되잖아?”심사 위원이 말했다. “우리는 공정, 공평의 원칙으로 채점했습니다. 이번은 팀전이고, 하지율 씨와 강병주 씨는
“맞아요. 하지만 고지후 대표님께서 방금 전, 이곳을 회수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진태환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작업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시간 안에 작업실의 물품을 옮겨 주십시오. 만약 직접 옮기지 못하시겠다면, 저희가 전부 비워두겠습니다.”임채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별장과 작업실은 고지후가 내게 선물한 거라니까요? 한번 준 물건을 무슨 수로 다시 가져가요? 언제부터 그렇게 찌질해진 거예요?”진태환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그 두 곳은 원래 하지율 씨께 드리기 위해 준비했던 곳입니다. 당시 임채아 씨
유소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움직여요? 뭘요?”주용화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대답했다. “당연히 해리의 손을 못 쓰게 만들어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오늘의 추가 대결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유소린이 멍하니 되뇌었다.“해리의 손을 망가뜨려서... 그러면 해리가 아예 경기에 나갈 수 없게 만들겠다는 뜻인가요?”주용화가 미간을 올리며 되물었다.“그럼 설마 정말로 다시는 바이올린을 켤 수 없게 만들자는 그 사람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란 말인가요?”유소린이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