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유소린은 솔직히 여기서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 눈 뜨자마자 다시 구석구석 뒤져 보고 싶었다.하지만 하지율의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걸 보니 유소린도 이 일은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율에게는 무엇보다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유소린은 하지율을 보며 말했다.“지율아, 우리 이제 돌아가자.”그러자 하지율이 짧게 대답했다.“좋아.”밖에는 이미 비가 그쳤지만 공기는 여전히 축축하고 차가웠다.차에 올라탄 하지율은 저도 모르게 몸을 한 번 떨었다.유소린은 곧바로 히터를 켰다.“지율아, 추워? 겉옷이라도 걸쳐줄까?”하지율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안 추워.”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인지 몸이 생각보다 훨씬 지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가 잔잔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 하지율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하지율은 꿈을 꾸었다.꿈속에서는 하지율과 주용화가 처음 만났던 날이 다시 떠올랐다.그날 주용화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하지율의 차 앞에 나타났다.하지율은 그때 주용화의 정체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단지 하지율에게 접근하려고 일부러 차에 몸을 던졌다고 보기에는 너무 목숨을 내놓은 짓처럼 느껴졌다.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하지율은 결국 주용화를 곁에 두었다.목숨까지 걸어가며 일부러 하지율에게 다가온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그 뒤로 하지율은 오랫동안 주용화를 경계했다.주용화가 하지율과 함께 M국까지 따라왔을 때도 하지율은 주용화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오히려 주용화는 머리가 비상했고 상황 판단도 빨라서 중요한 순간마다 몇 번이고 하지율을 도와주었다.“지율아, 일어나. 다 왔어.”유소린의 목소리에 하지율은 천천히 눈을 떴다.눈앞에 보인 건 익숙한 연씨 별장이었다.유소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지율에게 말했다.“지율아, 화야 씨도 이미 떠났고 지금 네 곁에는 일손도 부족하잖아. 그래서 내가 다시 네 옆에서 일하려고 해. 요즘 손형원은 손씨 가
뒤로 갈수록 유소린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임채아를 갖고 논 건, 솔직히 임채아가 자초한 일이었다.하지만 하지율은 이 일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었다.그리고 진짜 원흉은 다른 사람이었다.임채아는 이제 욕하는 것도 지겨울 지경이었다.고지후 역시 예전에는 정말 임채아한테 홀린 사람처럼 굴긴 했다.하지만 고지후의 곁에는 장하준이나 함우민 같은 절친도 있었고, 최혜은 역시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렇게 사방에서 흔들어 대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어느 정도 세뇌당한 것도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물론 가장 중요한 건, 고지후가 임채아의 본모습을 알게 된 뒤의 태도였다.적어도 그 뒤로 고지후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얼마 전에 주용화의 이야기를 꺼낼 때도 쓸데없이 말을 보태거나 과장하지 않았고 자기 감정을 섞어 주용화를 일부러 깎아내리려 하지도 않았다.그 점 때문에 유소린은 고지후에 대한 인상이 아주 조금은 좋아졌다.그렇다고 해서 주용화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면 유소린은 차마 그를 더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나쁜 사람이라고 하자니 누군가에게 잘해 주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그런데 또 좋은 사람이라고 하자니 재미를 위해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에게도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아마 하지율을 위해서도 주용화는 적지 않은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다.그 사람들은 하지율과는 원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주용화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예전의 하지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주용화가 하지율을 위해 걸림돌을 치워 버린 일은 본질적으로 보면 손형원이 연정미를 위해 하지율의 손을 망가뜨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피해자의 처지에서 보면 주용화 역시 용서 못 할 악인일 수밖에 없었다.그렇다고 주용화가 모두에게 다 잘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건 또 지나치게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란 뜻이 된다.그래서 유소린도 마음이 복잡했다.하지율을 설득하려 해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반면 하지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소린은 한동안 하지율과 함께 레이싱을 즐겼던 터라, 진열된 키들만 보고도 일반 차량인지, 슈퍼카인지 단번에 구분해 낼 수 있었다.가볍게 훑어본 것만으로도 키는 최소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그 순간, 유소린은 방금 들어올 때 봤던 풍경이 떠올랐다.뒤편에, 건물처럼 높게 솟은 거대한 주차장이 있었는데, 층수만 해도 다섯 층은 족히 되어 보였다.‘설마 전부 거기에 주차된 걸까? 와... 진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스케일이네...’두 번째 방을 다 둘러본 유소린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곧장 세 번째 방으로 향했다.문을 여는 순간 유소린은 문턱에 그대로 굳어버렸다.발이 떨어지지 않았다.하지율은 유소린처럼 들뜬 기색은 아니었지만 문 앞에 멈춰 선 그녀를 보고 물었다.“소린아, 왜 그래?”유소린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복잡한 감정으로 서서히 바뀌었다.그녀는 몸을 살짝 비켜서며 말했다.“지율아... 네가 먼저 들어가.”하지율은 잠시 유소린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그리고 그녀 역시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방 안에는 각양각색의 바이올린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그중에는 임채아가 사용하던 ‘오션’도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유명 연주자들이 은퇴하며 봉인해 두었던 것들도 여럿 눈에 들어왔다.하지율은 더 이상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전히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있었다.그래서였다. 관련 소식이 나오면 무심코 눈길이 가곤 했다.연주하지 못한다고 해서 바이올린을 외면하거나 아예 예술과 담을 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어느새 유소린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율아,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쉽게 말할 입장은 아닌 거 알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런데...”그녀는 하지율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도 화야 씨랑 꽤 오래 알고 지냈잖아... 화야 씨가 너한테 진심이 아예 없던 건 아닌 것 같아. 물론 널 다치게 한 건 맞지만...”
하지율은 손에 쥔 열쇠를 내려다봤다.“주소 어디야?”유소린은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가보려고? 나도 같이 갈게.”하지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바깥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흐려 있었다.앞서 하지율이 쓰러졌던 터라 운전은 유소린이 맡았다.하지율은 줄곧 창밖을 내다봤다.먹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처럼 기분도 이유 없이 가라앉았다.차가 중간쯤 왔을 무렵 결국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굵은 빗방울이 앞 유리를 세차게 두드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세상은 순식간에 축축한 회색으로 잠겼다.하지율은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봤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빈 채였다.그때, 유소린이 곁눈질로 하지율을 바라봤다.그녀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두 사람이 종이에 적힌 주소에 도착했을 때, 성 같은 저택이 눈앞에 펼쳐졌다.M국은 영나라의 영향권에 속한 나라라 전반적으로 영나라식 건축이 많았다.유소린은 눈앞의 성 같은 저택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여기... 설마 화야 씨가 사는 곳이야?”하지율이 짧게 답했다.“아니야. 거긴 L국에 있어.”유소린이 고개를 갸웃했다.“그렇다면 왜 여기로 안내한 걸까?”하지율이 담담하게 말했다.“들어가 보면 알겠지.”차에서 내린 뒤, 두 사람은 우산을 쓴 채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유소린은 눈앞의 광경에 그대로 숨이 막힌 듯 굳어버렸다.“세상에! 지난번 L국 전시에서 봤던 작품들 아니야? 거기 전시됐던 작품들이 전부 여기 있는 거야?”1층 홀 벽면에는 각국의 명화들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그중 일부는 하지율이 전시에서 본 작품들이었고 나머지는 그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모든 작품은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희귀했고 사실상 시장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었다.하지율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유소린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와... 뭐야, 저거! 저렇게 큰 다이아몬드는 경매
하지율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주용화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늘 그렇듯 무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이제 끝내죠. 임채아 씨로 시작된 이 게임은 여기까지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그는 말을 마치고 임채아를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시선을 들어 하지율을 바라봤다.“지율 씨, 아시다시피 저는 지율 씨를 곤란하게 만들 의도가 없습니다. 언제나...”말을 끝낸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대로 나가려 했다.고지후는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침묵을 깨고 함우민이 앞으로 나섰다.“저 자식 못 가게 해야 해. 절대 저렇게 그냥 보내면 안 돼. 지율 씨한테 한 짓이 있는데!”그의 말은 점점 거칠어졌다.“사람 인생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려 놓고 손바닥 위에서 바둑알 굴리듯 가지고 논 놈이야. 그냥 보내겠다고? 그게 말이 돼? 반드시 대가 치르게 해야 한다고!”그 순간 고지후가 단호하게 끼어들었다.“가게 놔둬.”그 말에 함우민은 멈춰 섰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지후를 바라봤다.“지후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고지후는 시선을 떨구지 않은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보내줘. 그냥 가게 놔두라고.”함우민의 얼굴이 굳었다.“그래도...”말을 잇기도 전에 고지후가 한 번 더 단호하게 끊어냈다.“함우민!”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였다.함우민은 이를 꽉 깨물었다.고지후가 나서지 않는다면 함우민 혼자서는 주용화를 막을 수 없었다.함우민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한 발 물러섰다.주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발끈하는 함우민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그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사람들 시야에서 사라졌다.함우민은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불만을 털어놓으려 했다.그런데 그때 하지율이 갑자기 힘없이 휘청이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그 모습을 본 함우민은 반사적으로 달려가려 했다.그러나 고지후가
그때, 옆에 있던 함우민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지율 씨, 저 말 절대 믿지 마세요! 주용화가 지율 씨를 도운 건 결국 지분 때문일 겁니다!”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주용화를 향했다.“저 입에서 나온 말들은 전부 치밀하게 계산된 겁니다. 주용화에게 진심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건 잠깐 내려놓고 윤택이 좀 생각해 보세요!”함우민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아직 어린 윤택이가 무슨 일을 당했었는지 잊으면 안 되죠. 예전에 임채아랑 주용화가 손잡고 벌인 일, 그 납치극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뻔했잖아요. 윤택이는 지율 씨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잖아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냥 넘길 수 있겠습니까.”그는 잠시 멈췄다가 분명하게 말했다.“용서해서도 안 됩니다, 절대!”함우민은 알고 있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주용화를 밀어내는 건 쉽지 않다는 걸.함우민은 자신과 고지후를 합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결국, 가장 확실한 카드를 꺼냈다.‘고윤택! 세상에 자기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을 거야.’그리고 지금껏 하지율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수해 온 사람이었다.매사에 참고 물러서고, 늘 고윤택을 위해 선택을 양보해 왔다.고윤택은 하지율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함우민은 하지율에게 주용화가 한때 고윤택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었다.하지만 하지율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주용화만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겪었던 일들 전부... 화야 씨한테는 그냥 심심풀이였던 건가요? 제가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더 즐거우셨던 거예요?”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후, 주용화가 짧게 답했다.“네, 그랬습니다.”그 한마디에 하지율은 그대로 무너졌다. 숨이 고르게 이어지지 않을 정도였다.미세하게 떨리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그 순간, 머릿속이 완전히 흐트러졌는데, M국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그녀는 갑
주용화는 일부러 거기 갇힌 척했다. 하지율이 자기를 버려두고 혼자 도망가는지, 그 반응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주용화는 그때의 기분에 따라 사람을 구해줄지 말지 결정했을 것이다.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마 구하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주용화는 남을 도와주며 사는 타입이 아니니까.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주용화의 몸 상태는 서서히 나빠졌다.그래도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었다.그러다 문득 또 하나의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자기 팔자가 그리 질긴 게 아니었다는 증거가 될까?혹은
“잘은 모르겠어. 아마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닐까? 그런 진부한 오해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꼭 약점을 드러낼 테니까. 먼저 평정심이 깨지는 쪽이 지는 거야. 우린 조용히 기다리면 돼.”...임채아가 다시 내려왔을 때, 주용화는 고윤택과 승마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주용화의 승마 실력은 손형서보다도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다.그런 주용화를 바라보는 고윤택의 눈에서 동경이 흘러넘쳤다.그 모습을 본 임채아는 속이 서늘해졌다.임채아는 예전에 많은 공을 들여서야 고윤택의 호감
고지후가 낮게 말했다.“그런 게 아니야. 네가 오해한 거야, 난 그냥...”해명하려던 고지후는 말을 잇지 못해서 결국 고개를 숙였다.“미안해. 내 잘못이야.”하지율이 증오한다는 눈빛으로 고지후를 쏘아보았다.“고지후, 언제쯤이면 내 앞에 나타나서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 이혼으로도 부족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거야?”고지후의 눈에 슬픔이 스쳤다.“하지율, 넌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하지율이 입꼬리를 올리고 가볍게 얘기했다.“이제 알았어? 지난 1년 내내, 당신이랑 임채아만 보면 역겨웠어. 보기만 해도 속
하지율이 잠깐 멍했지만 곧 주용화가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 눈치챘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질문은... 수술 끝나고 나왔을 때 대답할게요.”“좋아요.” 주용화는 짧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복도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왔다.하지율은 유소린이 도착한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또렷이 다른 실루엣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기석 씨?” 하지율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오셨어요?”핸드폰은 차 안에 두고 내려 유소린에게만 겨우 연락했을 뿐, 정기석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