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다음 날 아침.하지율이 막 세수를 마쳤을 때,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지율 씨, 아침 먹어요.”문을 열자 주용화가 밖에 서 있었다.하지율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주용화가 먼저 말을 막았다.주용화는 하지율의 손을 잡으며 다시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요. 할 말은 다 먹고 나서 해요.”식당에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는 하지율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모양만 봐도 주용화가 직접 만든 음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율은 식탁 앞에 앉아 멍하니 밥을 먹었다.그때 주용화가 반찬을 하지율의 접시에 덜어 주며 맑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율 씨, 이거 제일 좋아하잖아요. 많이 먹어요.”하지율이 고개를 들자 창밖에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이 주용화의 하얗고 잘생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옅은 햇빛이 감싸고 있어 눈앞에 있는 주용화의 얼굴이 어딘가 아련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하지율의 시선을 느꼈는지 주용화도 하지율을 바라봤고 눈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부드럽고 맑은 주용화의 눈빛은 물결처럼 잔잔했다.하지율은 이미 알고 있었다.이대로 계속 가서는 안 됐다.주용화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지율을 무너뜨리고 있었다.안 그래도 마음이 강하지 못한 하지율의 결심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주용화는 너무 영리했다.독한 말을 하든 헤어지자고 선언하든 주용화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유소린, 손형원, 정기석도 심지어 연정미와 단보현까지 모두 주용화가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인지 말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하지율은 그동안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언제나 주용화가 자신의 편이었으니까.그러다 지금에서야 그 말이 조금은 실감이 났다.‘정말 내가 화야 씨를 화나게 만든다면... 화야 씨는 나한테 어떤 식으로 나올까?’그때 복잡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친 하지율이 말했다.“어제 일은 아직 단 어르신께 제대로 설명해 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한번 다녀올게요.”하지율이 더 이상 이별 같은 듣기 싫은 말을 꺼내지 않자 주용
시계는 어느새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하지만 하지율은 여전히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책을 펼쳐 놓고 있었지만 글자는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머릿속은 엉망이었다.하지율은 천국에서 한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진 듯한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전에 없던 피로를 느낀 하지율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주용화와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주용화를 한 번만 더 바라봐도 마음이 약해져서 또다시 헛된 기대를 품게 될까 봐 두려웠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하지율은 책상에 엎드린 채 깜빡 잠이 들었다.하지만 잠은 편하지 않았고 이상한 꿈을 수도 없이 꿨다.주용화가 낫기를 너무 간절히 바랐던 탓인지 꿈속에서 주용화의 병은 완전히 치료돼 있었고 다시는 발병할 위험도 없었다.하지율은 너무 기뻐 견딜 수가 없었다.당장 주용화를 만나러 달려갔지만 그곳에서 본 건 낯선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주용화였다.게다가 두 사람은 막 결혼반지를 교환하고 있었다.하지율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그때 하지율의 시선을 느꼈는지 상대에게 반지를 끼워 주던 주용화의 손이 잠시 멈췄다.주용화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정확히 하지율을 바라봤다.하지만 주용화의 눈빛에는 더 이상 다정함이 없었고 그 대신 낯섦과 차가움뿐만 남아 있었다.주용화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실례지만... 누구시죠?”그제야 하지율은 주용화가 최면 치료를 받았다는 걸 떠올렸다.주용화는 병이 나았지만 하지율을 완전히 잊었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꿈이 너무나 생생하고 끔찍했기에 하지율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그 순간, 하지율은 숨이 가빠져 거칠게 헐떡였다.“지율 씨, 악몽 꿨어요?”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지율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눈앞에는 잘 생기고 익숙한 주용화가 있었다.따뜻한 노란 불빛 아래에서 주용화는 깊은 사랑과 다정함이 담긴 눈으로 하지율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자 불안하게 떠돌던 하지율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순간 코끝
“제게 햇빛을 보여 준 뒤 저를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돼요.”하지율은 눈을 내리깔았다.“화야 씨, 최면을 받으면 저를 잊게 될 거예요. 그러면 더는 괴롭지 않을 거고요.”그러자 주용화가 대답했다.“지율 씨, 이별도 최면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하지율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몸을 돌렸다.“그러면 더 이야기할 것도 없네요.”주용화가 하지율의 손목을 붙잡았다.“지율 씨, 어디 가는 거예요?”하지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일하러 가는 거예요.”집을 떠나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뒤에야 주용화는 손을 놓아줬다.하지율은 서재로 돌아와 문을 닫았고 힘없이 문에 기대선 채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렇게 하지율은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그러다가 전화벨 소리가 울리며 적막을 깨뜨렸다.하지율이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뜻밖에도 윈터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하지율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윈터 박사님...”윈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온화했다.“하지율 씨, 내일 시간 괜찮으십니까? 찾아가서 구 선생님께 치료 과정을 좀 더 배워도 될까요?”평소 같았다면 하지율은 당연히 허락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한참 동안 침묵한 뒤에야 대답했다.“죄송해요. 화야 씨는 내일부터... 더 이상 치료받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윈터는 놀라 물었다.“하지율 씨, 무슨 일이 있었어요?”하지율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가 묻어났다.“지난번에 윈터 선생님이 의심했던 게 맞았어요. 화야 씨가 저를 속였고 구현 선생님도 그 사람 편이었어요. 모든 게 좋아지고 있는 척했을 뿐이었어요. 사실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고요. 윈터 박사님, 알려 줘서 고마워요. 이대로 더 미뤘다면 상태는 계속 나빠지기만 했을 거예요.”윈터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주용화 씨의 병은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최면도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에요. 발병 시기를 늦추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러자 주용화가 말했다.“지율 씨,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하지율은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면 우리 헤어져요.”그 순간, 주용화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음산한 빛이 스쳤지만 주용화는 곧 감정을 감췄다.주용화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지율 씨, 바이올린 연주는...”주용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지율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이제 그만 속여요.”주용화를 바라보는 하지율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저는 화야 씨를 너무 많이 믿어 줬어요. 더는 치료를 미뤄서는 안 돼요.”하지율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내일 집에서 나갈게요.”말을 마친 하지율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 순간, 주용화가 뒤에서 하지율을 세게 끌어안았다.낮고 쉬어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하지율의 귓가에 울렸다.“지율 씨, 이제 저와 함께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하지율은 가슴이 순간 아프게 조여 왔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더 이상 이렇게 망설여서는 안 됐다.하지율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두 눈에는 어느새 흔들림 없는 결심이 서려 있었다.“화야 씨, 저는 극단적으로 행동하고 감정도 불안정한 데다가 계속 저를 속이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어요. 제가 거짓말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화야 씨는 저를 여러 번이나 속였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예전까지 주씨 가문의 병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요. 근거 없이 부풀려진 소문이라고까지 여겼고요. 그전까지는 저도 화야 씨와 잘 지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제 화야 씨의 병은 저뿐 아니라 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어요.”“미안해요. 화야 씨, 저는 지금의 화야 씨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하지율의 말이 이어질수록 주용화의 호흡은 점점 가빠졌고 하지율을 안은 팔에도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하지율이 희미한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하지만 주용화는 자신이 하지율을 겁먹게 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주용화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
주용화는 천천히 하지율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며 물었다.“지율 씨, 집에 가서 이야기할까요?”하지율은 눈앞에 내민 주용화의 손을 바라봤다.잠시 후, 하지율은 결국 자신의 손을 내밀어 주용화의 손을 잡았다.그 순간, 손형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단종건과 안병철, 구현을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도 제각각 달라졌다.하지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죄송해요. 괜히 여러분을 방해했네요. 저희는 먼저 돌아갈게요.”단종건은 아니라며 얼른 손을 내저었다.하지율과 주용화는 손을 잡은 채 함께 자리를 떠났다.손형원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깊고 어두운 눈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주용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자신을 속였는데도 하지율은 여전히 주용화의 체면을 지켜 주고 품어 줬다.그건 손형원이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용화는 영리한 사람이었다.하지율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결국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주용화였다.“지율 씨, 보셨죠? 아무리 중요한 계획이라도 외부인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하지율은 주용화를 바라봤다.“그런데 왜 하필 구현 선생님을 선택했어요?”주용화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다른 의사를 매수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가 더 많았어요. 구 선생님은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고 제가 도움을 준 적도 있어요. 그래서 다른 의사들보다 다루기 쉬울 거라고 판단했어요.”그러자 하지율이 물었다.“안 어르신이 구 선생님을 찾을 거라고는 어떻게 확신했어요?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면요?”주용화의 입가에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한 사람을 제게 충성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만 협박해서 이런 일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건 쉽습니다. 전 세계에서 저를 치료할 자격이 있는 의사는 많지 않아요. 제가 미리 경고하자 다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하지율의 손이 멈췄다.잠시 생각하던 하지율은 구현이 아닌 유소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소린아, 우리 사람들을 데리고 구 선생님이 머무는 곳으로 가서 데려와 줘.”유소린은 잠시 놀랐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전소연 씨 일행한테는 들키면 안 되는 거지?”“응.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 줘.”유소린도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한 듯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 바로 사람을 데리고 갈게.”하지율이 전화를 끊자 손형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주용화는 하지율 씨가 믿고 쓸 만한 사람들을 전부 곁에서 내쫓았어요. 무언가 조사하려 해도 주용화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하지만 하지율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 풍경만 바라봤다.약 20분 뒤, 유소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율아, 구현 선생님이 없어졌어. 집 안에 있던 짐도... 전부 사라졌어.”그 순간, 하지율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구현이 도망쳤다면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이 주용화든 손형원이든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사라지는 셈이었다.하지율은 가슴이 차갑게 식어 무겁게 내려앉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입을 열었다.“추적기 위치를 보내 줄게. 그 주소를 따라가서 찾아.”하지율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당부했다.“네가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가.”유소린은 하지율의 목소리만으로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손형원은 하지율의 눈빛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까지 함께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한 시간 뒤, 복도 너머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하지율은 정자에 앉아 조용히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발소리를 들은 하지율이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구현이 사람들에게 이끌려 오고 있었다.하지율이 물었다.“구현 선생님은 손형원 씨의 사람이에요? 아니면 화야 씨의 사람이에요?”구현은 돌의자에 앉아 있는 손형원을 한번 보고 안병철과 단종건도 차례로 바라봤다.오늘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을 것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해외에서 나댈 수는 없으니까요.”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임채아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다른 건 참을 수 있지만... 선생님을 공경하지 않는 건... 전 정말 용납이 안 됩니다.”그러면서 지난번 대회장에서 하지율을 마주쳤을 때, 하지율이 현성 대가에게 눈곱만큼도 예의를 보이지 않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곧이어 하지율에 대한 남은 호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레이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저런 인물이 무대에서 활개를 치다니, 음악가의 수치와 다름없
그날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연정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몇 번이나 그대로 잠들 뻔했다.그러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문 쪽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꾸벅꾸벅 졸던 연정미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어서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문 쪽을 바라봤다.밖에서는 손형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보현 오빠, 어제 정미한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무슨 일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보현 오빠한테까지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단보현이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 조사해보니 연정미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여기였어.”손형서
손형서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주용화 앞으로 내밀고 저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화야 씨, 뭐 마실래요?”주용화는 메뉴판을 받지 않고 말했다.“연정미 씨 말로는 여기 라테가 대표 메뉴라던데요. 라테로 할게요.”손형서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정미가... 왜 그걸 화야 씨한테 말했죠?”이 카페는 연정미가 예전부터 자주 오던 곳이었다.주용화가 태연하게 답했다.“지난번 같이 식사했을 때 들었어요.”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그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둘은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눴
결국 하지율이 나서서 말했다.“아버지, 오빠, 지금 중요한 건 범인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수습하는 게 중요해요. 이런 소문이 계속 돌면 회사 이미지도 타격이 큽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회사 협력사 중에는 연정미 씨 때문에 붙은 곳도 많아요. 저런 얘기를 들으면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재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회의실에 또렷하게 퍼졌다.“큰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정미 아가씨 쪽에서 거의 성사됐던 협업이... 또 하나 취소됐습니다.”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