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졸업식 전야, 기억이 끊긴 호텔 스위트룸에서 눈을 뜬 윤이서. 방에는 세 남자의 흔적만 남아 있다. 재벌 후계자 차태헌, 집요한 연구원 권시현, 냉정한 교수 강도하.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세 남자 사이에서, 이서는 그날 밤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View More졸업식 날 아침, 윤이서는 자기 것이 아닌 셔츠를 입고 눈을 떴다.
천장은 낯설지 않았다. 어제 오후에 혼자 체크인하면서 사진까지 찍어둔 방이었다. 공모전 부상으로 받은 스위트룸 숙박권. 혼자 욕조에 들어가고, 룸서비스를 시키고, 졸업 답사를 마지막으로 읽어보겠다고 예약한 밤.
그런데 옆 베개가 눌려 있었다.
이서는 몸을 일으키다 이마를 짚었다. 어깨가 뻐근하고 목이 말랐다. 그 정도로 어젯밤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와 가까이 누웠던 기억이 있었다. 문을 닫아달라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남자가 대답했다.
얼굴을 떠올리려 하자 다른 장면이 끼어들었다.
흰 셔츠. 벗어놓은 안경. 문밖에서 한 번 울린 전화.
이서는 침대 옆의 생수를 마셨다. 병뚜껑이 이미 열려 있었다. 이걸 열어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에는 오전 8시 30분이 떠 있었다. 졸업식은 10시였다.
“미치겠네.”
스물네 살까지 악착같이 살아온 결과가, 졸업 답사를 해야 하는 날 아침 남의 셔츠를 들춰보는 일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당장 기억을 붙잡고 싶은데 머릿속에는 어제 연회장에서 쏟은 와인과 발표 자료 이야기만 먼저 떠올랐다.
이서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의 자기 블라우스를 집었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고 앞섶에 와인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벗어둔 구두는 가지런하지 않았다. 한 짝은 침대 밑에, 다른 한 짝은 창가 의자 아래에 있었다.
그 앞에 반짝이는 것이 떨어져 있었다.
백금 커프스링크.
이서는 그것을 주웠다. 작은 검은 사각형에 흰 선이 비스듬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제도 봤다. 차태헌이 축하 잔을 들어주겠다며 소매를 걷었을 때, 이서가 잔 대신 보고서부터 보라고 하자 웃으며 흔들었던 것.
“차태헌…….”
경영학과 3년 선배. 지금은 차성그룹의 상무. 남이 한 문장을 다 말하기 전에 해결책부터 사주는 버릇이 있는 남자였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이서가 파일 이야기를 꺼내자 그 정도는 월요일에 정리하면 된다며 와인 잔을 밀었다.
하지만 이 물건이 여기 있다고 해서 답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서는 커프스링크를 책상 위에 올리다가 멈췄다.
협탁에 은색 립밤이 놓여 있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다. 박하 냄새가 났다.
권시현의 것이었다.
자기 물건에 작은 점을 찍는 사람. 은색 튜브 바닥에도 검은 펜으로 찍은 점 두 개가 있었다. 조교실의 충전기, 우산 손잡이, 연구실에서 빌려 쓰는 어댑터에까지 같은 표시가 있었다. 이서가 한번 웃었더니 시현은 자기 것은 돌아오는 편이 좋다고 답했었다.
이서는 립밤을 만지지 않고 사진부터 찍었다.
태헌의 커프스링크와 시현의 립밤이 같은 방에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왔던가. 번갈아 왔던가. 저녁에 받아 가방에 넣었던 물건일 수도 있었다. 기억이 없는 자리에 결론부터 채워 넣으면 안 됐다.
그때 침대 발치의 작은 탁자에 접힌 냅킨이 보였다.
[오전 중으로 연구실로 오도록. 어젯밤 일에 대한 변명은 듣지 않겠다.]
끝에 적힌 이름은 짧았다.
강도하.
“교수님까지?”
잉크가 번진 곳이 없었다. 문장 중간을 고쳐 쓰지도 않았다. 졸업 논문을 돌려받을 때마다 보았던, 한 줄로 사람을 밤새우게 만드는 필체였다.
이서는 냅킨을 펼쳤다. 뒤쪽에는 호텔 로고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문장을 두 번 읽을수록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젯밤 자신이 무슨 말을 했기에 이런 메모를 받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왜 해명할 사람은 당연히 자신으로 정해져 있는지, 그 점만은 분명히 불쾌했다.
세 물건을 나란히 놓자 오히려 더 알 수 없어졌다.
태헌과 시현과 도하. 자신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나치게 익숙한 세 남자였다. 아무나 방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어젯밤 이 방의 번호를 알려준 상대도 그 셋뿐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를 부른 이유는 같지 않았다.
태헌에게는 회사 자료에 빠진 이름을 물어보려고 했다. 시현에게는 원본 파일을 돌려받기로 했다. 도하에게는 졸업 후에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말을 했는지, 끝내 삼켰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서는 휴대전화의 대화방을 열었다. 보낸 문자는 남아 있었다. 답장도 있었다. 다만 그중 어느 것도 침대 옆의 눌린 베개를 설명하지 않았다. 통화 목록을 보고 사진첩을 열었다.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맨 아래에 있었다.
오전 2시 57분.
천장과 나무 모서리만 비친 사진이었다. 잘못 눌러 찍힌 듯 초점도 맞지 않았다. 지금 서 있는 침실을 올려다보았지만 같은 모서리를 찾을 수 없었다. 방 안의 어딘가인지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사진을 확대하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 빈칸에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써넣게 될까 봐 두려웠다. 괜찮았던 일인지,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부터 차근차근 알고 싶었다. 세 남자 중 말이 가장 단호한 사람을 정답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이서는 호텔 고객 담당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예약자 이름을 말하고, 어젯밤 자신과 관련된 객실 이용 내역을 확인할 방법을 물었다. 직원은 우선 요청 내용을 남기겠다고 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자 대면 상담이 필요한지도 물어주었다.
“네. 오늘 오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담당 직원은 한유정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서는 이름을 적고, 자신이 급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먼저 듣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은 예약자 본인에게 회신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머릿속에서 서로 겹치던 세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탁자를 정리하다가 남색 봉투가 없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발표 원고는 가방에 있었지만 어제 들고 온 인쇄 자료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아래를 한 번 살폈다가 일어났다.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두는 일부터 해야 했다.
전화가 끝난 뒤에는 가까운 진료기관의 예약 가능 시간도 확인했다. 몸이 불편한 것은 그 자체로 살펴야 할 일이었다. 어느 남자의 물건이 나왔는지와 섞을 이유는 없었다.
그제야 욕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예상보다 멀쩡했다. 그게 서러웠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아침인데 남들이 보면 밤을 조금 설친 수석 졸업생일 뿐이었다. 이서는 찬물로 손을 씻고 돌아왔다. 셔츠 안쪽에는 이름 대신 세탁 표시만 있었다.
어젯밤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 남자는 무슨 말을 했을까.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무나여도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 선배: 일어났어? 어제 얘기 마저 해야지.]
곧 두 번째 알림이 올라왔다.
[권시현: 혹시 방에서 제 물건 주웠어요? 다른 사람한테 주진 말아요.]
세 번째는 전화였다. 화면에 강도하 교수라는 이름이 떴다.
이서는 받지 못한 채 세 물건을 보았다. 어젯밤 이 방에 있었을지도 모를 남자는 셋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찾는 대답은 하나였다.
누가 나랑 했을까.
이서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교수님. 저한테 먼저 설명하실 것 없어요?”
2027년 8월 29일 일요일, 졸업식으로부터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서는 자기 집 식탁을 창가로 옮겼다.넷이 앉으면 한쪽 통로가 조금 좁았다. 그렇다고 새 식탁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의자 두 개는 미리 빌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접으려다 실패한 냅킨이 네 장 놓였다.***점심 무렵 민우에게 사진이 왔다. 작년 졸업식 때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이서는 자기 얼굴부터 확대했다가 원래 크기로 돌려놓았다. 학사모가 옆으로 기울어 있었고, 누군가는 꽃다발 뒤로 반쯤 가려 있었다. 그날에 호텔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너 그때 답사 잘했는데 왜 사진마다 눈을 감았냐.]이서는 자기보다 더 눈을 감고 있는 민우의 사진을 찾아 답장했다. 그는 자기는 찍히는 역할이 아니었다고 우겼다. 잠시 뒤 작은 카메라 시계가 제대로 맞는지 확인한 사진도 왔다.[이젠 9분 안 느려. 오늘 건 그냥 봐도 돼.]이서는 웃으며 고맙다고 보냈다. 작년에는 그 숫자 하나 때문에 사진을 몇 번이나 다시 펼쳤다. 오늘은 식탁의 구도를 잡으면서 민우에게 의자 두 개를 빌려줘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의자는 다음 날 저녁에 돌려주기로 했다. 드라이버처럼 몇 달씩 가지고 있지 말라는 답이 곧 왔다.민우의 말에 이서는 웃었다. 답사를 다시 할 일은 없겠지만, 사진은 한 장 더 남길 수 있었다.새 회사에서는 지난주 처음으로 작은 분석 업무 하나를 처음부터 마감까지 맡았다. 고객은 두 군데를 더 고쳐달라고 했고, 팀장은 정리 방식이 좋아졌다고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이서는 수정 요청 메일에 월요일 오전에 확인하겠다고 답한 뒤 업무용 노트북을 닫았다.가족처럼 가까워졌다는 말로 네 사람이 모든 생활을 합친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자기 집과 자기 월급, 자기 이름으로 보내는 보고서가 있었다. 함께 머무는 집에는 이서의 방과 생활비 몫이 남아
가평에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낸 쪽은 도하였다.8월 셋째 주말에 가기로 한 곳은 그가 예전에 원고를 정리하러 몇 번 묵었던 강가의 작은 숙소였다. 공용 마당이 있고 방은 세 개뿐이었다. 이번에는 하루만 예약했다.“차 막히기 전에 출발하면 좋겠다.”“그럼 아침에 깨워줘요. 대신 못 일어나도 교수님 목소리로 출석 부르지 말고.”도하가 잠깐 웃었다. 이서는 금요일 밤까지 일을 마치느라 잠이 부족했다. 태헌이 차 키를 흔들며 자기가 운전해줄까 물었지만, 이서가 둘이 다녀오겠다고 하자 투덜거리면서도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지난번에 산 빵, 이번에는 다른 집 걸로 사 와.”“맛없다면서 다 먹었잖아요.”“다 먹어봐야 맛없는 걸 알지.”시현은 날씨를 확인한 뒤 우산을 가져가라고 했다. 휴대전화 위치를 켜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서는 가방 옆 주머니에 접는 우산을 넣었다.숙소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주인은 방을 보여주고 마당 불을 끄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도하가 가져온 책은 한 권뿐이었다. 이서는 그 두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쉬러 온 거 맞죠?”“읽다가 잠들 생각이었다.”“그 두께면 기절하겠는데.”둘은 강가를 걸었다. 물 가까이 내려가는 길은 비 때문에 막혀 있었다. 도하는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앞서가려다 멈췄다. 이서가 젖은 운동화 끈을 보며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예전이라면 더 좋은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끝까지 길을 찾았을 것이다. 오늘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처마 아래 앉았다. 도하는 포장지에서 떨어진 초콜릿 조각을 바지에 묻혔다. 이서가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가리키자
도하가 외부 교육기관에서 맡을 새 강의의 첫 수업은 8월 첫째 주에 열렸다.정규 지도학생을 맡거나 성적을 단독으로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외부 교육기관의 실무자 대상 단기 강좌였다. 담당자는 차성그룹 자문 경력을 강사 소개 맨 위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도하는 그 계약이 끝난 시점과 현재 맡는 일을 구분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자료를 고친 뒤에도 신청 인원은 많지 않았다. 첫 강의에 온 사람은 열일곱 명이었다.이서는 그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반차를 낼 이유도, 그가 잘하는지 지켜볼 의무도 없었다. 대신 퇴근 후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도하는 강의를 마치고 전화하겠다고 했다.퇴근이 늦어진 것은 이번에는 이서 쪽이었다. 고객이 확인하지 않은 숫자 하나가 보고서에 남아 있어 팀원들과 다시 표를 펼쳐야 했다. 그녀가 늦겠다고 연락했을 때 도하는 아직 강의실에 있었다.“질문이 길어졌어. 나도 조금 늦는다.”“그럼 천천히 해요. 저도 아직 표 앞이에요.”한 시간 뒤 도하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서는 식당 입구 의자에서 꾸벅 졸고 있었다.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미안하다. 깨웠구나.”“안 깨우면 여기서 잘 뻔했어요.”도하의 어깨에 걸린 가방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이서가 이유를 묻자 남은 교재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식당에 앉아서도 가방을 바닥에 바로 놓지 못했다.“수업은 어땠어요?”“예상했던 질문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좋은 뜻이에요, 나쁜 뜻이에요?”“둘 다.”도하는 국에 숟가락을 넣었다가 멈췄다.“내가 준비한
메일 제목을 본 이서는 파일을 열기 전에 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거 누구한테 받으셨어요?”도하가 보내온 것은 이서가 맡은 신규 업무와 관련된 연구 자료 목록이었다. 공개 논문만 모아놓은 파일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도하가 아는 연구자의 연락처와 ‘상황은 간단히 설명해 두었다’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수화기 너머에서 도하가 잠시 말을 멈췄다.“전문가 의견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필요하다고 했지, 소개해달라고는 안 했어요.”이서는 사무실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상담할 상대를 찾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서 전날 저녁 그 이야기를 했고, 말하고 나니 조금 후련했다. 하룻밤 사이에 상대가 정해지고 자기 업무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돼 있을 줄은 몰랐다.“회사 이름까지 말씀하셨어요?”“회사와 분야만 말했다. 자료는 보내지 않았고.”“그래도 먼저 물어봐 주셨어야죠.”도하는 자신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는 듯했다. 잠깐 키보드 소리가 났다.“철회하겠다.”“상대한테 없던 일로 해달라고만 하지 말고요. 제가 요청한 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말해주세요.”그녀는 통화를 끝냈다.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는데도 손끝이 뜨거웠다. 주변에서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맥이었다. 그걸 거절하는 자신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닌지,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자리로 돌아왔을 때 팀장이 전문가 섭외 진행 상황을 물었다. 이서는 후보를 더 확인하고 있다고 답했다. 도하의 목록을 자기 성과처럼 내밀지는 않았다. 오후에는 공개된 학회 명단을 보고 직접 문의했다. 두 곳은 거절했고, 한 곳은 다음 주에 답을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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