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랑 했을까?

누가 나랑 했을까?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9-22
작가:  6jay최근 업데이트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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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전야, 기억이 끊긴 호텔 스위트룸에서 눈을 뜬 윤이서. 방에는 세 남자의 흔적만 남아 있다. 재벌 후계자 차태헌, 집요한 연구원 권시현, 냉정한 교수 강도하.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세 남자 사이에서, 이서는 그날 밤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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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화: 침대 옆의 세 가지

졸업식 날 아침, 윤이서는 자기 것이 아닌 셔츠를 입고 눈을 떴다.

천장은 낯설지 않았다. 어제 오후에 혼자 체크인하면서 사진까지 찍어둔 방이었다. 공모전 부상으로 받은 스위트룸 숙박권. 혼자 욕조에 들어가고, 룸서비스를 시키고, 졸업 답사를 마지막으로 읽어보겠다고 예약한 밤.

그런데 옆 베개가 눌려 있었다.

이서는 몸을 일으키다 이마를 짚었다. 어깨가 뻐근하고 목이 말랐다. 그 정도로 어젯밤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와 가까이 누웠던 기억이 있었다. 문을 닫아달라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남자가 대답했다.

얼굴을 떠올리려 하자 다른 장면이 끼어들었다.

흰 셔츠. 벗어놓은 안경. 문밖에서 한 번 울린 전화.

이서는 침대 옆의 생수를 마셨다. 병뚜껑이 이미 열려 있었다. 이걸 열어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에는 오전 8시 30분이 떠 있었다. 졸업식은 10시였다.

“미치겠네.”

스물네 살까지 악착같이 살아온 결과가, 졸업 답사를 해야 하는 날 아침 남의 셔츠를 들춰보는 일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당장 기억을 붙잡고 싶은데 머릿속에는 어제 연회장에서 쏟은 와인과 발표 자료 이야기만 먼저 떠올랐다.

이서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의 자기 블라우스를 집었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고 앞섶에 와인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벗어둔 구두는 가지런하지 않았다. 한 짝은 침대 밑에, 다른 한 짝은 창가 의자 아래에 있었다.

그 앞에 반짝이는 것이 떨어져 있었다.

백금 커프스링크.

이서는 그것을 주웠다. 작은 검은 사각형에 흰 선이 비스듬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제도 봤다. 차태헌이 축하 잔을 들어주겠다며 소매를 걷었을 때, 이서가 잔 대신 보고서부터 보라고 하자 웃으며 흔들었던 것.

“차태헌…….”

경영학과 3년 선배. 지금은 차성그룹의 상무. 남이 한 문장을 다 말하기 전에 해결책부터 사주는 버릇이 있는 남자였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이서가 파일 이야기를 꺼내자 그 정도는 월요일에 정리하면 된다며 와인 잔을 밀었다.

하지만 이 물건이 여기 있다고 해서 답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서는 커프스링크를 책상 위에 올리다가 멈췄다.

협탁에 은색 립밤이 놓여 있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다. 박하 냄새가 났다.

권시현의 것이었다.

자기 물건에 작은 점을 찍는 사람. 은색 튜브 바닥에도 검은 펜으로 찍은 점 두 개가 있었다. 조교실의 충전기, 우산 손잡이, 연구실에서 빌려 쓰는 어댑터에까지 같은 표시가 있었다. 이서가 한번 웃었더니 시현은 자기 것은 돌아오는 편이 좋다고 답했었다.

이서는 립밤을 만지지 않고 사진부터 찍었다.

태헌의 커프스링크와 시현의 립밤이 같은 방에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왔던가. 번갈아 왔던가. 저녁에 받아 가방에 넣었던 물건일 수도 있었다. 기억이 없는 자리에 결론부터 채워 넣으면 안 됐다.

그때 침대 발치의 작은 탁자에 접힌 냅킨이 보였다.

[오전 중으로 연구실로 오도록. 어젯밤 일에 대한 변명은 듣지 않겠다.]

끝에 적힌 이름은 짧았다.

강도하.

“교수님까지?”

잉크가 번진 곳이 없었다. 문장 중간을 고쳐 쓰지도 않았다. 졸업 논문을 돌려받을 때마다 보았던, 한 줄로 사람을 밤새우게 만드는 필체였다.

이서는 냅킨을 펼쳤다. 뒤쪽에는 호텔 로고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문장을 두 번 읽을수록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젯밤 자신이 무슨 말을 했기에 이런 메모를 받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왜 해명할 사람은 당연히 자신으로 정해져 있는지, 그 점만은 분명히 불쾌했다.

세 물건을 나란히 놓자 오히려 더 알 수 없어졌다.

태헌과 시현과 도하. 자신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나치게 익숙한 세 남자였다. 아무나 방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어젯밤 이 방의 번호를 알려준 상대도 그 셋뿐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를 부른 이유는 같지 않았다.

태헌에게는 회사 자료에 빠진 이름을 물어보려고 했다. 시현에게는 원본 파일을 돌려받기로 했다. 도하에게는 졸업 후에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말을 하려고 했다.

그 말을 했는지, 끝내 삼켰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서는 휴대전화의 대화방을 열었다. 보낸 문자는 남아 있었다. 답장도 있었다. 다만 그중 어느 것도 침대 옆의 눌린 베개를 설명하지 않았다. 통화 목록을 보고 사진첩을 열었다.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맨 아래에 있었다.

오전 2시 57분.

천장과 나무 모서리만 비친 사진이었다. 잘못 눌러 찍힌 듯 초점도 맞지 않았다. 지금 서 있는 침실을 올려다보았지만 같은 모서리를 찾을 수 없었다. 방 안의 어딘가인지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사진을 확대하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 빈칸에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써넣게 될까 봐 두려웠다. 괜찮았던 일인지,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부터 차근차근 알고 싶었다. 세 남자 중 말이 가장 단호한 사람을 정답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이서는 호텔 고객 담당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예약자 이름을 말하고, 어젯밤 자신과 관련된 객실 이용 내역을 확인할 방법을 물었다. 직원은 우선 요청 내용을 남기겠다고 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자 대면 상담이 필요한지도 물어주었다.

“네. 오늘 오후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담당 직원은 한유정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서는 이름을 적고, 자신이 급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먼저 듣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은 예약자 본인에게 회신하겠다고 했다. 그제야 머릿속에서 서로 겹치던 세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탁자를 정리하다가 남색 봉투가 없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발표 원고는 가방에 있었지만 어제 들고 온 인쇄 자료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아래를 한 번 살폈다가 일어났다.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두는 일부터 해야 했다.

전화가 끝난 뒤에는 가까운 진료기관의 예약 가능 시간도 확인했다. 몸이 불편한 것은 그 자체로 살펴야 할 일이었다. 어느 남자의 물건이 나왔는지와 섞을 이유는 없었다.

그제야 욕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예상보다 멀쩡했다. 그게 서러웠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아침인데 남들이 보면 밤을 조금 설친 수석 졸업생일 뿐이었다. 이서는 찬물로 손을 씻고 돌아왔다. 셔츠 안쪽에는 이름 대신 세탁 표시만 있었다.

어젯밤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 남자는 무슨 말을 했을까.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무나여도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 선배: 일어났어? 어제 얘기 마저 해야지.]

곧 두 번째 알림이 올라왔다.

[권시현: 혹시 방에서 제 물건 주웠어요? 다른 사람한테 주진 말아요.]

세 번째는 전화였다. 화면에 강도하 교수라는 이름이 떴다.

이서는 받지 못한 채 세 물건을 보았다. 어젯밤 이 방에 있었을지도 모를 남자는 셋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찾는 대답은 하나였다.

누가 나랑 했을까.

이서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교수님. 저한테 먼저 설명하실 것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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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챕터
제1화: 침대 옆의 세 가지
졸업식 날 아침, 윤이서는 자기 것이 아닌 셔츠를 입고 눈을 떴다.천장은 낯설지 않았다. 어제 오후에 혼자 체크인하면서 사진까지 찍어둔 방이었다. 공모전 부상으로 받은 스위트룸 숙박권. 혼자 욕조에 들어가고, 룸서비스를 시키고, 졸업 답사를 마지막으로 읽어보겠다고 예약한 밤.그런데 옆 베개가 눌려 있었다.이서는 몸을 일으키다 이마를 짚었다. 어깨가 뻐근하고 목이 말랐다. 그 정도로 어젯밤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와 가까이 누웠던 기억이 있었다. 문을 닫아달라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남자가 대답했다.얼굴을 떠올리려 하자 다른 장면이 끼어들었다.흰 셔츠. 벗어놓은 안경. 문밖에서 한 번 울린 전화.이서는 침대 옆의 생수를 마셨다. 병뚜껑이 이미 열려 있었다. 이걸 열어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휴대전화에는 오전 8시 30분이 떠 있었다. 졸업식은 10시였다.“미치겠네.”스물네 살까지 악착같이 살아온 결과가, 졸업 답사를 해야 하는 날 아침 남의 셔츠를 들춰보는 일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당장 기억을 붙잡고 싶은데 머릿속에는 어제 연회장에서 쏟은 와인과 발표 자료 이야기만 먼저 떠올랐다.이서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의 자기 블라우스를 집었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고 앞섶에 와인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벗어둔 구두는 가지런하지 않았다. 한 짝은 침대 밑에, 다른 한 짝은 창가 의자 아래에 있었다.그 앞에 반짝이는 것이 떨어져 있었다.백금 커프스링크.이서는 그것을 주웠다. 작은 검은 사각형에 흰 선이 비스듬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어제도 봤다. 차태헌이 축하 잔을 들어주겠다며 소매를 걷었을 때, 이서가 잔 대신 보고서부터 보라고 하자 웃으며 흔들었던 것.“차태헌…….”경영학과 3년 선배. 지금은 차성그룹의 상무. 남이 한 문장을 다 말하기 전에 해결책부터 사주는 버릇이 있는 남자였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이서가 파일 이야기를 꺼내자 그 정도는 월요일에 정리하면 된다며 와인 잔을 밀었다.하지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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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세 사람 모두 아는 아침
수화기 너머에서 도하가 잠깐 말을 멈췄다.“메모를 읽었니.”“읽었어요. 그래서 전화 받았고요.”“학교에 와서 이야기하자. 지금 어디야?”이서는 호텔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어디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 자기가 갈 곳부터 정하고 싶었다.“졸업식에서 뵐게요. 오후에 시간을 따로 주세요.”“오전 중으로 오라고 했을 텐데.”“오전에는 제가 답사해야 하잖아요.”이번 침묵은 조금 길었다. 도하가 알겠다고 답했다. 이서는 그 짧은 대답이 낯설었다. 수업을 들을 때는 마지막에 늘 할 일이 하나 더 붙었다. 페이지를 고치거나 표를 다시 만들거나, 처음부터 읽고 오라는 말이었다.전화를 끊고 보니 손에 냅킨이 들려 있었다.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다. 이서는 펴서 작은 지퍼 파우치에 넣었다. 커프스링크와 립밤은 서로 다른 칸에 넣었다.남의 셔츠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어제 미리 가져온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었다. 숙박은 오늘 정오까지였지만 짐을 맡기겠다고 프런트에 연락했다. 방을 나온 사람이 자신이라는 기록부터 남기고 싶어서 출입 시각도 적어두었다.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7분이었다.민우가 정문에서 꽃다발을 흔들고 있었다. 꽃집 포장지에 붙은 가격표를 떼지 못한 채였다.“야, 연락 좀 받아. 너 답사 안 하면 내가 나가야 되는 줄 알았잖아.”“네가 왜 나가.”“네 원고 내가 인쇄했으니까.”이서는 웃으려다 입술이 당겨 고개를 숙였다. 민우가 눈치를 보더니 더 캐묻지 않고 학사 가운을 건넸다. 밥은 먹었느냐고만 물었다.“아직.”“당연하지. 네가 이 시간까지 먹었을 리가.”그가 가방에서 작은 빵을 꺼냈다. 이서는 포장지를 뜯고 한 입 먹었다. 밤의 행방보다 빈속을 먼저 아는 사람이 있어서 조금 살 것 같았다.그때 정문 안쪽에 서 있던 차태헌이 다가왔다.민우가 빵을 쥔 손을 내렸다. 태헌은 그 손과 이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꽃다발부터 확인했다.“그건 누가 줬어.”“민우요. 졸업하니까요.”“나도 알아.”태헌이 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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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사진 찍는 동안
“무슨 셔츠요?”이서가 물었다. 시현은 강당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어깨가 잠깐 닿았다. 가까이서 박하 냄새가 났지만 그것이 기억인지 지금 맡는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어제 와인 쏟았잖아요.”“그다음까지 보셨어요?”“봤죠.”시현은 더 말하려다 문 쪽을 보았다. 진행요원이 이서를 찾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이서는 시현의 팔을 잠깐 잡았다.“이따 그 얘기부터 해요. 잊지 마시고요.”“안 잊습니다.”그 대답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시현은 남의 말도 잘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어느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할지 늘 자기가 골랐다는 데 있었다.강당 앞쪽의 대기 의자에 앉자 민우가 생수와 원고를 건넸다. 한 장이 모서리부터 접혀 있었다. 이서는 습관처럼 편 다음, 첫 문장을 읽었다. 어젯밤까지는 자연스럽게 외웠는데 지금은 남이 쓴 글 같았다.‘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그 말 다음에 누구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펜을 들었다.“지금 고치게?”“첫 문장만.”“너 맨날 첫 문장만 고친다더니 밤새잖아.”“이번에는 진짜야.”이서는 문장을 지우고 새로 적었다.‘오늘 아침, 저는 제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생각했습니다.’별로 대단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기 이야기 같았다.무대에 올라갔을 때 태헌이 앞줄에 보였다. 시현은 출입문 옆에 서 있었고, 도하는 학위 케이스가 쌓인 탁자 앞에 있었다. 누구에게 시선을 둘지 고르다가 이서는 가운데 통로를 보았다. 민우가 카메라를 들고 손을 흔들었다.그 앞쪽 렌즈를 향해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발음 하나가 꼬였다. 잠깐 웃음이 났다. 객석에서도 가볍게 웃었다. 틀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서는 그다음 문장을 조금 천천히 읽었다. 마지막 인사를 마쳤을 때에는 손의 떨림이 거의 멎어 있었다.도하에게서 학위 케이스를 받았다.“수고했다.”매번 지적부터 하던 사람이어서 짧은 칭찬이 더 선명했다. 이서는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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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빠진 사람의 이야기
민우는 바로 대답을 고쳤다.“정확히는, 연회장 밖으로 먼저 나간 게 너였어. 엘리베이터까지는 못 봤고.”“혼자 나간 건 맞아?”“응. 남색 봉투 들고 있었어. 전화하면서.”이서는 식판 위의 국을 내려다봤다. 졸업식 날에도 학생식당은 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꽃다발을 품에 안고 기념사진을 찍던 사람이 가장 싼 정식을 먹고 있었다. 이서는 포장지가 국그릇에 닿지 않도록 의자를 조금 당겨놓았다. 그게 오히려 익숙했다.남색 봉투는 기억났다. 제출한 공모전 제안서를 인쇄해둔 봉투였다. 태헌이 회사에서 쓰는 자료를 보여주었는데, 그 안의 표 하나가 자신의 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런데 작성자 이름은 다른 사람이었다.그 이야기를 하려고 봉투를 가져갔었다.지금 가방에는 없었다.“민우야, 그 봉투 내가 너한테 맡기진 않았지?”“아니. 왜, 없어졌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식판을 옆으로 밀어놓고 다시 물었다.“중요한 거야?”“월요일에 보여주려고 했던 거. 제안서 원본이랑 회사 자료가 어디서 달라졌는지 표시해뒀어.”“원본 파일 있잖아.”“파일에는 내가 연회장에서 들은 말을 못 적었으니까.”이서는 숟가락 끝으로 식판 모서리를 두드렸다. 기억나는 대목이 있었다. 회사에서 쓰는 표를 보고 이름이 왜 바뀌었느냐고 묻자, 누군가 학생이 만든 것은 실무에서 그대로 쓸 수 없다고 했다. 내용은 쓸 수 있는데 이름은 쓸 수 없다는 게 이상해서 봉투에 그 말을 적었었다.입사 제안은 이미 일주일 전에 받은 상태였다. 그 자리를 얻으려고 밤을 보낸 사람으로 이야기가 바뀌는 것만큼은 싫었다. 이서는 메일에서 계약 안내를 열어 날짜를 다시 보았다. 읽을수록 안심이 되는 숫자였다.민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어제 찍은 사진을 훑었다. 연회장과 복도에서 촬영한 것들이었다. 이서가 웃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적어도 초저녁에는 웃을 수 있었다.“여기 있다. 이때 들고 있잖아.”사진 속 이서는 남색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태헌이 그 앞에서 몸을 기울여 무언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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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키스 다음
태헌은 조수석 문을 열어두었다.카페 지하 주차장에는 차들이 계속 들어왔다. 이서는 앉지 않고 문 옆에 섰다. 태헌이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려다 그대로 멈췄다. 넓은 차체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막상 이서가 서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들어와. 에어컨 켜줄게.”“30분이라고 했어요.”“알아.”태헌은 열린 문을 한 손으로 잡았다. 이서는 그제야 앉았다. 차 안에는 어제 맡았던 가죽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기억한다고 밤의 상대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심장은 생각보다 먼저 뛰었다.“저랑 잤어요?”이번에는 다른 뜻으로 알아들을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태헌이 문 가장자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서는 그의 표정을 끝까지 보았다. 부끄러워서 돌려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같은 대화만 반복할 것 같았다.“키스했어.”“그다음은요.”“없어.”태헌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네가 멈추라고 해서 멈췄어. 그러고는 속이 안 좋다고 했고. 그래서 나갔어.”“그런데 왜 아침에는 그렇게 말했어요?”“어떻게.”“다 안다는 것처럼요. 제가 주운 물건도 선배 거겠거니 하고, 설명은 나중에 하자고 하고.”태헌은 열린 문 위를 한번 보았다. 주차장 형광등이 그의 얼굴을 반씩 나눴다.“네가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어.”“왜 부끄러워하는지 묻지는 않고요?”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서는 그 침묵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남자를 말문 막히게 할 수 있다는 발견보다, 이렇게까지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 피곤했다.태헌이 이서 쪽으로 물러서 있던 가방을 조금 옮겼다. 발을 편하게 놓으라는 뜻이었다. 이서는 고맙다고 했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질문은 계속할 수 있었다.“저는 선배를 잘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제 선배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모르겠어요. 둘은 다른 거더라고요.”태헌은 이번에는 말 끊지 않았다.기억이 맞지 않았다. 이서에게는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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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소매 끝에 남은 것
태헌은 어제 입었던 재킷을 뒷좌석에서 꺼냈다.소매 한쪽에 와인 얼룩이 남아 있었다. 세탁소에 맡기기 전이라 차에 뒀다고 했다. 이서는 재킷을 받지 않고 태헌이 잡은 상태에서 보았다. 왼쪽 안감에 작은 실밥이 빠져 있었다.“여기 걸렸어. 네 블라우스 단추.”“그래서 제 단추가 떨어졌다고요?”“잔 피하려다가 네가 내 소매를 잡았어. 나도 어떻게 된 건지 그때는 몰랐어.”태헌이 떨어진 단추 하나를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동그랗고 평범한 흰 단추였다. 이서는 자기 가방에서 블라우스를 꺼내지 않았다. 호텔에 맡긴 짐에 들어 있었다. 사진으로 찍어둔 단추 모양과 비교할 수는 있었다.“그걸 왜 갖고 있어요?”“네 거니까.”“버려도 되는 건데.”태헌이 단추를 내려다봤다.“그럼 버릴까?”이서는 손을 내밀었다. 태헌은 웃지 않고 건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비싼 커프스링크보다 싸구려 단추를 돌려받는 일이 더 신경 쓰였다.태헌은 오른쪽 소매의 커프스링크를 보여주었다. 짝을 맞춰 만든 물건이라 뒷면의 숫자가 이어져 있다고 했다. 이서는 둘을 함께 찍었다. 물건의 주인을 확인하는 일은 쉬웠다. 그 주인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비싼 거예요?”“왜. 잃어버릴까 봐?”“보관하는 사람도 알아야죠.”태헌이 가격을 말하려다 웃었다.“네가 연락 안 하는 것보다는 싸.”이서는 그를 보았다. 태헌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음이 빨리 사라졌다. 이서는 오늘은 그런 말로 넘어가주지 않겠다고 했다. 태헌은 알겠다며 소매를 내렸다.이서는 단추를 작은 칸에 넣었다. 지금 이 물건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블라우스가 찢어진 이유 중 하나뿐이었다. 침대 옆에 남아 있는 모든 물건이 한 가지 사건의 흔적일 필요는 없었다.“커프스링크는요?”“소매 정리하다가 뺐던 것 같아. 네 셔츠 찾으려고 가방도 열었고.”“제 가방을요?”“네가 열었어. 나는 옆에 있었고.”태헌이 곧바로 정정했다.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구별해서 말해주는 것은 좋았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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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이서는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주차장 결제라면 그 시간에 호텔에 있었다는 뜻일 수 있었다. 하지만 차를 놓고 걸어 나갔다가 나중에 차만 찾았을 수도 있었다. 가능한 설명이 여러 개였다. 그중 가장 화나는 것을 정답으로 고르고 싶어지는 마음부터 눌러야 했다.태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주차장 3시 2분은요?]읽음 표시가 바로 떴다.[차는 호텔에 뒀다고 했잖아.]이서는 그 앞의 대화를 다시 읽었다. 맞는 말이었다. 태헌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생략할 수 있었다.[다시 방에 갔던 시간도 같이 보내주세요.]이번에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민우가 옆에서 물었다.“다음은 어디 가?”“학교. 오후에 교수님 만나기로 했어.”“그전에 좀 쉬어. 눈 뜨고 자는 것 같아.”둘은 학교 근처 작은 카페로 갔다. 민우는 노트북을 꺼내 어제 사진을 정리했다. 이서는 충전기를 빌려 휴대전화를 연결하고 눈을 감았다. 카페의 낮은 음악과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 이후 처음으로 누구의 표정도 읽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눈을 감자 어제의 복도가 떠올랐다. 호텔 카펫에는 푸른 선이 두 줄씩 이어져 있었다. 이서는 그 무늬 위에 서서 누군가에게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잠시 뒤에는 가지 말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같은 상대였을까. 자신이 모순된 말을 한 것일까.그녀는 눈을 떴다. 기억은 이어지지 않았는데 마음은 먼저 그 사이를 메우려고 했다.민우가 컵을 자기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방금도 뭘 기억하려고 했지.”“티 나?”“네가 생각할 때 컵을 그렇게 돌려. 물 다 식는다.”이서는 컵을 보았다. 손으로 잡고 있지도 않은 손잡이가 조금 전과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사소한 버릇은 기억하지 않아도 계속 하고 있었다.“어제 내가 너한테 연락한 건 있어?”민우가 대화방을 열었다. 밤 11시 40분에 답사 원고를 보내달라는 메시지, 자정이 조금 지나 고맙다는 답장. 그 뒤에는 아침에 민우가 보낸 물음만 남아 있었다.“네가 말한 거 말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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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알고도 묻는 사람
시현의 메시지는 사진을 받아보고 5분 뒤에 왔다.[학교 오셨어요? 돌려드릴 파일이 있어요.]이서는 카페의 시계를 봤다. 오후 3시였다. 도하와의 약속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민우가 시간 괜찮으냐고 물었다.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시현에게 조교실이 아니라 카페로 와달라고 답했다. 노트북을 펼칠 자리도 있었다. 밖에서 보는 편이 마음이 덜 복잡했다.이서는 어젯밤 그에게 보낸 문자를 다시 열었다.[원본 받으러 어디로 가면 돼요?]그 아래에 방 번호가 있었다. 2001호. 연회장 밖 라운지에서 기다리다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겠다고 자신이 보낸 말이었다. 방에 들어오라는 내용은 없었다. 시현의 답장은 [금방 가져다줄게요.]였다.평소라면 고맙다고 했을 문장이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가져다주겠다는 말이 어디까지 들어오겠다는 뜻인지 그때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읽는 문장을 다른 뜻이었다고 우길 수도 없었다.이서는 그 화면도 저장했다. 기억을 확인하겠다는 일이 누군가에게 불리한 것만 고르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됐다. 자신의 말도 같은 자리에 놓아야 했다.시현은 파일이 교내 장치에 있어 옮기려면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서는 그럼 자기가 조교실 앞 휴게 공간으로 가겠다고 했다. 한 번 장소를 바꾸는 데에도 서로의 이유를 확인해야 했다.민우가 함께 일어났다.“너 발표 원본 받는 거지? 나도 행사 사진 넘겨야 되니까 가자.”이서는 고마웠다. 시현을 만나겠다고 해서 혼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됐을 일을 오늘에서야 배우는 기분이었다.조교실 앞 긴 의자에는 졸업생들이 놓고 간 꽃다발 포장지가 쌓여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시현이 이서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까지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웃음을 거두지는 않았다.“사진 때문에 왔죠? 담당자 메일 다시 드릴게요.”“네. 근데 원본 옮기는 데 시간 좀 걸려요.”민우가 복도 탁자에 노트북을 펼쳤다. 시현은 이서에게 안쪽 의자를 권했다. 이서는 복도 의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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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립밤
시현이 행사 안내 파일을 열었다.맨 위에는 차성그룹 비서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참석자 명단과 행사장 배치, 발표 장치 반납 장소.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자료 대기실 2001호가 있었다. 이서는 자기 예약 확인서와 그 문장을 나란히 놓았다.“저 방을 제가 쓴다는 것도 알았어요?”“나중에는요. 이서 씨가 번호를 보냈으니까.”“그전에는 몰랐고요?”“정확히는, 누구 방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어요.”처음에 들은 대답과 조금 달라졌다. 이서는 곧바로 따지지 않았다. 시현은 자신이 틀리지 않을 문장을 고르고 있었다. 그 문장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 살펴야 했다.복도 건너편에서 민우의 노트북이 울렸다. 파일 전송이 끝난 모양이었다. 민우는 담당자와 통화하며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둘만 남자 시현이 의자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아까 질문, 계속해도 돼요?”이서가 물었다.“무슨 질문인데요.”“그날 저랑 잤어요?”시현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는 이서의 눈을 오래 보았다. 질문이 어디까지를 묻는지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이서는 피하지 않았다.“아니요.”“키스 다음에는요?”“아무 일 없었어요.”이서는 물컵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시현에게 그런 질문을 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조교실에 둘이 남았을 때 서로 말이 없어지던 순간은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현은 먼저 컴퓨터 화면을 돌렸고, 이서는 자료를 보는 척했다.한 번은 도서관이 닫힌 뒤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비가 왔는데 우산은 하나였다. 시현이 우산을 넘겨주고 뛰어가려 하자 이서가 소매를 잡았다. 같이 쓰면 되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 그는 그녀를 보다가, 그러면 자기가 너무 좋아할 것 같다고 답했었다.그때는 농담으로 넘겼다. 집에 와서는 버스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어깨를 한참 떠올렸다. 시현을 아무 감정 없는 조교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날의 설렘이 어젯밤의 빈칸을 대신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다.“저도 조교님을 싫어해서 묻는 건 아니에요.”뜻밖에 먼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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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사진의 가장자리
시현은 방에서 나온 시각을 2시 55분쯤이라고 했다.이서는 그 말을 적었다. 숫자가 세 개가 되자 종이에 순서가 생겼다. 태헌이 나간 뒤 시현이 들어왔고, 시현이 나갈 무렵 도하가 왔다는 설명이었다.“그럼 태헌 선배가 다시 올라온 건 몰랐어요?”시현의 시선이 들렸다.“다시요?”이번 놀람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이서는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다른 남자의 설명을 미리 보여준 다음 대답을 받으면 말이 섞일 것 같았다.“그건 나중에 같이 맞춰봐요. 조교님이 직접 본 것부터요.”“조금 전에는 수석님이더니.”“지금 학교 얘기하잖아요.”시현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이서는 틀린 호칭을 고르는 게임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실랑이 덕분에 그가 질문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잘 보였다.민우가 계단에서 올라왔다. 전송된 파일을 확인해달라는 전화였다고 했다. 그는 시현의 노트북으로 다가가지 않고 제 화면을 돌렸다. 연회장의 단체사진이 크게 떠 있었다.“어제 안내판 누가 만든 거예요? 방 번호 적힌 거요.”시현이 물었다.“행사 쪽에서 줬죠. 저는 사진만 찍었어요.”“원본 사진에 그것도 나왔어요?”민우는 몇 장을 넘겼다. 복도에서 이서를 찍기 직전의 사진에 안내 데스크가 걸려 있었다. 작게 세운 종이 표지에 2001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얼굴을 내민 임성준이 누군가에게 봉투를 주고 있었다.민우가 사진을 한 장 앞으로 돌렸다. 같은 안내 데스크였는데 그 사진에는 2001이라는 종이가 없었다. 검은 명찰과 줄 맞춘 펜, 명함을 넣는 작은 상자만 보였다.“두 장 사이 얼마나 돼?”“실제 시각으로 열한 시 십 분쯤부터 열한 시 이십사 분. 나 시계 9분 더한 거 맞게 계산했나 봐줘.”이서는 화면의 숫자를 직접 더했다. 두 장 사이에 안내판이 생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까지 보이는 사진은 아니었다.그 짧은 사이에 자신의 방이 다른 이름을 얻었다. 이서는 어제 저 시간에 태헌과 언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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