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개를 돌린 하지율은 화려한 무늬의 뱀 한 마리가 구불구불 몸을 틀며 자신을 향해 기어 오는 것을 발견했다.뱀은 하지율의 팔뚝만 한 굵기에 선홍빛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몸통을 수놓은 선명한 문양만 보아도 치명적인 맹독을 품고 있음을 짐작게 했다.하지율은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녀는 뱀이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했다.그리고 하필 이런 산속에는 그런 것들이 득실댔다. 독사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잔뜩 웅크리며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엿보았다.하지율은 손에 쥔 단도를 꽉 움켜쥐었다. 얼마 전 주용화가 호신용으로 쓰라며 선물해 준 칼이었다. 작고 날렵해 몸에 지니고 다니며 방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율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독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독사는 하지율을 향해 조금 더 거리를 좁혀오더니 이내 공격 사정권 안까지 파고들었다. 뱀이 잔뜩 경계하며 숨을 죽인 그 찰나, 그녀가 전광석화처럼 단도를 휘둘렀다.날카로운 칼날이 공기를 가르자 독사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나갔다. 몸통은 몇 번 꿈틀대더니 이내 생기를 잃고 축 늘어졌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혈향에 하지율은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내야 했다.“우읍...”정말 참기 힘든 악취였다.그때, 적막한 밤공기를 가르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율은 뒤틀리는 속을 추스를 새도 없이 주위를 경계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안개를 헤치고 훤칠하고 듬직한 체구의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나타난 사람을 확인한 하지율의 눈에 반가움과 안도감이 서렸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일시에 풀리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화야 씨,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예요?”주용화는 하지율의 창백한 얼굴을 살피며 대답했다.“비가 와서 길에 흔적이 좀 남았더군요. 그걸 따라왔습니다.”하지율의 안색이 다시금 굳어졌다.“길에 발자국이라도 남았단 말인가요?”혹시라도 살인청부업자들이 그 발자국을 따라 이곳까지 들이닥치지는 않을
하지율은 권총을 꼭 쥔 채 상대의 틈을 노려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탕.총알은 상대의 다리에 박혔다.그동안 사격장에서 훈련한 성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율은 이걸 실전에서 써먹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실전에서는 처음 총을 써보는 것이라 손이 떨려 조금 빗나갔지만 주용화를 맞추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율은 주용화처럼 상대를 바로 죽일 실력이 없었다.그 총성에 킬러들이 하지율의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하지율은 얼른 권총을 들고 또 다른 곳으로 숨었다.킬러가 하지율에게로 시선을 돌리려 하자 주용화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주용화는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 눈앞의 사람을 하나둘 처리했다.탕. 탕. 탕.하지율의 뒤를 좇으려던 사람들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주용화의 총알은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다.하지율은 킬러를 피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그러다가 뒤에서 총소리와 발걸음 소리를 듣고 더욱 긴장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가시덤불 때문에 종아리와 팔이 긁히고 피가 나서 아팠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얼마나 달렸을까.주변은 고요해졌고 뒤따르는 발소리도 사라졌다.하지율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나무 아래서 숨을 몰아쉬었다.심장이 세게 요동치고 있었다.당장 핸드폰을 꺼내서 구조 요청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보아도 핸드폰을 찾을 수가 없었다.아마 도망쳐오다가 어디에 흘린 것 같았다.사방은 까마득하게 어두웠고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달이었다. 하지율은 도망치는 것에 집중하느라 방향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때 하늘에 빛이 번쩍이더니 이윽고 천둥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차가운 빗물이 하지율의 얼굴에 떨어지자 하지율은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산길은 원래부터 순탄하지 않다. 그런데 비까지 더해지니... 자칫하다가는 굴러서 뼈가 다 부스러질지도 모른다.비는 점점 세게 내려서 어느새 하지율의 온몸을 적셔버렸다.가뜩이나 추운 숲에서 비까지
주용화는 전에 이미 하지율의 차를 방탄 소재로 리모델링했다.하지만 상대가 쉬지 않고 총을 쏘는 탓에 유리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아직 깨지지는 않았지만 이 상태로 두고 본다면 곧 유리가 깨질 것이다.그때 앞쪽에서 라이트가 켜졌다.이곳은 워낙 외진 곳이라 평소에도 차량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많은 차가 나타났다는 건, 하지율과 주용화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굳은 표정의 주용화가 하지율에게 얘기했다.“길이 좁은데 상대가 너무 많아요. 무턱대고 들이박았다가는 절벽으로 추락할 수도 있어요.”이 길의 한편은 가파른 절벽이고 다른 한편은 숲이다.절벽으로 떨어진다면 다 박살 날 것이고 숲으로 돌진한다면 곧 나무에 부딪혀 차가 부서져 상대한테 따라잡힐 것이다.어느 쪽이든 위험했다.주용화가 아무리 운전 실력이 좋다고 해도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신은 아니었다.수많은 차가 앞뒤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주용화가 홀로 그들을 따돌리는 건 어려웠다.결국 주용화가 얘기했다.“지율 씨, 준비해요. 우리는 차를 버리고 떠날 겁니다.”이런 일을 당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하지율은 아직 담담했다.“네.”주용화가 하지율에게 권총을 건네주며 얘기했다.“필요할 때 써요.”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총을 받았다.M국에 온 이후로 하지율도 총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M국은 치안이 별로 좋지 않고 또 하지율의 적이 많으니까 말이다.실력이 안 되니 무기라도 갖춰야 했다.주용화는 사격 실력이 아주 좋아서 하지율은 주용화한테서 권총을 쓰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그나마 봐줄 만한 실력으로 성장했다.주용화는 기회를 노려 차 몇 대를 따돌린 뒤 깊은 숲속으로 핸들을 틀었다.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나무에 차를 박고 말았다.하지율과 주용화는 이미 준비를 했었기에 차를 버리고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러나 그들을 쫓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기에 수색 능력도 좋았다. 게다가 사람도 많아서 빠른 속도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그리고 대학교에서 만난 심다희와 문지아, 남하연.지금은 정기석과 정시온, 함우민, 단종건 어르신까지 알게 되었다.하지율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하지율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생각에 잠긴 하지율은 주용화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다.‘나와 소린이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어요.’하지만 주용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사실 오늘 이곳에 같이 와달라고 한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하지율이 가볍게 물었다.“무슨 이유요?”주용화가 맥주를 마신 뒤 말했다.“오늘이 제 생일이에요.”하지율이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오늘이... 생일이라고요?”하지율은 그제야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죄송해요.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네요. 돌아가면 꼭 생일 선물을 챙겨줄게요.”“어차피 제 생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괜찮아요. 이곳에 같이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하지율은 약간 후회되었다.주용화가 이곳으로 오자고 했을 때 그 이유를 물어봤더라면 주용화는 바로 알려줬을 것이다.“앞으로 제가 기억할게요. 그리고 꼭 생일을 챙겨줄게요.”주용화의 눈은 별을 담은 밤하늘처럼 깊었다.“진심이에요?”“당연하죠.”“전에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거든요.”하지율은 주용화가 말하는 그 사람이 주용화의 전 연인이라고 생각했다. 고민하던 하지율이 입을 열었다.“그럴 수 있죠. 미래를 약속하는 건 쉽게 할 일이 아니니까. 그럼... 일단 내년 생일을 같이 보내는 걸로 약속할까요? 내년에 제가 꼭 생일을 챙길게요. 네?”주용화의 눈에 부드러운 온기가 스며들었다.“좋아요.”이윽고 주용화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약속해요.”하지율은 가볍게 웃었다.고윤택은 새끼손가락을 거는 것이 치사하다면서 하지율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하지율은 기쁜 마음으로 주용화의 새끼손가락에 본인의 손가락을 걸었다.“좋아요.”1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짧다. 주용화만 하지율의 곁에 계속 남아준다면 내년 생일을 챙기는
주용화가 얘기했다.“M국에 온 이후로 기뻐하는 모습을 거의 못 본 것 같아서요. 힐링할 겸 왔어요.”하지율은 눈을 반짝였다.연씨 가문은 하지율에게 있어서 집이 아닌 호랑이굴이었다.주위에는 적이 너무 많았고 까딱하다가는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다.그래서 하지율은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긴장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입을 다물고 있던 하지율이 주용화에게 얘기했다.“화야 씨, 고마워요.”주용화가 물었다.“저녁에 선약 없죠?”“네.”주용화와 약속을 잡았기에 하지율은 하루 종일 시간을 비워두었다.주용화가 가볍게 웃고 얘기했다.“마침 잘됐네요. 여기 야경까지 보고 가면 좋겠어요. 이곳은 밤이 낮보다 더 예쁘거든요.”주용화의 말을 들은 하지율은 저도 모르게 기대를 품었다.어느덧 시간이 흘러 해가 지고 노을이 드리워졌다.“지율 씨.”주용화가 갑자기 하지율을 불렀다.“저기 봐요.”하지율이 주용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노을 아래서 아름다운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금색의 빛이 꽃 위로 쏟아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냈다.그 순간 하지율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느꼈다.이윽고 해가 완전히 지고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교외의 밤은 아주 어둡고 조용했다.작은 별들이 하늘에 수놓아져 빛을 내뿜고 있었다.반딧불도 날아올라 어두운 밤을 밝혀주었다.낮에 볼 때는 호수가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밤이 되니 호수 면에 걸린 달의 그림자가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이곳의 경치는 정말 주용화의 말대로 아름다웠다.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주용화가 무언가를 챙겨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받아요.”주용화가 하지율한테 무언가를 던져주었다.받아보니 그건 캔맥주였다.“이건...”“기분이 안 좋을 때는 술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거든요.”주용화는 시선을 내려 하지율을 보면서 얘기했다.“주량이 별로라면 그냥 내버려둬요. 제가 마실 테니까.”하지율이 대답했다.“술고래는 아니지만 이 정도도 못 마실 주량은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소를 잃으면 안 되고 화를 내서도 안 되죠.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가면을 오래 써서 익숙한 것 같네요. 그리고 알았죠. 가면을 오래 쓴 만큼 벗기도 쉽지 않다는 걸.”하이현의 교육 때문에 하지율은 아주 올바르게 자라왔다.다른 사람을 비꼬아 얘기할 때도 하지율은 절대 저급한 언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주용화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면을 벗는 게 쉽지 않은가 봐요?”가벼운 바람이 불고 옅은 향기가 얼굴을 스쳤다. 코를 찌를 만큼 자극적인 냄새가 아닌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였다.가지각색의 꽃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이름 모를 꽃의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은근히 흔들었다.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여기 참 좋은 곳이네요.”하지율은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시끄러운 도시에서 벗어나 마음을 놓을 수 있게 하니까요.”주용화는 하지율을 힐긋 쳐다보았다. 하지율은 확실히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따뜻한 햇살이 쏟아지자 몸이 따뜻해졌다.하지율은 부드러운 향기 속에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손을 다친 이후로 하지율은 불면증에 시달렸다.그럴 때마다 수많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불면증이 나아지지는 않았다.이 불면증은 처음이 아니었다.임채아가 돌아왔을 때부터 하지율은 편안하게 밤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불면증이라는 건 정말 기분 나쁜 것이다.깨어났을 때, 햇살은 여전히 하지율을 비추고 있었다.하지율은 천천히 눈을 뜰 뿐 일어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이곳에서 하지율은 잠시나마 안정감을 느꼈다. 그래서 걱정과 근심을 모두 내려놓고 이곳에서 푹 자고 싶었다.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곁에 앉아 있는 주용화가 눈에 보였다.주용화는 고개를 숙인 채 검은 눈동자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손에 무언가를 쥔 채 손을 놀리는 주용화의 동작은 아주 우아했다. 하지율은 이토록 집중한 주용화의 모습은 처음이라 약간 놀라서 물었다.“지금 뭐 해요?”하지율의 목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