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손형원과 주용화는 서로의 존재와 마지노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특히 손형원은 몇 번이고 주용화의 심기를 건드리며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었다.손형원이 간이 큰 건지, 정말 죽는 게 두렵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그때 하지율이 말했다.“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그러자 손형원이 대답했다.“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하지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하지율은 안병철의 거처에 도착해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안병철의 의견도 단종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짧게 연주하는 건 괜찮지만 오래 하는 건 안 돼. 그리고 의사를 찾는 일은...”안벼얼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마침 실력 있는 의사를 한 명 알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해 두마.”하지율의 눈에는 고마운 기색이 떠올랐다.“안 어르신, 감사합니다.”안병철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더 할 말 없으면 이제 가 봐. 그리고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라면 앞으로 매주 한 번씩 나한테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해.”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전했다.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 서 있는 손형원이 보였다.손형원은 더 붙잡지 않고 하지율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하지율도 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안으로 들어오는 손형원을 본 안병철이 코웃음을 쳤다.“네 몸에 든 독도 아직 못 풀었으면서 남 걱정할 여유는 있나 보구나. 주씨 가문 그 녀석 때문에 이 꼴이 됐으면 복수할 생각부터 해야지 네 적을 치료할 의사까지 찾아 주는 거야? 바다에 빠지더니 머릿속까지 물이 잔뜩 들어찬 모양이군.”하지만 손형원은 담담하게 말했다.“주용화가 저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닙니다. 제가 자초한 일이죠.”안병철은 할 말을 잃었다.잠시 뒤 답답하다는 듯 호통을 쳤다.“너 정말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야? 너도 예전에는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던 놈 아니었어? 이제 와서 개과천선이라도 하
하지율은 손형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그러자 손형원은 뜸을 들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들은 주용화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주 무거운 족쇄를 채워 뒀습니다. 그런데 주용화는 자기 몸에도 가차 없이 손을 대야만 했어요.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손을 억지로 부러뜨렸대요.”손형원은 당시 주용화가 손을 부러뜨리는 모습을 목격한 교도관이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하지율에게 말하지 않았다.교도관은 감옥을 순찰하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했다.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주용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보기만 해도 온몸이 서늘해질 정도였다.그러다 주용화는 교도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주용화의 눈빛은 어둡고 음산한 나머지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 같았다.교도관은 그 자리에서 겁에 질렸고 주용화의 싸움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었기에 혼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원을 부르러 갔다.하지만 그 짧은 사이 주용화는 이미 탈출한 뒤였다.손형원의 말을 들은 하지율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율은 주용화가 과거 최면 치료를 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고문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것도 반년이나 이어졌다는 건 더더욱 알지 못했다.진소현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주용화 역시 예전에 자신이 싸우고 죽이던 이야기는 하지율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로 대충 넘겼을 뿐이었다.그에게 이렇게 끔찍한 과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손형원의 담담한 설명은 오히려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손형원은 새하얗게 질린 하지율의 얼굴과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하지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물었다.“주용화가 언제나 이기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하지율은 잠시 침묵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율은 주용화가 최면으로 잊은 과거가 감정 문제와 관련됐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주용화의 살기가 지나치게 강해 감정을 안정시키기 위
그러자 하지율은 반사적으로 사과했다.“죄송해요.”하지만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사람을 확인하자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손형원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손형원은 하지율을 내려다보며 엉뚱한 말을 꺼냈다.“좀 야위었네요. 요즘 잘 지내지 못하는 거예요?”하지율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짧게 대답했다.“잘 지내고 있어요.”그 말을 마친 뒤 손형원을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손형원은 하지율의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오세요.”하지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맙지만 괜찮아요. 화야 씨가 질투할 테니까요.”단종건과 안병철은 모두 성격이 조금 까다로워 외부인이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그래서 전소연은 입구에서 하지율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손형원은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하지율의 뒤를 따라왔다.그러자 하지율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손형원 씨, 저를 계속 따라오지 말아 줄래요?”“안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거 아닙니까? 저도 마침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같은 길입니다.”하지율은 손형원을 흘겨보며 무심하게 말했다.“화야 씨가 알게 돼서 또 다치더라도 제가 경고하지 않았다고 하지는 마세요.”그런데 어째서인지 하지율의 말에 손형원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네. 충고해 줘서 고마워요.”하지율은 이상하다는 듯 손형원을 한번 바라본 뒤 시선을 거뒀다.지금 하지율의 머릿속은 온통 주용화의 병으로 가득해 손형원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때 뒤에서 손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단보현이 왜 주용화에게 붙잡혀 갔는지 알고 있어요?”하지율이 대답했다.“단보현 씨가 계속 저희를 방해했고 뒤에서 비열하고 악독한 수단도 많이 썼으니까요.”“물론 그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손형원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연정미와 단보현이 주용화의 과거를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율 씨, 주용화가 예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어요?”하지율은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손형원
그러자 하지율이 말했다.“음악 치료가 효과만 있다면 그 정도는 괜찮아요.”단종건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하지율을 바라봤다.“주용화를 위해서라면 손이 다시 망가져도 괜찮다는 거야?”하지율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화야 씨의 병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다시는 바이올린을 켤 수 없어도 괜찮아요.”그 말에 단종건이 입을 열었다.“네 손이 망가질 때까지 연주한다고 해도 주씨 가문 그 녀석의 병은 조금 완화될 뿐 완전히 낫기는 어려워.”“그래도 괜찮아요.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충분해요.”단종건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는 어떤 남자를 위해서도 네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않겠다더니... 지금 네 모습을 봐봐. 전과 똑같이 사랑에 빠져 앞뒤를 못 가리는 거야?”하지만 하지율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단 선생님, 화야 씨는 달라요. 제 손뿐 아니라 지금 제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고 해도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사랑에 눈이 먼 게 아니라 그만큼 화야 씨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하지율은 예전의 자신을 인정했다.고지후와 함께할 때의 하지율은 분명 사랑에 지나치게 매달렸다.하지만 주용화를 향한 마음은 그때의 감정과는 달랐다.지금 하지율이 가진 모든 것은 주용화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주용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하지율도 없었다.주용화가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킬 수 있듯 하지율 역시 주용화를 위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주용화를 향한 하지율의 마음은 이미 단순한 사랑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율의 진지한 표정을 본 단종건도 장난스러운 태도를 거뒀고 표정을 바로잡고 말했다.“주씨 가문 그 녀석이 제안한 방법은 확실히 시도해 볼 만해. 하지만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아. 발병하기 전이라면 어느 정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이미 병이 발작하기 시작된 상태라 네 연주가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약해질 가능성이 커. 지율아, 생각해 봐. 주씨 가문에서도 온갖 방법을 다 시도했을 거야.
“예전에는 그저 지율 씨의 바이올린 소리가 좋다고만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지율 씨 자체가 제 치료제예요. 지율 씨는 그때보다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 됐으니까요.”하지율의 마음에는 여전히 작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제 연주가 정말 그렇게까지 효과가 있나요?”그러자 주용화가 대답했다.“지율 씨도 아시잖아요. 때로는 심리 치료가 어떤 약이나 치료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걸요. 그런 사례는 아주 많아요. 원하시면 제가 자료를 찾아서 보여 드릴까요?”하지율은 잠시 말없이 생각했다.결국 주용화의 말에 설득되고 말았다.“좋아요. 그럼 일단 해 봐요. 하지만...”하지율은 선이 뚜렷한 주용화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한 달 안에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는...”그러자 주용화는 하지율의 말을 가로막았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네. 그때는 전부 지율 씨 뜻대로 하겠습니다.”그제야 하지율의 굳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주용화를 바라봤다.“화야 씨, 또 자기 몸을 해치는 걸 발견하면 지금 한 약속은 전부 없던 일이에요.”주용화는 바로 대답했다.“알겠어요.”...다음 날, 하지율은 손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안병철을 찾아갔다.주용화도 함께 가려고 했지만 하지율이 말렸다.“단보현 씨가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단 어르신이 화야 씨를 보면 화를 내실 수도 있어요. 당분간은 단 어르신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전소연 씨와 다녀올게요.”전소연은 하지율이 새로 고용한 여성 비서 중 한 명이었다.물론 주용화가 하지율의 곁에 심어 둔 사람이기도 했다.하지율은 주용화가 왜 자신의 곁에 사람을 붙였는지 따로 묻지 않았다.자신의 행적을 통제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개의치 않았다.지금 하지율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직 주용화의 병이었다.주용화도 더는 하지율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순순히 받아들였다.“알겠어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주용화는 직접 하지율을 문 앞
불안하고 혼란스럽던 하지율의 마음은 오히려 서서히 가라앉았다.하지율은 주용화를 바라보며 말했다.“화야 씨, 하지만 저는 제 친구들을 해치거나 자기 자신을 해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할 수 없어요. 화야 씨에게 기억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들의 삶도 중요하잖아요. 오늘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수단을 썼지만 언젠가 제가 화야 씨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저한테도 똑같이 할 수 있겠죠.”주용화가 무언가 말하려 하자 하지율이 먼저 주용화의 입을 막았다.“아니라고 바로 부정하지 마세요. 자기 몸까지 해칠 수 있는 사람인데... 대체 뭘 못 하겠어요?”하지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말을 이었다.“화야 씨, 최면과 이별 중 하나만 선택하세요.”그 말에 주용화의 눈에 사악한 빛이 스쳤지만 주용화는 곧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주용화는 하지율을 살며시 끌어안고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율 씨, 며칠 전에 제 청혼도 받아 주셨잖아요. 반년 뒤면 결혼식도 올릴 거고 웨딩드레스도 이미 디자인해 뒀는데... 저를 버리시면 안 돼요.”하지율은 본능적으로 주용화를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주용화의 단단한 팔이 하지율을 빈틈없이 끌어안아 움직일 틈조차 주지 않았다.말로는 애처롭게 매달리면서도 주용화의 행동에는 여전히 강압적인 기색이 묻어났다.주용화는 하지율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주용화는 하지율의 목에 얼굴을 묻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율 씨, 저도 사람을 보내 여기저기 의사를 찾고 있어요. 최면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약속할게요. 지율 씨가 싫어하는 일은 다시는 하지 않을게요. 앞으로는 뭐든 지율 씨의 말을 들을게요.”주용화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침대에서도요.”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동시에 하지율은 화가 났다.주용화와 오랫동안 지내 온 만큼 하지율은 주용화의 약한 모습도 자신을 흔들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주용화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고 이렇게 부
경호원들이 하지율을 둘러싸고 밀려드는 인파를 막아섰지만, 누군가 물건을 던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하지율은 무언가가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달걀이 얼굴에 닿기 직전, 한 실루엣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곧이어 하지율의 시야에 들어온 건, 화야의 손에 잡힌 달걀 몇 개였다.하지율이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화야가 다시 달걀을 던졌다.달걀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던 한 젊은 여성의 얼굴에 떨어졌다.“꺄악!”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순간 현장은 얼어붙었다.하지율은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해외에서 나댈 수는 없으니까요.”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임채아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다른 건 참을 수 있지만... 선생님을 공경하지 않는 건... 전 정말 용납이 안 됩니다.”그러면서 지난번 대회장에서 하지율을 마주쳤을 때, 하지율이 현성 대가에게 눈곱만큼도 예의를 보이지 않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곧이어 하지율에 대한 남은 호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레이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저런 인물이 무대에서 활개를 치다니, 음악가의 수치와 다름없
그날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연정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몇 번이나 그대로 잠들 뻔했다.그러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문 쪽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꾸벅꾸벅 졸던 연정미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어서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문 쪽을 바라봤다.밖에서는 손형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보현 오빠, 어제 정미한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무슨 일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보현 오빠한테까지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단보현이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 조사해보니 연정미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여기였어.”손형서
손형서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주용화 앞으로 내밀고 저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화야 씨, 뭐 마실래요?”주용화는 메뉴판을 받지 않고 말했다.“연정미 씨 말로는 여기 라테가 대표 메뉴라던데요. 라테로 할게요.”손형서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정미가... 왜 그걸 화야 씨한테 말했죠?”이 카페는 연정미가 예전부터 자주 오던 곳이었다.주용화가 태연하게 답했다.“지난번 같이 식사했을 때 들었어요.”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그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둘은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