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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7 21:00:17

“내 목울대가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삐이이이이이익—.

뇌내 비상경보가 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하하하.”

선우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딱딱거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고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요.

방금 전까지 본부장님의 목울대를 아주 구체적으로 복기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님 말고요.”

에단이 태연하게 맞은편 의자를 빼냈다. 너무 태연해서 선우만 혼자 사고 현장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

의자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

아니.

왜 또 앉는데.

그의 손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에단은 그것을 선우 앞으로 밀었다.

“괜찮으시면.”

권유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없어야 했다.

“……감사합니다.”

정상적인 척.

그게 지금 선우의 최우선 과제였다.

“…….”

정상적인 척.

선우가 잔을 들었다. 잔을 코끝에 가져가자 달큰한 향이 먼저 올라왔다.

“버번이네요.”

“맞습니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버번 특유의 결이 느껴졌다.

옥수수를 베이스로 한 특유의 부드러운 단맛. 셰리처럼 여러 향이 복잡하게 겹쳐들기보다는, 시작부터 끝까지 비교적 선명하고 직선적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낯익은 손 하나가 기억 속에 겹쳐졌다.

‘먹어.’

무심한 얼굴로 고기를 잘라 제 앞접시에 올려주던 손.

“…….”

선우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아, 그놈의 권윤오.

이제는 윤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저렸다.

지나가야 하는데 지나가지 않는 것.

정리해야 하는데 손을 대는 순간, 더 엉망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선우는 요즘 자신이 거대한 문 하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열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손잡이를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는 안 되겠다.

요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늘 비슷했다.

언젠가는 끝내야 한다.

언젠가는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을 상상하면 겁부터 났다.

윤오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되는 것.

“…….”

그게 가능한가?

그건 지금까지의 자신을 조금씩 떼어내는 일 같았다.

그때였다.

짧은 진동이 테이블 위를 울렸다.

휴대폰 화면이 환하게 켜졌다.

“…….”

화면에 선명하게 박힌 이름은.

[윤오].

참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선우가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보네.”

저절로 새어 나온 한숨이 깊었다.

전화를 받으면 뻔했다.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일찍 자라는 잔소리.

입국하는 날 몇 시에 도착하는지.

공항까지 데리러 갈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물어올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또 아무 일도 없는 척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전화를 끊고 나면 또 그럴 것이다.

아, 역시 이 사람이 좋구나.

역시 나는 이 사람을 놓을 수 없구나.

익숙하고 편안한 곳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안전한 자리로.

그런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휴대폰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있던 선우의 시선 끝이 눈앞의 남자로 향했다.

“…….”

선우가 끝내 휴대폰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달칵.

작은 소리가 났다.

***

미친 듯이 몸을 떨던 휴대폰의 진동이 뚝 멎었다.

“…….”

선우가 뒤집힌 휴대폰을 한참 바라봤다.

뭐였을까.

이 난데없는 용기는.

선우의 시선이 천천히 맞은편으로 향했다.

“…….”

“…….”

에단은 잔을 느긋하게 돌리고 있었다. 얼음이 잔 안쪽을 따라 미끄러졌다.

달그락, 달그락.

맑은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길게 흘렀다.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이 빗물에 번져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나란히 흔들렸다.

눈 앞의 남자는 정적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이렇게, 속도 없이 마음이 놓이는 걸까.

“…….”

“…….”

선우가 한동안 잔 속의 호박색 액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잠시 말을 고르다 피식 웃었다.

“단순한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에단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이 버번처럼요.”

선우가 잔을 살짝 기울였다.

“처음이랑 끝이 같은 거.”

말하고 나니 스스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십이 년을 좋아했는데도, 마음은 조금도 영리해지지 않았다.

선우가 혀로 입술을 적셨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그게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서요.”

그런데 에단이 공기를 가볍게 흩트리는 웃음을 흘렸다.

“그게 약점일 수도 있죠.”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네?”

약점?

보통의 사람이라면, 처음과 끝이 같은 걸 선호하지 않나.

물론 위스키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였다.

“왜요?”

“금방 읽히니까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감청색 눈동자가 정면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

선우는 불에 데인 것처럼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늘 그렇듯 저 남자에게 마음 가장 약한 곳을 속절없이 들킬 것 같았다.

새로 온 본부장은 정말 심리학 박사라도 되는 걸까. 사람 마음을 읽는 데 무슨 특별한 재능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자꾸만 정확히 아픈 곳을 건드렸으니까.

“…….”

심리학 박사가 잔을 내려놓았다.

얼음에 작은 금이 가며,

쩌억.

아주 작은 파열음이 울렸다.

“다른 것도 드시겠습니까.”

갑자기?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라 선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

“…….”

에단의 눈이 잔을 향했다가 선우에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옆에 놓인 병을 집어 들었다.

조명 아래 유리병이 은은하게 빛났다.

Blanton’s Single Barrel.

“싱글 배럴입니다.”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술이 잔으로 떨어졌다.

졸졸.

고요한 밤 사람 하나 없는 라운지에 유난히 선명한 소리였다.

“단 하나의 캐스크에서 나온 위스키죠.”

에단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호박빛 액체가 유리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래서 같은 이름을 달고 있어도.”

에단이 잔을 선우 앞으로 천천히 밀었다.

“병마다 전부 다른 맛을 냅니다.”

선우의 손가락이 잔에 닿았다.

제 쪽으로 가져온 잔 가장자리를 무심코 쓸었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손끝을 움직이면 엉켜 있던 생각도 조금은 정리될 것 같아서.

“시작은 같았는데.”

에단이 말했다.

“결과는 다르다는 거죠.”

선우의 손끝이 멈췄다.

“…….”

선우가 잔을 내려다봤다.

호박빛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작은 같았는데.

결과는 달라진다.

그 문장은 권윤오라는 거대한 원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댔던 수많은 시도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좋아해 보려고 해도.

자신의 연애는 늘 시작은 달랐는데 끝이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돌아오는 곳은 하나였다.

선우는 그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매번 똑같은 절망으로 수렴하던 연애의 궤적들이 낱낱이 파헤쳐진 기분이었다.

“…….”

에단의 시선이 선우의 손끝으로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감청색.

늘 차분하고 자신만만하던 눈동자가 오늘만큼 가깝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

선우가 숨을 조금 멈췄다.

피해야 했다.

그런데 피하지 못했다.

“…….”

“…….”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테이블 하나가 갑자기 지나치게 작게 느껴졌다.

왜 당신은,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이걸로 드셔보시겠습니까.”

늘 그렇듯이.

강요하지 않으나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앞에서는,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처럼 느껴졌다.

“…….”

선우의 시선이 잔으로 내려갔다. 짙은 호박빛이 잔 안에서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끝이 잔을 향해 움직였다. 망설임 끝에 유리잔을 감싸 쥐자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선우가 마침내 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호박빛 액체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너머로 에단의 얼굴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

첫 모금을 삼켰다. 한 모금이 지나간 자리에 캐러멜처럼 깊고 따뜻한 단맛이 입안을 감싸고, 뒤늦게 오크에서 배어 나온 은은한 스파이스가 겹쳐졌다. 한 모금이 지나간 자리에는 구운 나무 같은 고소함과 드라이한 풍미가 남았다.

선우는 잔을 입술에서 떼지 못한 채 잠시 멈췄다.

시작은 같았는데.

결과는 달라진다.

그날 밤의 선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던 두 사람의 운명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느린 속도로 같은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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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104.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 부정맥 메이커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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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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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맥 메이커   98.

    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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