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담당 배우 한별에게 민낯을 들킨 스타일리스트 해경. 피하려 할수록 그는 더 솔직하게 다가온다. 꾸민 모습만 사랑받을까 두려운 여자와, 그녀의 모든 일상을 함께하고 싶은 남자의 로맨스.
더 보기“벗어요.”
한별이 대기실 문을 붙잡은 채 해경을 봤다.
“인사부터 하면 안 돼요?”
“안녕하세요. 벗어요.”
해경은 그의 코트 소매를 끌어당겼다. 손목 안쪽에 묻은 주황색 얼룩이 거울 조명 아래서 선명해졌다. 세 시간 뒤면 브랜드 담당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옷이었다.
“이거 뭐예요.”
“모르면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요.”
“떡볶이예요?”
“국물이 좀 튀었어요.”
“배우님은 왜 매번 음식을 입고 오세요?”
한별이 순순히 코트를 벗었다. 흰 티셔츠에도 작은 점이 찍혀 있었다. 해경은 천장을 한 번 보고 휴대폰 계산기를 켰다.
“뭐 해요?”
“배우님이 먹은 떡볶이 가격 다시 계산해요.”
“옷값 빼요. 떡볶이는 사천오백 원이었어요.”
문 앞에서 매니저 백승재가 웃음을 삼켰다. 해경이 코트를 건네자 곧바로 표정을 정리했다.
“제가 먹자고 했어요, 실장님.”
“그럼 두 분이 나눠 내세요.”
오늘은 드라마 종영 인터뷰였다. 원래 매체 세 곳이었는데, 해외 공개 후 순위가 뛰더니 여덟 곳으로 늘었다. 한별은 새벽까지 추가 촬영을 하고 왔고, 해경은 아침 다섯 시에 샵 문을 열었다. 누구도 떡볶이 얼룩을 처리할 시간까지 계산하지 않았다.
해경이 옷걸이에서 남색 재킷을 골랐다. 한별은 의자에 앉아 거울 속 자기 얼굴을 주물렀다.
“많이 부었어요?”
“네.”
“조금 망설여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덜 부어요?”
그가 입을 다물자 해경은 차가운 패드를 양 볼에 붙였다. 헤어 담당이 늦는다는 연락이 와서 머리까지 봐야 했다. 해경은 가르마를 바꿔보고, 재킷을 얼굴 밑에 대보고, 다시 원래 쪽으로 머리를 넘겼다.
“오늘은 이마 다 안 넘길게요. 피곤한 거 더 보여요.”
“피곤한 게 아니라 깊이 있는 얼굴이라고 해줘요.”
“그건 기자님한테 부탁하세요.”
한별의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화면을 뒤집어놔도 책상에서 진동이 이어졌다. 불과 한 달 전에는 인터뷰 끝나고 셋이 칼국수를 먹으러 갔는데, 오늘은 점심시간도 없었다.
그가 패드를 떼려 하자 해경이 손등을 툭 쳤다.
“아직이요.”
“이거 붙인 채로 대답하면 인터뷰 덜 들어오겠죠?”
“광고도 덜 들어와요.”
“그럼 붙이고 기다릴게요.”
해경은 웃음을 참으며 도구 가방을 열었다. 옆에서 신입 보조 민소담이 커피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손이 떨려서 종이컵 가장자리에 커피가 묻어 있었다.
“소담 씨, 재킷 스팀 한 번만 부탁해요. 안감 먼저 보고.”
할 일을 주자 소담이 바로 움직였다. 해경은 한별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돌렸다. 면도하다 베인 자리에 작은 딱지가 생겨 있었다.
“여긴 왜 이래요?”
“살려고 씻다가 다쳤어요.”
“오늘 액션 얘기 나오면 이쪽 보여줘요.”
“욕실 액션도 쳐줘요?”
그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홍보 담당자가 고개만 들이밀었다.
“배우님, 포털 영상팀이 일찍 와서요. 준비 과정 조금 찍어도 되죠?”
“잠깐만요. 지금 옷부터—”
해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메라가 들어왔다. 렌즈가 거울을 향하자 소담이 스팀기를 든 채 굳었다. 한별은 볼에 패드를 붙이고 목에는 수건을 두른 상태였다.
“이렇게 바로요?”
그가 웃으며 물었지만 담당자는 이미 문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계시면 돼요. 요즘 이런 걸 좋아하셔서.”
해경이 카메라 앞에 손을 들었다.
“재킷 착용하고 오 분 뒤에 찍어주세요. 뒤에 다른 배우 의상도 걸려 있어요.”
촬영자가 화면을 확인하며 한 발 물러났다. 해경은 의상 커버의 이름표를 안쪽으로 돌렸다. 그 사이 한별이 패드를 떼고 수건을 접어 승재에게 넘겼다.
“실장님 말대로 할게요. 저 지금 자연스러운 상태로 계약 위반할 뻔했네.”
그제야 홍보 담당자가 사과하고 문을 닫았다.
해경이 퍼프를 들었다. 한별은 방금까지 웃던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이 붉었다. 머리로 계산한 수면 시간보다 훨씬 적게 잔 얼굴이었다.
“몇 시간 잤어요?”
“차에서 잔 거 합쳐도 돼요?”
해경은 대답 대신 의자를 조금 눕혔다. 휴대폰 알람을 사 분에 맞추고 승재에게 물 한 병을 부탁했다.
“눈 감고 있어요. 깨우면 바로 일어나고.”
“일하다 자도 된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
“깨어 있는 얼굴보다 수습하기 쉬워서요.”
한별이 웃다가 그대로 잠잠해졌다. 해경은 퍼프를 두드리는 힘을 줄였다. 소담에게도 스팀기를 잠깐 꺼달라고 손짓했다. 사 분이면 부기가 빠지지도, 피로가 풀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지금 그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이었다.
알람이 울리기 직전 한별이 눈을 떴다.
“류 실장님은 밥 먹었어요?”
“배우님 얼굴 만드느라 못 먹었죠.”
그가 승재를 찾았다. 해경이 바로 말을 끊었다.
“떡볶이 사 오라고 하지 마요.”
“김밥인데.”
문밖에서 소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해경도 결국 입꼬리를 올렸다. 한별은 거울로 그걸 보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었다.
곧 들어온 촬영팀 앞에서 그는 재킷 단추를 잠갔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준비를 도와준 사람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분 없으면 저 밖에 못 나가요.”
한별이 해경을 가리켰다.
해경은 브러시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홍보 담당자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류해경 실장님이요. 제 얼굴 책임자.”
“발언 정정할게요.”
해경이 카메라 밖에서 말했다.
“떡볶이 먹고 묻힌 것까지는 책임 안 집니다.”
현장이 웃음으로 들썩였다. 한별도 웃었다. 그때까지는 해경도 그 짧은 영상 때문에 내일 자기 출근 시간이 바뀔 줄은 몰랐다.
“배우 때문에 안 하시게요?”프로듀서는 돌려 묻지 않았다. 해경은 무릎 위 시안을 내려다봤다. 열두 벌의 옷과 네 사람의 변화가 있었다. 주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전부 덮기에는 오래 준비한 기회였다.“배우 때문만은 아니고요. 제 역할을 확인하고 싶어요.”“의상 총괄입니다. 기존 전담 업무와는 별개예요.”“한별 씨 현장 수정은 제가 봐도, 다른 배우 의상 결정 중에는 보조가 맡아야 해요. 그때마다 저를 부르면 일정이 안 돌아가요.”프로듀서는 바로 메모했다. 필요한 인원부터 잡자고 했다.해경은 한 장 더 넘겼다. 지방 촬영이 끼어 있었다. 촬영일에는 근처 숙소에 머물고, 쉬는 날에는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샵 예약을 정리할 수는 있었다. 대신 몸이 두 개가 될 수는 없었다.“배우분들한테도 먼저 설명해주세요. 준비 시간이 모자라면 제가 밤새우면 된다는 식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요.”“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해경은 그제야 자료를 덮었다. 당장 계약서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인력과 예산을 확인할 하루를 달라고 했다.회의실 밖에 한별이 남아 있었다. 승재가 차를 가져오는 동안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해경이 지나가자 그가 물었다.“할 거예요?”“배우님은요?”“대본은 괜찮아서요.”“저도 일은 괜찮아서요.”두 사람 사이에서 엘리베이터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다.한별이 먼저 말했다.“내가 싫다고 할 때마다 일정 얘기부터 안 하시면 좋겠는데.”해경은 그를 봤다.“싫다고만 하지 말고 뭐가 싫은지 말씀하시면 되죠.”“다 설명해야 알아요?”“제가 배우님 속마음까지 스타일링해요?”그의 턱이 조금 들렸다. 해경은 시안 모서리를 가지런히 맞췄다.“제 의견도 끝까지 들어보시고요. 오늘 다음 장에 다 있었잖아요.”한별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둘 다 옆으로 비켰다. 해경은 반대쪽 계단으로 향했다.“안 타요?”“한 층 아래 사진팀 만나러 가요.”굳이 같이 타야 할 이유도 없었다.재하는 회의실에서
“의상 총괄을 저한테요?”해경이 기획서를 다시 펼쳤다. 패션 브랜드가 제작하는 여덟 편의 짧은 드라마였다. 재하는 포스터와 화보 촬영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네 작업 사진 보고 먼저 물어봤어. 배우 누구 하느냐보다 캐릭터별로 옷을 다르게 만들 사람이 필요하대.”해경은 출연진 칸부터 확인했다. 주연 두 자리 모두 협의 중이었다.여섯 주 촬영, 주 삼 일. 촬영 없는 날에는 기존 고객을 받을 수 있었다. 예산표에는 의상팀 인건비와 구매비가 따로 잡혀 있었다. 셋을 넘기지 못하던 자기 포트폴리오가 처음으로 여러 캐릭터의 옷장이 될 기회였다.“나 이런 규모 총괄은 처음인데.”“그러니까 자료 보고 결정해.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하고.”재하가 남은 샌드위치를 밀어줬다. 해경은 한 입 먹고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주 월요일 미팅이었다.“갈게. 대신 네가 추천했다고 가격 깎아주진 않아.”“그 말을 내가 제작사에 그대로 전하면 돼?”“응. 앞에 실력 좋다는 말 붙여서.”재하가 웃었다. 해경은 일정표에 시간을 적었다.같은 시각, 한별은 차 안에서 기범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브랜드 드라마 주연 제안이었다. 해외 영상 반응이 좋아 우선 미팅을 원한다는 말에 그는 대본부터 보내달라고 했다. 소속사는 일찌감치 출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의상 쪽은 류 실장님 얘기가 나와요.”한별이 창밖에서 눈을 뗐다.“내가 추천한 거 아니에요.”“알아요. 거기도 후보로 올랐대요.”“다른 사람도 볼 수 있잖아요.”기범이 잠깐 조용해졌다.“두 분 무슨 일 있어요?”“일밖에 없죠. 그게 문제지.”그는 전화를 끊고 대본을 열었다. 오래된 동네 수선집에 돌아온 아들과 그 건물을 맡은 건축가의 이야기였다. 전작의 말끔한 검사와는 달랐다. 옷을 잘 입는 장면보다 남의 옷을 만지는 장면이 많았다.세 장만 보려다가 끝까지 읽었다.이틀 뒤 대본 미팅에서 한별은 윤세린을 만났다. 서른두 살, 예전에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춘 배우였다. 그녀는 먼저 와서 대본에 표시하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 두 시, 해경은 한별의 전화를 끊었다.정확히는 받지 않고 무음으로 돌렸다. 모델이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귀걸이를 찾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의 촬영장이 아니었다.“안 받아도 돼?”재하가 조명을 옮기며 물었다.“응. 오전에 인계 끝냈어.”해경은 의자 밑에서 귀걸이를 찾아 소독 솜으로 닦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소담을 먼저 보내고, 샵에 짐을 내려놓고, 씻고 나온 게 한 시간 전이었다.몸은 피곤했다. 그런데 행거에 걸린 옷을 보면 잠이 달아났다. 자신이 고른 질감과 색이었다. 한별에게 어울리는지부터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재하가 모델의 어깨에 걸친 장식을 가리켰다.“그거 그대로 갈 거야?”“왜. 어제는 좋다며.”“사진으로 볼 때랑 달라. 조명 받으니까 얼굴을 가려.”해경이 모니터 앞에 섰다. 테스트 사진의 은색 장식이 턱 옆에서 빛났다. 예쁘기는 했지만 시선이 그쪽으로만 갔다.“등으로 넘겨볼게. 없애지는 말자.”“응. 그렇게 한 번.”재하는 카메라를 들었다. 해경이 장식을 고쳐 달자 바로 다음 컷이 이어졌다. 안 된다는 말 뒤에 왜 안 되는지가 붙었고, 바꾼 다음에는 확인했다. 일이라는 게 늘 싸워야만 굴러가는 건 아니었다.휴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승재였다.해경은 모델에게 잠깐 쉬라고 한 뒤 전화를 받았다.“네. 무슨 문제 있어요?”“실장님, 내일 시사회 재킷이요. 배우님이 다른 걸 입고 싶다고 하셔서.”“원장님께 사진 세 개 보내놨어요. 지금 샵에 계세요?”“네. 그런데 배우님이 실장님이랑 얘기를.”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바뀌었다.“이거 소매가 짧아요.”해경은 눈을 감았다 떴다.“소매 안쪽에 시침해놨어요. 원장님께 풀어달라고 하세요.”“아까 다른 사람한테 물었는데 모르던데.”“신입한테 물으신 거 아니에요? 원장님께 여쭤보세요.”“그냥 잠깐 와서 보면 안 돼요? 오래 안 걸리는데.”해경은 스튜디오 안쪽을 봤다. 모델이 거울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대관은
“연인 설정은 빼주세요.”해경이 말하자 한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모처럼 의견이 맞았다. 원인은 아주 분명했다. 서로의 옆에 붙여놓은 하트 그림이었다.영상 담당자는 실제 연애가 아니라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삼십 초짜리 옷 고르기 영상이고, 두 사람의 말싸움이 자연스러워서 떠올렸다고 했다.해경은 시안의 제목을 짚었다.“직원과 배우로 찍어도 되는 거잖아요.”한별이 옆에서 덧붙였다.“제가 옷 고르고 이분이 반대하는 건 연기 안 해도 되는데.”“배우님이 고르시는 걸 보면 반대할 만해요.”담당자가 웃었다. 통역도 웃다가 곧장 말을 옮겼다.결국 콘셉트는 배우의 취향과 스타일리스트의 선택을 비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해경의 얼굴이 나오는 만큼 별도 출연료를 받기로 했다. 분량은 짧았고 금요일 귀국에도 지장이 없었다.해경은 완성본에서 자신의 이름과 직함이 어떻게 나오는지까지 확인했다. 한별은 그동안 휴대폰으로 대본을 읽었다.“다 됐어요?”“네.”“저는 여기 앉아 있는 시간도 출연료 나와요?”“소속사에 물어보세요.”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경도 기획안을 접었다. 같은 편이었던 시간은 정확히 십칠 분이었다.다음 날 촬영은 호텔의 작은 연회장에서 시작됐다. 한쪽 벽에 행거를 세우고 브랜드 로고를 붙였다. 해경은 대기 중인 한별에게 회색 바지를 건넸다.“이게 제 선택인 거죠?”“배우님이 고르신 검은 바지는 저쪽이에요.”“이건 누가 봐도 회색이 더 어울리게 준비했잖아요.”해경은 검은 바지에 맞는 상의를 하나 더 가져왔다.“이제 이겨보세요.”첫 촬영은 한별이 검은색 옷을 고르는 장면이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자 능숙하게 소매를 들어 보였다. 편하고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설명했다.해경의 차례가 되자 감독이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마이크를 단 쪽을 옷걸이로 가린 탓이었다.“다시 갈게요.”해경이 옷걸이를 내렸다. 이번에는 말을 너무 빨리했다. 통역을 붙일 틈이 없었다. 세 번째에는 시선이 카메라 옆 모니터로 갔다.한별이 행거에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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