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여긴 아르벨라의 창립자가 생전에 아꼈던 곳입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빈티지 잔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죠.”태연히 설명을 이어가는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선우의 시선은 자꾸 그의 얼굴에 붙들렸다.“산업혁명 이후 이 도시는 배와 철, 기계로 돈을 벌었어요. 강을 따라 조선소가 들어섰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죠.”저 반듯한 콧날도.말할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술도.아무렇지 않게 웃는 저 입꼬리도.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낮은 베이스 선율이 먼저 발목을 감았다.뒤이어 오래된 가죽과 시가, 오크통에서 배어 나온 듯한 묵직한 나무 향이 천천히 폐부로 스며들었다.바 안은 조명을 극도로 낮추어, 오직 백바에 진열된 크리스털 잔들만이 보석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두 사람은 바텐더가 안내한 가장 안쪽, 반원형의 벨벳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소파가 깊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어깨가 밀착되었다. “…….”“…….”바 안은 놀라울 만큼 어두웠다.천장에 매달린 조명은 의도적으로 빛을 낮춰놓았고, 오직 바 뒤편에 진열된 크리스털 잔들만이 희미한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잔마다 모양이 달랐다.길고 가느다란 것. 배가 둥글게 부푼 것. 입구가 꽃처럼 벌어진 것.어떤 것은 오래된 은잔처럼 묵직했고, 어떤 것은 유리라기보다 얼음을 얇게 깎아 만든 것처럼 섬세했다.“글래스고는 처음이라고 했죠?”“네.”에단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놓인 코스터를 천천히 두드렸다.“글래스고의 클라이드강으로 위스키와 담배, 설탕 같은 무역이 움직였어요. 지금 우리가 마시는 한 잔에도 이 도시와 지나온 시간이 담겨 있는 셈이죠.”에단은 잔을 들어 선우에게 건넸다.“그래서 제가 글래스고를 좋아합니다.”“에든버러보다요?”괜히 입술이 삐죽 나왔다.“비교할 수 없죠.”에단이 잔을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다 말을 덧붙였다.“글래스고의 밤을 위해서.”어제와는 다른 밤이었다.발베니의 오래된 성벽. 짙은 안개. 입술이 닿았던 순간의 감각
“…….” “…….”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에 섞인 희미한 위스키 향까지 느껴질만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우가 눈을 들었다. “정말 안 갈 겁니까?” “…….” 끄덕. 선우의 목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 ***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이윽고 손끝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안개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스며들었고, 산 능선 위에 낮게 걸린 별들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가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꿈이라면 느낄 수가 없는 온기였다. “눈 감아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오직 체온과,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위스키 향만 선명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
젖은 풀 냄새가 짙었다. 발밑에서 이끼가 축축하게 눌렸고, 낮게 깔린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거대한 돌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발베니 성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폐허지만,” 그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한때는 이 하이랜드를 지키던 요새였죠.” 무너진 벽. 금이 간 계단. 이끼가 뒤덮은 돌. 800년이라는 시간이 돌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었다. “…….”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이로 고성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장엄하고 거대했다. 특히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린 별빛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별이 이렇게나
더프타운의 아침은 차가웠다. 3번 창고에 도착하자 이미 현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냉각기는 복구되어 있었지만, 폭풍이 남긴 습기와 열의 흔적은 여전히 창고 안에 남아 있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현지 책임자인 캘럼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스코틀랜드 억양이 섞인 영어로 상황을 쏟아냈다. “냉각기 복구 시점.” 캘럼이 즉시 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는?” “정상 범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창고를 바라봤다. “어제 우리가 확인한 건 가능성이었어요.” 잠시 멈췄다. “오늘 필요한 건 확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김 과장님.” “네.” “3번 창고 전체 캐스크를 다시 봅니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전부요?” “전부.” *** 작업은 힘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서른 번째. 캐스크마다 마개를 열고 샘플을 뽑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서 굴리고. 기록하고. 버리고. 다시 다음 캐스크. 같은 캐스크라도 숙성 위치와 열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향과 질감이 미세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바닐라가 지나치게 강했다. 어떤 것은 오크의 탄닌이 입안을 말려버렸다. 어떤 것은 향은 화려했지만 모틀락과 붙이는 순간 중심이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점점 숫자와 향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87번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선우는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퐁. 공기가 바뀌었다. “…….” 잔을 돌렸다. 색을 확인했다. 코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 아주 조금 머금었다. “…….”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멀리서 도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바로 시선을
“그리고.”낮은 목소리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당신이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쿵.눈치없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눈앞의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거리가 조금 좁혀졌다.하지만 닿지는 않았다.그가 언제든 물러날 수 있고, 선우 역시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거리.“그냥 당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라고 하는 겁니다.”선우는 숨을 죽였다.“그리고 지금.”에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당신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도망가지는 않잖아요.”“……그건.”선우가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질문 끝났으면 이제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벌써요?”아니.벌써가 아니라.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잠깐 전까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잠이나 자라는거지?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본부장님.”“네.”“이 상황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요?”에단이 눈을 들었다.“…….”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아까 그 말.”“어떤 말.”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주황빛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지금도 내가 무섭습니까?”음.대답하지 못했다.“…….”괜히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뜨거웠다.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무섭느냐고.그래.무서웠다.그런데 처음 그가 무서웠던 이유와 지금 무서운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그런데 지금은.선우가 그를 돌아봤다.에단의 눈빛이 불꽃 너머에서 느리게 휘었다.“……네.”반대였다.이 사람이 정말 진심일까 봐.“하.”말을 내뱉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엄청 무서워요.”“왜죠?”“본부장님이…….”진짜일까봐요.선우가 말을 삼켰다. 대신 잔을 손안에 깊숙이 움켜쥐었다.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병신인데.선우는 잔을 내려다봤다.“가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손끝에 닿은 유리잔이 차갑게 느껴졌다.“본부장님이 원래 여자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한테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죄책감이 덜해지니까.선우가 또 말을 삼켰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까지 알아들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자꾸 아니더라고요.”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아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쳐나갔을 때도.”“…….”“다음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놓으셨을 때도.”“…….”“오늘 여기까지 와서도.”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입장이 줄곧 같으시네요, 본부장님은.”“선우 씨니까요.”“그러니까요.”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윤오에게도.그 누구에게도.“윤오는 제가 아무리 오래 좋아해도 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본부장님은.”선우가 숨을 삼켰다.“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