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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1 03:21:42

청담동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은 변한 게 없었다. 현관에는 서희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거실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은은한 향이 남아 있었다.

강수가 익숙했던 자리였다.

“오빠, 먼저 씻을래?”

서희가 그의 재킷을 받아 들며 물었다.

“너 먼저 해.”

“피곤하지?”

“괜찮아.”

서희는 강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침실로 향했다.

강수는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고요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연했던 고요함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테이블 위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몇 초 뒤 다시 집어 들었다.

시간은 밤 열 시가 조금 넘었다.

강수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췄다.

민사라.

이름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화를 걸 이유는 없었다.

내일 출근할 직원이었다. 이미 업무도 끝났고, 퇴근 후 누구를 만나든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강수는 화면을 껐다.

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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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온한 정착   외전 11

    밤이 깊어진 르베르는 조용했다. 건이는 제 방에서 잠들었고, 진이도 몇 번을 칭얼거리다 겨우 깊은 잠에 빠졌다. 거실까지 불이 모두 꺼진 집에서 안방 문만 굳게 닫혀 있었다. 사라는 흐트러진 이불 위에서 강수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맞닿은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거친 숨이 섞였다. 몇 년을 함께 살았고 아이가 둘이나 생겼는데도 이런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해지지 않았다. 강수의 체온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도. 가까워질수록 달라지는 숨소리도. 사라는 숨을 몰아쉬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 목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순간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강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왜.” 사라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만 가늘게 떴다. “진이 깨.”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도 겨우 재웠다. 요즘 진이는 한 번 잠들면 제법 오래 잤지만, 가끔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고 울었다. 강수가 사라의 손목을 잡았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오빠.” “왜.”

  • 불온한 정착   외전 10

    “네가 신경 쓸 사람 아니야.” 강수의 대답은 짧았다.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건이는 아빠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왜?” “어른 일이야.” “어른 일은 애가 신경 쓰면 안 돼?” “어.” “왜?” 강수가 아들을 내려다봤다. 역시 민사라 아들이었다. 하나를 대답하면 질문이 두 개가 되어 돌아왔다. “몰라도 돼.” “나 다섯 살이라서?” “그래.” 건이가 잠시 생각했다. “여섯 살 되면?” “안 돼.” “일곱 살은?” “차건.” “응.” “그만.” 건이는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몇 걸음이었다. “아빠.”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옆에서 걷던 사라가 결국 피식 웃었다. “왜.” “아빠는 저 이모 안 좋아해?” 이번에는 사라의 웃음도 멎었다. 강수는 잠깐 건이를 내려다봤다. 아이의 얼굴에는 다른 뜻이 없었다. 그저 궁금한 것이었다. 강수는 굳이 거짓말하지 않았다. “어.” “왜?”

  • 불온한 정착   외전 9

    서희의 시선이 건이에게 내려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까만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수를 그대로 닮은 얼굴이었다. 서희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를 못 잊는 사람.” 사라의 표정이 굳었다. 강수의 눈빛도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서희는 멈추지 않았다.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 건이가 눈을 깜빡였다. 다섯 살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대답이었다. “우리 아빠를?” “응.” “왜?” 서희의 입술이 열리기 전 강수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만.” 짧고 낮았다. 서희가 강수를 바라봤다. 강수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애한테 할 얘기 아니야.” 사라 역시 말없이 건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건이는 여전히 궁금한 얼굴이었다. “근데 아빠는 엄마랑 결혼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희의 시선이 사라에게 향했다. 사라는 피하지 않았다.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친구의 눈 안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미움도. 상처도. 그리고 강수를 향한 감정도. 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불온한 정착   외전 8

    한국에 돌아온 지 나흘째였다. 김서희는 아직 누구에게도 돌아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청담동 펜트하우스에서 잠들고, 늦게 일어나 혼자 밥을 먹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밖에 나오는 게 전부였다. 오래 비웠던 집에는 생각보다 필요한 게 많았다. 그래서 찾은 백화점이었다. 평일 오후라 주말만큼 붐비지는 않았다. 서희는 생활용품 몇 가지를 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때였다. 익숙한 옆얼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서희의 걸음이 멎었다. 차강수. 잘못 봤다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큰 체격. 구릿빛 피부. 오른쪽 얼굴을 길게 가르는 흉터.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강수는 강수였다. 조금 더 짙어진 얼굴선을 제외하면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서희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검은 셔츠 위로 아기띠가 둘러져 있었다. 강수의 넓은 가슴에 아주 작은 아기가 붙어 잠들어 있었다. 서희는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차강수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그

  • 불온한 정착   외전 7

    아침부터 르베르는 시끄러웠다. 정확히는 차건 혼자 시끄러웠다. “엄마!” “왜.” “아빠가 내 공룡 숨겼어!” 주방에서 계란을 뒤집던 사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빠가 왜 네 공룡을 숨겨.” “내가 안 치웠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강수가 눈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안 숨겼어.” 건이가 아빠 앞에 섰다. “없잖아.” “장난감 통.” “없어.” “밑에.” 건이가 장난감 통으로 달려갔다. 잠시 뒤. “있다!” 사라가 어이없는 얼굴로 강수를 봤다. “오빠.” “왜.” “저걸 왜 숨겼다고 생각한 거야?” 강수가 그제야 아들을 한번 봤다. “어제 치우라고 했으니까.” 건이가 공룡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아빠가 숨긴 줄 알았어.” “아니야.” “미안.” 사과는 빨랐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이 이어졌다. “아빠, 티라노 해.” “싫어.” “해.” “안 해.” 건이는 잠깐 생각했다. “그럼 엄마 해.” 사라가 뒤집개를 든 채 눈을 크게 떴다. “왜 또 나야?” “엄마는 해주잖아.” 맞는 말이었다. 사라가 뒤집개를 내려놓고 두 손을 갈고리처럼 만들었다. “크아아앙!” 건이가 비명을 지르며 식탁 주변을 뛰었다.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차건. 뛰지 마.” “티라노 온다!” “넘어져.” “아빠도 도망가!” “안 가.” 사라가 방향을 틀어 강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럼 아빠부터 잡아먹는다!” 강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라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크아앙.” “…….” “무서워해야지.” “안 무서워.” 건이가 달려와 강수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빠 잡혔어!” 강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양팔을 움직였다. 한쪽에는 사라. 다른 쪽에는 건. 둘이 동시에 들렸다. “아!” “우와!” 건이는 신났고 사라는 강수의 어깨를 잡았다. “차강수! 나 내려!” “잡아먹는다며.” “그거랑 이건 다르지!” 강수는 두 사람을 그대로 소파까지 옮겼다

  • 불온한 정착   외전 6

    5년 만이었다. 김서희는 한참 동안 현관문을 열지 못했다.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누를 때마다 짧은 전자음이 고요한 복도에 울렸다. 마지막 숫자를 누르자 익숙한 잠금 해제음이 들렸다. 문이 열렸다. 서희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동안 서 있었다. 강수와 살았던 청담동 펜트하우스. 이혼할 때 강수가 자신에게 남겨두고 간 집이었다. 해외에 머무는 동안에도 사람을 두어 꾸준히 관리했다. 청소도, 환기도, 시설 관리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했다. 거실도. 소파도. 긴 식탁도. 그대로였다. 서희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구두 소리가 넓은 집 안에 작게 울렸다. 침실 문을 여는 순간에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강수의 옷이 있었다. 한쪽 드레스룸을 채우고 있는 셔츠와 재킷, 넥타이. 그가 쓰던 시계 보관함도 그대로였다. 강수는 이혼하던 날 거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필요한 건 이미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서희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버리지 못했다. 5년 동안. 옷 한 벌조차. 서희가 검은 셔츠 소매를 손끝으로 만졌다. “……여전하네.” 집이 여전한 건지. 자신이 여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여러 나라를 돌았다. 한곳에 오래 있기도 했고, 아무 계획 없이 다른 도시로 떠나기도 했다. 왜 사라가 그렇게 떠돌았는지 알고 싶었다. 왜 떠나면서도 결국 돌아올 수 있었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는 여전히 어려웠다. 차강수. 5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이름만큼은 완전히 과거가 되지 않았다. 서희는 드레스룸 문을 천천히 닫았다. 강수를 찾아온 건 아니었다. 만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떠났던 곳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 시각 CH건설 회장실. 강수는 보고서를 넘기고 있었다. 마흔둘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세월이 지나며 얼굴선은 더 짙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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