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알렉산더는 아무말 없이 비상등 깜빡이를 넣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브리의 엄마 사진을 쳐다본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학교 다녀올게요.”하고 인사하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는지 몰라도. “파티는 어땠는데?“할 말이 없는지 흠흠, 기침하더니 첫말이 그거였다. 브리는 심신이 피곤한 탓에 데리고 온 아버지를 옆에 구고 하이힐부터 벗었다. “아버지 뭘 여기까지 왔어요.”구두를 가방에 넣는 브리를 보더니 알렉산더가 운을 뗐다. “파트너도 없이 그렇게 나가는데 누가 데려다줄라고?” “아니에요. 그래도 에이든이..””밀러가에서 자금 수혜 받았다. 너도 알고 있었냐?“ 아 그게 오늘이었구나. 오늘을 기점으로 알렉산더가의 자금난이 조금 줄어들었으니까. 세계적인 전염병 때문에 줄줄이 폐업했던 호텔이 밀러가의 자금과 납품 때문에 겨우 설비 공사에 착수한 시점이었다. 유서 깊은 로즈가의 호텔들, 끽하면 밀러그룹에 흡수될 뻔했지만 올드머니의 자존심과 체면 그리고 브리의 희생으로 버텨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응?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내 몸 하나 추리기도 바쁜데, 남자 으른들 일에 내가 왜 끼어들겠어. 아빠. 하하.“ 브리는 어색하게 시치미를 뗐다. 로즈가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할머니때부터 대대손손 물려받은 유서 깊은 호텔이었기 때문에, 그건 곧 엄마의 유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그래서였을 것이다. 브리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에이든한테 무릎을 꿇은 이유가. “네가 에이든한테 부탁한 건 아니고?”잠시 생각에 잠긴 브리를 의식하듯 알렉산더가 브리를 떠봤다. “어우 아빠. 그런 소리 좀 하지마. 내가 뭐가 아쉬워서 걔한테 부탁해? 이상한 소리하지말고 운전 집중해.” 꽤 친근해진 딸의 말투에 알랙산더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데리고 오면 먼저간다, 친구들이랑 밤새 파티를 하고 들어와도 그거 층계를 올라갈 뿐이었던 딸. 오늘은 자신의 차를 넙죽 얻어타더니 잔소리까지하네? 알렉산더는 핸들을 잡은 손을 까딱거리다, 옆자리에 앉은
“아니 뭐 어떻게 안다기 보다... 그냥 저절로.”에이든은 고개를 대충 끄덕이더니 옅게 미소지었다. 그의 각진 턱과 부드러운 입술이 눈에 들아왔다. 뭐지? 그것도 잠시, 에이든은 브리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빠르게 미소를 걷히곤 자세를 고쳤다. ”뭐 그건 그렇고, 아까 말한 거 있지? 오늘 초대 받은 사람들 이름 다 외우고...“”알겠다고. 자슥아.“브리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럼 그렇지. 따라다니며 잔소리나 하는 게 계약 연애라는 건 여간 피곤한 게 아니구나. 말은 추모파티지만 고인을 그리는 사교 파티에 가까웠다. 바네사의 부모, 에이든의 가족들 등 엘리즈 하이의 부모들도 꽉꽉 채워 참석한 곳이었다. “브리, 이번에 너희 아버지는 안 오셨나봐?” 바네사의 시녀 중 한 명이 물어왔다. 브리는 대충 아버지가 이 파티에 왜 참석하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에이든의 부모가 참석하는 이 곳에서 에이든의 눈치를 보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 오늘 아버지가 좀 아프시대.” 추모파티인데도 이들은 여유롭고 행복해보였다. 죽음도 값비싼 사람들. 브리는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원작의 주인공도 그랬을까. 이런 느낌은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았지. 꽤 주인공이 외로웠을 거 같은데, 미영은 이 주인공이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식당에서 본 왁자지껄 웃는 사람들, 돌아가면 녹초가 된 자신도. 해외여행을 꿈꾸던 황미영을 생각하면서. 그런 브리에게 웨이터로 보이는 누군가가 브리를 불렀다.“저 브리씨. 블랙 드레스입니다.” 단정하게 접혀있는 우아한 실크드레스였다.“누..누가 보냈어요?” 보낸 사람이 말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파우더룸에서 갈아입고 나오시죠. 언제 이런 걸 준비했지, 브리는 블랙 드레스를 받아들고 파우더룸으로 향했다. 조금 피로한 얼굴. 그래도 부드러운 살결과 발그레한 볼 때문에 환하게 빛났다.“어머 브리아나, 오랜만이네요.” 알알이 빛나는 전구가 눈부시게 빛나는 화장대 앞
“브리아나? 음? 너 어디가?“ 엘리샤가 작게 불렀다. 브리는 성큼성큼 단상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작은 현악단이 있었다. 턱수염이 긴 첼로 연주자가 무릎 사이에 첼로를 낀 채 브리를 바라보았다. 브리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순간 홀 안이 술렁였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노래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상황에서?” 뒤늦게 파티장으로 들어온 에이든이 무대로 걸어가려 했다. “야, 비켜.” 그가 낮게 내뱉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려는 순간, 누군가 옆에서 그의 팔을 잡았다. 이안이었다. 그는 파티에 조금 늦었다. 이안 케네디. 캘리포니아의 가장 유명한 갤러리 소유자의 아들이었다. 그의 가문은 노블리스오블리주로 유명했고, 겸손한 애티튜드와 자선활동으로 유명했다. 금발의 머리카락, 짙은 쌍커풀과 꽤 귀여운 눈매. 끝이 완벽하게 올라간 입꼬리와는 대비되는 근육질의 어깨. 에이든이 날카롭게 그를 돌아보았다. “놔.” 이안은 단상 위의 브리를 바라본 채 낮게 말했다. 은근한 미소로 브리를 바라보면서. “기다려봐. 뭐하는 진 봐야 할 거 아니야.“ 브리는 마이크 앞에 섰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아까보다 차분했다. 브리는 로버트 선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거릿 여사께서 Cyndi Lauper의 〈Time After Time〉을 좋아하셨다고요.” 로버트 선생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브리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감히 이 자리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그 노래만큼은 진심으로 부르겠습니다.” 홀 안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브리는 현악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연주해주실 수 있을까요?” 첼로 연주자는 잠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옆의 피아니스트와 눈을 마주쳤다. 짧은 침묵. 이윽고 피아노가 조심스럽게 첫 음을 눌렀다. 익숙한 전주가 아주 느리게 흘러나왔다. 물결이 흐르듯 전주가 나왔다. 브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첫 소절을 불렀다. 화려
“눈치가 없는 거야, 머리가 나쁜 거야?” 잠시의 잡념을 깨우듯 에이든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이어졌다. “너 이러면 사교계에서 아웃이야. 알아?” 아웃. 삼진아웃도 아니고 아웃 아웃 자꾸 아웃거리는 게 귀에 피딱지가 않을 거 같았다. 하긴 아웃은 아웃이지. 사교계에서 아웃. 엘리즈 하이에서 아웃. 로버트 선생에게 밉보이고, 엔딩은 더 멀어진다. 그렇게 되면 미영은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잃는다. 그럼 인생에서도 아웃. “됐고, 오늘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한테 다 인사하고, 이름이랑 사업 부분 어떤 성격인지까지 정리해서 나한테 보고해.” ’....이기적인 놈, 아욱국으로 끓여버릴까보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브리는 잠시 풀이 죽은 투로 대답했다. 남친이라는 작자가 드레스 갈아입힐 생각은 안하고 자기 안위만 걱정하는 게, 여기도 박살난 건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울어나 볼까, 근데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뭔가를 해야했다. 어쩐다, 어쩐다. 그래도 산 세월이 있는데. 그런 브리에게 문득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브리는 잠시 뭔갈 생각하는가 싶더니 혼자 손뼉을 맞대 치며 뭔가를 결심한듯 보였다. 브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해결할게.” 에이든이 말을 멈췄다. “뭐?” “해결하면 되잖아. 이것아.“ “네가 뭘 어떻게 해결해. 지금 이 밤에 누가 드레스를 배달해줄 수도 없고... 너 어디 보냐?” 브리는 대답 대신 저택 안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파티장에 들어설 때 보았던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입구 옆에 마련된 작은 추모 전시. 마거릿 헤일이 생전에 쓰던 흰 장갑, 오래된 향수병, 손때 묻은 요리책, 그리고 유리 액자 안에 들어 있던 낡은 포스터. 분홍색과 하늘색이 섞인 화려한 포스터 속 여가수. Cyndi Lauper. 브리는 그걸 분명히 봤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어딘가 촌스럽고 예쁜 80년대 포스
“따라와.”“뭐?”브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에이든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브리는 그에게 이끌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뒤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저 둘 뭐야?”“에이든 화난 것 같은데.”“당연히 화나지. 저 꼴로 왔는데.”“야 듣겠다 쉿.”조용한 분위기 때문인지 주변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꼭 볼륨을 확대한 것마냥 크게 들렸다. 브리는 이를 악물었다.바네사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떡하냐. 브리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바네사는 더 빛나보였다. 완벽한 검은 드레스. 단정한 진주 귀걸이. 슬픔마저 연출한 듯한 얌전한 표정.웬걸 바네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같은 블랙 드레스를 일부러 보내서 입고 오면 망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거 보다 브리가 더 멍청했다. 추모파티에 레드 드레스라니. 터져나오려는 웃음 때문에 바네사는 이를 꽉 물면서 파티를 누볐다. 캘리포니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정계 인사들, 사업가들이 참석한 자리였기에 바네사는 가문의 사업인 스파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 동분 서주했다.“안녕하세요. 바네사라고 합니다.”“아 그 바네사 가문의 딸이군요. 실제로 보니 더 아름답네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선탠된 구맃빛 몸매하며 찰랑거리는 회갈빛 머리카락. LA에서 망할 일 없는 뷰티 비즈니스의 촉망받는 후계자. ‘같은 드레스를 입고 오면 그냥 좀 골려줄 생각이었는데, 너무 땡큐잖아?’시녀들은 그런 바네사를 더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의 퀸이야. 퀸. ** 에이든은 브리를 저택 옆 마당으로 끌고 나왔다.파티장의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 너머로 희미하게 밀려왔다. 마당에는 낮은 조명과 잘 다듬어진 관목들, 흰 장미가 놓인 분수가 있었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브리의 어깨 위로 서늘하게 내려앉았다.에이든은 손을 놓자마자 돌아섰다.“오늘 무슨 자리인지 몰랐어?”브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자면 길었다.그 많고 많은 파티 중에 추모파티라니. 인생이 이렇게 억까일
로버트 선생의 아내, 마거릿 헤일을 기리는 자리였다.‘……아 망했다‘원작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게 하는 것이 사실 함정이 아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지 않게 만드는 것.그게 함정이었다.멀리서 바네사가 보였다.그녀는 완벽한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단정한 진주 귀걸이와 검은 레이스 장갑. 슬픔을 품위 있게 감춘 듯한 표정까지.바네사는 브리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그 웃음은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이번엔 네가 졌어. 이 바보야. 그때 낮은 목소리가 옆에서 떨어졌다.“너 미쳤어?”브리가 고개를 돌렸다.엘리샤와 클로이였다.그들의 시선은 입은 새빨간 드레스에 꽂혀 있었다. 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주변의 눈치를 보는 찰나에 바네사가 다가왔다.“내가 보낸 드레스? 혹시 다른 주소로 배달되었을까?“바네사는 잠시 눈을 땡그랗게 굴려보이더니 인상을 푹 썼다. 안쓰러운 무엇을 보는듯 무척이나 걱정하는 투로 거의 울먹이다 싶이 말했다.”아니면.... 설마 오늘 추모파티인 걸... 잊은 거야?“ 브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로버트 선생은 학교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로버트에게 밉보이면 엔딩도 미뤄질 거고, 그럼 미영은 이 세계에서 나갈 수 없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주인공들은 서사 밖에 존재하질 않으니, 그 말은.. 미영의 인생이 영화 안에서 끝난다는 것이었다. 첫날부터 교복을 안 입은데다가 드레스코드까지, 완전 밉보이기 딱 좋았다. 브리는 가까스로 턱을 들었다.“알아.”주변에 서있는 엘리샤와 클로이의 얼굴이 더 차갑게 굳었다. “아는데 이 꼴로 왔다고?”엘리샤가 얼굴을 더 과장되게 움직이며 틱틱댔다.“꼴이라니. 이 드레스 비싸 보이는데.”클로이가 눈치없이 거들었다. 클로이와 엘리샤 그리고 브리가 중간에 서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갑자기 참석자들의 눈이 문 쪽으로 고정됐다.머리를 정중하게 넘기고선, 빳빳한 정장 블랙 수트 차림의 에이든이 긴 다리를 휘저으며 내부로 들어왔다. 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