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브리는 수업 전에 사물함 쪽 자판기에서 체리콕 하나를 뽑았다.빨간 캔을 손안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보니, 따는 순간 탄산이 퍽 하고 치솟았다.“아앗!”검붉은 거품이 손등과 교복 소매에 조금 튀었다.“으휴. 칠칠맞기는.”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넌 언제 또 잔소리하려고 나타났어? 괜찮으니까 가봐.”“이렇게 또 혼자 사고 치다가 넘어져서 커뮤니티에 올라오면 어쩌려고.”“그게 너랑 뭔 상관…”“넌 내 여친이잖아.”브리는 한순간 눈이 동그래졌다.그래. 여친 맞긴 하지.에이든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더프백 안을 뒤적이더니 큼지막한 타월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브리 쪽으로 손을 뻗어 교복에 튄 체리콕을 닦아주기 시작했다.브리는 약간 민망해져 얼른 타월을 빼앗았다.“됐어, 내가 할게.”자기 몸보다도 큰 타월로 소매를 문질러 닦던 브리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안 되겠다. 손 씻어야겠어.”“그건 이리 내.”에이든이 브리 손에 들린 빈 캔을 보고 말했다.“내가 다시 뽑아놓을게.”“나 손 씻을 때까지 기다리려고?”“그럼 뭐하게. 훈련, 수업 말곤 할 것도 없는데. 너 사고 치나 안 치나도 봐야 되고.”‘갈등의 주범이 너거든요.’브리는 속으로만 툴툴대며 화장실로 향했다.등 뒤로 자판기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차가운 물로 손끝을 씻어내며 브리는 문득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바네사가 뒤집어쓴 음료.컵 가장자리로 흐르던 검은 액체.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얌전했던 표면.브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아까 자기가 자판기에서 뽑은 체리콕은 따자마자 탄산이 넘쳐흘렀다. 조금만 흔들어도 거품이 솟았다. 그런데 헤일리가 들고 있던 컵은 뚜껑도 없었는데 이상할 만큼 잠잠했다. 바네사가 넘어지며 쏟아졌을 때도, 기세 좋게 튀는 탄산은 거의 없었다.“이상한데.”브리는 손을 털며 화장실을 나왔다.복도 벽에 기대 서 있던 에이든은 새 체리콕 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캔 표면
로버트는 교탁 위 원고 뭉치를 한 번 탁, 내려놓았다.떠들썩하던 강의실이 아주 조금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로버트가 입을 열면 듣는 척은 했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교실을 장악하는 사람이었다. 크게 소리치진 않는데, 괜히 더 거슬릴 만큼 정확한 타이밍에 분위기를 끊는.로버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학생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자. 이건 여러분들이 저번 시간에 썼던 에세이다.”그는 원고를 한 장씩 나눠주기 시작했다.브리는 자기 몫의 종이를 받아 들고 잠깐 숨을 멈췄다.그날은 정신이 반쯤 부서진 상태라 거의 생각나는 대로 써버렸으니까.로버트는 칠판에 크게 적었다.READ / RESPOND“오늘은 이 에세이를 짝과 바꿔 읽는 거다. 읽고 끝내는 게 아니라, 어떤 문장이 마음에 걸렸는지, 어떤 부분이 더 궁금한지, 혹은 어디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지 적어서 돌려줘.”학생들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아…”“싫어요…”“그냥 읽기만 하면 안 돼요?”로버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남의 글을 읽는 건 남의 머릿속을 잠깐 빌리는 일이야. 대충 하지 마.”브리는 괜히 어깨가 뻣뻣해졌다.그때 로버트가 다시 교탁을 두드렸다.“그리고.”이번엔 분위기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다음 교내 스피치 대회 등록 후보를 발표하겠다.”강의실 안 공기가 한순간 팽팽해졌다.누군가는 자세를 고쳐 앉았고, 누군가는 벌써 자기 이름이 불리길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엘리즈하이의 스피치 대회는 그냥 발표회가 아니었다. 추천서, 재단, 입시, 선생들 평가까지 다 이어지는 제법 중요한 행사였다.로버트는 명단을 내려다보며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했다.“줄리안 포터.”앞줄 어딘가에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에밀리 하트.”작게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케빈 모리스.”케빈이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 보였다.로버트는 종이를 한 장 넘겼다.“바네사.”강의실 한쪽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바네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인 것 같다.좋아한다는 말은 쉽다.보고 싶다는 말도, 마음이 간다는 말도,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볍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사랑은, 그런 말들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한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함께 기억하고, 그 사람이 웃는 얼굴 뒤에 숨긴 아주 작은 그늘까지 눈치채는 일.내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처음 이 동네로 이사 온 날, 나는 부모님을 도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낯선 집, 낯선 거리, 낯선 공기.프랑스에서 건너온 뒤 처음 맞는 미국의 오후는 이상할 만큼 밝았다. 창문 밖으로는 햇빛이 흰 벽에 부서지고 있었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자들 사이로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나는 상자 안에 담긴 물건들을 대충 꺼내고 있었다.그때였다.창문 밖으로 네가 지나갔다.너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머리칼이 빛났고, 햇빛은 네 어깨 위에 너무 자연스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꼭 세상이 오래전부터 너를 위해 빛나는 법을 연습해온 것처럼 보였다.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멈춘 게 아니라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아니, 정말 멈췄다.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부모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그날 오후의 온도가 어땠는지, 그런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은 아주 선명하다.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던 소리.네 치맛자락 끝에 스치던 바람.그때부터였다.너의 빛나는 그림자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건.너는 분명 빛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빛 아래에는 어딘가 슬퍼보였다.그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처음 배운 건, 우리 부모님을 통해서였다.두 사람은 가끔 별것 아닌 일로 다투기도 했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안았다.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사랑은 폭죽처럼 터지는 감정이 아니라, 매일 같
“어떻게 한 거야?” 바네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브리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울 것처럼 떨던 애가, 브리가 책을 찾으러 오래된 사물함 쪽으로 가자 따라붙었다. “제법 끈질긴 애였네.” 브리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바네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어떻게 했냐고.” “너야말로 어떻게 했는데?” 브리는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연기를 해?” “뭐?” 바네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다친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니?” “다쳤어?” 브리 시선이 바네사의 무릎으로 내려갔다. 깔끔한 밴드 아래로 아주 조금 붉은 자국이 비쳐 보였다. 순간 바네사 눈빛이 흔들렸다. 브리는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맞네. 그런 거네. 너 찔리지?” 그녀는 낮게 말했다. 바네사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 “왜 또 아까처럼 애들 불러 모아서 작당질 좀 해보지 그래? 나한테 와서 이러지 말고.” “그러기엔 네가 좀 여우 같아야지. 브리야.” “응?” 브리는 비웃음기 어린 얼굴로 눈썹을 들었다. “내가 여우 같다는 게 무슨 소리야?” “네가 에이든을 꼬신 것도. 그리고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내 발을 피한 것도.” “하.” 이번엔 브리 쪽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네 입으로 말했네.” “뭘.” “내가 네 발을 피했다고.” 브리는 한 걸음 다가갔다.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그래서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내가 쌩뚱맞은 걸 피한 건 아니었나 봐.” 바네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당장 뱉어낼 말을 생각하는듯 하더니 말인지 똥인지 모를 걸 마음대로 뱉어냈다. “고작 말실수 하나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마. 추하니까.” “그래?” 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하고.” 그리고 한
”그러니까 애 발을 걸긴 왜 걸어?“ 브리는 손에 가지런히 접어둔 교복을 땅에다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에이든은 진짜 발을 건 게 맞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브리가 교복을 처량히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나갔다. “하... 아까 못 들었어? 내가 안했다고.” 브리는 힘을 쥐어짜 말하는 듯했다. 꽤 지쳐있었다. 거기다 대고 에이든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그냥 얌전하게 학교 생활하면 된다고. 교복 갖다주랬지 누가 애 발걸랬어?” 브리는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한 번 으윽-하고 삼켰다. 근데 그게 잘 안되었다. 하. 엔딩봐야지. 브리야. 참자. 참자. 결국 브리는 참지 못했다. “내가 걔 발 걸 이유가 뭔데? 너 때문에? 그거야? 그래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걔가 너 약혼녀될 뻔 한 사람이어서?” 에이든은 쏘아붙이는 브리에 잠시 온 몸이 굳어 뒷걸음질 쳤다. “너가 그렇게 잘났어? 그래서 내가 너 미친듯이 좋아서, 발 걸었다고? 착각하지마. 아직도 내가 바본 줄 아나본데.....” 브리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아차차. 이렇게 말하면 에이든이 의심할 게 뻔했다. 브리가 회귀한 거라도 알면 계약은 당연히 무효고, 에이든이 까무러칠 게 뻔했다. ”어차피 내 말은 안 믿을테니까 니 알아서 생각해. 네가 말하는 계약 여친 규정도 어긴 적 없고, 난 그냥 날 보호한 거 뿐이야.“ “.....” 에이든은 꿀 먹은 병아리가 된 듯했다. 뭐지? 이 듣도 보도 못한 태도는? 이렇게 하면 에이든이 예상한 건 브리가 울고 불고 잘못했다고 빌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데이트를 가는 거였는데. 언제부터 브리가... 이렇게 똑부러지는 말을 할 수 있었지? ”흠흠“ 에이든은 약간 상기된 표정을 풀더니 브리에게서 교복을 건네 받았다. 약간 풀이 죽은 허스키처럼, 에이든은 교복을 건네 받았다. 시선은 옆으로 향하면서 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넌 안 따라와도 돼. 일단 수업 들어가.” 에이든의 말이 끝나자 마자 절묘하게 다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맞다. 이 기분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자가 되는 기분. 아무리 억울하다고 소리쳐봐도 누구도 듣지 않는 기분. 미영의 나날이 숱하게 내려앉은 먼지가 돌덩이가 되던 순간들. 모두가 자신의 탓을 하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와이프가 취향이 구려서, 며느리가 싹싹하지 못해서, 손이 빠르질 못해서, 야무지게 거절을 못해서. 남편 관리를 잘 못해서. 죄라면 살아온 것 뿐인데, 얼마나 큰 돌덩이를 지고 살아온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 “브리양, 수업에 왜 이렇게 늦었나.“ 로버트 교수는 안경을 치켜내리곤 브리를 타일렀다. ”죄송합니다.“ 브리는 꾸벅 인사하고 강의실 자리로 들어갔다. 종종걸음으로 자리에 가서 앉는 브리의 뒤통수에 로버트와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애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은 점점 퍼져 대강의실이 웅웅하고 울렸다. 모두들 브리와 바네사 얘길 하고 있었다. “야 이거 봤어?” 브리가 강의실 열을 지나치는 동안, 학생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켜고 바네사가 쉐이크를 덮어쓴 사진을 공유중이었다. “이게 글쎄, 브리아나가 발을 걸었다던데?” “정말이야? 브리아나 보기보다 용감한 애였네~” “야야 온다. 온다. 쉿.” 브리는 애써 그런 광경을 뿌리치려 애썼다. 일어난 일만 해도 버거웠으니까. 그런 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강의실이 학생들이 떠드는 소음에 더 웅성거리다 울리기까지 했다. 로버트가 미간을 잔뜩 찌뿌리더니 원목 교탁을 세번 탁탁탁하고 크게 쳤다. ”어험! 다들 조용!“ 그리고서 로버트는 칠판에 분필을 가져갔다. 점심 시간에 생긴 일 때문에 거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져있었다. 브리는 옆 빈 의자에 에이든의 교복을 가지런히 놓았다. ‘아 맞다. 이거. 까먹고 전해주지도 못했네.’ 발을 걸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