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엘리즈 하이

Author: 차노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01 16:46:36

슈웅, 하고 검게 썬팅된 차 문이 위로 열렸다.

캘리포니아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브리는 본능적으로 눈이 부셔 와 눈을 가늘게 떴다.

“가실까요.”

아까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사람 속을 박박 긁던 에이든은, 문이 열리자마자 세상 부드러운 말투로 팔을 내밀었다. 기가 차지도 않았다.

브리는 거절하려다가, 결국 마지못해 그의 팔에 손을 걸었다.

그 순간 에이든이 뭔가 잊은 게 있다는 듯 멈춰 섰다.

손에 들고 있던 자켓을 휙 뒷좌석에 던져 넣고, 삐릭, 하고 차를 잠갔다.

그제야 브리는 놓친 걸 알아차렸다.

에이든은 교복 차림이었다.

“오… 오늘 교복 입는 날이었어?”

브리는 제 차림을 내려다봤다.

후드 집업에 몸에 달라붙지 않는 트레이닝 팬츠, 운동화. 옷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입고 나온 결과였다.

엘리즈 하이는 교복의 본질인 평등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학교 같았다. 이들에게 교복은 학생을 같게 만드는 옷이 아니라, 엘리즈 하이 학생이라는 자격을 과시하는 수단에 가까웠다.

에이든은 몸매가 드러나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브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정신머리 하고는.”

브리는 입술을 비죽였다.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겠지. 개학 첫날이니까, 기껏해야 선도부 잔소리 정도나 듣고 말 것이다.

브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엘리즈 하이의 교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둥근 아치형의 끝이 보이지 않는 교문을 지나자, 엘리즈 하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꼭 성처럼 지어진 건물, 정교하게 다듬어진 창문과 벽면, 넓게 펼쳐진 잔디와 중앙 분수.

학교라기보다 영화 세트장 같았다. 그런데도 잘 관리된 나무와 분수 덕에 특유의 온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났다.

브리는 다시 한번 제 차림을 내려다봤다.

“하, 이 전생의 습관이 무섭다니까.”

작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황미영으로 살 때는 편한 게 최고였다.

움직이기 편하고, 일하기 편하고, 허리 덜 아프고, 빨래 쉬운 옷. 문제는 지금 이 몸이 황미영이 아니라 브리아나 로즈라는 거였다.

정문 근처에 있던 학생들 시선이 하나둘, 곧 우르르 이쪽으로 몰렸다.

“브리다.”

“진짜 예쁘다…”

“오늘 에이든 차 타고 왔어?”

“쟤 교복 안 입었는데?”

“헐, 미친. 진짜네? 어쩌려고 저러냐.”

브리는 수군거림을 애써 무시했다.

로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살짝 긴장했다.

오겠지.

분명히 오겠지.

원작에서라면 이쯤, 그녀가 등장했어야 했다.

“와~ 브리, 오랜만이야.”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브리가 고개를 들자, 여자애 하나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윤기 나는 갈색 머리, 단정하게 손질된 교복, 지나치게 완벽한 미소. 화려하지만 정돈된 인상.

바네사.

원작에선 분명 여왕벌이자 악녀였다. 브리아나를 제일 집요하게 긁고, 에이든 주변을 맴돌고, 끝까지 사람 속을 거슬리게 하던 타입.

브리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온 바네사는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개학날인데 소감이 어때?”

목소리도 밝았다.

억지로 꾸민 다정함이라기보다, 진짜로 반가워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티가 줄줄 흘렀다.

브리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어?’

바네사는 브리의 차림을 위아래로 한번 훑고는 눈을 반짝였다.

“와, 이거 예쁘다. 어디서 샀어?”

브리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막상 실제로 마주한 바네사는 생각보다 상냥했고, 적어도 첫인상만큼은 꽤 괜찮아 보였다. 딱히 노골적인 악의라고는 찾을 수 없을 만큼, 꽤 귀엽기까지 했다.

‘뭐지. 생각보다 착한데?’

“아… 그냥 옷장에서 아무거나 집어 입고 나왔어.”

그러자 바네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은 약간 어색하긴 했다.

“개학 첫날이니까, 너무 바빴나 보다. 진짜 브리답다.”

바네사는 브리를 잘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십수 년을 산 황미영은, 한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브리는 바네사를 보며 설명하기 어려운 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에이든이 브리 옆으로 다가와 섰다.

“가자.”

바네사가 웃는 얼굴로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 웬일로 브리랑 같이 학교를 왔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 실루엣은 정말 잘 어울렸다.

아무런 우여곡절도 없이 살아온, 너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서 오히려 권태만 묻어나는 부잣집 아이들 같았다.

브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서둘러 대답했다.

“어… 좀 그렇게 됐어.”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넘겼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브리 저년이 에이든 차 얻어 타려고 별 난리를 쳤겠지.

바네사는 끓어오르는 생각을 하얀 이를 드러낸 미소 뒤로 눌러 담았다.

오전 수업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일교시는 문학 수업이었다. 중년의 꽤 멋진 신사가 들어와 수업을 했는데, 브리는 이름을 제대로 들을 정신이 없었다.

누가 자기를 힐끗거리는지, 누가 바네사와 붙어 다니는지, 누가 에이든을 보는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드문드문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츄리닝 차림이었던 탓에, 선생의 따가운 눈총까지 받아야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엘리즈 하이 식당은 식당이라기보다 호텔 레스토랑 같았다.

높은 천장 아래, 유리벽 너머로 야자수가 흔들리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대리석 카운터 위엔 병아리콩 샐러드, 훈제 연어, 치킨 시저 샐러드, 컵과일, 요거트 파르페, 아보카도 토스트, 파스타 샐러드가 모두 값비싼 그릇에 담겨 있었다.

브리는 쟁반을 든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 이런 것도 먹고 사는 구나“

“빨리 안 가져가고 뭐 해?”

엘리샤였다.

브리아나, 엘리샤, 클로이는 퀸카 삼인방으로, 바네사 무리와는 묘하게 라이벌 관계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을 보니 꽤 반가웠다.

마네킹 같은 몸매, 좋은 향수 냄새, 아무렇지도 않게 빛나는 분위기. 원작에서 정이 가던 캐릭터들이었다.

브리는 대충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집어 그들과 마주 앉았다.

누구와 점심을 먹는지는, 학교 안 권력을 보여주는 창 같은 것이었다.

클로이가 껌을 소리 내서 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점심시간 되니까 진짜 개학한 것 같네.”

엘리샤가 바로 맞장구를 쳤다.

“야, 아니 오스틴 봤어? 걔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줬다니까? 근데 차에서 내리면서 뭐라는 줄 알아?”

“왜왜? 뭐랬는데?”

클로이는 벌써 웃겨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엘리샤가 목소리를 가늘게 흉내 냈다.

“마미~ 나 식단 도시락을 두고 와써~”

클로이가 손뼉까지 치며 터졌다.

“꺄하하하! 오스틴 걔 덩치는 산만해서 왜 그런대?”

“아니 그니까! 엘리즈 하이의 마마보이!”

브리는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흐름에 맞춰 같이 웃었다.

한창 웃고 떠드는데, 식당 한가운데서 챙챙 하고 스푼 두 개를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다들 잘 들어.”

식당을 꽉 채우던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멎었다.

브리는 설마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이든이었다.

설마.

에이든은 포크를 하나 들어 올리더니, 브리아나 로즈가 앉아 있는 쪽을 가리켰다.

포크 끝과 브리아나의 눈이 정확히 맞닿았다.

브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 오늘부터 내 여친. 브리아나 로즈.”

정말로 식당 전체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브리는 눈을 깜빡였다.

미친놈인가?

웅성거림이 뒤늦게 터졌다.

“뭐야?”

“진짜?”

“사귀는 거였어?”

“바네사는?”

브리는 저 멀리 스무디 바 앞에 서 있는 바네사를 봤다.

방금 전까지 완벽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아사이볼이 허공에서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뭐, 라, 고?

홱 서슬퍼런 시선이 브리에게 꽂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내가 말할게

    박수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바네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주 자연스럽게 프로그램 북을 접어 무릎 위에 올리고, 허리를 곧게 편 채 객석 사이를 빠져나왔다. 누가 봐도 단정하고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다만 걸음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힐 끝이 바닥을 찍는 소리도 유난히 날카로웠다.강당 바깥 복도는 무대 안보다 훨씬 어두웠다. 다음 후보 발표가 이어지고 있었는지, 안쪽에선 희미하게 마이크 울림이 새어 나왔다. 바네사는 운영 부스 뒤편 좁은 복도로 몸을 틀었다.올리버는 이미 거기 나와 있었다.헤드셋을 목에 건 채, 서류철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 서 있었다. 얼굴은 벌써 하얗게 질려 있었고, 안경 너머 눈빛은 바닥만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실수한 사람의 얼굴이었다.바네사는 그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아주 낮게 물었다.“뭐 한 거야?”올리버 어깨가 움찔했다.“바, 바네사…”“내가 지금 이름 부르라고 했어?”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해서 더 무서웠다.올리버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미안해. 나… 나는…”“미안?”바네사가 짧게 웃었다.그 웃음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넌 그게 지금 미안하다고 끝날 일로 보여?”올리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바네사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에게선 달콤한 향수가 났고,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아니었다.“내가 뭐라고 했지?”“……”“실수처럼만 보이면 된다고 했잖아.”올리버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근데 넌 그것도 못 했어.”“나… 못 하겠더라.”올리버가 겨우 말했다.“그냥… 화면에 뜨는 순간… 너무…”“너무?”바네사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불쌍해 보였어?”올리버 얼굴이 굳었다.바네사는 그 반응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올리버.”그녀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게 오히려 더 잔인했다.“착각하지 마.”바네사는 손끝으로 올리버 서류철 끝을 톡 건드렸다.“너 지금 나한테 실수한 거야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스피치 대회2

    첫 번째 후보가 무대에 올랐다. 박수 소리가 잔잔하게 번졌다. 교장은 앞줄에서 프로그램 북을 정리했고, 재단 관계자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 후보자 이름 옆에 작은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학생은 목소리를 한 번 떨었지만, 곧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브리는 무대 계단 옆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숨을 골랐다. 원고 첫 장은 이미 손에 땀이 배어 조금 눅눅해져 있었다. 종이 끝이 손가락에 달라붙는 감각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강당 안은 시원했는데, 브리 손바닥만 자꾸 뜨거워졌다. 두 번째 후보, 세 번째 후보. 줄리안은 예상보다 잘했고, 에밀리는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케빈은 중간에 한 번 원고를 놓쳤지만 웃으며 넘겼다. 학생들은 그때마다 예의 바르게 박수쳤다. 브리는 무대 뒤 검은 커튼 틈으로 객석을 힐끗 봤다. 바네사는 후보석 끝에 앉아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손끝으로 프로그램 북 귀퉁이를 넘기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였다. 너무 여유로워서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운영 부스. 유리창 너머로 올리버가 보였다.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등을 잔뜩 굽힌 채 양손을 키보드 가까이에 두고,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는 사람처럼 멈춰 있었다. 브리는 미간을 좁혔다. ‘왜 저래.’ 그 순간, 객석 쪽에서 누군가 낮게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브리는 시선을 돌렸다. 오스틴이었다. 그는 에이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프로그램 북보다 후보석 쪽을 더 열심히 보고 있었다. 보기 좋은 정장 대신 교복 셔츠 위에 재킷만 대충 걸친 차림이라 혼자 약간 둥글둥글한 불량 모범생 같았다. 볼살이 웃을 때마다 먼저 들썩였고, 표정은 사람을 놀리기 직전인 얼굴이었다. 오스틴은 옆자리 에이든에게 아주 작게 몸을 기울였다. “야.” 에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 지금 브리아나 차례 기다리는 거 티난다.” “닥쳐.” “아니, 진짜로.”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스피치 대회1

    다음 날, 대회 당일. 학교 강당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무대 위엔 푸른색 커튼이 반듯하게 걷혀 있었고, 천장에는 스피치 대회 현수막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계단식 객석 아래로는 후보자 이름이 적힌 좌석 표지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재단 관계자들이 앉을 앞줄엔 작은 생수병과 프로그램 북까지 가지런히 준비돼 있었다. 브리는 강당 입구 앞에 서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손엔 원고가 들려 있었지만, 그 종이는 아침부터 한 번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어젯밤 분명 문장들이 잘 흘렀는데, 막상 무대가 눈앞에 오자 단어들은 전부 낯설어진 것 같았다. 하얀 종이 위 활자들이 남의 얘기처럼 보여서 더 이상했다. “브리.” 뒤에서 로버트가 불렀다. 브리는 퍼뜩 돌아봤다. 로버트는 늘 그렇듯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안경 너머 눈빛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긴장되나?” 브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조금 같지는 않군.” 그 말에 브리는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입이 마르도록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로버트는 브리 손에 들린 원고를 한 번 보고, 다시 얼굴을 봤다. “무대에 올라가면 다 잊어버릴 수도 있어. 순서도, 문장도, 준비한 표정도.” 브리는 침을 삼켰다. “그럼 어쩌죠?” “그럴 땐 기억하게.” 로버트가 낮게 말했다. “왜 이 글을 쓰고 싶었는지.” 그 한마디에 브리 손끝이 아주 조금 풀렸다. 로버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른 후보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한 위로도, 노골적인 격려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더 힘이 됐다. 브리는 원고를 가슴 쪽으로 붙여 안았다. 무대 아래 후보자 대기석엔 이미 몇몇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줄리안은 넥타이를 세 번째 고쳐 매는 중이었고, 에밀리는 입 모양으로 원고를 외우고 있었다. 케빈은 겉으론 여유로운 척했지만, 무릎을 떠는 걸 보면 긴장한 게 분명했다.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펜이 멈추질 않았다

    차가 멈춘 곳은 학교 근처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일식집 앞이었다.문이 열리자 안에서 우렁찬 구호가 터져 나왔다.“이랏샤이마세!”브리는 그대로 멈칫했다.안쪽 바 테이블 너머로 셰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열댓 명쯤 되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조명은 은은했고, 실내엔 진한 육수 냄새가 감돌았다.브리는 에이든을 돌아봤다.“야.”“왜.”“이건 컵라면이 아니잖아.”“비슷해.”“어디가.”에이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면이잖아.”브리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직원이 정중하게 둘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좁고 긴 바 자리였다. 셰프들이 바로 앞에서 면을 삶고, 육수를 따르고, 토핑을 올리는 게 다 보였다.브리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렇게 좁아터진 의자 말고 한강공원에서 라면이나 땡기고 싶다고.’하지만 막상 첫 그릇이 나오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얇은 면부터 두꺼운 면, 맑은 육수부터 진한 미소 베이스까지, 조그맣게 나뉜 여러 종류의 라면이 차례대로 나왔다. 진짜로, 말도 안 되는 라멘 오마카세였다.브리는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렸다.“이건 또 뭐야…”“먹어봐.”브리는 조심스럽게 한입 먹었다.그리고 잠깐 눈을 크게 떴다.“…맛있네.”에이든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그러니까.”브리는 그다음 그릇도 먹고, 그다음 것도 먹었다. 마지막엔 후식처럼 작은 말차라떼까지 나왔다. 위에 얇은 꽃잎 모양 장식이 얹혀 있었다.브리는 컵을 내려놓고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고마운데.”“응.”“난 다음엔 그냥 분식집 가서 라면 먹고 싶어.”에이든이 그대로 멈췄다.브리는 턱을 괸 채 솔직하게 덧붙였다.“이렇게 좁은 의자 말고, 한강공원 같은 데서. 김밥이랑 같이.”에이든은 몇 초쯤 브리를 빤히 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야야. 됐어. 또 뭘 해.”브리가 손을 내밀었지만 에이든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기 코리아타운 분식집, 내일 저녁 예약 가능한 데 전부 알아봐.”브리는 두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에이든과 오마카세

    브리는 밤새 스피치 원고를 붙들고 있었다. 처음엔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노트북 화면 위에 커서만 깜빡이기 시작하자, 말들은 이상하게 전부 목구멍 근처에서 걸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새벽이 오자, 흰 창틀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방 안 바닥을 서서히 밀어냈다. 브리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그 희미한 빛을 큰 숨으로 빨아들였다. ‘이런 새벽이면 먼저 밥부터 차렸지.’ 애들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시키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 치우고. 집 안 청소하고. 황미영으로 살던 시간의 새벽은 늘 누군가의 배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자기 배가 고픈지, 피곤한지, 졸린지 같은 건 맨 끝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아무도 깨우지 않는 새벽은 아직도 조금 낯설었다.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브리님?” 샐리였다. 브리는 노트북을 반쯤 덮고 문 쪽을 봤다. 문이 열리고, 샐리가 브런치가 차려진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버터 향이 은근하게 퍼졌다. 갓 구운 크루아상, 잘린 과일, 반숙 계란, 따뜻한 차.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브리는 은쟁반을 내려놓는 샐리를 보다가 문득 오래전부터 걸리던 질문을 꺼냈다. “샐리.” “네, 브리님.” “샐리한테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샐리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건 눈 깜빡일 사이의 일이었다. 샐리는 곧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주 멋진 분이셨죠. 꼭 요즘의 브리님을 보는 것 같아요.” 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나요?” “네. 경쾌하면서도, 할 일은 척척 해내고… 현명하고 멋진 분이셨어요.” 브리는 괜히 어깨가 아주 조금 으쓱해졌다. “그 일만 없었다면…” 샐리의 말끝이 낮게 꺼졌다. 브리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 일?” 샐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그 말은 공손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 온도가 차갑게 느껴졌다. “이만 내려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아침 되시길.” 문이 닫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파자마 파티1

    브리의 방엔 희한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샐리가 올려준 미니 컵케이크, 포도, 젤리, 그리고 한 번 따면 절대 한 봉지로 안 끝나는 짭짤한 과자들까지. 침대 위엔 폭신한 담요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고, 세 사람은 각자 파스텔톤 파자마 차림으로 엉망진창이 된 채 그 위를 뒹굴고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브리만 뒹굴고 있었다.“아 진짜, 덥다.”브리는 침대 위에서 배를 깔고 누운 채 베개를 끌어안았다. 금발이 사방으로 흩어져 얼굴을 반쯤 덮었다.클로이는 네일 파일로 손톱을 다듬다가 브리를 힐끗 봤다.“네가 아까 담요 세 개나 끌어안고 있었잖아.”“그건 감성이지.”“지금은?”“지금은 더위.”앨리샤가 그 말을 듣고 빵 터졌다.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는데, 웃다가 손에 들고 있던 젤리를 떨어뜨렸다.그 순간, 침대 아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하얀 치와와 한 마리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퓨리!”브리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퓨리는 젤리를 물진 못하고, 대신 그 앞에 떨어진 리본끈을 덥석 물었다. 그러곤 마치 전리품이라도 얻은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클로이가 질색했다.“쟤 또 시작했다.”“안 돼, 그거 먹는 거 아니야!”브리가 손을 뻗자 퓨리는 즉시 크르릉거리며 침대 아래로 후퇴했다. 작은 몸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납고 진지한 으르렁거림이었다.앨리샤가 배를 잡고 웃었다.“진짜 신기하다. 얘는 왜 너한테만 이래?”브리는 정색했다.“몰라. 나도 너무 억울해.”“아니, 근데 예전보다 좀 나아지긴 했어.”클로이가 턱을 괴고 말했다.“전엔 진짜 널 물어뜯으려고 했잖아.”“맞아.”브리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요즘은… 음.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닌 것 같아.”그 말에 셋이 동시에 웃었다.그때 퓨리가 다시 침대 밑에서 얼굴만 쏙 내밀었다. 까만 눈이 반짝였다. 브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퓨리는 잠깐 망설이더니 아주 짧게 코끝을 킁킁대고는 다시 쏙 숨어버렸다.브리는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무릎

    “너 설마.” 말리부 언덕 위 붉은 신호등 불빛이 에이든의 얼굴을 비스듬히 물들였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반듯한 콧대,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당연시된 실루엣. “우리 계약한 거 까먹은 거 아니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걸 까먹을 수 있나.” 에이든은 무시하듯 피식 웃었다. 그는 브리가 진짜로 기억 못한다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하는 것 같았다. 브리는 휘황찬란한 헐리우드 사인에 뺏긴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계약연애.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이틴 퀸카 여주와 프레스티지 사립고 킹카 남주의 뻔한 그림. 원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다 잊은 거 아니지?

    브리아나는 문간에 선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빳빳한 셔츠 깃, 대충 서 있어도 뭔가 압도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탄탄한 어깨는 교복의 각을 더 세웠다. 주머니에 한 손을 찌르고 브리를 노려보는 남자. 좋게 말하면 영화배우 같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금수저 같았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하며, 브리를 향해 싸늘하게 식은 표정. 아 이 남자는.... 황미영은 그 얼굴을 알아봤다. 저 얼굴. 설거지 끝나고, 시어머니 자는 틈에 몰래 이어폰 꽂고 보던 하이틴 무비. 하이틴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블링블링한 전쟁터

    문이 닫히자 방 안엔 다시 정적이 흘렀다. 황미영은—아니, 브리아나는 한참 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금발. 파란 눈. 작고 예쁜 얼굴. 남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딱 그런 얼굴. “…미친.”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나서야 현실감이 조금 따라왔다. 살아 있다기엔 이상했고, 죽었다기엔 너무 선명했다. 이불 감촉도, 카펫의 폭신함도, 향수 냄새도, 창문 밖으로 번지는 햇살도 전부 지나치게 또렷했다. 브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호텔처럼 길고 조용했다. 벽마다 커다란 그림이

  •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브리?

    차가운 바닥에 얼굴이 닿기 직전까지도 황미영은 믿고 있었다. 사람 인생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는 있어도, 어디선가는 한 번쯤 멈춰 줄 거라고. 누가 어깨라도 붙잡아 주든가, 아니면 적어도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 생각 하나쯤은 정리하게 해주든가. 하지만 세상은 그런 친절이 없었다. 빛이 번졌다. 차가운 공기 대신, 이상할 만큼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세제 냄새도, 고기 연기 냄새도, 길바닥 먼지 냄새도 아니었다. 어디 비싼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나 맡을 것 같은 향. 황미영은 눈을 뜨려 했다. 눈꺼풀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