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 Kapitel 1 – Kapitel 10

15 Kapitel

모히토에서 몰디브나 한 잔

열심히 살면 언젠가 보답받는다고들 했다. 황미영은 마흔다섯이 넘도록 그 말을 믿어 보려 했고, 하늘은 꼭 그런 날을 골라 그 믿음을 짓밟았다. 황미영은 마흔다섯을 넘기고도 하루를 꽉꽉 채워 일했다. 새벽엔 마트 진열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엔 사무실 경리 일을 보고, 퇴근하면 부업으로 전단을 접었다. 그래도 모자라면 남의 식당 설거지까지 했다. 손끝은 늘 불어 있었고, 손등엔 세제에 데인 자국이 성한 날이 없었다. 그날도 저녁 피크가 막 빠진 식당 주방에서 미영은 산처럼 쌓인 그릇을 닦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고, 기름 낀 접시는 손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허리는 쑤셨고, 발바닥은 퉁퉁 부어 있었다. ‘에고, 내 팔자야.’ 그래도 일은 해야 했다. 남편 박진수가 몇 년 전부터 사업이니 주식이니 떠들며 돈을 끌어다 썼고, 결과는 늘 같았다. 말아먹은 돈은 미영이 메웠다. 처음엔 잠깐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은 몇 년이 되었고, 미영의 인생은 어느새 남편의 실패를 메꾸는 데 다 갈려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천성이 낙천적인 건지. 해외에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다. “가서 영어로 쇼핑도 하고, 멋진 사람들 구경도 하고. 모히토에서 몰디브나 한 잔? 그거!!” 황미영은 혼자 킥킥대며 웃었다. 언젠가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제 돈으로 비행기 표를 끊고, 이어폰을 끼고 공항 면세점을 돌아다니다가, 괜히 영어로 “Excuse me” 한 번 해 보는 날. 자격지심 덩어리인 남편 앞에서 기죽지 않고 또박또박 영어 한마디 뱉어 보는 날. 그것도 잠시였다. “뭐하냐 혼자서 킥킥 대고. 뭐가 그렇게 재밌어. 우리는 너 때문에 매일이 고생인데.” 사장이었다. “아이구, 네네. 금방 치울게요.” 미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집에 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만 딸깍딸깍 눌러대다가 미영만 보면 입을 열었다. “집 안 꼴이 이게 뭐니?” “남편 아침상은 이딴 식으로 차릴 거야?”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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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들어올 생각하지마라

“그래서. 내 돈으로 니들 결혼자금 하시겠다고?” 방 안 공기가 딱 멎었다. 시어머니는 생선살을 발라 주던 젓가락을 든 채 굳었고, 박진수는 입을 벌린 채 황미영을 노려보았다. 그 옆에 앉은 젊은 여자는 놀란 척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황미영은 식당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젖은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 고무장갑 자국이 손목에 선명했고, 설거지 물이 바짓단을 타고 축축하게 번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불판 닦고 접시 나르던 사람의 꼴 그대로였다. “왜요? 계속하지 그러셨어요. 아주 분위기 좋아 보이던데.” 시어머니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얘가 미쳤나. 어른들 얘기하는 데를 어딜—” “어른들이요?” 미영이 피식 웃었다. “남의 남편 끼고 밥 먹으면서 며느리 내쫓을 궁리하는 게 어른스러운 일이면, 내가 오늘 배운 셈 치죠.” 박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미영. 적당히 해.” “싫은데.” “여기 손님들 있잖아! 밥 먹으러 왔으니까 우리도 손님이지! 넌 가서 네 할 일이나 하지!“ “창피해?” 미영은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섰다. “주식 말아먹고 사업 말아먹고, 마누라는 설거지 시켜 놓고, 지는 애인 데리고 와서 갈비 뜯는 건 안 창피하고?” 젊은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 갑자기 박진수 팔을 꽉 붙잡더니 병든 소리를 냈다. “오빠! 나 저 여자 무서워~흥흥“황미영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비웃듯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피해자 얼굴로 바뀌는 걸 눈앞에서 봤다. 너무 뻔뻔해서 오히려 말이 안 나왔다. 박진수는 기다렸다는 듯 여자를 감싸 안았다. “아구 그래쩌요. 우리 애기, 괜챠냐. 괜찮아.” 그 한마디에 시어머니 얼굴엔 안도와 만족이 동시에 스쳤다. 꼭 이 광경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원래부터 그래야 했다는 듯. 황미영은 멍하니 그 꼴을 쳐다봤다. 우리 애기라. 허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박진수가 고개를 들어 황미영을 노려봤다. “야. 황미영. 오늘은 들어올 생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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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

차가운 바닥에 얼굴이 닿기 직전까지도 황미영은 믿고 있었다. 사람 인생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는 있어도, 어디선가는 한 번쯤 멈춰 줄 거라고. 누가 어깨라도 붙잡아 주든가, 아니면 적어도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 생각 하나쯤은 정리하게 해주든가. 하지만 세상은 그런 친절이 없었다. 빛이 번졌다. 차가운 공기 대신, 이상할 만큼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세제 냄새도, 고기 연기 냄새도, 길바닥 먼지 냄새도 아니었다. 어디 비싼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나 맡을 것 같은 향. 황미영은 눈을 뜨려 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겨우 뜬 시야엔 천장이 보였다. 샹들리에였다. “……어?” 목소리가 이상했다. 쉰 목소리도 아니고, 지친 중년 여자 목소리도 아니었다. 맑고, 가볍고, 너무 어렸다. 황미영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자 하얀 이불이 가슴께에서 부드럽게 들썩였다. 가슴께. 뭔가 이상했다. 황미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주름도 없고, 세제에 튼 흔적도 없었다. 손톱은 반짝거렸고,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이게…” 황미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드러난 팔과 다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고 매끈했다.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처럼 가늘면서도, 또 이상하게 생기 있어 보였다. 침대 옆엔 거울이 있었다. 황미영은 숨도 못 쉬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엔 금발의 여자애가 서 있었다. 햇빛을 녹여 얹은 것 같은 머리칼,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 작고 도톰한 입술. 심지어 잠에서 막 깬 얼굴조차 예뻤다. 예쁜 정도가 아니라, 남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얼굴. 황미영은 거울을 짚었다. “……미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분명 한국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옆에 놓인 향수병이며 책등이며 화장품 라벨이 전부 한눈에 읽혔다. 영어였다. Rose Mist. Hydrating 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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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블링한 전쟁터

문이 닫히자 방 안엔 다시 정적이 흘렀다. 황미영은—아니, 브리아나는 한참 동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금발. 파란 눈. 작고 예쁜 얼굴. 남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딱 그런 얼굴. “…미친.”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나서야 현실감이 조금 따라왔다. 살아 있다기엔 이상했고, 죽었다기엔 너무 선명했다. 이불 감촉도, 카펫의 폭신함도, 향수 냄새도, 창문 밖으로 번지는 햇살도 전부 지나치게 또렷했다. 브리아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호텔처럼 길고 조용했다. 벽마다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고, 바닥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소리가 안 날 것 같은 두툼한 러그가 깔려 있었다. 집이라기보다 미술관 같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돈으로 바른 성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렇게 반짝이는데도, 집 안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싸늘했다. 아래층 어딘가에서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스쳤다. 누가 소리치는 것도 아닌데 등골이 쭈뼛해졌다. 브리아나는 난간 쪽으로 한 발 다가갔다가 멈칫했다. 커다란 거실 한가운데, 햇빛은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고 샹들리에는 아침부터 번쩍였다. 은쟁반 위엔 갓 내려놓은 커피포트가 김을 올리고 있었고, 잘 정리된 소파와 꽃꽂이는 잡지 화보 같았다. 그런데 그 풍경이 어쩐지 무서웠다. 너무 예쁜데, 너무 정돈되어 있는데, 사람이 사는 냄새는 하나도 없달까. 블링블링한 전쟁터. 황미영은 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한바탕 싸운 뒤 흔적만 전부 닦아낸 집. 유리잔은 새것으로 갈아놓고, 목소리만 벽 틈에 남겨둔 집. “브리 아가씨!” 등 뒤에서 샐리가 불렀다. 브리아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이쪽이에요.” 샐리는 익숙하다는 듯 드레스룸 문을 열었다. 그리고 브리아나는 또 한 번 숨이 멎을 뻔했다. 옷장이 아니라 거의 고급 편집숍이었다. 트위드 재킷, 실크 블라우스, 미디 스커트, 반짝이는 힐, 로고가 박힌 가방들까지 색깔별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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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잊은 거 아니지?

브리아나는 문간에 선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빳빳한 셔츠 깃, 대충 서 있어도 뭔가 압도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좋게 말하면 영화배우 같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금수저 같았다. 그리고 순간, 황미영은 그 얼굴을 알아봤다. 저 얼굴. 설거지 끝나고, 시어머니 자는 틈에 몰래 이어폰 꽂고 보던 하이틴 무비. 하이틴 여주 나오는 로맨스 드라마. 거기 꼭 한 명씩 나오던 얼굴이었다. 명문가 집안 아들. 성격은 더럽고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데, 이상하게 여주한테만 집착하는 남자 주인공. ‘하. ㅈ됐다.’ 생각해보니 자기 얼굴도 그랬다. 지나치게 예쁘고, 지나치게 반짝이고, 남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얼굴. 딱 미영이 밤마다 몰래 보던 하이틴 여주였다. ”어쩐지 낯이 익다했더니.“ 이야기가 번개처럼 브리의 뇌리를 스쳤다. 그럼 여기는 있는 집 자식들만 산다는 프레스티지 타운. 그리고 나는 여주다. …아니, 잠깐. 브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분명 본 적 있는 이야기 같은데, 늘 그렇듯 본 지 좀 돼서 결말만 어렴풋했다. 누가 누구랑 이어졌더라. 금발 여주가 끝에 가서 울었나, 웃었나. 꼭 이런 건 내 일이 되면 기억이 안 난다니까. ‘아오. 남의 연애 구경은 재밌었지. 하 내가 그 여주가 될 줄이야.’ “안녕.” 브리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히 밀리기 싫었다. 먼저 인사하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주가 먼저 기세를 잡으면, 여주는 꼭 끌려다니게 되어 있으니까. 에이든 입꼬리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 “오늘은 꽤 친절하네?“ 그 말이 어째 아까 아버지가 한 말과 비슷해서 브리아나는 더 불안해졌다. ‘뭐야. 내가 원래 얼마나 개차반이었길래 다들 첫마디가 저거야.’ 알렉산더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늦기 전에 데려가.” “네” 에이든은 당연한듯 턱짓했다. “가자, 브리.” 가자고? 누가 들으면 어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줄. 브리아나는 순간 머뭇했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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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너 설마.” 말리부 언덕 위 붉은 신호등 불빛이 에이든의 얼굴을 비스듬히 물들였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 반듯한 콧대,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당연시된 실루엣. “우리 계약한 거 까먹은 거 아니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걸 까먹을 수 있나.” 에이든은 무시하듯 피식 웃었다. 그는 브리가 진짜로 기억 못한다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하는 것 같았다. 브리는 헐리우드 사인을 보던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계약연애.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이틴 퀸카 여주와 프레스티지 사립고 킹카 남주의 뻔한 그림. 원작에서도 그 설정 정도는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늘 그렇듯, 조각들만 기억난다는 거였다. 열혈 시청자라면 몰라도. 브리는 어떻게 하면 계약 내용을 알 수 있을까 잠깐 고심했다. 에이든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굉장히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차 안에는 비싼 가죽 냄새와 에이든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브리는 괜히 창밖만 보는 척을 했다. 야자수, 언덕,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이 요망한 남주에게서 내용을 확인하고 싶어 브리는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안달하는 찰나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도로의 신호등 불빛이 빨간불이 되었다. ‘자, 하나아 두울 셋.’ 에이든이 고개를 돌려 말을 걸려는 찰나 브리는 있는 힘껏 에이든에게로 달려들었다. “흐읍!!!!” 에이든의 입술에 브리의 오동통하고 조그마한 입술이 겹쳐들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이든은 운전대를 잡고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브리의 코끝에 오랫동안 맡아본 적 없던 남자 향수 냄새가 훅 끼쳐들었다. 뜨뜨미지근한 입술을 감각이 브리의 온 몸에 베여드는듯했다. ’이쯤이면 됐어‘ 브리는 그리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듯이 앉았다. “아이씨 이게 돌았나. 우리 키스는 금지한 거 몰라?!“ 옳지. 그렇지. 걸려들었다. 에이든은 드러운 게 묻었다는듯 뒷자석으로 손을 뻗어 물티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슨 결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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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즈 하이

슈웅, 하고 검게 썬팅된 차 문이 위로 열렸다.캘리포니아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브리는 본능적으로 눈이 부셔 와 눈을 가늘게 떴다.“가실까요.”아까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사람 속을 박박 긁던 에이든은, 문이 열리자마자 세상 부드러운 말투로 팔을 내밀었다. 기가 차지도 않았다.브리는 거절하려다가, 결국 마지못해 그의 팔에 손을 걸었다.그 순간 에이든이 뭔가 잊은 게 있다는 듯 멈춰 섰다.손에 들고 있던 자켓을 휙 뒷좌석에 던져 넣고, 삐릭, 하고 차를 잠갔다.그제야 브리는 놓친 걸 알아차렸다.에이든은 교복 차림이었다.“오… 오늘 교복 입는 날이었어?”브리는 제 차림을 내려다봤다.후드 집업에 몸에 달라붙지 않는 트레이닝 팬츠, 운동화. 옷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입고 나온 결과였다.엘리즈 하이는 교복의 본질인 평등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학교 같았다. 이들에게 교복은 학생을 같게 만드는 옷이 아니라, 엘리즈 하이 학생이라는 자격을 과시하는 수단에 가까웠다.에이든은 몸매가 드러나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브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정신머리 하고는.”브리는 입술을 비죽였다.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겠지. 개학 첫날이니까, 기껏해야 선도부 잔소리 정도나 듣고 말 것이다.브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엘리즈 하이의 교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둥근 아치형의 끝이 보이지 않는 교문을 지나자, 엘리즈 하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꼭 성처럼 지어진 건물, 정교하게 다듬어진 창문과 벽면, 넓게 펼쳐진 잔디와 중앙 분수.학교라기보다 영화 세트장 같았다. 그런데도 잘 관리된 나무와 분수 덕에 특유의 온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났다.브리는 다시 한번 제 차림을 내려다봤다.“하, 이 전생의 습관이 무섭다니까.”작게 중얼거리고 말았다.황미영으로 살 때는 편한 게 최고였다.움직이기 편하고, 일하기 편하고, 허리 덜 아프고, 빨래 쉬운 옷. 문제는 지금 이 몸이 황미영이 아니라 브리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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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갈라?

복도에서 바네사와 헤어진 뒤로도 브리는 한동안 등 뒤가 따가웠다.바네사의 시선 때문인지, 지나가는 학생들의 수군거림 때문인지, 아니면 에이든이 점심시간에 공개적으로 던진 그 폭탄 발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오늘 하루, 브리아나 로즈라는 이름은 엘리즈 하이에서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브리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 피곤해.”그러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띠링.브리는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Eiden.「오늘 파티에서 봐.」짧은 문장이었다.그런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브리의 손끝이 멈췄다.“아.”그 파티.사람 머리는 참 신기했다. 행복했던 기억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쪽팔리고 비참했던 기억은 바위처럼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브리는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바네사가 드레스를 보낸다. 브리아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간다.그리고 바네사는 사람들 앞에서 브리아나가 자신의 드레스를 따라 입었다며 은근히 몰아간다.직접적인 모욕도 아니었다. “어머, 나랑 똑같은 드레스네” 하고 웃었을 뿐인데, 주변 사람들은 알아서 의미를 만들어냈다.결국 그날의 중심은 바네사가 가져갔다. 브리아나는 질투에 눈 먼 우스운 여자가 되었고. 사실 그 덕분에 에이든의 동정표를 사는 계기가 되긴 했다. “그랬지.”브리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이번에도 같은 수를 쓸 생각이구나?”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바네사가 보낸 드레스를 입지 않으면 된다.집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샐리가 브리의 방 한가운데에 드레스를 가지런히 펼쳐두고 있었다.“아가씨, 샵에서 드레스가 도착했어요.”브리는 천천히 드레스 쪽으로 다가갔다.부드러운 새틴 위로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블랙 드레스. 과하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허리선이 우아하게 잡혀 있고 목선은 단정하게 떨어져 있었다.분명 예쁜 드레스였다.아니, 아주 예뻤다.하지만 브리의 눈에는 그것이 드레스가 아니라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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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입성

문을 여는 순간, 브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와. 멧갈라냐.“드레스룸은 드레스룸이라기보다 작은 패션쇼였다. 한쪽 벽면은 전부 드레스였고, 맞은편에는 구두와 클러치가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진주, 다이아, 이름도 모를 보석 장식들이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브리는 잠시 감탄하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바네사의 덫을 처음으로 피할 절호의 기회. “최대한 다른 걸로 고르자.”브리는 옷걸이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러다 브리의 손이 한 드레스 앞에서 멈췄다.빨간 드레스였다.깊고 선명한 레드 컬러. 장미잎처럼 겹친 장식이 허리선 아래로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어깨선은 우아하게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딱 미영의 취향이었다.강렬했다.아주 강렬했다.브리는 드레스를 꺼내 몸에 대보았다.거울 속 브리아나 로즈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솔직히 말해, 억울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그래. 이거야.“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정도면 절대 안 겹치겠지.”문제는 하나 있었다.브리는 오늘 파티의 드레스 코드를 기억하지 못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누구에게 묻기도 애매했다.‘브리아나, 너 초대장도 제대로 안 읽었어?’‘오늘 무슨 파티인지 몰라?’어쨌든 바네사의 함정을 피했으니까, 오늘 파티에선 주도권이 브리에게로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고른 뒤 거울 앞에 선 브리는 자신을 한참 바라보았다.미영이 좋아하던 빨강. 튀는 색만 입으면 남편한테 아줌마가 주책이라고 잔소리 듣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흠 잡을 때 없는 몸으로 거울 앞에서 장미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악역 보다 한 수 앞이라는 게 너무 짜릿했다. 완벽했다.**말리부의 저녁이 어둑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급 저택들의 불빛이 하나둘 번졌다.화려하고, 조용하고, 비현실적인 풍경.브리는 가슴 한쪽이 묘하게 답답했다.이 세계는 너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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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선생의 아내

로버트 선생의 아내, 마거릿 헤일을 기리는 자리였다.‘……아 망했다‘원작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게 하는 것이 사실 함정이 아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지 않게 만드는 것.그게 함정이었다.멀리서 바네사가 보였다.그녀는 완벽한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단정한 진주 귀걸이와 검은 레이스 장갑. 슬픔을 품위 있게 감춘 듯한 표정까지.바네사는 브리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그 웃음은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이번엔 네가 졌어. 이 바보야. 그때 낮은 목소리가 옆에서 떨어졌다.“너 미쳤어?”브리가 고개를 돌렸다.엘리샤와 클로이였다.그들의 시선은 입은 새빨간 드레스에 꽂혀 있었다. 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주변의 눈치를 보는 찰나에 바네사가 다가왔다.“내가 보낸 드레스? 혹시 다른 주소로 배달되었을까?“바네사는 잠시 눈을 땡그랗게 굴려보이더니 인상을 푹 썼다. 안쓰러운 무엇을 보는듯 무척이나 걱정하는 투로 거의 울먹이다 싶이 말했다.”아니면.... 설마 오늘 추모파티인 걸... 잊은 거야?“ 브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로버트 선생은 학교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로버트에게 밉보이면 엔딩도 미뤄질 거고, 그럼 미영은 이 세계에서 나갈 수 없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주인공들은 서사 밖에 존재하질 않으니, 그 말은.. 미영의 인생이 영화 안에서 끝난다는 것이었다. 첫날부터 교복을 안 입은데다가 드레스코드까지, 완전 밉보이기 딱 좋았다. 브리는 가까스로 턱을 들었다.“알아.”주변에 서있는 엘리샤와 클로이의 얼굴이 더 차갑게 굳었다. “아는데 이 꼴로 왔다고?”엘리샤가 얼굴을 더 과장되게 움직이며 틱틱댔다.“꼴이라니. 이 드레스 비싸 보이는데.”클로이가 눈치없이 거들었다. 클로이와 엘리샤 그리고 브리가 중간에 서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갑자기 참석자들의 눈이 문 쪽으로 고정됐다.머리를 정중하게 넘기고선, 빳빳한 정장 블랙 수트 차림의 에이든이 긴 다리를 휘저으며 내부로 들어왔다. 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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