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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부르는 곳 (1)

Author: 이온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8 19:31:58

“우의정 황희 대감이시라고?”

천우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산속에서 살 때도 황희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주상전하의 오른팔로, 비단 주상전하뿐 아니라 상왕 전하 때에도 중신으로 활약했으며 더 올라가면 태조대왕 시절부터 벼슬길을 걸었으니 가히 조선 땅 전체의 중역이라 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래. 우상 대감이 맞아.”

이포교가 중얼거렸다.

“몇 년 전에 잠깐 얼굴은 뵌 적 있었는데, 변한 것이 없으시군. 여전하셔.”

“우의정께서 제례(祭禮)를 직접 보시기도 하는군.”

“어쨌거나 반촌에서 행해지는 제사이니 말일세. 조정의 중신께서 계셔야 질서가 유지될 테니. 그리고 우상 대감께서 계시는 것을 보니, 이 제사가 무슨 제사인지 알 것 같네.”

“뭔가?”

“기우제(祈雨祭)야. 비를 바라는 제사가 틀림없네.”

이포교가 옆머리를 긁적였다.

의관을 정제한 것과는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십중팔구 그 패거리가 여기 있을 것인데……”

“무슨 패거리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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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빛미르   결계 (1)

    이도가 앞장서서 가니, 천우와 지운과 이포교 세 사람은 황망한대로 총총- 따를 뿐이었다.배를 타고 연못을 건너, 궁궐의 어딘가로 향하는데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궁궐 서편의 한 귀퉁이였다.작은 담벼락이 성벽처럼 둘러싸고, 작은 문 하나만 나 있어 따로 뚝 떼어진 사당을 보는 듯한 인상이었다.문은 잠겨있지도 않았다.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의 출입이 없었는지 힘주어 문을 열자 끼이익- 오래된 경첩 녹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보이느냐?”문 안으로 들어선 이도가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저게 바로 할바마마께서 이 궁궐 안에 따로 마련해두신 것이다.”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작은 마당 하나뿐이었는데, 그 중앙에 무언가 커다란 것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짐승의 형태를 흉내 낸 석상(石像)이었는데, 어두컴컴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불을 비춘 것처럼 잘 보였다.“이것은……”이포교가 석상을 눈여겨보며 말했다.“해치(獬豸)가 아닙니까?”“그렇다.”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발 달린 짐승인데다, 이마에는 뿔이 하나 솟아있고, 목도리처럼 두른 갈기가 어깻죽지까지 빈틈없이 덮고 있는 모양새가 한눈에 보기에도 위엄이 넘쳤다.불을 다스린다는 영물. 해치였다.

  • 붉빛미르   집결 (6)

    “네.전하.”“권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이번 일에 대하여.”“물빛미르가 저희를 돕겠다 약조한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불은 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지요. 아무리 불이 세차게 타오른다 한들, 물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법. 거대한 산불도 장대비에 진화되지만, 물에 젖은 산에서 불이 타오르는 일은 생길 수가 없나이다.”“권사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든든합니다. 하지만……”이도가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붉빛미르가. 큰형님의 정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크게 걸립니다. 권사께서도 아시겠지만, 형님과 저는……”“네. 멀리 떨어진 듯 하면서도 멀지 않은, 어찌 보면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분이시지요. 일국의 군주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 왕이라고 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남들과 다르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이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는 조금 멋쩍은 얼굴이 되어 천우와 이포교를 돌아보았다.“음. 혹시 과인의 형님에 대해 세간에서 어떤 얘기가 도는지 혹시 들어보았는가?”천우가 먼저 대답했다.“외람되오나, 전하. 저는 한양이라는 곳도 이번에 처음 방문하였습니다.”“물빛은 그렇다면 잘 모르시겠구려.”“송구하옵니다. 전하.”“이포교는 어떠한가?&rdq

  • 붉빛미르   집결 (5)

    “고맙소. 물빛.”이도가 천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크고 보드라우면서도 힘찬 열기가 느껴지는 손이었다.국왕과의 악수라니. 황홀함에 눈앞이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화, 황송합니다. 전하!”“정말로 고맙소. 온 조선 땅의 백성이 물빛에게 빚을 지게 되었소.”“과찬이십니다. 전하! 저는 그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싸울 뿐입니다.”“시원시원하시군. 역시 물을 다루는 미르다운 언행이오.”이도가 기껍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허허- 웃어보였다.“아, 이포교. 자네도.”이도의 눈이 이포교에게로 돌아갔다.방심하고 있던 이포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네, 네…… 전하?”“미르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 외부인은 조선 땅에서 오직 자네 하나다. 그러니 이포교 자네는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힘껏 과인을 도우라. 알겠느냐?”“부,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전하!”이포교가 다시 한 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이도는 그런 이포교를 내려다보더니 가만히 주저앉아 이포교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일어나라. 지금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이지, 과인에게 굴종할 때가 아니다.”“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자, 그럼 이제 대충 전후사정 파악은 끝난 듯싶구나. 네가 지금까지 여기 와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 성 싶으냐?”“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이포교가 덜덜 떨면서도 힘주어 물어왔다.“어떤 결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이포교 자네는 조선 땅에 미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초의 외부인이다. 그런 자네가 듣기에 이번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할 것 같은지 그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말해봐라.”이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이포교는 옆에 서 있던 천우의 눈치를 한번 슥- 살피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조선 땅에는 붉빛미르와 물빛미르 두 미르가 있습니다. 붉빛미르는 적을 없애는 불의 용이요, 물빛미르는 백성을

  • 붉빛미르   집결 (4)

    “그때 과인은,지금처럼.”이도가 한번 보라는 듯 손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고요한 섬 주변의 연못 위로 달빛을 머금은 물안개가 푸르스름하게 떠 있는데,말 그대로 구름 위를 거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한양 밖으로 사냥을 떠나 한동안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었소.사냥 강무를 떠난 때였지.오랜만에 궁을 벗어나 말을 달리고,활을 쏘니 입맛도 잘 돌고 마음도 한결 편해지더이다.확실히 사람은 어디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자유로이 어디 나다니고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소.”“전하……”“그런데 궁에서 갑자기 급한 파발이 오는 게 아니겠소?한양에 큰불이 났으니 즉시 돌아오라는 것이었지.불이 뭐 얼마나 크게 났기에 이 난리를 치는 것인가 싶었지만,과인이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방팔방이 모두 붉은색이었소.살이 타는 냄새는 속이 뒤집힐 것 같고,짐승이며 사람이며 아프고 뜨겁다고 울부짖는데,아직까지도 꿈결에 그때 비명소리가 나오곤 하오.악몽에서 깨어날 때도 있었지.가끔은.”“망극하옵니다.”“그때 불난리 한 번에 기우사들이 몰살당하고,오로지 권사 혼자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놓이자 참으로 난감했소.농사 짓는데 필요한 빗물이며 물줄기가 필요할 터인데 기우사들이 전부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으니.”“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습니다……”“그리고 불을 끄다 당한 것도 아니고,

  • 붉빛미르   집결 (3)

    “돌겠구나.”향원정 내부를 가득 채운 뭉근한 습기보다도 더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붉빛미르가…… 형님 곁에 있다고……?”방금 들은 말이 못내 충격적인지, 조금 전까지도 농을 건네던 유쾌한 모습을 몽땅 잃어버린 채로 나지막이 되묻는 이도였다.거기 있던 모두가 국왕의 탄식에 할 말을 잃었다.붉빛미르가 여인의 몸으로 양녕대군 옆에 있음을 말한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운은 뒷짐을 진 채로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며 천장만 올려다보았다.아무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유일하게 이포교만이 울상이 된 채로 이쪽저쪽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침묵이 흘렀다.“그 여인이.”이윽고, 이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붉빛미르라는 것은 틀림이 없으렷다?”“그러하옵니다. 전하.”“그리고 붉빛미르 또한 천우 자네가 물빛미르의 환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주었고?”“……”“두 미르가 조선 땅에 동시에 나타났다…… 그리고 붉빛미르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 경고했으며, 이를 어기는 자들을 처단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조선 땅에 언제 비가 내리고, 언제 날이 갤 것이며 언제 땅이 마르고 질어지는지 알아내는 것을 천기누설이라 했습니다.”천우가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본인 말로는, 그것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며 여기 관련된 인물들을 없애버리겠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이 땅의 역법을 연구하던 관리에게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반촌에서 누가 실종되었다는데 그 이름은 아직……”“이여립.”이도가 냉랭한 목소리로 이름 하나를 말했다.“작년에 집현전 학사로 들어온 재사(才士)로, 강원도의 산맥을 돌며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서 별과 달의 움직임을 관측하라 파견된 관리였다. 그렇잖아도 실종되었다는 장계를 받아 심란하던 차였는데……”“실종된 관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사옵니까?”“그렇다. 이여립 말고도 조선8도 군데군데 천문을 살피러 파견된 이들이 더 있다. 어명으로 파견된 것이기에 신변에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곧장 내게로 연통

  • 붉빛미르   집결 (2)

    지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물이 수상하게 흐르는 기운을 감지했다네. 알다시피, 나도 나름 경륜이 있는 기우사다보니 어디서 갑자기 격하게 물이 흐른다거나 하는 이상 현상 정도는 느낄 수 있어. 자네처럼 정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그럼 혹시…… 불도 마찬가지이십니까?”“붉빛미르의 그것은 우리와는 궤가 다르지. 알아낼 수 없다네. 기우사들이 2년 전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몰살당한 것도 그때문이지. 불이 어디서 덮쳐오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붉빛미르…… 이 악독한……”천우가 가만히 읊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그 중간에서, 미르를 처음 접하는 이포교는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어색한 눈만 끔벅이며 천우와 지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저, 외람되지만…… 붉빛미르가 무엇입니까?”“자세한 내용은 궐에 가서 함께 듣지.”지운이 도포 자락을 휙- 젖히며 말했다.축지법의 순간이었다. * * *궁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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