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백사성 또한 불길에 밀려난 충격에 탄식을 내뱉으며 공중에서 굴렀다.
쾅-!
백사성이 옆에 있던 작은 가옥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러자 양분된 불길이 그런 백사성을 악에 받혀 쫓아가듯이 함께 가옥 출입구로 빨려들어갔다.
“칫!”
천우 또한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 * *
가옥 안은 한밤처럼 어두웠다.
잿더미와 무너진 지붕으로 엉망이 된 마당은 전시(戰時)이 폐허를 방불케 했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오직 죽은 듯한 적막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불과
지운이 물었다.“서촌 말씀이십니까?”“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동안 하늘 보는 거 어디까지 되었나 살펴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사들 은자(銀子)라도 좀 챙겨줘야 닭백숙이라도 고아 먹으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전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으십니다.”그렇게 4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음 행보를 정하고는 곧바로 서촌으로 옮겨갔다.“저, 전하!”어김없이 장영실이 나와 맞이했다.지난 기억보다 조금 더 피곤하지만, 눈의 생기만큼은 곱절은 더한 장영실이었다.장영실뿐 아니라, 다른 학사들도 여럿이 한자리에 있었다.밤중에 오직 장영실 혼자만 일하던 기억 때문일까. 학사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어, 어인 일로 옥체를 직접 행차하셨습니까?”“잠깐 볼일이 있어 암행을 나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와 보았다. 자, 일단 이것들 좀 받고.”이도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옆에 있던 학사에게로 건넸다.천문 연구에 지친 사기(士氣)를 채워줄 묵직한 은자 덩어리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은자를 받아든 학사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장영실이 그 학사를 가만히 불렀다.“이여립. 자네는 얼른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 나가 좋은 술과 포(脯)를 사오게.”“
“뉘십니까?”맑은 목소리가 들렸다.여인의 목소리였다.“지나가던 길손인데, 말씀 좀 묻겠소.”천우가 의아함을 숨긴 채로 대답했다.끼익-문이 열렸다.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엇…….”놀란 천우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냈다.어리였다.틀림없는 어리였다.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태로 문을 열고 나와 이쪽을 보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붉빛?”천우가 부지불식중에 그리 불렀다.“네?”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외람되지만, 선비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빙긋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어리였다.그 바람에 천우는 뒤로 물러서며 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물보라를 일으켜 다시금 물과 불의 다툼을 재현할 작정이었다.“나, 나는…….”천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백……. 백천우라고 하는데&he
“시간을 바꾸다니요?”지운이 아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따지고 보면 미르가 존재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 아니오? 필요할 때 비를 주시고, 필요할 때 불과 무력을 주시는 것도 사람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 그러니 시간을 바꾸는 것도 일어날 수 없지만 또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일겁니다.”“그렇다면…….”“아마 물빛미르께서 붉빛미르를 베어내시면서, 우리가 있는 시간대가 바뀌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되오.”이도가 조곤조곤 읊조렸다.맑은 두 눈에 지성(至聖)의 빛이 반짝 빛났다.“나 또한 천문 연구에 돌입하면서 조금이나마 깨달은 이치가 있소.”이도의 말이 이어졌다.“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점과 점이 이어져 길게 이어지는 형태로 흘러가는 것이오. 다만 그것이, 점점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보이는 것이지.”“그 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하?”“우리의 선택으로 빚어진 시간이오. 모든 선택이 한데 모여 길고 긴 세계를 이루는 것이지. 물빛미르께서 한양으로 올라오기로 결심하신 선택, 저자의 사람들을 돕기로 하신 선택, 붉빛미르를 무찌르신 선택 등이 말이오.”이도가 거기까지 말하곤 천우를 흘깃거렸다.“그리고 물빛미르께서 붉빛미르를 벤 그 선택으로 시간이 뒤바뀐거요. 이미 그려진
향기로운 화차(花茶)한잔과 함께, 천우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백사성을 찾아 한양으로 올라왔고, 곰보에게 목걸이를 빼앗겼고, 불이 났고, 비를 불렀다가 의심받았고, 이포교를 만났고 궁궐로 불려왔으며 주상전하를 뵈었고, 이포교와 함께 양녕대군의 식객으로 갔다가 어리라는 여인을 만났고, 어리가 붉빛미르임이 드러났으며, 여러 사건사고를 거쳐 어리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그렇게 마지막 전투에서 붉빛미르를 칼로 베어낸 끝에 다시 처음 이때로 돌아왔다는 말이냐? 천우 네 말에 따르면?”백사성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물었다.“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천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모든 것이 제가 기억하는 것과 동일하게 흘러갔습니다. 만나는 사람, 마주치는 상황, 함께 나누는 대화까지 모든 것이 말입니다.”“믿기가 힘들군…….”“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붉빛미르며, 대군마마 이야기에, 천문연구에 대한 사실까지 다 알고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고, 바로 직전에 겪은 것처럼 생생합니다.”천우는 거기까지 말하고선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사당에 모여 있던 모두 크게 놀란 기색으로 입을 벌리고 있거나 이쪽 얘기를 경청 중에 있었다.“천문 연구는…….”이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n
나룻배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물살을 갈랐다.저 앞에 물빛미르의 사당이 있는 섬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탁-섬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분명 맑은 날씨였는데, 이쪽에서 보니 궁궐 쪽이 안개가 서린 듯 희뿌옇게 보였다.새벽녘에 잔잔한 바닷가 암초 위에라도 올라와 있는 듯했다.섬에 내린 세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당을 향해 갔다.사당 앞에 다다랐을 때, 향원정이라는 이름을 추천했던 기억이 났기에 잠시 입구 앞에서 멈추어 섰다.취로정(翠露亭)이라는 현판이 거기 걸려 있었다.“왜 그러십니까?”이도가 그런 천우를 보고 물었다.“전하. 혹시 이 사당은…….”“기억이 나십니까?”이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물빛께서 틈틈이 머무르시던 장소이지요. 그동안 관리도 잘 해놨으니 다시 여기 기거하시는 데는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취로정이라…….”“푸른 안개가 머무는 정자라는 뜻이지요. 물빛미르께서 원래 푸른 기운을 내시기에 그렇게 명명하였습니다. 혹시 따로 바라는 명칭이 있으신지요?”“아, 아닙니다.”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전에 없던 이름이 생겨있다니. 조금 신기했다.‘단순히 과거로 돌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포교는 불안한 기색으로 정원 앞을 왔다 갔다 거닐던 참이었다.금화도감의 병력이 불씨 순찰을 위해 허가를 맡으러 왔을 때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초조했다. 꼭두새벽부터 포청을 찾아온 그 노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노인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선 땅을 다스리는 국왕의 징표를 가지고 있었다.포청이야 워낙 다양한 사건사고를 접하다 보니 종사관은 물론, 형조판서, 심지어 의금부 소속의 사람이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왕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무슨 일이지, 대체?’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도성 내의 화재를 담당하는 금화도감의 일원으로서, 이포교는 그저 큰불이 날 뻔했던 사건을 마무리 짓고 그 배후로 의심되는 누군가를 잡아 문초한 것밖에 없었다.당최 무엇 때문에, 왕명을 가진 이가 여기를 찾아온단 말인가?덜컹-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찾아왔던 손님들이 나타났다.어쩐 일인지 두 사람 모두 상기된 듯한 얼굴이었다.“얘기는 잘 끝마치셨습니까?”이포교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지운이 이포교를 발견하고 활짝 웃어보였다.“오, 노고 많았네.”지운이 이포교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법 기분이 좋아보였다.흥분감으로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이포교라고 했던가?”“그렇습니다.”“금화도감 소속이고?”“네.”“젊은 나이에 고생길이 훤하군. 몸이라도 제대로 추스를 수 있을지 모르겠어.”지운은 진심으로 이포교가 안쓰럽다는 투였다.이포교가 담담히 받았다.“금화도감으로서 저는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종묘사직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기에…….”“옳은 말일세. 전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실 거야.”“과찬이십니다.”“내 전하를 뵙고 자네에 대해 알려드리겠네. 일개 포교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가 여기 있다고.”“네?”이포교가 목소리로 되물었다.“주상전하께 아뢴다고 하셨습니까?”“그래. 마침 입궐하러 가는 길이니.
“당장 바른대로 고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몸을 베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놓을 것이다!”“후후. 목청만큼은 할아버지 못지않네요.”이죽거리는 어리의 목소리가 귓가를 불편하게 간질였다.아무리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용은 용. 목소리를 내고 손을 내젓는 것만으로도 능히 상대를 쳐 없앨 수 있는 맹수. 국왕 따위가 아무리 떠들어도 내게는 위협거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거기 묻어 있었
“붉빛이 말하는 그것은 패도(霸道)요!”이도가 장엄하게 꾸짖었다.“어떻게 국왕에게 남을 짓밟으라는 말을 건넬 수 있단 말이오! 그대가 미르가 아닌 신하였다면, 나는 당장에 그대를 내쳤을 것이외다! 참람하고 무서운 말이오. 내 절대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오. 알아듣겠소?!”“이성계와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어리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
뒤에 서 있던 이도가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당신이…….”이도의 상기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붉빛미르요?”“바로 알아보셨습니다.”어리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용안을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이렇게 뵙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그건 나도 마찬가지외다.”이도가 진중한 투로 말했다.“할아버님, 그리고 아버님에게서 익히 들어온 바, 용은 자신의 형체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기에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했지. 이렇게 뛰어난 자색(姿色)을 갖춘 여인네로 나타라리라고 누가 알았겠소?”“그리 말씀해주시니,
곰보의 상태를 보아하니, 본인의 의지는 살아있으나 이미 불에 먹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듯했다.자기 자신이 먹혀버렸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저렇게까지 한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니. 붉빛미르는 실로 무서운 존재였다.“아예 머릿속까지 불에 익어버려 백치가 되어버렸구나. 곰보 놈아.”“뭐라?”곰보가 이를 갈며 으르렁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