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이 수상하게 흐르는 기운을 감지했다네. 알다시피, 나도 나름 경륜이 있는 기우사다보니 어디서 갑자기 격하게 물이 흐른다거나 하는 이상 현상 정도는 느낄 수 있어. 자네처럼 정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
“그럼 혹시…… 불도 마찬가지이십니까?”
“붉빛미르의 그것은 우리와는 궤가 다르지. 알아낼 수 없다네. 기우사들이 2년 전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몰살당한 것도 그때문이지. 불이 어디서 덮쳐오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붉빛미르…… 이 악독한……”
천우가 가만히 읊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중간에서, 미르를 처음 접하는 이포교는 이게 다
“역시 당신이었군.”천우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붉빛미르 쪽에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언젠간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했소.”천우의 칼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생각했지.”“똑똑하시네요.”“이렇게 나타나주어 고맙소. 마음 졸이며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을 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나한테든, 당신에게든.”천우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산속에 잠든 물 전체가 우르릉- 대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천우의 명에 맞추어 움직이겠다며 한껏 예기(銳氣)를 다듬는 듯했다.붉빛미르는 가만히 이쪽을 살피기만 할뿐, 손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불길이라도 내밀 줄 알았는데, 별일이었다.“어떠셨습니까?”불쑥, 붉빛미르가 그리 물었다.“뭐를 말이오?”천우가 되물었다.“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의 조선 땅 말입니다. 물빛께서 보시기에는 이쪽의 삶이 만족스러우십니까?”“갑자기 무슨…….”“이쪽의 삶은, 시간은, 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천지신명의 뜻을 받든 붉빛미르가 세상을 침범하지 않고, 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놔두기로 결심한 세계.
지운이 물었다.“서촌 말씀이십니까?”“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동안 하늘 보는 거 어디까지 되었나 살펴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사들 은자(銀子)라도 좀 챙겨줘야 닭백숙이라도 고아 먹으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전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으십니다.”그렇게 4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음 행보를 정하고는 곧바로 서촌으로 옮겨갔다.“저, 전하!”어김없이 장영실이 나와 맞이했다.지난 기억보다 조금 더 피곤하지만, 눈의 생기만큼은 곱절은 더한 장영실이었다.장영실뿐 아니라, 다른 학사들도 여럿이 한자리에 있었다.밤중에 오직 장영실 혼자만 일하던 기억 때문일까. 학사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어, 어인 일로 옥체를 직접 행차하셨습니까?”“잠깐 볼일이 있어 암행을 나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와 보았다. 자, 일단 이것들 좀 받고.”이도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옆에 있던 학사에게로 건넸다.천문 연구에 지친 사기(士氣)를 채워줄 묵직한 은자 덩어리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은자를 받아든 학사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장영실이 그 학사를 가만히 불렀다.“이여립. 자네는 얼른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 나가 좋은 술과 포(脯)를 사오게.”“
“뉘십니까?”맑은 목소리가 들렸다.여인의 목소리였다.“지나가던 길손인데, 말씀 좀 묻겠소.”천우가 의아함을 숨긴 채로 대답했다.끼익-문이 열렸다.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엇…….”놀란 천우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냈다.어리였다.틀림없는 어리였다.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태로 문을 열고 나와 이쪽을 보는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붉빛?”천우가 부지불식중에 그리 불렀다.“네?”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외람되지만, 선비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빙긋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어리였다.그 바람에 천우는 뒤로 물러서며 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물보라를 일으켜 다시금 물과 불의 다툼을 재현할 작정이었다.“나, 나는…….”천우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백……. 백천우라고 하는데&he
“시간을 바꾸다니요?”지운이 아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따지고 보면 미르가 존재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 아니오? 필요할 때 비를 주시고, 필요할 때 불과 무력을 주시는 것도 사람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 그러니 시간을 바꾸는 것도 일어날 수 없지만 또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일겁니다.”“그렇다면…….”“아마 물빛미르께서 붉빛미르를 베어내시면서, 우리가 있는 시간대가 바뀌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되오.”이도가 조곤조곤 읊조렸다.맑은 두 눈에 지성(至聖)의 빛이 반짝 빛났다.“나 또한 천문 연구에 돌입하면서 조금이나마 깨달은 이치가 있소.”이도의 말이 이어졌다.“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점과 점이 이어져 길게 이어지는 형태로 흘러가는 것이오. 다만 그것이, 점점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보이는 것이지.”“그 점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하?”“우리의 선택으로 빚어진 시간이오. 모든 선택이 한데 모여 길고 긴 세계를 이루는 것이지. 물빛미르께서 한양으로 올라오기로 결심하신 선택, 저자의 사람들을 돕기로 하신 선택, 붉빛미르를 무찌르신 선택 등이 말이오.”이도가 거기까지 말하곤 천우를 흘깃거렸다.“그리고 물빛미르께서 붉빛미르를 벤 그 선택으로 시간이 뒤바뀐거요. 이미 그려진
향기로운 화차(花茶)한잔과 함께, 천우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백사성을 찾아 한양으로 올라왔고, 곰보에게 목걸이를 빼앗겼고, 불이 났고, 비를 불렀다가 의심받았고, 이포교를 만났고 궁궐로 불려왔으며 주상전하를 뵈었고, 이포교와 함께 양녕대군의 식객으로 갔다가 어리라는 여인을 만났고, 어리가 붉빛미르임이 드러났으며, 여러 사건사고를 거쳐 어리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그렇게 마지막 전투에서 붉빛미르를 칼로 베어낸 끝에 다시 처음 이때로 돌아왔다는 말이냐? 천우 네 말에 따르면?”백사성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물었다.“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천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모든 것이 제가 기억하는 것과 동일하게 흘러갔습니다. 만나는 사람, 마주치는 상황, 함께 나누는 대화까지 모든 것이 말입니다.”“믿기가 힘들군…….”“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붉빛미르며, 대군마마 이야기에, 천문연구에 대한 사실까지 다 알고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고, 바로 직전에 겪은 것처럼 생생합니다.”천우는 거기까지 말하고선 모두의 얼굴을 살폈다.사당에 모여 있던 모두 크게 놀란 기색으로 입을 벌리고 있거나 이쪽 얘기를 경청 중에 있었다.“천문 연구는…….”이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n
나룻배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물살을 갈랐다.저 앞에 물빛미르의 사당이 있는 섬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탁-섬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분명 맑은 날씨였는데, 이쪽에서 보니 궁궐 쪽이 안개가 서린 듯 희뿌옇게 보였다.새벽녘에 잔잔한 바닷가 암초 위에라도 올라와 있는 듯했다.섬에 내린 세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당을 향해 갔다.사당 앞에 다다랐을 때, 향원정이라는 이름을 추천했던 기억이 났기에 잠시 입구 앞에서 멈추어 섰다.취로정(翠露亭)이라는 현판이 거기 걸려 있었다.“왜 그러십니까?”이도가 그런 천우를 보고 물었다.“전하. 혹시 이 사당은…….”“기억이 나십니까?”이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물빛께서 틈틈이 머무르시던 장소이지요. 그동안 관리도 잘 해놨으니 다시 여기 기거하시는 데는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취로정이라…….”“푸른 안개가 머무는 정자라는 뜻이지요. 물빛미르께서 원래 푸른 기운을 내시기에 그렇게 명명하였습니다. 혹시 따로 바라는 명칭이 있으신지요?”“아, 아닙니다.”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전에 없던 이름이 생겨있다니. 조금 신기했다.‘단순히 과거로 돌아
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그렇지만 백성의 삶이 곧 조선의 삶이 되는 법. 이 땅의 백성으로서, 모두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사람이 아닌 미르라 할지라도 미래는 결코 볼 수 없는 법.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저승길로 갈지 알고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의 역법이 완성되어 제가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것은 알 수 없을 일. 저는 제가 지금 숨 쉬고 살아가는 조선 땅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것뿐입니다.&
“형님.”“네. 전하.”“어리는. 붉빛미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이도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어왔다.“그렇게 지치고 외로운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양녕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리와 지금까지 정을 나누며 살아온 동안, 한 번도 우울해하거나 눈물지은 적
“전하?”양녕이 크게 놀란 얼굴이 되어 이도를, 그리고 천우를 바라보았다.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빛마저 공포에 질려 흔들릴 정도였다.“붉빛미르라니요? 그게 무슨…….”“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형님께서 사모하시는 그 여인, 어리가 붉빛미르라면 형님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전하! 외부인이 듣고 있습니다! 미르에 대한 얘기를 꺼내시면 아니되옵니다!”양녕이 목청을 높이며 천우를 실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갑자기 광기(狂氣)가 서린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송구
“제가 사람을 부르겠습니다.”천우가 문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전하께서는 조금 뒤로 물러나시어 거리를…….”“이리 오너라!”그러나 그게 무어냐 하는 투로 문 쪽으로 외치는 이도였다.천우는 그런 이도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