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포청 앞은 아무래도 하는 일이 하는 일이라 그런지,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다.
높은 누각은 지나다니는 이들을 감시하는 듯했고, 두꺼운 벽과 지붕은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뭔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이 앞에만 서면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그만큼 포청이라는 장소가 가진 무게는 다른 관청과는 대조적이었다.
“들어가세.”
천우가 머뭇거리고 서 있자, 이포교가 채근했다.
천우는 조금은 가라앉은 발길로 포청 본사로 들어서는 돌계단을 올라갔다.
크고 넓은 연무장 같은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4방향으로 에워싸듯 나 있어, 바깥보다도 더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바닥을 덮고 있는 거친 모래, 기름을 발라 반질반질하게 관리되고 있는 형틀
“고맙소. 물빛.”이도가 천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크고 보드라우면서도 힘찬 열기가 느껴지는 손이었다.국왕과의 악수라니. 황홀함에 눈앞이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화, 황송합니다. 전하!”“정말로 고맙소. 온 조선 땅의 백성이 물빛에게 빚을 지게 되었소.”“과찬이십니다. 전하! 저는 그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싸울 뿐입니다.”“시원시원하시군. 역시 물을 다루는 미르다운 언행이오.”이도가 기껍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허허- 웃어보였다.“아, 이포교. 자네도.”이도의 눈이 이포교에게로 돌아갔다.방심하고 있던 이포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네, 네…… 전하?”“미르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 외부인은 조선 땅에서 오직 자네 하나다. 그러니 이포교 자네는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힘껏 과인을 도우라. 알겠느냐?”“부,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전하!”이포교가 다시 한 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이도는 그런 이포교를 내려다보더니 가만히 주저앉아 이포교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일어나라. 지금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이지, 과인에게 굴종할 때가 아니다.”“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자, 그럼 이제 대충 전후사정 파악은 끝난 듯싶구나. 네가 지금까지 여기 와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 성 싶으냐?”“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이포교가 덜덜 떨면서도 힘주어 물어왔다.“어떤 결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이포교 자네는 조선 땅에 미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초의 외부인이다. 그런 자네가 듣기에 이번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할 것 같은지 그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말해봐라.”이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이포교는 옆에 서 있던 천우의 눈치를 한번 슥- 살피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조선 땅에는 붉빛미르와 물빛미르 두 미르가 있습니다. 붉빛미르는 적을 없애는 불의 용이요, 물빛미르는 백성을
“그때 과인은,지금처럼.”이도가 한번 보라는 듯 손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고요한 섬 주변의 연못 위로 달빛을 머금은 물안개가 푸르스름하게 떠 있는데,말 그대로 구름 위를 거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한양 밖으로 사냥을 떠나 한동안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었소.사냥 강무를 떠난 때였지.오랜만에 궁을 벗어나 말을 달리고,활을 쏘니 입맛도 잘 돌고 마음도 한결 편해지더이다.확실히 사람은 어디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자유로이 어디 나다니고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소.”“전하……”“그런데 궁에서 갑자기 급한 파발이 오는 게 아니겠소?한양에 큰불이 났으니 즉시 돌아오라는 것이었지.불이 뭐 얼마나 크게 났기에 이 난리를 치는 것인가 싶었지만,과인이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방팔방이 모두 붉은색이었소.살이 타는 냄새는 속이 뒤집힐 것 같고,짐승이며 사람이며 아프고 뜨겁다고 울부짖는데,아직까지도 꿈결에 그때 비명소리가 나오곤 하오.악몽에서 깨어날 때도 있었지.가끔은.”“망극하옵니다.”“그때 불난리 한 번에 기우사들이 몰살당하고,오로지 권사 혼자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놓이자 참으로 난감했소.농사 짓는데 필요한 빗물이며 물줄기가 필요할 터인데 기우사들이 전부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으니.”“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습니다……”“그리고 불을 끄다 당한 것도 아니고,
“돌겠구나.”향원정 내부를 가득 채운 뭉근한 습기보다도 더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붉빛미르가…… 형님 곁에 있다고……?”방금 들은 말이 못내 충격적인지, 조금 전까지도 농을 건네던 유쾌한 모습을 몽땅 잃어버린 채로 나지막이 되묻는 이도였다.거기 있던 모두가 국왕의 탄식에 할 말을 잃었다.붉빛미르가 여인의 몸으로 양녕대군 옆에 있음을 말한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운은 뒷짐을 진 채로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며 천장만 올려다보았다.아무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유일하게 이포교만이 울상이 된 채로 이쪽저쪽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침묵이 흘렀다.“그 여인이.”이윽고, 이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붉빛미르라는 것은 틀림이 없으렷다?”“그러하옵니다. 전하.”“그리고 붉빛미르 또한 천우 자네가 물빛미르의 환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주었고?”“……”“두 미르가 조선 땅에 동시에 나타났다…… 그리고 붉빛미르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 경고했으며, 이를 어기는 자들을 처단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조선 땅에 언제 비가 내리고, 언제 날이 갤 것이며 언제 땅이 마르고 질어지는지 알아내는 것을 천기누설이라 했습니다.”천우가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본인 말로는, 그것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며 여기 관련된 인물들을 없애버리겠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이 땅의 역법을 연구하던 관리에게 손을 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반촌에서 누가 실종되었다는데 그 이름은 아직……”“이여립.”이도가 냉랭한 목소리로 이름 하나를 말했다.“작년에 집현전 학사로 들어온 재사(才士)로, 강원도의 산맥을 돌며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서 별과 달의 움직임을 관측하라 파견된 관리였다. 그렇잖아도 실종되었다는 장계를 받아 심란하던 차였는데……”“실종된 관리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사옵니까?”“그렇다. 이여립 말고도 조선8도 군데군데 천문을 살피러 파견된 이들이 더 있다. 어명으로 파견된 것이기에 신변에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곧장 내게로 연통
지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물이 수상하게 흐르는 기운을 감지했다네. 알다시피, 나도 나름 경륜이 있는 기우사다보니 어디서 갑자기 격하게 물이 흐른다거나 하는 이상 현상 정도는 느낄 수 있어. 자네처럼 정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그럼 혹시…… 불도 마찬가지이십니까?”“붉빛미르의 그것은 우리와는 궤가 다르지. 알아낼 수 없다네. 기우사들이 2년 전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몰살당한 것도 그때문이지. 불이 어디서 덮쳐오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붉빛미르…… 이 악독한……”천우가 가만히 읊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그 중간에서, 미르를 처음 접하는 이포교는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어색한 눈만 끔벅이며 천우와 지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저, 외람되지만…… 붉빛미르가 무엇입니까?”“자세한 내용은 궐에 가서 함께 듣지.”지운이 도포 자락을 휙- 젖히며 말했다.축지법의 순간이었다. * * *궁궐까지
푸하-차가운 물이 얼굴을 뒤덮었다.반촌 밖 한적한 개울가에 다다르자마자 거기 엎어지듯 뛰쳐나간 천우는 냅다 개울물에 머리를 박고 찬물을 한 사발은 들이켰다.이렇게 물이 주린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심한 갈증은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개울물이 천우보고 괜찮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후우…… 후우……”“이제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보게.”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이포교가 물어왔다.이쪽 역시 천우처럼 개울물을 떠다가 세수를 하고 목 뒤에 묻은 검댕을 씻어내느라 제법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었다.“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건가?”“……”“그리고 어리 낭자는? 낭자는 또 어디 가셨고? 왜 천우 자네 혼자만 여기 있는 건가?”어리가, 붉빛미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천우 본인도 정말로 알고 싶었다.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역법 연구하는 관리들을 살해하러 갔을까, 아니면 양녕대군 옆으로 날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인을 연기하고 있을까.‘이런……’양녕대군의 정인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더욱 섬뜩했다.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폐세자의, 주상전하의 형님되시는 분 옆에 붉빛미르가 붙어있다. 그것도 군신이나 상하관계가 아니라 서로 연모하는 형태로. 한쪽이 목숨을 걸면
어리의 말이 이어졌다."사람은 무릇 하늘의 명을 받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권위 앞에서 복종하고, 겸손하고, 섬김으로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미르는 그런 천명의 대리자. 방해되는 자는 모두 없앨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이 나라의 주상이라고 하더라도.”“나를 여기서 죽이지 않는 이상.”천우가 불끈 힘을 주며 경고했다.푸른 기운이몰아치며,양팔을 완갑(脘甲)처럼 둘러쌌다.“주상전하께는 손댈 수 없을 거요.내 목숨을 다해 당신을 막을 테니까.”“목숨을 걸어도 제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어리가 피식 비웃으며 놀리듯 말했다.사실은 사실인지라,천우로서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패배하셨어요.물빛께서는 제게.비루한 허섭스레기처럼.”“이길 수 없다 하더라도 생을 걸어볼 가치는 있소.”“원래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는 것이 아니랍니다.어리석은 짓이지요.합리적이지 않은 짓이고.그리고 아무리 그러한들,물빛의 숨통을 제 손으로 끊어버릴 생각은 없습니다.물빛의 목숨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귀중한 것이니까요.저한테도 말이지요.”어리가 후훗-웃는 기색으로 천우를 노려보았다.장난기가 어려있는 가운데,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위는 죽여버리고도 남는다……는 여유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