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그만해요. 둘 다 왜 이상한거로 힘빼고 그래요? 당신은 로하공주나 찾지. 여기까진 왜 온거죠?” 일그러진 첸 장군의 표정을 살핀 라임 장군이 우리 둘 사이에 서서 나를 다그쳤다. 그 때 느껴지는 불쾌함과 가슴 한 켠에 저림이 내 심술의 이유를 대변했으나 난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공주에게 전해. 적당히 기다리게 하라고.”“당신이 날 그렇게까지 기다리고 있을줄은 몰랐네요.” 뒤에서 음습한 기운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맞은편에 있던 첸 장군과 라임 장군은 각자 다른 표정을 띄며 한 쪽 무릎을 꿇고 뒷 편을 향해 말했다. “제느 로하를 뵙습니다.” 뒤를 돌자 반짝이는 후광에 눈이 절로 감겼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어디 파티라도 다녀온 행색이었다. 평소에도 외모 때문에 화려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기라도 작정한 듯 머리부터 발 끝까지 반짝이는 것들로 한껏 치장되어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한 치의 수수함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촘촘히 보석들이 박혀있었고, 온갖 악세사리로 하얀 살결을 뒤덮고 있었다. “이제야 보네요.” “친구를 사귀느라 바빠서 날 기다리고 있을거라 생각은 못했는데. 제가 무신경했네요.”친구를 사귀느라 바빠서… 라니. 이번엔 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떠보는 말일 수도 있지만, 캥기는 것이 있는 입장에서 저 말은 뒷덜미가 서늘해질 말이었다. 그녀는 내 코 앞까지 다가왔고, 무릎을 꿇었던 두 장군도 몸을 일으켰다. 그들과 나, 우리 네 사람은 묘한 기류 속에 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신기한 일이었다. 네 사람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니.나는 라임 장군을 보고, 라임 장군은 첸 장군을 본다. 첸 장군은 로하 공주를, 그리고 로하 공주는 나를. 마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은 평행선 같았다. 같은 공간에 서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느낌. 이 선들은 끝내 겹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스쳤다. “혹시 싸우고 있던 건 아니죠?
침대에 누워 반제느의 단검을 만지작 거리며 라임장군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반제느끼리는 공유가 거의 없다는 말,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다. 그녀의 말은 어딘가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리라. 그녀가 말하길, ‘루‘ 라는 마을의 길거리는 모든 인간들이 검은색 망토로 얼굴을 감추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특히 왕궁 내에 상주하고 있는 인물들끼리는 절대 마주칠 수 없도록 심혈을 기울이며 복잡한 방법으로 움직이게 한다고 했다. 반제느는 무조건 은밀하게. 제느에게 정체를 걸리지 않는 것을 가장 최우선으로 한다-. 그들이 라임 장군에게 그렇게 말한 적 있었더랬다. 그렇기에 위에서 중요한 지시를 하기 위해 호출을 할 때면 은밀히 본인의 방문 아래 틈으로 편지를 넣어두고 간다고 했다. 그 점에서 왕궁 내에 메이드들이나 보초병들 대다수가 반제느 소속일 것이라며 라임 장군은 덧붙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반제느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로하공주가 싫기는 했지만, 자신의 부모는 반역은 멍청한 짓이라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문에 먹칠을 할 일은 생각조차 없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약 5년 전 즈음,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 반제느 인원 중 하나가 먼저 유혹의 손을 내밀었다. 라임 장군의 평범한 일상을 바꾸게 만든 건 ’차엘‘ 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머니 나이대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였다고 한다. 초대를 받아 찾아간 차엘이라는 여성은 루에서 가장 큰 저택에 살고 있으며 리트리 일기의 복사본을 개인 자택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반제느의 가장 핵심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었다. 그 때 자신의 조상이 원래 이 세상의 왕이였다는 걸 알게되었고, 그때부터 더욱 반역에 대한 욕구가 들끓기 시작했다고 했다. 차엘은 말했더랬다. 원래 왕좌는 ‘당신의 것’ 이니 돌려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
“대단한 분인가보죠?”“이 분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유일하게 정의를 실현시키려고 했던, 정말 ‘신에게 선택 받았다.’ 라고 칭할 수 있는 청렴결백한 제느, 우리의 진짜 여왕님이셨죠.“ 그러니까 리트리라는 사람은 반제느 소속이였단 말이군.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리트리란 사람이 어떤 인물이였는가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 난 그저 빨리 용건을 끝내고 이 낡은 곳을 나가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반쯤 열려 있는 저 문 사이로 로하 공주가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 것 만 같은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용건 끝났으면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나와는 달리 라임 장군의 행동은 나무늘보보다 느렸다. 애간장을 태우던 내게 라임 장군은 자신의 옷소매 안 쪽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건넸다. 손바닥보다 작은 단검의 칼집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선물로 줄게요. 반제느들만 가지고 있는 칼이에요. 우리끼리의 표식이죠. 호신용으로 써요.” 얼떨결에 건네받은 단검은 꽤 묵직했다. “여길 못열었다면 당신 목엔 이 칼이 꽂혔을텐데." 라임 장군은 활짝 웃어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살벌한 말을 던지며 웃는 그 얼굴에서 내 머리속에 자연스럽게 과거의 그녀가 떠올갔다. 가슴 한 켠이 욱신거린다. 이제 하다하다 웃는 얼굴까지 빼닮았다니. 가지런한 치열과 반쯤 휘어지는 반달눈, 왼쪽에만 살짝 파이는 보조개까지. “뭘 그렇게 봐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내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몇 번 내뱉곤 ‘아니, 별로.’ 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랑하던 여자와 닮았다는 멍청한 소리를 할 순 없으니 말이다. “그보다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는 게 좋을거예요. 제느 공주는 물론이고, 반제느 단체에서도.” “로하 공주한텐 당연한거지만, 반제느 단체에는 왜죠?” “당신을 위한거예요. 아까 말했죠? 이 문은 제느만 열 수 있다고. 가뜩이나 반제느들한테 당신
“그것 참 너그러운 선택권이네. 그 정도의 호의엔 대가가 필요하겠죠?” “그럼요. 우선 당신의 힘에 대해 작은 거짓도 없이 모든 걸 말해줘요.”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 힘은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단 말이예요! 저도 뭐가 뭔지 몰라요. 그냥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에 나온 힘이였다고! 그 뒤론 나오지 않았어. 로하 공주랑 블러드 실험실에 가서도-!” 헉.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라임 공주는 환희에 찬 미소로 말했다. “블러드 실험실이라. 여우같은 년.” 아무래도 난 어쩌면 지금 조금… 많이 조진 것 같다. “그럼 앞장서세요.” * 고의는 절대 아니었지만, 나는 제느와 반제느 사이에서 박쥐가 되어버렸다. 라임 장군의 등살에 못이겨 우리는 제느의 실험실로 가보았다. 고작 두 번 가본 것이 전부지만 이 복잡한 왕궁에서 길을 정확히 외운 스스로에게 감탄하면서. "장난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꽤 얌전하게 행동하시네요. 마음에 들어요.이제야 당신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 “그보단 이 방 안엔 한 발자국도 못들어가겠는데요. 이렇게 꽁꽁 잠금장치를 해놔서.” 인적없는 은밀한 곳에 위치해있던 실험실 입구를 보자 라임 장군은 그제서야 나를 믿는 듯 했고, 살벌한 입구에 공주가 걸어 놓은 단단한 자물쇠와 결계들은 내 말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상했다. 이 정도로 많은 자물쇠들이 걸려있었던가? 팔뚝만한 두꺼운 쇠사슬이 칭칭 감겨있는 문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이상했지만, 이런 것까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라임 장군은 금방 수긍했다. “이 안의 풍경이 너무 궁금하지만,
오늘만큼은 꼭 로하 공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다짐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공주와 나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블러드의 저주 사태가 끝난 이후론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져버린 로하공주는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었고, 당연히 내 귀환은 계속 미뤄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못만나는 걸 보면 로하 공주가 일부러 피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그건 안된다. 집요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 곳의 생활이 적응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심지어 더 편해지고 있었다. 안락한 침구와 풍요로운 먹거리. 노동이 필요치 않은 삶까지. 더욱 소름이 끼치는 건 ‘돌아가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 문득, ‘근데… 굳이 그 컨테이너로 돌아갈 이유가 있나? 날 기다리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데.’ 라는 개떡같은 의문이 들이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평온하고 이상한 일상에 더 이상 익숙해질 순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러다 정말 여기에 눌러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곳은 내 세상이 아니었다. 방문을 나서려는 때, 익숙한 여자가 내 방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라임 장군. 다가오는 표정이 꽤나 비장했다. 못본 척 넘기기엔 이미 눈이 적나라하게 마주쳤고, 그걸 안 라임장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내게 말했다. “드디어 만나네요. 저를 하도 만나주지 않아서 살던데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맞다. 난 라임장군을 고의로 만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찾아오면 잠든 척 방문을 꼭 잠구고 있거나, 행여 복도에서 마주치면 급한 일이 있다며 도망치기 바빴다. 내 본능은 그녀를 피하라고 지시했고, 지금 상황에서 그녀와 대화를 해봐야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했기에.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예요.” “그래서. 지금도 급한 일이 있나요? 오늘은 꼭 진득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야.”내게 양해를 구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어디 오늘도 한 번 피해봐라.’ 라고 말하는 듯 한 저 살벌한 표정은 감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였다. 블러드들의 눈동자는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새 흩어져 있던 병력들이 내 주변을 둘러싼 채 블러드들과 치열한 칼부림을 하고 있었고, 로하 공주의 나무줄기들 또한 더 많이 생겨나 내 주변을 빈틈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블러드가 나를 보호하는 나무줄기들을 찢으면 나무줄기들은 빠른 속도로 재생해 다시 내 방패가 되고, 그 사이 첸 장군과 여러 병사들이 블러드들을 무찌르고, 또 다시 다른 블러드가 나타나 나무줄기를 찢어내며 그 잔혹한 루트가 반복되었다. 내 바로 옆에서 나를 지키던 병사들이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며 죽어나갔다. 블러드들 또한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애석하게도 그 광경은 슬로우모션처럼 적나라하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게 되니 죄책감과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서 삶에 대한 집착도 사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그저 살기를 원했을 뿐, 누군가가 죽기를 원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죽어야 이것도 끝나는걸까.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나가는 걸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고있지니, 이건 이거대로 괴로웠다. 반쯤 체념상태에 들어서자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냐아-.” 익숙한 목소리가 내 다리 밑에서 들려왔다. 네로. 대체 이 아비규환 속에서 어떻게 들어온건지. 네로는 꼬리를 빳빳히 치켜세우곤 내 두 다리를 오염하게 감쌌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내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맞다. 고양이는 말하지 못한다. 내 속안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는 것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큰 위안을 얻은 나는 나무막대기를 다시 한 번 세게 거머쥐었다. 그리고 나를 보호하는 나무줄기가 찢겨지는 그 타이밍에 블러드를 향해 나무막대기를 휘둘르며 소리쳤다. ”꺼져, 이 괴물아!!!” 그리고 순간, 내 비명과 함께 빠른 속도로 블러드를 향하던 막대기의 끝에서 검붉은빛이 수직으로 뿜어져 나왔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