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달 속에 울리는

붉은 달 속에 울리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By:  r라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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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한 이현오. 어쩌다 빠진 늪에서 전혀 다른 세상에서 눈을 떠버렸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엮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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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 늪에 비친

[그렇게 고집 부리더니 꼴이 그게 뭐냐? 내 말 좀 귀담아듣지… 하여간 고집만 세가지고. 그래서 너 지금 어디에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태준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거친 숨소리와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내비치는 감정에 짙은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속엔 분명 내 처지를 향한 조소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찌질한걸까?

“그래. 쓸데없는 고집부리다가 결국 이 꼴이 났네. 지금은 인터넷도 잘 잡히지 않는 시골에 박혀있고.”

[거기서 뭐해먹고 사는데?]

뭐해먹고 살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지.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저 방정맞은 놈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현오 니가 농사를 짓는다고? 밥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라는 둥 사람 속을 긁어댈 것이 뻔했다.

“대충 살아. 밥 그까짓거 뭐….”

[몇 개월 동안 연락도 안되고 그러길래 죽은 줄 알았네. 언제 돌아오려고? 평생 거기서 살거냐?]

“어. 평생 살거야. 나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 이제 전화하지마. 죽으면 알아서 부고 문자 보낼테니까.”

신경질적이게 전화를 끊고 뒷마당 한 켠에 던져버렸다. 나무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휴대폰을 보며 흠칫 놀라 액정을 살펴보았다. 멀쩡한 휴대폰을 보고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찌질한 내 모습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킴 채 휴대폰 전원을 껐다. 

맞다. 난 원래 이 정도로 찌질한 인간이다. 태준이의 아니꼬운 말투는 15년 전 부터 알고 있었다. 

평소의 나, 아니… 불과 반 년 전의 나였다면 태준이의 진심을 알아차리곤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알고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태준이 뿐이라는 걸. 

다만 지금의 나는 중고로 싸게 구매한 휴대폰의 액정이 나갔을까 노심초사 하고, 15년지기 친구의 마음을 비꼬아들을 정도로 머리와 마음이 녹슬어 있었기에 그 순수한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녹슨 이유는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오랫동안 일구었던 사업이 망했다. 그것도 아주 쫄딱. 몇 년간 고생해서 이루었던 것들을 순식간에 모든 것을 다 날렸다. 평생 번 돈은 물론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이 작은 컨테이너집이 전부다. 

“인생이 너무 고독한데.”

낮은 혼잣말을 하자 등 뒤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빳빳한 꼬리가 위로를 건네듯 내 팔을 휘감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근처에서 밥을 몇 번 챙겨주니 아예 집 안으로 들어와 상주하고 있는 고양이 ‘네로.’ 였다.

이름에 맞게 발을 제외한 모든 털이 새까맣다. 밤에 보면 가끔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 그래. 너가 있으니 덜 고독하다.”

위로에 답해주자 네로는 만족했다는 듯 ‘야옹-.’ 소리를 내며 요염하게 문 앞으로 걸어갔다. 네로와 동거한지 3달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상과 단절한 채 24시간을 살다보니 작은 몸짓과 울음소리가 어떤 걸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산책을 갈테니 문을 열어달라는 뜻이다.

평소라면 문만 살짝 열어두고 냅뒀을텐데…. 그 날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도 함께 길을 따라 나섰다. 네로의 산책길은 늘 똑같다. 한 달간 주구장창 쫓아다녀봐서 알고 있다. 딱히 궁금할 것도 없는데 왜 굳이 따라 나간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홀린 듯 네로의 종종거리는 발자취를 따라 밤길을 걸었다.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시골.’ 은 거짓말이 아니다. 갈라진 땅에 가로등도 많지 않은 시골. 인적없는 동네에 벌레와 풀소리만 가득한 이 곳의 밤은 꽤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 네로?”

익숙한 길만 찾아다니던 네로가 낯선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새 네로의 산책길이 바뀐 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네로의 뒤를 따라갔다. 구부정하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낮은 산길을 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지겨워지려는 찰나 작은 늪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달빛을 그대로 받아 표면이 빛을 내고 있는 늪.

그 오묘하지만 확실한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분명 낮에 봤더라면 초라하기 짝이 없을텐데….

이 곳에 산지 6개월이 넘었음에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홀린 듯 멍하니 늪을 바라보다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검은색 털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호박색의 두 눈은 더욱 선명하게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먀아-.”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청아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나무 사이사이로 울려퍼졌다. 달빛이 환해 늦은 밤시간에도 검은색 고양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졌다. 네로의 호박색 눈망울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에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다.

지금 네로의 얼굴은 먹이를 사냥하는 얼굴이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콧수염이 앞으로 나온.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얼굴이었다. 이내 꼬리를 살랑거리며 요염한 걸음걸이로 늪으로 향했다.

“야! 네로…!”

나는 분명 늪으로 향하는 네로를 잡으려 했을 뿐이다. 망성임 없이 늪으로 향하는 네로의 발걸음이 늪바닥까지 향할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팔을 쭉 뻗었으나 결국 닿지 않았다.

네로가 늪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딱히 네로에게 정을 준 것도 아닌데, 왜 내 몸은 본능적으로 그 새까만 늪으로 향했을까. 차가운 물이 팔과 다리를 뒤덮었을 때만 해도 위기감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낮은 동네 산의 늪이니까. 여차하면 수영하면 되니까. 수영은 배웠으니까. 게다가 작은 네로를 건져 내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일테니까.

복부까지 축축한 늪 속에 들어갔을 무렵, 늪 지평선에 보이는 아지랑이 같은 붉은 형체를 발견했다. 나의 움직임으로 인해 강하게 일렁이는 물결과 함께 그 붉은 형체도 함께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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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늪에 비친
[그렇게 고집 부리더니 꼴이 그게 뭐냐? 내 말 좀 귀담아듣지… 하여간 고집만 세가지고. 그래서 너 지금 어디에 있는데?]수화기 너머로 태준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거친 숨소리와 떨리는 목소리는 그가 내비치는 감정에 짙은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었다.그 속엔 분명 내 처지를 향한 조소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찌질한걸까?“그래. 쓸데없는 고집부리다가 결국 이 꼴이 났네. 지금은 인터넷도 잘 잡히지 않는 시골에 박혀있고.”[거기서 뭐해먹고 사는데?]뭐해먹고 살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지.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저 방정맞은 놈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현오 니가 농사를 짓는다고? 밥도 할 줄 모르는 놈이?’ 라는 둥 사람 속을 긁어댈 것이 뻔했다.“대충 살아. 밥 그까짓거 뭐….”[몇 개월 동안 연락도 안되고 그러길래 죽은 줄 알았네. 언제 돌아오려고? 평생 거기서 살거냐?]“어. 평생 살거야. 나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 이제 전화하지마. 죽으면 알아서 부고 문자 보낼테니까.”신경질적이게 전화를 끊고 뒷마당 한 켠에 던져버렸다. 나무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휴대폰을 보며 흠칫 놀라 액정을 살펴보았다. 멀쩡한 휴대폰을 보고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찌질한 내 모습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킴 채 휴대폰 전원을 껐다. 맞다. 난 원래 이 정도로 찌질한 인간이다. 태준이의 아니꼬운 말투는 15년 전 부터 알고 있었다. 평소의 나, 아니… 불과 반 년 전의 나였다면 태준이의 진심을 알아차리곤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알고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태준이 뿐이라는 걸. 다만 지금의 나는 중고로 싸게 구매한 휴대폰의 액정이 나갔을까 노심초사 하고, 15년지기 친구의 마음을 비꼬아들을 정도로 머리와 마음이 녹슬어 있었기에 그 순수한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녹슨 이유는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오랫동안 일구었던 사업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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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붉은 달
스트레스로 인해 없던 색맹이 생긴 줄 알았다. 원래라면 하얀색감을 가진 동그란 형태여야 했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달은 아주 뚜렷하게 붉은 색을 띄고 있었고, 늪 수면 위에 비친 모습 또한 붉은색이였다. 검은 늪 위에 비친 붉은 달의 모습. 분명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발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것 처럼. 늪이 턱까지 차오르고, 검은 물이 온 몸을 잠식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늪 안이… 원래 이런가? 많이 이상하다. 분명 수심이 낮을거라 생각했다. 내 몸을 다 잠식하고 눈을 떴을 때, 달빛에 환하게 비춰진 물 속 안이 눈에 들어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한 물 속은 광활한 바다 속을 연상케했다. 끝없어보이는 심해와 바깥에서 봤을 때완 비교도 안될 정도로 넓은… 아까 내가 본 늪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때 네로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내 앞을 지나쳤다. 그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고양이가 물 속 안에서 수영을 한다는 문제는 둘째치고, 네로의 몸에서 섬광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며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대체 뭔데, 이거…. 고양이 몸에서 섬광이 흘러나올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지금 늪에 빠져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설마 벌써 죽은 거 아니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을 때,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더 깨달았다. 내가 바깥에 있는 것처럼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물 속에서. 그럼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되려 고급 호텔 침대에 누워있는 것처럼 편안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머리 속은 빨리 네로를 잡아 이 곳을 나가야 한다 명령하고 있는데 내 몸은 명령을 거부했다. 대자로 뻗어진 팔 다리는 이미 물흐름에 따라 가고 있었고 나는 잠에 들 듯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은 나를 마비시켰고, 나는 그렇게 끝없는 심해로 깊이, 더욱 더 깊이 들어갔다. * “이런 상황에서 저런 불길한 것을 살려둔다니요! 명령을 거두어주십시오. 제느 로하 공주님!” “맞습니다. 지금처럼 저주의 흐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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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상한 곳, 이상한 사람들
꽤나 중요해 보이는 대화 속에서 산통을 깨는 행동이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애초에 그 고양이를 찾기 위해 늪에 들어간 것이니 본전은 찾아야 않는가? 이 곳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대한민국 땅 안일테고,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굴에서 살아남는다 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인간 중 하나로써 충분히 해쳐나갈 수 있을거라 착각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 안에 있는 많은 하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하얀 머리털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절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느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특히 ‘공주님’ 이라고 칭하는 그 여자의 눈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순간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검은 머리가 어딜 감히-!” 나와 가장 가깝게 있는 여자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올 기세로 소리쳤다. 이쯤되면 저들이 말하는 ‘검은 머리’ 라는 단어가 나를 칭하는 것 정돈 알 수 있고,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그 적대시의 정도가 살인에 가깝다는 것도. 움직이기 위해 상반신을 일으키자 내 팔다리가 포박되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순식간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순간 속에서 강렬한 생존본능이 일렁였다. 저들 눈에 서린 경멸과 분노 때문도, 손에 들려 있는 위협적인 창과 칼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포박되어 있는 내 몸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포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내게 강렬한 인상을 심은 것은 제느 로하 공주라는 여자와 마주치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과 눈동자 때문이었다. 비어있다고 하기엔 비집을 틈 없어 보이고, 사람의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 차갑고 공허한. 저 인형같이 아름다운 눈동자가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과연 교주를 할 정도의 포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남자인 내가 쫀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더 쫄지 않은 척 하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다소 건방한 표정으로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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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느에게 영광을
정말 끔찍한 소리다. 머리 속에 뉴스에서나 보던 쇼킹한 내용들이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이런식으로 나를 옭아메어 감금하려는 건 아닐까? 더 끔찍한 것은 여자가 사람들을 향해 이상한 손짓으로 무언가를 지휘하자 일제히 내 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느에게 영광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그 문구가 노래처럼 들려왔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멘탈이 깨지기 직전, 로하 공주는 내 팔과 다리 쪽을 향해 무언가를 읊조리며 손짓했다. 나를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던 포박의 압력이 순식간에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아까 봤던 나무줄기도 그렇고, 손도 대지 않고 포박이 풀린 것도 그렇고… 마법처럼 보이는 장치들을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아 꽤나 정성스러운 사이비 집단임이 분명했다. “우선 제 핸드폰과 고양이를 좀 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휴대폰이 좀 그러면 고양이만이라도….”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내가 아무리 잃을 것 없는 밑바닥 인생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이런 사이비 집단들 사이에서 세뇌나 당하고 살 수는 없었다. 지금은 최대한 이들의 심기를 맞추고 타이밍을 봐서 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휴대폰이라는 건 뭔지 모르겠고. 당신의 고양이는 제 방 침실에서 잘 자고 있으니 걱정 안해도 됩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제 개인 하인들도 여럿 붙였으니 어떠한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겁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네로가 나보다 더 팔자가 좋군. 나는 한 끼도 못먹고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로 누워있었는데. “모두 들으세요. 여기 있는 이현오는 ‘검은 재앙의 잔여물.’이 아닙니다. 함부로 대하는 행동을 자제하고, 예우를 갖추세요. 이현오를 만난 오늘 우리는 천 년 째 이어오던 검은 재앙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된 날입니다.” 그 때,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란한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 불쾌함을 적나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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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 곳의 저주와 구원
“저거 달이야?” 끌려가던 몸을 멈추곤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함께 움직이던 다른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내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 끝에는 붉은 달이 있었다. 이 곳에 오기 전 보았던, 피처럼 선명하고 새빨간. 하늘의 면적을 반쯤은 가린 것만큼 커다랗다. 저 색깔과 크기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더 말도 안되는 것은 달 옆에 처량하게 서있는, 10배는 아담한 사이즈의 태양이었다. 그래, 내가 알던 태양. 30년을 보고자랐던 눈부신 그 태양… 몇 번이나 눈을 씻고 확인해봐도 확실했다. 두 개의 행성이 같은 하늘에 공존하니 풍경색 또한 애매했다. 낮도, 밤도 아닌 초저녁의 하늘 같은. 주황빛을 내는 풍경. 아무리 규모있는 사이비 집단이라고 한들 하늘까지 조작할 수는 없다. “참나. 태양까지 있네. 이거 실화냐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반응에 주변 사람들이 더 놀란 눈으로 내게 물었다. “저주와 구원을 말하는 건가요?” “저주와 구원… 그건 또 뭔 이름이야?” 나는 되물었다. 이름의 의미 따위를 물은 것이 아니다. 왜 저것이 두 개가 동시에 떠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달은 왜 또 저런색인지. 내가 늪에 빠지기전에 보았던 달은 잘못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자연 이상 현상이란 건데,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온 지 고작 6개월. 그 사이에 우주의 공전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까? 심란한 내 마음을 약올리기라도 하는 듯 한 여자가 옆에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신명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원래 이 메아리는 신의 구원만 있었어요. 신의 구원은 생명을 키우고 자라나게 하는, 우리가 살기 위해 가장 적합한 세상을 만들어주신 신의 선물이였죠. 몇 백 년 전에 마녀가 나타나 메아리에 블러드의 저주를 걸기 전까진 말이죠. 그 마녀가 걸은 저주가 당신이 가르키고 있는 저 붉은 것이랍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의하면 원래는 신의 구원과 비슷한 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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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블러드의 저주
그녀가 안내한 방은 다른 아까 있던 곳과는 반대로 휑한 공간이었다. 50평은 족히 넘어보이는 넓은 방에 있는 것이라곤 티타임을 즐기는 용도로 보이는 작은 탁상과 의자 몇 개 뿐이었다. “당신들은 하나같이 이 곳에 오면 자신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생각하는 ‘것‘ 같다고? ‘당신들은 하나같이’? ”그럼… 내가 죽은 게 아니라는거야?”“음… 네. 아마도요.”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니거든? 똑바로 설명해. 아마도는 뭐야?””제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저의 어머니들이 쓰신 이야기에 의하면 당신들은 죽은 게 아니에요. 저주로 인한 균열로 당신들이 이 곳에 흘러들어온 것이죠. 가장 신과 가깝게 소통했던 저의 어머니도 그렇게 기록해놨어요. 솔직히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로하공주는 아랫입술을 깨물곤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한데 기다려줄 인내심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땀에 흠뻑 젖은 두 손을 무릎팍에 닦아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자세한 건 설명할 수 없지만, 이 곳 ‘메아리.’ 에 걸려 있는 저주… ’블러드’ 를 없애야만 당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확실해요.“ “그래서? 날 살려둔 이유가 그건가? 당신네들이 말하는 저주를 풀기 위해서?” “그거 외에는 딱히 없죠.” “내가 뭘해야 하지?” “조급해하지 마세요. 그건 차차 알려 드릴겁니다.”저 말을 신용할 수 없다. 방금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로하 공주의 뉘앙스도 찝찝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충 맥락을 보아하니 희한한 요술을 부리는 저 공주도 그렇고, 잘나셨다는 저 여자의 조상들도 저주를 못 풀어낸 듯 한데. 평범한 남성인 내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거절을 하겠다면?”“그럼 이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되겠죠. 당신이 죽어서 이 곳에 온건지. 여기에서 진짜 죽는 건지.” 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가녀린 작은 손. 자신에게 협조하라는 의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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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일무이한 힐러
그딴 게 신의 배려라니. 차라리 저주를 없애주는 게 맞지 않나? 나는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를 간신히 참아냈다. “저주로 인해 세상에 균열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 그 미세한 틈 사이로 당신들 같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던 인간들이 간혹 흘러들어온다고 하죠. 실제로 저주가 시작될 때 마다 당신같은 인간들이 저주의 호수에서 발견되곤 합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그 쪽이 생각하시는 것과 같아요. 여긴 우리와 다름을 두려워하고 경멸하죠. ‘블러드’ 들 또한 당신들과 같은 색을 하고 있기도 하고… 우리의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전부 죽였다는 뜻이군. 500년 전부터 저주 때 마다 이 곳으로 흘러온 나같은 사람들을… “블러드 저주가 뭐죠?” “블러드는 괴물의 이름이에요. 저주가 끝난지 얼마 안된터라 살아있는 건 볼 수 없지만, 죽은 사체는 왕궁 지하에 있습니다. 늘 사체를 몇 개 거두거든요.“ 나는 그것의 실제 모습이 궁금하다 말했고, 로하 공주는 흔쾌히 지하로 안내했다. 가는 길 동안 호위와 하녀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뒤를 따라 붙으려 했으나 공주는 한사코 하지말라며 매섭게 거부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걱정이 한아름 고여있었다. “위험하니까 걱정해주는데 왜 그렇게 까칠해요?“ 나를 위험인물로 생각하는 건 어이없었지만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쓸데없는 인력낭비를 하려고 하니까요. 시키는 일이나 잘하지.” “공주님 걱정을 하는거잖아요.” “그게 쓸데없단 거죠. 여긴 내 왕궁이고, 당신은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은데 왜 걱정을 하냐고. 내 손짓 하나에 모든 게 끝나는네.” 진짜 말뽄새하고는.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난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그녀는 아까 하던 메아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블러드의 저주가 생겨날 땐 하늘이 붉게 물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주기는 보통 10년이라 했다. 짧은 저주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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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슬라브 라임
로하 공주는 지하실에서 오랜 시간 블러드에 관한 것들을 설명했다. 나 또한 그 내용들이 흥미로워 여러가지 질문들을 해가며 경청했다. 그녀는 내 반응에 내심 기뻐보였다. 오랜만에 코드가 맞는 친구를 만나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것 처럼 조금도 입을 쉬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선 안된다. 눈처럼 하얀빛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저런 검붉은 피를 뒤집어쓰며 인체실험을 한다니. 공주는 이 실험실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이 처음 이 실험을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다른 장군들과 장로들이 그런 비윤리적인 짓을 했다간 신께 미움을 받을거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말은 신의 미움 어쩌구하면서 반대한거지만… 사실 여왕식을 미루는 것을 못마땅하다 생각한거겠죠. 하지만, 이 실험들은 실제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죠. 신께 노여움을 사지도 않았고. 반대하던 이들이 제일 많은 블러드를 잡아오곤 한답니다.“ 여왕식이 정확히 무엇이냐 묻자, 공주는 짧게 ‘결혼식.‘ 이라 답했다. 이내 산처럼 쌓여 있는 블러드 사체 더미에 다가가 한 쪽 발로 그것의 머리를 즈려밟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것들은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요. 목이 잘려도, 몸이 두동강나도 쉽게 죽지 않죠. 어떻게든 제 몸을 찾아 재생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었어요. 칼이나 창 같은 중금속 속에 나무 뼈대를 심어 만든 무기로 베면 재생할 수 없다는 것, 저주가 시작될 무렵 우리와 똑같은 형태로 교배를 시작해 아이를 만들어 번식한다는 것 등등.“ 이 공주는 나름 깨어있는 인재란건가. “그럼 이제 정확히 알려주시죠. 제가 뭘해야 하는지. 기도터가서 같이 기도하자는 건 아닐거 아니예요?“ 공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 꽤나 마음에 드네요. 당돌한 것이 특히나. 좋아요. 원래는 좀 더 시간 끌다가 알려주려고 했지만-.“ 공주가 무엇인가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며 말했다. “제느 로하를 뵙습니다. 공주님. 곧 기도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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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반제느
당연히 봤지. 공주와 강렬하게 눈싸움을 하던 인물인데. 게다가 이쁘고.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단호하지만 상냥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성문으로 나가면 보초들 쫙 깔려 있어요. 실력자들로 배치해서 당신 힘으론 절대 뚫고 갈 수 없을거에요. 제가 알려주는 곳으로 가요.” “하핫. 무슨 말씀이신지… 전 방 안에 화장실을 못보고 나가서 찾으려 했던건데.”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전 당신편이니까.” “내 편이라고?” “응. 당신 편 맞아요. 도와주려는거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을텐데, 내 말을 들어서 나쁠것도 없지 않아요? 설마 제느 공주를 믿는 건 아니죠?“ 아아. 알겠다. 저 여자 제느를 멕이고 싶어서 나를 이용하는거구나. 아까 봤을 때 사이가 안좋아보였지.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공주를 엿먹이고 싶다 이거군. 의도야 어찌되었던 저 여자의 말이 진실이면 내가 손해볼 일은 없을 것이다. 진실이라면. “오해입니다. 전 도망가려 한 것이 아닙니다.” “에이, 거짓말.” 아예 거짓말은 아니지. 지금은 도망가려고 했다기보단 답사를 하려고 했달까. 나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라임 장군은 못마땅하디는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새침하게 말했다. “못믿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하네요. 어떻게 신뢰를 줘야 한담?“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냐. 그나저나 이 여자, 보면 볼수록 내 이상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을 약속했던 전 여자친구와 똑 닮았다. 전형적인 아기 복숭아상의 얼굴에 상반되는 중성 목소리와 침착한 말투가 정말 매력적이다. 게다가사슴같은 눈을 새침하게 치켜 뜨는 걸 보고 있자니 상황에 맞지 않게 얼굴에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발정난 짐승도 아니고… 외계인에 가까운 존재한테 얼굴을 붉히다니. 미친 게 아닐까? 게다가 저 여자는 재수없는 첸장군을 좋아하고 있다. 짐작하건데, 공주를 싫어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따라와요. 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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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옛날 꿈
내 침묵에 그녀 또한 입을 다물었다. 길고 무거운 이 침묵이 불편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느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 이지 않나요? 그러다 신에게 미움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내 말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제 자리에 멈춰서 정신나간 여자처럼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목소리가 과하게 울리는 통로 안에 그녀의 웃음소리는 기괴하게 들려왔고, 조금 소름이 끼쳤다. “이미 미움을 한껏 받고 있는데, 더 받을 게 있을까요?” “네?” “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오로지 제느만을 사랑하고 있죠. 우리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진작에 블러드를 없애주셨어야 했고, 꼬인 실타래를 풀었어야 했어요. 이 세상이 꼬이기 시작한 건 전부 제느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죠. 신은 방관하고 추잡한 제느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고.” 추잡한, 자신의 왕을 표현하기엔 굉장히 공격적인 단어다. 이 정도면 단순히 싫어하는 걸 넘어서 원망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저 확신한다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공주를 정말 싫어하나 보네요.” “네. 처음 보는 당신에게 이런 걸 말할 정로도요. 왕궁 내에 그걸 모르는 사람도 없을걸요.” 최대한 담담하고 간결하게 설명하려는 그 목소리에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불현듯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얼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왜인지 지금 라임 장군의 감정에 저 말이 어울렸다. 무엇을 근거로 공주 때문에 꼬였다고 확신하냐 물으려는 찰나, 눈 앞에 막힌 통로가 나왔다. 라임 장군은 익숙하게 발 밑에 있는 벽돌 하나를 잡아 지긋이 눌렀고, 또 한 번 ‘달칵’ 소리를 내며 단단한 벽문이 열렸다. 바깥으로 나서자 지금까지 본 풍경과 상반되는 흑색 빛의 잔디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정확히 열 걸음. 앞으로 걸어가봐요.” 나는 그녀가 지시한대로 속으로 숫자를 세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6, 7… 8… 9… 10. 숫자 10을 맞춰 바닥을 딛자 방금 전 디디던 땅과는 조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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