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번 세계도 멸망합니다.” 신탁은 늘 갑작스럽게 내려온다. 그리고 그 멸망의 원인은. 북부의 대공. 훗날 제국을 무너뜨릴 최악의 흑막. 엘라는 이미 세 명의 망나니 황자를 사람답게 만들어 황실 최고의 문제 해결사로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번 임무는 북부 대공이다.” “…싫습니다.” “…거절은?” “없다.” 그렇게 시작된 마지막 특명. 세상을 멸망시킬 흑막을. 사람으로 만들어라.
View More유안이 돈 쓰는 법을 배웠다는 말은 정확히 절반만 맞았다.엘라와 단테가 소란을 따라 중앙 홀까지 내려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양손 가득 상자를 든 기사들이었다. 그 뒤로는 천이 둘둘 말린 꾸러미와 꽃 화분, 빵 봉지, 작은 나무 상자와 이름 모를 장식품까지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장 하나를 통째로 옮겨 온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쪽 골목 정도는 털어 온 듯한 광경이었다. 사용인들은 물건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고, 그 한가운데서 카엘은 지갑을 든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반면 유안은 아주 평온했다. 양팔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세 개나 들려 있었고, 목에는 시장에서 산 듯한 짙은 보라색 목도리까지 둘러져 있었다. 그 옆에서 아렌이 신이 난 얼굴로 상자 하나를 열어 보고 있었다.엘라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오빠.”카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원자를 발견한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엘라.”“이게 다 뭐예요?”“나도 묻고 싶다.”유안이 대답했다.“산 거.”“그건 보여요.”엘라는 계단을 내려가 가장 가까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색색의 실뭉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다음 상자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새 장식이 열두 개나 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잼 병 여섯 개와 향초, 찻잔 두 세트, 말린 꽃, 어린아이용 털장갑, 은색 단추, 빨간 리본까지 있었다. 물건 사이에는 도무지 공통점이 없었다.“왜 이렇게 많이 샀어요?”유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좋아서.”엘라는 눈을 깜빡였다.“뭐가요?”“다.”너무 단순한 대답이었다.유안은 자신이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 안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설탕을 입힌 작은 견과류였다.“이것도 처음 봤어. 저것도 처음 봤고, 시장에 있던 것들이 거의 다 처음이었어.”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눈빛은 달랐다. 오래도록 이름조차 없이 갇혀 있던 사람이 처음으로 시장이라는 곳에 갔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않는 거리에서 물건을 고르고, 가격을 묻고, 동전을 건네고,
두 번째 보고서가 황궁으로 전송된 뒤에도 북부 대공성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세계를 멸망시킬 예언과 최초의 문이 사라졌다고 해서 성 안에 쌓인 일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해야 할 일은 더 늘었다. 육체를 얻은 이들의 방과 식사, 의복과 신분을 정리해야 했고, 아직 영혼핵으로 머무는 이들에게는 각자의 의사를 확인할 절차가 필요했다. 황실 조사단은 지하 실험실을 봉인한 채 밤낮없이 기록을 분류했고, 휴고는 갑자기 몇 배로 늘어난 성의 거주 인원을 감당하느라 기사단보다 하인들을 더 많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한계에 도달한 곳은 주방이었다. “안 됩니다.” 주방장의 단호한 선언에 엘라는 빵을 집으려던 손을 멈췄다. “뭐가요?” “오늘부터 야식은 한 사람당 한 번입니다.” 엘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늦은 저녁인데도 식당에는 사람이 많았다. 317년 만에 육체를 얻은 이들 중에는 배고픔이라는 감각 자체가 신기해서 하루 다섯 끼를 먹는 사람도 있었고, 리에나는 조린 사과 만들기에 성공한 뒤 자신감을 얻었는지 이번에는 사과 파이를 배우겠다며 주방 한쪽을 점령하고 있었다. 유안은 오늘 처음 마신 따뜻한 우유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있었고, 카엘은 그런 유안을 감시한다는 핑계로 네 번째 쿠키를 집어 먹는 중이었다. 엘라가 물었다. “제가 두 번 먹었어요?” 주방장이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 말고요.”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엘라도 따라 봤다. 아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은 손에는 빵이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잼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아주 천천히 빵을 등 뒤로 숨겼다. “아렌.” “응.” “오늘 몇 번째야?” “뭐가?” “야식.” 아렌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한 번?” 주방장이 말했다. “네 번입니다.” “…….” “저녁 식사 후에만 네 번입니다.” 엘라가 이마를 짚었다. “아렌.” “배
황실 조사단이 임시 조사실로 사용하고 있는 서쪽 응접실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귀족 손님을 맞는 평범한 방이었지만, 지금은 탁자 세 개가 이어 붙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북부 지하에서 발견된 기록물과 황실 조사관들이 밤새 분류한 자료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증거 보존용 마법진이 겹겹이 펼쳐져 있었고, 방 중앙에는 열어 보는 것만으로도 별도의 기록을 남기도록 봉인된 검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엘라는 단테와 함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상자를 봤다. 단테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주어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손가락 사이를 자연스럽게 얽고 있었는데, 그 평범한 온기가 오히려 엘라를 안심시켰다.조사단 책임자 마리엘 로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대공 전하. 공녀.”“기록은.”단테가 바로 물었다.“어젯밤 아시온의 진술을 토대로 지하 실험실의 폐기 문서를 다시 분류하던 중 발견했습니다. 정확히는 한 장의 기록이 아니라 세 개의 서로 다른 자료가 연결된 것입니다.”마리엘은 단테의 표정을 한 번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첫 번째는 전대 대공의 개인 기록, 두 번째는 당시 가문 주치의의 시술 기록, 세 번째는 아르젠트 직계 혈통 의식의 마력식입니다. 각각 따로 보았을 때는 의미를 확정하기 어려웠지만, 시간과 대상이 일치합니다.”엘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제국력 798년.단테가 일곱 살이던 해.그해는 이미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린 단테가 버려진 가능성을 처음 관측했던 해이자, 미래의 엘라가 잠시 그 시대로 흘러들어 갔던 해였고, 아직 한 살이던 루시안의 기억까지 최초의 문에 얽혀 버린 해였다.그리고 이제.또 하나가 나온다.단테는 의자를 당기지 않았다.“읽어.”마리엘이 잠시 망설였다.“전하께서 직접 보시는 편이.”“읽어.”단호했지만 감정적인 명령은 아니었다. 마리엘은 고개를 숙인 뒤 첫 번째 문서를
카엘이 엘라에게 붙잡힌 뒤 북부 대공성의 아침은 한동안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심각한 싸움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엘라는 눈밭 한가운데서 카엘의 외투 소매를 붙잡은 채 왜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그런 말을 가르쳤느냐고 따졌고, 카엘은 자신은 단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억울해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미래의 엘라는 말릴 생각도 없이 웃고 있었고, 단테는 아렌을 품에 안은 채 어느 쪽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끼어들었다가 자신까지 교육 대상이 될 가능성을 빠르게 계산한 얼굴이었다.“객관적인 사실이요? ‘네 엄마 아빠는 생각보다 느리다’가 객관적인 사실이에요?”“틀렸어?”“오빠.”“청혼했지, 승낙했지, 반지도 줬지. 그런데 날짜는 안 정했지. 어디가 틀렸는데?”엘라의 입이 다물렸다.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카엘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기 소매를 빼내려 했으나 엘라가 더 단단히 붙잡았다.“그래도 아렌한테 그런 걸 가르치면 안 되죠.”“왜?”“애가 그대로 따라 하잖아요.”“똑똑하네.”“누구 조카인데.”카엘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내 조카.”엘라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갑자기 생긴 조카라며 눈물까지 글썽거리던 사람이 하루 만에 완벽한 외삼촌 행세를 하고 있었다.그때 아렌이 단테의 품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나 또 배웠어.”엘라가 불길한 얼굴로 돌아봤다.“뭘?”“결혼은 날짜를 정해야 한다.”“…….”“그리고 외삼촌이 그랬어. 약혼은 결혼하기 전까지 마음 놓으면 안 된대.”이번에는 단테의 시선이 카엘에게 향했다.카엘이 아주 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단테가 아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 말은 맞군.”“단테까지 왜 그래요?”“날짜를 정하면 되잖아.”너무 간단하게 나온 말에 엘라가 오히려 멈칫했다. 단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마치 오늘 점심 메뉴를 정하듯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엘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지금요?”“싫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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