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 화

서정원이 짐을 챙기던 찰나에 하은별이 전화를 걸어왔다.

“도대체 얼마나 더 걸려야 완성하는 거죠?”

“이미 완성했어요.”

“뭐라고요? 정말 열심히 검토해 보셨어요?”

하은별은 그녀가 이렇게나 빨리 완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정원은 성격을 꾹꾹 참으면서 말했다.

“네 열심히 검토해 봤고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끊을게요. 전 지금 퇴근해야 하거든요.”

“안 돼요! 지금 퇴근할 수 없어요!”

하은별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서정원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죠?”

“방금 진 대표님이 제게 연락하셨는데 추가해야 할 데이터가 남아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지금 전해주러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럼 그냥 데이터만 전송해 주시죠. 하은별 씨 기다리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거든요.”

“안 돼요. 내용이 아주 복잡한 내용이라 서정원 씨가 아직 혼자 하기엔 무리거든요. 하나라도 틀려서는 안 되는 거니까 저를 기다리고 있으세요. 짜증 내지 마세요. 전 지금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돌아가서 서정원 씨와 함께 야근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니 저한테 짜증 내셔도 소용없어요! 진 대표님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제가 안 받을 순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만약 하은별이 그저 단순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면 굳이 이 늦은 시간에 본인이 와서 같이 야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서정원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서정원은 음악을 들으며 평소 즐겨하던 게임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0분이 지났지만 하은별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서정원은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휴대폰을 보았다. 20분이 더 지나고 하은별이 여전히 나타나지 않자 서정원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오시는 거죠?”

“제가 빨리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더니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더라고요. 지금 길도 엄청나게 막혀서 아마 반 시간 후에나 도착할 것 같네요. 오늘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네요. 진 대표님이 일찍 제게 알리셨다면 저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다시 회사로 갈 필요도 없고 이렇게 길 막히는 일도 없겠죠. 어휴, 기사님. 빨리 좀 부탁드려요! 아주 급한 일이에요!”

하은별의 원망 섞인 하소연을 들으니 서정원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빨리 오세요.”

하은별은 자신의 집에 있었고 서정원이 전화를 끊자 씨익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어. 어차피 기다려도 오지 않을 테니까.’

다시 40분이 지나고 하은별이 여전히 나타나지 않자 서정원의 인내심은 바닥나버렸다.

그녀는 다시 하은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은별 씨, 설마 오늘 저랑 회사에서 같이 밤새우려는 건 아니죠?”

하은별은 얼굴에 팩을 붙이고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자꾸 재촉하세요. 저라고 안 급한 줄 아세요? 서정원 씨가 조급해해도 소용이 없어요. 일단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10분 정도면 무조건 도착할 것 같으니까요. 저기요? 기사님, 빨리 좀 가주세요. 10분 안에는 도착할 수 있는 건가요? 가능하다고요? 네, 그럼 빨리...”

“그럼 10분 더 기다리죠. 10분 후에도 하은별 씨가 나타나지 않으면 전 그냥 갈 겁니다. 데이터는 혼자 알아서 처리하세요.”

서정원이 전화를 끊자 하은별은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휴대폰을 옆으로 던졌고 다시 한가롭게 포도를 뜯어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느낌에 서정원은 하은별의 전화번호를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이 사람 위치 좀 확보해 주세요.”

5분 뒤, 서정원은 답장을 받았다.

하은별의 위치가 잡힌 곳은 아파트 단지였다. 서정원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은별, 감히 이런 식으로 나를 엿 먹인 거야?’

‘그래, 내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네. 하은별 같은 사람이 집에서 달려올 리가 없지!’

서정원은 가방을 챙겨 들고 속으로는 어떻게 복수를 해줄까 생각하며 나갔다. 하지만 몇 발짝도 못 가서 전등이 나가버렸다.

텅 빈 사무실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서정원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황급히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손전등을 켰다.

그녀는 줄곧 어둠을 무서워했다.

그 두려움은 뼛속까지 와닿았다. 서정원은 두려움에 손발이 차가워졌고 온몸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고 책상 밑에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비록 휴대폰 손전등을 켜두긴 했지만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캄캄한 장소에 그녀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서웠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전인가? 그럼 언제 다시 전기 들어오는 거야?’

그녀는 회사 경비팀에 연락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녀에겐 경비팀의 연락처가 없었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