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대체역사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 6화: 동업자, 그리고 진짜 호랑이 3

Share

6화: 동업자, 그리고 진짜 호랑이 3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5:59:30

​"어디 가느냐."

​등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이었다. 잠귀가 밝은 양반이라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깬 모양이다. 사랑방 문을 열고 나온 김덕홍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나는 짐짓 밝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몸이 좀 찌뿌둥해서 운동이나 다녀오려고요. 뒷산에 약초도 좀 캘 겸 해서요."

​"약초? 네가 언제부터 풀뿌리에 관심이 있었느냐."

​형님의 시선이 내 빈손에 머물렀다. 호미도, 망태기도 없었다. 거짓말이 서툰 건지, 형님의 눈치가 백 단인 건지.

​"맨손으로 가는 게 운동이 더 잘 됩니다. 그리고 요즘 산에 칡이 좋다더군요. 형수님 달여 드릴 것 좀 찾아보겠습니다."

​"......"

​김덕홍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어제 왈패들을 쫓아내던 동생의 괴력을 목격한 뒤로, 형님은 나를 대하는 게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걱정과 의구심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

​"추월산(秋月山) 쪽은 가지 마라."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요새 그쪽에 험한 짐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돈다. 나무꾼들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알고 있다.

그래서 가는 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쇼. 제가 뭐 간 덩이가 부은 놈도 아니고, 위험한 데를 왜 가겠습니까. 그냥 동네 뒷동산이나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점심때까진 돌아와라. 오늘은 글 공부를 좀 봐줄 테니."

​"예, 예.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형님의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대문을 나섰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모른 척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오늘 글공부는 땡땡이 좀 쳐야겠습니다. 대신 쌀가마니를 들고 올 테니 용서해 주십쇼.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속도를 높였다.

​타닷.

​발바닥이 흙길을 박차는 감각이 경쾌했다. 전생의 몸이었다면 10분도 안 돼서 헉헉거렸겠지만, 지금의 심장은 지칠 줄을 몰랐다. 펌프질할 때마다 전신으로 뿜어지는 에너지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담양의 진산, 추월산.

​가을 달이 아름답다는 낭만적인 이름과 달리, 산세는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 해발 700미터가 넘는 고지대.

​산 입구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써늘했다.

단순히 기온이 낮은 게 아니었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질감이 달랐다. 끈적하고 무거운, 본능적인 경고 신호.

​숲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새소리도, 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만이 쉬이익 하고 귀신 곡소리처럼 울렸다.

​'영물은 영물이네.'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놈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하위 포식자들은 숨을 죽이고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낙엽을 밟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야옹아, 밥 왔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친 짓이다. 21세기였다면 유튜브 라이브를 켜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같은 제목을 달았겠지. 조회 수는 폭발하겠지만 결말은 뉴스 사회면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

내 피부. 그리고 내 근육.

​어제 왈패의 칼을 막아냈을 때 확신했다. 날카로운 쇠붙이도 뚫지 못하는 가죽이라면, 호랑이 발톱도 견딜 수 있다. 물론 아예 안 아픈 건 아니겠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살점이 떨어져 나갈 일은 없다.

​문제는 '어떻게 잡느냐'다.

​서백설과의 계약 조건은 '상품 가치 보존'.

가죽에 구멍을 내면 안 된다.

그러니 짱돌을 던져서 머리통을 깨부수는 건?

기각.

눈을 찌르는 건?

기각.

​결국 답은 하나다.

​조르기(Choke).

아니면 관절기.

​호랑이한테 암바를 건다라. 상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UFC 헤비급 챔피언도 기겁할 발상이다. 하지만 이 무식한 몸뚱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놈은 어디 있을까.'

​산을 반쯤 올랐을 때였다.

​후욱.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피 냄새, 그리고 짐승 특유의 노린내.

​등골이 오싹해졌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내 몸 안의 야성이 반응한 것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며 전투 태세로 전환되는 감각.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앞쪽 덤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저기다.

​"나오지 그래."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목을 풀었다.

​"손님이 왔으면 마중을 나와야지. 예의가 없네."

​크르르릉...

​땅바닥을 긁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덤불 속에서 두 개의 황금색 불빛이 번뜩였다.

안광(眼光).

​드디어 만났다.

내 사업 자금. 아니, 조선의 산군.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33화: 대장장이 김덕령 2

    "이걸로 속도 문제는 해결됐습니까?""해결되다마다! 자네가 이렇게 펴주기만 하면, 모양 잡고 다듬는 건 일도 아니오! 생산 속도가 열 배, 아니 백 배는 빨라질 거요!"나대용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천재 기술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좋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저는 인간 물방아입니다. 형씨는 집게 잡고 쇠만 대주십쇼."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화덕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익호군 녀석들이 풀무질을 하고, 나대용이 달궈진 쇠를 올리면, 내가 내려친다.콰앙! 콰앙! 콰앙!일정한 리듬으로 굉음이 울려 퍼졌다.마을 사람들은 또 산에서 천둥이 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내 망치질 한 번에 철판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나대용은 그 철판을 가져다가 규격에 맞춰 자르고, 구멍을 뚫고, 담금질을 했다.분업화.산업혁명의 핵심인 그 시스템이, 1591년 담양의 작은 대장간에서 구현되고 있었다.한참을 두드리고 있는데, 서백설이 간식으로 보리개떡을 가져왔다. 그녀는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철판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와... 이게 다 뭐예요? 쇠를 떡 주무르듯이 하네.""돈이다, 돈. 이게 다 거북선 껍데기가 될 거야."나는 땀을 닦으며 개떡을 집어 먹었다."근데 당신, 괜찮아요? 땀을 비 오듯 흘리는데.""괜찮아. 운동 되고 좋지 뭐."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힘들었다. 금강불괴라고 해서 지치지 않는 건 아니다. 에너지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른다. 쓴 만큼 채워야 한다."오늘 저녁은 고기 좀 많이 볶아야겠다. 소 한 마리 잡을까?""미쳤어요? 소가 얼만데!"서백설이 펄쩍 뛰었지만,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쌓여가는 철판을 보며 그녀도 계산이 섰을 것이다. 이 사업, 무조건 된다고.해가 질 무렵.마당에는 얇고 단단한 철판들이 탑처럼 쌓였다.나대용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망치로 두드려보았다.탱- 탱-맑고 청아한 소리.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강철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아름답소. 내 평생 이렇게 완벽한 철은 처음 보오.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32화: 대장장이 김덕령 1

    객주 마당은 아수라장이었다.아니, 활기찬 산업 현장이라고 해두자."야! 거기 돌 똑바로 안 날라? 밥 굶고 싶어?"최가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그의 지시를 받고 흙더미를 나르는 녀석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산채에서 칼 좀 쓴다며 폼 잡던 흑산채 산적들이었다. 지금은 칼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고, 죄수복 대신 땀에 쩐 삼베옷을 입은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놈들은 나를 보면 오줌을 지릴 듯이 피했다. 산채에서 두목의 팔다리가 꺾이는 꼴을 라이브로 봤으니 트라우마가 생길 만도 했다."대장님! 안녕하십니까!"작업을 감독하던 최가가 나를 보고 거수경례를 했다. 폼이 제법 그럴싸했다."어, 고생한다. 애들 말은 잘 듣냐?""말입니까? 아주 순한 양이 따로 없습니다. 개기면 고기 국물도 없다고 했더니 죽어라 일만 합니다.""좋아. 밥은 든든히 먹여라. 힘을 써야 철을 녹이지."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것이 바로 자원 재활용이다. 인간 쓰레기들을 잡아다가 산업 역군으로 재탄생시키는 기적의 연금술.부엌 쪽에서는 구수한 밥 냄새가 풍겨왔다. 어제 구조해 온 여인들이 밥을 짓고 있었다. 미령이가 안방마님처럼 지시를 내리고, 다른 여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서백설이 챙겨준 새 옷을 입으니 다들 때깔이 고와 보였다."대장님! 일어나셨어요?"미령이가 나를 보고 쪼르르 달려왔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숭늉 대접이 들려 있었다.어제보다 나를 대하는 것이 편해진 듯하다. 처음엔 괴물, 그다음엔 나으리, 오늘은 대장님.'다행이다. 그래, 애는 애다워야지.'"세수하고 드세요. 오늘 아침은 고기반찬이에요.""어, 그래. 고맙다."나는 숭늉을 받아 들었다. 따뜻했다."야! 거기 숭늉 안 내오고 뭐 해!"부엌에서 서백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네네, 갑니다요!"미령이가 혀를 쏙 내밀고는 후다닥 뛰어갔다. 가다가 작업 감독하던 최가와 부딪칠 뻔했다."어이쿠! 조심해라, 꼬맹이.""꼬맹이 아니라니까요!"미령이가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31화: 주식회사 익호의 신입 여직원들 3

    "내가 원래는 그냥 보내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여자들 눈물 값은 받아야지."우지끈!"끄아아악!"내 손에 힘이 들어가자 놈의 팔뼈가 나뭇가지처럼 꺾였다. 비명이 산채를 울렸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이건 납치죄."우지끈!왼팔이 꺾였다."이건 폭행죄."퍼억!무릎을 밟아 분질렀다."이건 정신적 피해 보상."퍼억!반대쪽 무릎까지 밟았다."끄... 끄윽... 컥..."두목은 사지가 뒤틀린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거품을 문 입에서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죽이지는 않았다.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줘야 하니까."최가야. 이 새끼 묶어서 수레에 실어라.""옛? 이놈도 데려갑니까?""그래. 배달 갈 데가 있거든."나는 놈을 짐짝처럼 수레 구석에 던져넣었다."출발한다! 전리품 챙겨서 집으로 간다!""와아아아!"행렬이 다시 움직였다.올 때는 몽둥이 든 장정뿐이었지만, 갈 때는 쇠와 곡식, 새로운 식구들, 그리고 인간 쓰레기 하나까지 한가득이었다.하산하는 길. 우리는 담양 관아 앞을 지나갔다.야밤이라 관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보초 서는 포졸들은 졸고 있었다."멈춰."나는 수레에서 사지가 꺾인 산적 두목을 끌어내렸다. 놈은 고통에 기절해 축 늘어져 있었다.나는 놈을 들어 올려 관아 대문 앞에 냅다 던졌다.쿠당탕!"누, 누구냐!"졸고 있던 포졸들이 화들짝 놀라 창을 겨눴다. 횃불 아래 드러난 건,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진 산적 두목과 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였다."현감 나으리한테 전해라."나는 포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흑산채 두목 배달 왔다고.""흐, 흑산채? 산적 두목?"포졸들이 기겁하며 두목의 얼굴을 확인했다. 수배 전단에 붙어있던 그 흉악한 얼굴이 맞았다."그리고 하나 더 전해."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이놈 목에 걸린 현상금. 내일 아침까지 담양 객주로 보내시라고. 떼먹을 생각 마시라고 해라. 안 그러면..."나는 관아 옆에 서 있던 장승을 주먹으로 툭 쳤다.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30화: 주식회사 익호의 신입 여직원들 2

    아. 맞다.여기는 2025년이 아니지.1591년, 조선이다.여자의 정절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미친 나라. 납치당해서 강간을 당해도, 피해자가 위로받기는커녕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받는 야만의 시대. 심지어 미령이처럼 아직 당하지 않았더라도, 산적 소굴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낙인이 찍히는 세상.가족들도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왜 혀 깨물고 죽지 않았냐"며 은장도를 던져주는 게 이 시대의 '도덕'이었다."죽여주십시오."미령이가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아직 몸은 더럽혀지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죽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여기서 죽게 해주십시오."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줄줄이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죽여주세요!""제발 죽여주세요!"기가 찼다.살려놨더니 죽여달라니.이게 나라냐.전생의 나는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진짜 헬조선은 여기 있었다. 피해자가 죄인이 되는 세상.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치밀었다. 도적 놈들에게? 아니, 이따위 세상을 만든 꼰대들에게."그만!"내가 고함을 지르자 통곡 소리가 뚝 그쳤다. 여인들이 겁에 질려 나를 쳐다보았다."죽긴 왜 죽습니까? 당신들이 뭘 잘못했다고?"나는 씩씩거리며 말했다."잘못은 납치한 도적 놈들이 했고, 못 지켜준 나라가 했고, 힘없는 가장들이 한 거지. 당신들은 피해잡니다. 살아서 돌아가는 게 복수고, 잘 먹고 잘사는 게 이기는 겁니다."하지만 여인들의 눈빛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내 말이 그들에게는 딴 세상 언어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미령이마저 고개를 젓고 있었다.'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나는 머리를 굴렸다.이 여자들을 받아줄 곳이 있을까. 편견 없이, 능력으로만 사람을 봐줄 곳.있다.딱 한 군데.바로 나, 그리고 서백설이 있는 곳."좋습니다. 집으로 못 가시겠다면, 취직이나 하시죠.""네...? 취... 뭐요?"미령이가 젖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갈 곳 없으면 저 따라오십쇼. 밥 주고, 옷 주고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29화: 주식회사 익호의 신입 여직원들 1

    "심 봤다! 아니, 철 봤다!"최가의 호들갑스러운 고함 소리가 산채를 울렸다.창고 안은 그야말로 보물섬이었다.시커먼 무쇠 덩어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한쪽에는 일본으로 밀반출되려던 곡식과 포목이 가득했다. 심지어 관아 마크가 찍힌 무기 상자까지 있었다.현감 이 자식, 도적들이랑 짬짜미를 아주 제대로 해 먹었구만.아... 현감. 자꾸 보고 싶게 만드네.그 포동포동한 뺨따귀, 손맛이 아주 짜릿할 것 같은데 말이야."싹 다 챙겨. 못 하나, 쌀 한 톨 남기지 마."내 명령에 익호군 녀석들이 신나서 짐을 날랐다. 지게가 부족해 산적들이 쓰던 수레까지 동원해야 했다.이 정도 양이면 충분하다.나대용이 노래를 부르던 거북선의 철갑을 두르고도 남을 양이다. 거기에 우리 애들 무장시킬 칼과 창, 조총까지 만들 수 있다.'오늘 밤 일당은 제대로 챙겼네.'나는 흐뭇하게 짐 나르는 꼴을 구경하며 육포를 씹었다. 짭짤한 게 술안주로 딱이었다.그때였다."대... 대장님! 이쪽으로 좀 와보셔야겠습니다!"안쪽 건물을 뒤지던 춘식이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왜? 뭐 또 좋은 거라도 나왔냐? 금괴라도 있어?""아닙니다! 그게... 사람이 있습니다.""사람? 도적 놈들 남았어? 그럼 그냥 보내줘. 우린 살생은 안 하니까.""그게 아니라... 여자들입니다."춘식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나는 씹던 육포를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춘식이가 안내한 곳은 산채 가장 구석진 곳, 바위굴을 개조해 만든 감옥이었다. 입구부터 지린내와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빗장이 걸린 쇠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횃불을 비추자 참혹한 광경이 드러났다.열 명 남짓한 여인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구석에 몰려 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드러난 살결에는 멍 자국과 채찍 자국이 선명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공포와 절망 그 자체였다.산적 놈들이 납치해 온 양민의 딸, 혹은 부녀자들이었다. 놈들이 이들을

  •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28화: 산적 토벌 작전 2

    ​"비켜라."​나는 뒷걸음질 치는 부하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내 앞을 막아선 도적 하나. 험상궂게 생긴 놈이 칼을 겨누고 있었다.​"넌 뭐냐? 덩치만 믿고 까부는 거냐?"​놈이 칼을 휘둘렀다. 목을 노린 예리한 일격.​나는 피하지 않았다.대신 왼손을 뻗었다.​탁.​칼날이 내 손바닥에 잡혔다.​"......?"​도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맨손으로 칼날을 잡았다. 피가 철철 흘러야 정상인데, 내 손에선 오히려 쇳소리가 나는 듯했다.금강불괴.​"이런 건 과일 깎을 때나 쓰는 거야."​나는 놈의 눈을 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빠각!​강철로 만든 칼날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부러졌다.​"히익!"​놈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내 오른주먹이 놈의 명치에 꽂혔다.​퍼억!​놈의 몸이 'ㄱ' 자로 꺾이며 10미터 뒤로 날아갔다. 흙바닥에 처박힌 놈은 꿈틀거리지도 않았다.​정적.전장의 소음이 일순간 멈췄다. 도적들도, 익호군들도 얼어붙었다.​나는 부러진 칼날 조각을 바닥에 툭 던졌다.​"다음."​낮게 깔린 내 목소리가 산채를 울렸다.​도적들의 눈빛이 흔들렸다.저건 인간이 아니다. 칼을 맨손으로 부러뜨리는 괴물.​"대... 대장님 만세!"​최가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봤냐! 우리 대장님은 칼도 안 들어간다! 다 죽여!"​"와아아아!"​사기가 다시 역전되었다. 우리 편 대장이 천하무적이라는 사실만큼 든든한 백은 없다. 익호군 녀석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으아악! 살려줘!""도망쳐! 저 괴물한테서 도망쳐!"​도적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칼이 안 통하는 상대랑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놈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다.​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누구냐! 내 구역에서 행패 부리는 놈이!"​산채 가장 안쪽, 두목의 처소 문이 열렸다.곰 가죽을 두르고, 양손에 쌍칼을 든 거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흑산채 두목.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지만, 덩치는 만만치 않았다. 얼굴에는 길게 칼자국이 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