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땅을 박차고 놈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회전 회오리 슛... 이 아니라, 회전 방망이질.부웅- 퍽! 억!360도 회전하며 휘두른 미숙이에 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갑옷이 찌그러지고 뼈가 나가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꺾인 놈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괴물이다! 도망쳐!"놈들의 전의가 완전히 꺾였다.안코쿠지 에케이는 이미 상황이 글렀다는 걸 파악했는지, 본대를 이끌고 금산성 쪽으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쫓지 마라! 성 안으로 들어가면 못 잡는다!"나는 흥분해서 쫓아가려는 익호군들을 말렸다.금산성은 견고하다. 공성 장비 없이 들이닥쳤다가는 위에서 쏘아대는 조총과 화살에 역관광 당하기 딱 좋다. 궁지에 몰린 쥐를 너무 몰아붙이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여기서 만족해야 했다.적의 기습 부대를 섬멸하고, 700 의병을 살려낸 것. 그것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상황 종료!"내 외침에 전투가 멈췄다. 전장에는 신음 소리와 피 냄새만이 남았다.나는 미숙이에 묻은 피를 풀밭에 쓱쓱 닦고 조헌에게 다가갔다.영규 대사는 의병들의 부축을 받고 지혈 중이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조헌은 멍하니 불타버린 왜군 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영감님.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내가 묻자, 조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이겼어... 우리가... 이겼어...""네. 이겼습니다. 아주 압도적으로요."나는 씨익 웃었다."제가 말했잖습니까. 죽는 것보다 이기는 게 낫다고. 죽어서 이름 남기면 뭐합니까? 살아서 승전보 울리는 게 진짜 애국이지."조헌의 어깨가 들썩였다.평생을 성리학적 명분에 갇혀 살았던 늙은 선비. 그에게 전쟁은 곧 '충(忠)을 위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화약과 전술, 그리고 압도적인 무력이 만들어낸 승리의 쾌감을. 그리고 살아남은 부하들의 안도하는 표정을."살아서... 내 병사들이 살아서 돌아가는구나.
콰직!내 손에 들린 미숙이가 왜병의 투구를 강타했다. 쇠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끔찍한 화음을 이뤘다.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진동.역시 흑단목이다. 참나무였다면 벌써 부러졌을 텐데, 이놈은 쇠몽둥이마냥 짱짱했다."비켜!"나는 쓰러지는 놈을 발로 차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 앞을 막아선 왜군 창병들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당연하겠지.멀쩡하던 진영이 갑자기 폭발하고,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지더니, 산 위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내려왔으니까. 놈들의 지휘 체계는 이미 박살이 난 상태였다."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최가가 낫을 휘두르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익호군 녀석들은 신이 나서 날뛰었다. 훈련 때 흘린 땀방울이 전장에서의 생존율로 보상받고 있었다. 놈들은 3인 1조로 움직이며 당황한 왜군들을 하나씩 각개격파하고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놈들! 네놈들이 조선 땅을 더럽히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백발을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는 노인. 조헌이었다.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으러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던 꼰대 영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늙은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낸 것 같았다.서걱!조헌의 칼이 왜병의 어깨를 깊숙이 베었다. 문신(文臣) 출신이라 무시했는데, 칼솜씨가 제법이었다. 악과 깡으로 싸운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나무아미타불! 지옥으로 가거라!"그 옆에서는 영규 대사가 거대한 철장(쇠지팡이)을 풍차처럼 돌리고 있었다. 스님의 쇠지팡이에 맞은 왜군들은 허수아비처럼 날아갔다. 살생을 금하는 불가(佛家)의 제자라기엔 타격감이 너무 찰졌다.전황은 우리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하지만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의 지휘관은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승려 출신의 다이묘였다. 그래서인지 적들 중에는 머리를 깎고 기괴한 승복에 갑옷을 걸친 승병들이 섞여 있었다."조센징! 죽어라!"승병 하나가 나기나타(월도)를 휘두르며 내게 덤벼들
붉은 불기둥이 치솟고, 바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폭심지 근처에 있던 일본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주변에 있던 놈들은 충격파에 휩쓸려 낙엽처럼 날아갔다."끄아아악!""화산이 터졌다!"아비규환.정돈되었던 일본군 진형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조총수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쳤고, 승병들은 염불을 욀 새도 없이 불타올랐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보셨습니까, 영감님."나는 넋이 나간 조헌을 내려다보았다."저게 제가 싸우는 방식입니다. 내 피는 한 방울도 안 흘리고, 놈들의 피로 강을 만드는 거.""......""의(義)요? 좋습니다. 훌륭하죠. 근데 죽어서 지키는 의가 무슨 소용입니까? 살아서 놈들 목 하나라도 더 베는 게 진짜 의 아닙니까?"조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불타오르는 적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평생 믿어왔던 '죽음의 미학'이,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그때, 옆에서 "으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영규 대사가 깨어났다.그는 부스스 일어나 앉더니, 산 아래의 불바다를 보고 눈을 비볐다."허... 내가 지옥에 온 것인가? 염라대왕이 불놀이를 하는구먼.""아직 이승입니다, 스님."내가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그리고 저 불놀이는 제가 한 겁니다."영규 대사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허허허! 대단하군. 자네가 우리를 살렸어."그는 조헌의 어깨를 짚었다."중봉(조헌의 호). 고집 그만 피우시게. 부처님도 개죽음은 원치 않으실 걸세. 저 젊은이 말이 맞아. 이기는 게 중요해."조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이 강한 노인이었지만,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서 독기가 빠져나가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감정이 들어차고 있었다. 인정. 그리고 전율."네놈... 이름이 뭐라고 했지?""김덕령입니다.""덕령이라..."조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이 무식한 놈! 상놈! 도적놈!"등 뒤에서 찰진 욕설이 랩처럼 쏟아졌다.조헌 영감님. 연세도 지긋하신 분이 폐활량 하나는 기가 막혔다. 산을 오르는 내내 쉬지도 않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영감님. 혀 깨무십니다. 좀 조용히 가시죠."나는 짐짝처럼 둘러멘 조헌을 추스르며 산길을 올랐다.내 왼쪽 겨드랑이에는 기절한 영규 대사가 끼여 있었다. 덩치 큰 스님이 축 늘어져 있으니 무게가 꽤 나갔지만, 내게는 솜이불 정도였다."네놈이 감히 의병장을 능멸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내 당장 내려가서 왜적과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게 선비의 도리거늘!"조헌이 내 등짝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안마받는 기분이었다."도리 좋아하시네. 개죽음 당하는 게 도리입니까?"나는 씩씩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뒤를 돌아보니 가관이었다.700명의 의병들이 쭈뼛거리며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대장이 납치되어 가니 구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납치범(나)이 너무 강력해 보여서 덤비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가자니 의리가 없고.그야말로 오리 떼가 어미 오리 따라오듯 줄줄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빨리 가자! 밥 줄 테니까!"최가가 맨 뒤에서 양치기 개처럼 의병들을 몰았다.우리가 도착한 곳은 금산성 맞은편, 험준한 산봉우리였다.아래로는 조헌이 원래 진을 쳤던 연곤평(눈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였다."도착했습니다."나는 조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영규 대사도 옆에 뉘었다. 스님은 아직도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내가 급소를 너무 정확하게 쳤나 보다."쿨럭! 이, 이 괘씸한..."조헌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지팡이를 찾았다. 없으니까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나를 겨눴다."네놈이 나를 욕보였어! 내 오늘 너를 죽이고 저승에 가겠다!"독기 어린 눈빛.진짜로 찌를 기세였다.나는 피하지 않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죽이려면 죽이쇼. 근데 그전에 구경이나 좀
전쟁에서 이기는 게 장땡이지, 방식이 뭐가 중요한가. 이 양반은 전쟁을 무슨 예법 대결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영감님. 전쟁은 소꿉장난이 아닙니다. 이기면 충신이고 지면 역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죽이는 게 군인의 본분 아닙니까?""말버릇 보게!"조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군인에게 중요한 건 기개와 명분이다! 오랑캐 놈들처럼 비열한 술수를 쓰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낫다!"전형적인 꼰대 논리.죽어서 이름을 남기면 뭐 하나. 내 가족, 내 백성은 다 죽어나가는데."그래서, 저 수많은 백성을 데리고 죽으러 가시겠다는 겁니까?"나는 밖을 가리켰다."저기 있는 700명.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입니다. 영감님 명예 챙기자고 다 죽이실 겁니까?""이, 이 무식한 놈이!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의(義)를 보이러 가는 것이다!"조헌이 지팡이를 바닥에 쾅 찍었다."우리가 여기서 피를 뿌려야, 잠자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이 깨어날 것이다! 조정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우리는 불쏘시개가 되러 온 것이다!"말이 안 통한다.이 사람은 군사적 승리가 목적이 아니었다. '순국(殉國)'이라는 거대한 퍼포먼스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다.숭고하다. 인정한다.하지만 나는 그 꼴 못 본다.살아서 싸울 수 있는 700명의 병력을, 고작 불쏘시개로 태워버리는 건 낭비다. 그것도 내 눈앞에서."영감님."나는 목소리를 깔았다."저는 장사꾼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합니다. 저 아까운 인력을 잿더미로 만드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네놈이 못 보면 어쩔 텐가? 썩 물러가라! 내일 날이 밝으면 우리는 진격한다!"조헌은 완고했다. 벽창호가 따로 없었다.옆에 있던 영규 대사가 나직하게 거들었다."젊은이. 뜻은 고마우나, 우리 대장의 고집은 황소도 못 꺾네. 그냥 돌아가게."황소?황소라.내가 제일 잘 다루는 게 황소인데.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
"밀어! 바퀴 빠졌다!"진흙탕에 빠진 현무 2호기를 꺼내느라 익호군 녀석들이 끙끙거렸다.이치 고개에서 금산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강행군. 전투 직후라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쉴 틈이 없었다.나대용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바퀴 축을 살폈다."대장, 무리요. 현무들이 한계에 다다랐소. 바퀴 살이 휘고 축이 틀어져서, 이 속도로는 금산까지 하루 꼬박 걸릴 거요.""하루면 늦습니다. 그 영감님 성격에 벌써 들이받았을지도 모릅니다."나는 초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조헌(趙憲).호는 중봉(重峯).임진왜란 의병장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조선 최고의 '꼰대'로도 유명했다.그는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리던(지부상소) 강성 인물이었다. 타협이란 걸 모르는 불같은 성격. 그런 양반이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성에 틀어박힌 왜군을 치러 갔다.역사대로라면, 그는 내일 아침 전멸한다.함께 간 승병장 영규 대사도, 이름 없는 의병들도 모조리.그 아까운 목숨들을 역사책의 한 줄로 남게 할 순 없었다."최가야.""예, 대장님. 헉헉."최가가 혀를 빼물고 달려왔다."현무는 천천히 오라고 해. 나대용 형씨한테 맡기고, 우린 정예 요원만 추려서 먼저 뛴다.""뛰어서 말입니까? 여기서 금산까지요?""그래. 다리 튼튼하잖아. PT 체조로 단련된 허벅지를 믿어라."나는 미숙이를 허리춤에 단단히 묶었다."늦으면 다 죽는다. 살리고 싶으면 뛰어."우리는 산길을 달렸다.전생의 나는 5분만 뛰어도 숨이 찼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자이저였다. 산을 타고 계곡을 넘었다.한밤중이 되어서야 금산성 인근, 눈벌(연곤평)이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허억... 허억... 대장님... 도착했습니다..."최가와 병사들이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하지만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금산성.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