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문을 닫지 않아 들어오는 찬바람과 실내의 넉넉한 따뜻함이 대조적으로 느껴져 성유리도 지금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느껴질 뿐이었다.한참 만에 목소리를 찾은 그녀는 중얼거리듯 물었다.“그러니까 내 설명도 듣기 싫다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성유리, 이 세상은 결과만 보면 돼.”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결과는?무엇이 결과란 말인가?결과는 그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누워 인사불성이 되었고 그 유서가 그녀의 손에서 그의 손까지 온 것이다.결국, 그는 그들이 이제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심지어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도 그녀에게 인색했다.성유리는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문득 그동안 그들이 함께 지냈던 시절을 떠올렸다.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침대에서 속삭이던 다정한 모든 장면...그 박한빈들이 눈앞의 그와 서서히 겹쳤다.하지만 그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갑고 매몰찼다.마치 쓸모없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듯 그는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얼마 전의 일들은 모두 자신의 상상인 것만 같았다.“그래요.”마침내 성유리는 이 말을 뱉었다.그녀는 사실 오늘 여기 온 것은 그에게... 모든 걸 해명하려는 것뿐이었다.그녀는 심지어 문밖에서 기다리며 졸렬한 고육책을 연출하기까지 했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결과만 본다고...’과정이 더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그는 신경 안 쓴다는 뜻이니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그럼 가볼게요.”성유리는 이런 말을 남기고 그냥 돌아섰다.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성유리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코트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을 꽉 잡았다.“안 작가님이 청첩장을 보내주셨어.”박한빈은 그녀
심지어 아까 첫술보다 더 맛이 없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채 그 하얀 그림자를 보았다.그는 높은 층에 서 있었는데 아래층의 모든 물건은 이때 희미한 점으로 변했다.하지만 그때 박한빈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쓰레기통 옆에 서서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박한빈은 갑자기 술잔을 꽉 움켜쥐었는데 한참 후에야 서서히 풀었다.자신이 결코 감정을 중요시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신 덕분이었다.지금 그녀를 생각하면 박한빈은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와 겉으로 드러나는 미소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어머니에게 사고가 나기 전까지 박한빈은 그녀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다.박한빈은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일찍이 그녀의 몸 안에 존재했었는데 작은 탯줄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감정은 그녀의 유서를 보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그녀는 그에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떠나려 했다.떠나면서 그녀는 그 ‘혼외자'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함께 주었다.그녀 명의의 모든 재산과 주식도 그에게 남겼는데 그 재산들은 지화 그룹 외의 것이었다.만약 어느 날 다른 사람들과 더는 경쟁하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고 하면서 이 재산은 그가 먹고 입는 걱정 없이 살기에 충분하다고 했다.그녀의 아이로서, 사실 그녀의 가장 큰 희망은 그가...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아이러니하게 지난 30년 동안 그녀는 그에게 어떤 칭찬의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예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녀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유서에서 박한빈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김서영이 박씨 집안의 미래 후계자에게 주는 감정이 아니라 평범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었다.그걸 깨달은 순간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니 불쌍하고
박한빈은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그는 처음으로 병원 보안요원에게 그들을 내쫓으라고 했다.연약해 보이는 두 노인은 끌려갈 때 욕설을 퍼부으며 기자를 찾아가 아들이 박씨 가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했다.당시 박한빈은 차갑게 한마디만 했다.“그렇게 해요.”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한 그 태도는 사람의 마음에 서리가 내리게 했다.박한빈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잠시 후, 서훈이 달려와 미화로 쪽에 있는 물건들을 이미 시월파크로 옮겼다고 보고했다.박한빈이 알았다고 한마디만 하자 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 성유리 씨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병이 난 것 같아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사실 이 일은 성유리 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성유리 씨에게 화를 내신 거예요?”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쳐다보았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을 그냥 삼켜버리고 속으로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정말 병이 났다.찬바람에 몇 시간씩 앉아있었으니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그녀는 원래 늘 비상약을 집에 두고 있었지만 약을 먹기 직전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천천히 약상자를 내려놓고 따뜻한 물 한 잔만 따라 마셨다.다행히 그녀의 상황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이틀 동안 집에 누워 있었더니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지만 기침만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특히 밤이면 원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연이은 기침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어려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해졌다.‘왜 또 그럴까’에 대한 심경에서 ‘역시 그래’로 바뀌었다.사실 박한빈의 마음을 믿은 적은 없다.그들의 감정이 가장 ‘불타오를'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거절하는 것을 배워내지 못했을 뿐인데 비소를
성유리는 말을 하지 못했다.그녀도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입까지 나온 말을 다시 삼켜 버렸다.이 일들을... 박한빈은 아마 다 잊었을 것이다.오죽했으면 이곳에 와서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했겠는가.그래서 성유리는 그와 그녀 사이의 ‘뜨거운' 감정도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마치 그녀가 그를 좋아할 때 그들이 함께 지내는 모든 일, 모든 세부 사항을 머릿속에 새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그녀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들이... 속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이번에 혼자 도인국에 온 성유리는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찾았다.가이드는 이쪽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었는데 깔끔한 단발머리에 열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다.“성유리 언니죠?”성유리가 짐을 찾자마자 그녀가 다가왔는데 손에는 ‘성유리’라는 이름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사하나예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안녕.”“호텔 예약했으니 바로 가면 돼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 그녀를 앞으로 안내했다.그녀는 전문적인 가이드였는데 가는 내내 성유리에게 이곳의 풍경을 소개하고, 성유리의 음식 취향을 물으며 그녀에게 맞는 레스토랑을 추천했다.“내일 단풍사부터 가봐요. 마침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서하나가 말했다.“최근 단풍사가 갑자기 핫해서 휴일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그래.”성유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사하나는 성유리의 냉담함을 느끼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다행히 앞으로 이틀 동안 그들은 즐겁게 지냈다.성유리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하나의 스케줄에도 이의가 없었다. 사하나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탄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했다.사흘째 되던 날, 성유리는 한 바에서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
“아까 저 사람 전 남자친구예요?”룸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가 직접 성유리에게 물었다.성유리는 먼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에요? 하지만 두 사람이...”“전남편이야.”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뒤에야 손뼉을 치며 말했다.“생각났어요. 금성의 지화 그룹 그분 아니에요?”“아는 사이야?”“음... 아는 사이라 할 수도 있죠. 국내 뉴스를 지켜봤는데 다른 회사 대머리 느끼한 남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이잖아요.”성유리는 웃기만 했다.“그럼 아까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군데 유리 언니에게 언니라고 어떻게 부르나요?”“부모님이 입양한 딸이야.”성유리의 말에 너무 많은 정보량이 담겼는지 사하나의 입이 달걀 하나라도 집어넣을 수 있을만큼 벌어졌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었다.“하지만 이젠 두 사람 모두 나랑 아무 관계가 없어. 며칠 동안... 재미있게 놀았어. 고마워.”사하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두 글자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모른 척 술잔만 따라 들었다.“그럼 됐어요. 다음에 다시 오면 또 절 찾아요.”“그래.”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 속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이곳의 술 도수는 사실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성유리는 맵고 쓰려 눈물을 흘릴 뻔했다.사하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급하게 마셔서 그래요. 하지만 이틀 전에 술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왜 갑자기 마시는 거예요?”“응, 오늘은 마실 수 있어.”성유리는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그녀는 원래... 하늘이 또 자신을 불쌍히 여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허사가 됐다.아마 처음부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른다.많은 것은 그녀가 평생 얻지 못할 운명일 지도 모른다.온전한 가정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아이든 말이다.스물여섯 살 먹도록 성유리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그녀는 술을 마셔서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유리는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인한 뒤 그를 불렀다.“박한빈?”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마치 아까 그가 바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눈이 와요.”성유리는 그의 표정을 개의치 않는 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요. 눈이 엄청 많이 와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곳의 눈은 확실히 금성보다 더 아름다워요. 그래도 저는 금성의 눈이 더 좋아요.”성유리는 중얼거리며 계속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박한빈이 팔을 꽉 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하지만 금성은 너무 추워요.”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물론 여기도 춥죠. 이번 겨울은... 참 기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졌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허리를 숙여 안아 올렸다.“한빈 오빠!”가게에서 나오던 심유정이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없이 달려들려고 했다.그러자 사하나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뭐 하는 거야? 비켜! 내가 누군지 알아?”성유정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는데 그 흉악한 모습은 방금 박한빈 앞에서 보여줬던 부드러움과는 완전히 달랐다.사하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요?”...박한빈은 그렇게 성유리를 안고 가버렸다.멀리 성유리는 아직도 성유정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달빛과 가로등을 비추어 남자의 얼굴도 어느 정도... 부드럽게 느껴졌다.이런 부드러움은 성유리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더없이 단호하던 그의 모습도 본 적이 있다.지금 성유리 앞에 나타난 이 모습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갑자기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끝내 참
성유리는 여전히 도인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매년 관광객들로 붐비고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이곳을 좋아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단지 빨리 금성으로 돌아가서 그녀만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성씨 가문에서 찾아왔다.윤청하가 위독하다고 했다.성시원이 그동안 알맞은 신장이식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성유리는 친딸로 의료적으로도 이식 적임자였다.성유리는 거의 강제로 차에 태워졌는데 성시원을 본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요? 날 억지로 수술대에 올려놓고 싶어요?”성시원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손을 흔들어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러고는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원하는 게 뭐야?”성유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당신 아내에게 분명히 말했었는데요? 회사를 주면 할 게요.”“회사는 내 피와 땀이야.”“그럼 당신의 아내는 뭔가요?”성유리가 되묻자 성시원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졌다.성유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장 일어나 떠나려 했다.하지만 곧 성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술만 한다면 성씨 가문의 모든 재산 상속권을 줄 수 있어.”“헐, 당신이 죽으면 준다고요?”성유리의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성시원은 결국 화를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당신이 언제 죽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유언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당신들은 이미 어떠한 신용도 없다는 거예요.”“성유리, 너무 그러지 마!”성시원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난 네 아버지고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너의 어머니야. 엄마가 없으면 네가 있을 수 있겠어? 한때는 피를 나눈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알고 있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만약 그날이 온다면... 내가 직접 보내드릴 거예
성유정의 말이 끝나자 성시원의 얼굴빛은 갑자기 변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문득 성유정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이 지독한 생각을 뱉을 수 있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성유정도 이를 의식한 듯 황급히 말했다.“전 그저 엄마가 살아있길 바랄 뿐이에요. 아빠도 보셨잖아요. 엄마가 병마에 시달려서 어떻게 되었는지. 전 정말... 차마 지켜볼 수 없었어요.”성시원은 말을 하지 않았다.비록 그도 성유리가 죽어가는 엄마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을 원망하고, 그녀가 죽기를 수없이 저주했지만 성유정의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맞은편에 있는 성유정도 별말 없이 고개만 치켜든 채 그를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봤다.마침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족들 다 왜 여기 있어요? 빨리 와요.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이 말을 들은 성시원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여 바로 달려갔지만 윤청하는 이미 응급실에 실려 갔다.성시원이 도착했을 때, 의사는 그에게 위독 고지서를 건네줬다.성시원은 손을 떨며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아빠...”성유정은 울면서 그를 바라보았다.“엄마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에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성시원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곳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냉정해 보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성유정은 그의 말을 듣고 일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켜진 수술 등을 힐끗 보았다.죽도록 억누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심지어 웃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 같았다.“아빠, 만약 정말 손을 쓴다면 우리가 직접 할 수는 없어요.”성유정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나서 말했다.“잊었어요? 지금 성유리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지석민이어야 해요.”“맞는 말이야.”성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하지만 지석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아?”“찾아보라고 하면 알아요.”성유정은
“그렇지? 어제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아이가 없어졌다는 소식 듣자마자 바로 다 흩어지더니 오늘은 누구도 찾아오지 않네.”“모두 다 자식 덕분에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하잖아. 농담인 줄 알았어? 아이만 있으면 최소한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이도 없으니 정말... 아무런 희망도 없지. 이렇게 살 이유가 있을까?”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다 등 뒤에서 문득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급하게 뒤를 돌아본 그들이 본 사람은 박한빈이었다.여자들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박한빈을 보고는 더 이상 말도 못 했다.“꺼져.”박한빈은 이를 꽉 깨문 채 꺼지라는 두 글자만 내뱉었는데 두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겁먹은 채 서둘러 도망갔다.잠시 후, 박한빈은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발을 내디뎠다.성유리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본래 야위었던 얼굴이 하루 만에 풍선이 바람 빠진 것처럼 변해 있었다.눈가와 볼이 움푹 패였고 얼굴은 마치 물에 불린 듯 창백했다.성유리의 뺨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두 손은 침대 시트를 꽉 잡고 있었다.마치 꿈속에서조차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자 성유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그들의 시선이 마주치자 박한빈은 이 순간이 어색하고 어눌하게 느껴졌다.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성유리가 곧 박한빈에게 선택을 내려줬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침대 시트를 움켜잡고 뒤로 물러났다!경계심 가득한 눈빛은 마치 박한빈이 성유리의 적처럼 보이게 했다.박한빈은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그때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돌아오셨어요?”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응.”“아이가... 없어졌어요.”성유리는 다시 말했다.목소리는 쉰 듯했지만 차분하게 들렸다.그녀가 이 말을 할 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박한빈은 경매가 끝난 뒤에서야 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았다.소식을 들은 즉시 박한빈는 항공편을 바꿔 급히 금성으로 돌아왔다.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병원 복도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지만 주변은 고요했다.오직 박한빈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함 속에서 뚜렷하게 울렸다.그러다 그는 성유리를 보았다.성유리는 병상에 앉아 있었다.곁에는 이미 깊이 잠든 간병인이 있었는데 정작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달빛 아래 그는 아주 또렷이 볼 수 있었다.성유리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그건 박한빈이 처음으로 보는 성유리의 눈물이었다.성유리는 그의 앞에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감정 기복이란 게 없는 줄로만 알았다.그러나 바로 지금, 제대로 깨달았다.성유리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그녀도 슬퍼할 줄 알고 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다만 지금껏 박한빈이 몰랐던 건 성유리가 그를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지금 성유리는 울고 있으면서도 입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저 덜덜 떨리는 어깨만이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박한빈은 처음엔 당장 달려 들어가 성유리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하지만 이내 생각했다.지금 이 순간, 성유리가 과연 자신을 보고 싶어 할까?자기 앞에서조차 감정을 드러내길 꺼렸던 사람이다.그런 성유리가 과연 박한빈이 자신의 눈물을 보는 걸 원할까?그래서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결국 돌아섰다.집으로도 가지 않았다.그저 기사에게 회사로 가자고 했다.박한빈의 휴대폰엔 비서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경매에서 낙찰된 목걸이가 검수를 마쳤다는 내용이었다.그리고 성유리의 배송 주소를 입력할지 묻는 질문도 함께였지만 박한빈은 아무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그저 휴대폰을 옆에 툭 던지고는 두
“걱정 마세요. 여기서는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그러니 따님 먼저 데리고 돌아가 주세요.”윤청하는 뭔가 더 말하려다 김서영을 한번 바라보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하려던 말을 삼켰다.그리고 성유정의 팔을 잡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안 돼... 안 돼요! 가지 말라고.”그제야 성유리는 겨우 목소리를 되찾았고 몸을 버둥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쫓아가려 했다.하지만 윤청하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몸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이러다간 정말 죽어!”“쟤가 절 밀었어요. 절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렸다고요.”성유리는 손을 뿌리치고 이성을 잃은 듯 윤청하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잡았다.“왜 안 잡아? 왜 안 잡냐고. 성유정... 쟤가 내 아이를 죽였는데 왜 아무도 안 잡아!”“왜 다들 성유정 편만 드는 거야?”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들 마음속에서 자신은 언제나 성유정보다 못하다는걸.성유정은 말도 잘하고 사람 마음도 사로잡을 줄 알고 무엇보다 그녀보다 훨씬 더 깨끗해 보이니까.성씨 가문 사람들과 김서영, 그리고 박한빈조차도 그랬다.그러나 성유리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단 한 번도 성유정의 자리를 뺏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하지만 아이만은 달랐다.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왜 애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도대체 왜 세상에 태어날 기회조차 빼앗겨야 했을까?그때, 김서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가 말한 CCTV, 내가 확인해 보라고 했어.”성유리가 윤청하의 옷깃을 꼭 쥔 채 흥분해 있을 때 김서영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렇지만 당시 네트워크 점검 중이라 영상이 찍히지 않았어.”“그러니까 유리야, 그건... 그냥 사고였어.”김서영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성유리의 얼굴에 떠오르던 모든 표정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손도 힘없이 천천히 내려왔다.그리고 성유리는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툭 하고 침대에 쓰러졌다.‘사고?’그러니까 자신의 뱃속에서 함께 숨 쉬며 네 달 가까이
“유리야.”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가에 닿았다.성유리는 사실 이미 깨어 있었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상대는 성유리의 떨리는 속눈썹을 알아챈 듯 곧장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깨어났으면 뭐라도 먹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지금은 네 몸이 가장 중요해.”그 말이 끝난 뒤에야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김서영을 한참 바라보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CCTV는 확인했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서영은 순간 멈칫했다.“2층 계단 입구... 거기 CCTV 있잖아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다 찍혔을 거예요. 그때... 성유정이 절 밀었어요. 경찰에 신고했어요?”그 순간, 윤청하가 성유정을 데리고 방에 들어섰다.원래도 창백하던 성유정의 얼굴은 성유리의 말을 들은 순간 핏기마저 완전히 가셨다.그녀는 곧장 김서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 아니에요. 어머님, 전 정말 아니에요!”“언니, 언니가 아이를 잃어서 마음 아픈 거 알아. 근데 난 정말 그런 짓 안 했다고.”성유정은 곧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언니 몰랐겠지만... 나 요즘 계속 언니 아이를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했어. 옷도 여러 벌 샀단 말이야. 난 아이의 미래 이모였어. 그런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성유정은 흐느끼며 울먹였고 윤청하는 그녀를 감싸안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 넌 어떻게 네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어서... 어서 사과해.”‘사과하라고?’성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이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점점 더 뻣뻣해졌다.“엄마... 지금 나보고 사과하라는 거야?”눈앞의 사람은 성유리의 친어머니였다.비록 그동안 자신에게 늘 차가웠고 무심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언젠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믿어왔다.과거가 어떻든 간에 그들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니까.설령 마음에 안 들고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자신은 그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이니까 언젠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