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다 됐어?”성유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연정우는 꾹 참았다가 드림 타운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성유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아프지 않아?”연정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만지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동작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몸이 조금 굳어졌다.하지만 그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연정우는 이미 손을 거두었다.“다행히 열이 나지 않네.”그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말했다.“하지만 너는 좀 더 쉬어야 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기 전 그를 향해 말했다.“고마워.”연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너 예전에 박한빈과 함께 있을 때도 이렇게 자주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어?”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성유리는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연정우가 계속 물었다.“사실 궁금하긴 했어. 오늘 밤 박한빈이 네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에 정말 신고할 예정이었어?”“나는... 그랬을 거야.”성유리가 말했다.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 자신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다.연정우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됐어.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몸을 돌려 그의 방으로 돌아갔지만 성유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잠에서 깬 듯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퇴원한 후부터 그녀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는데 전부 오늘 밤 박한빈의 담판을 위해서였다.그녀는 원래 자신이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박한빈이 너무 쉽게 대답해서 그녀가 준비한 것을 다 꺼내지 못했다.정신적으로 피로가 극에 달했지만 정작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방금 연정우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만약 박한빈이 동의하지 않았다면...사실 오늘 밤 약속 장소에 나갔을 때 성유리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정말 그를 경찰서로 보낼 수 있을까?방금 성유리는 시원하게 대답
“무슨 말이에요? 이 성유리가 정말...”“아니면요? 전에 조 대표님도 다 이렇게 따냈잖아요?”“쯧쯧, 이래도 박 대표님은 더럽지 않대요? 아니지, 성 대표님은 전에 박 대표님의 부인이었잖아요?”“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박 대표님의 동정을 얻었나 봐요. 박 대표님도 정말 불쌍해요. 이런 여자한테 걸렸으니...”소리가 딱 멈추었다.가장 신이 나서 말을 하던 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성유리를 발견했다.그녀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추측할 수 없었고 하나같이 어색하게 성 대표님에게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하이힐을 밟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명도의 사무실로 향했다....성유리는 종일 회의실에서 보냈는데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서 목이 좀 불편했다.그녀가 드림 타운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연정우가 집에 없지만 그녀는 전화를 걸지 않고 소파에 쓰러진 채 눈을 감았다.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잠에서 깼을 때는 여전히 혼자였다.그의 일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성유리는 머뭇거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학교 실험실 쪽에 있어. 고쳐야 할 데이터가 좀 있어서.”“그래, 그럼 일 봐.”“응, 목소리가 좀 쉰 것 같은데 아직도 불편해?”“난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그래.”웃으며 대답하고 난 연정우는 전화를 끊고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박한빈이 술잔을 돌리고 있었는데 오렌지색 액체에 얼음을 띄워 입안이 아릿한 감촉이 느껴졌다.연정우는 한 모금만 마셨는데 입맛에 맞지 않아 잔을 내려놓았지만 옆에 있던 남자는 여러 잔을 마시더니 전화를 끊는 소리를 듣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거짓말을 잘하시는 것 같은데... 이런 일을 처음 한 건 아니죠?”“저와 성유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박 대표님께서 궁금하실 필요는 없겠죠? 앉아서 이미 한참 마셨는데 박 대표님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연 교수님은 똑똑한 사람이니 내 목적이
인주 프로젝트 계약서는 매우 빨리 작성되었다.성유리는 중간에 우여곡절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이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심지어 이익 점에서도 박한빈은 그들을 압박할 생각이 전혀 없이 모든 것을 시장의 기준에 따라 작성했다.계약서에 서명한 후 박한빈은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다른 협력자였다면 당연히 성유리도 동의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른 고객과의 연락을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었으니 말이다.옆에 있던 정민재는 그의 제안을 듣고 휴대전화를 꺼내 레스토랑을 예약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죄송해요. 저녁에 다른 일이 있어서 안 되겠어요.”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민재가 성유리에게 저녁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성유리가 말을 이었다.“정 비서님이 가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박 대표님을 잘 모시도록 해요.”“네?”정민재는 얼떨결에 묻다가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제가...”“아니야.”박한빈은 그의 말을 끊고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 대표님이 이렇게 바쁘니 다음에 다시 만나.”“좋아요.”성유리는 빙긋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그럼 박 대표님, 잘 해봐요.”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이내 다시 손을 뗐다.정민재는 성유리의 요구에 따라 그를 배웅했는데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이미 얼굴빛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정민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할 말이 있으면 해요.”성유리는 무표정하게 말했다.“음...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대표님만이 감히 박 대표님을 이렇게 대하실 수 있어요. 화내실 까 두렵지 않으세요?”그의 말에 컴퓨터에 뭔가 입력하고 있던 성유리는 손가락을 멈칫했다가 이내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솔직히 저도 기다리고 있어요.”“네?”성유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그 사람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보고 싶어요.”정민재의 말처럼 오늘
그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누가 성유리의 손을 갑자기 잡더니 외투를 그녀의 몸에 걸쳐 주었다.“너...”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그 사람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갔다.“아니, 너 누구야?”남자는 당연히 화가 나서 몇 발짝 쫓아갔다.“차례를 지켜야지.”박한빈은 자신의 외투를 성유리 몸에 걸쳐 주는 바람에 그때 셔츠만 입고 있었다.그의 강한 카리스마에 눌린 남자는 기세가 한풀 죽었지만 이대로 지기 싫어서 목만 뻣뻣하게 세우고 박한빈과 눈을 마주쳤다.“내가 전남편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박한빈이 물었다.“쳇, 전남편일 뿐이잖아. 남자친구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가 뭔데?”남자의 등은 순식간에 꼿꼿해졌는데 그러면서도 성유리의 다른 손을 잡으려 했다.박한빈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망설임 없이 발을 들어 남자를 걷어찼다.화가 난 그의 발길에 힘이 실려 하체부실처럼 보이는 그 남자는 순식간에 멀리 날아갔다.소란스러움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다가 비명이 들려왔다.“젠장!”얼굴이 창피해진 남자는 욕설을 퍼부은 뒤 바로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내리쳤다.박한빈은 순식간에 성유리를 밀어냈는데 그 의자는 그렇게 그의 팔에 부딪혔다.그러자 그 남자도 달려들며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남자를 다시 발로 차서 땅에 쓰러뜨리고 난 박한빈은 뒤에 있던 사람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변하며 갑자기 고개를 돌린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미 술집 앞에 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그의 시선을 느낀 듯 성유리는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짓다가 돌아서서 떠났다.박한빈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그제야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그래서 지금 성유리한테 당한 건가?’...한 시간 후, 박한빈이 경찰서에서 나왔다.배지수도 때마침 도착해 거즈를 감은 박한빈의 손을 본 후 순간 눈시울을 붉히며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괜찮아요? 아파요?”박한빈은 재빨리 그녀를 밀어내고 경고
박한빈은 혼자 차를 몰고 드림 타운까지 갔다.성유리는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문을 열었을 때 전혀 의아해하는 기색이 없었다.박한빈은 먼저 안을 들여다보았다.“출장 갔어요.”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박한빈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물었다.“내가 그 자식 무서워할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 남자친구니까 그렇게 당당한 건 좀 아닌 것 같아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돌아서서 말했다.“들어오세요.”박한빈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그는 처음으로 여기에 왔는데 지난번에는 문 앞에만 도착했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미화로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새하얀 쿨톤, 어수선한 테이블, 맞은편 캐비닛에 가득 찬 술병...진짜 이런 집은... 그가 사는 집에 더 가까웠다.그리고 곧 박한빈도 탁자 위에 있는 약상자를 보았는데 심지어 요오드포름과 거즈도 준비되어 있었다.박한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예상이 정말 맞았어.”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가와 뺨에 상처를 입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는데 두 눈은 서리가 낀 듯 웃는 기색이 없었다.성유리는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친 후 소파에 앉아 말했다.“앉아요. 소독해 줄게요.”그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 요오드포트를 집어 든 채 단호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사실 이때, 박한빈은 자신이 돌아서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어쨌든 그동안 그가 한 비이성적인 일은... 충분히 많으니 말이다.그는 그녀를 만회하려고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계속 그녀 곁을 맴돌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렇다고 자존심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 그녀에게 놀림당하고 짓밟혔다.그는... 자신이 아직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를 바라보며 옆으로 늘어뜨린 손을 꽉 쥐었는데 팔뚝에는 핏줄이 솟아올랐다.순간, 그는 그 탁자를 뒤엎고 그녀를 몸 아래에 깔고 싶었다.그녀를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성유리는 가볍게 웃었다.“당신이 저한테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이미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박 대표님은 이제 아웃됐어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가락을 하나씩 쪼갰다.“상처는 이미 다 처리했어요. 이렇게 작은 상처는 싸맬 필요도 없으니 가세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일어서려고 할 때 박한빈이 대뜸 말했다.“넌 정말 소탈하네. 내려놓았다면 다 내려놓은 거야?”그의 말 속에는 약간의 원망이 숨겨져 있었는데 그녀가 ‘무책임하다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우습다고 여긴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박 대표님은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저는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소탈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면 혼자 도인국에 가지도 않았고 또 당신에게 기회를 다시 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일부러 술에 취하지도 않았겠죠.”“그때 당신은 나를 거절할 때 일말의 설명 기회도 여지도 주지 않았어요. 이제 와서 무슨 입장으로 저를 비난해요? 제가 지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그때 이미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고 또 최선을 다해 이 감정을 만류했기 때문이에요.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저는 저의 감정을 올인했기 때문에 유감이 없어요.”“그리고 박 대표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당신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항상 제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릴 수 없어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테이블 맞은편에 섰는데 그곳은 마침 박한빈과 대치하는 자리였다.박한빈은 주먹을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성유리는 돌아서서 말했다.“가셔도 돼요.”한참 후에야 박한빈은 그녀가 바란 대로 일어섰다.성유리는 방금 그의 떠나려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아참, 금성에 돌아갈 때 시간이 있으면 어머니를 뵈러 가도 돼.”이 말에 어리둥절해진 성유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그녀는 박한빈이 왜 갑자기 김서영을 언급했는
생신 잔치는 무사히 끝났다.연정우는 성유리를 집으로 초대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호텔에 묵으면 돼.”“그럼 내가 함께 호텔에 있어 줄게”‘아니야.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부모님과 많이 있어야 해.”성유리가 웃으며 말했다.연정우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한 성유리를 마주 보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엄마와는 내가 잘 얘기해 볼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오늘 사모님과의 대화를 엿들었어?’곧 연정우가 계속해서 말했다.“어쨌든 너는 내가 데려온 손님인데 이렇게 대하지 말아야 했어.”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했음을 알았다. 비록 오늘 밤 금미라의 태도는 좋지 않았지만 그녀가 뒤에서 뒷담화를 한 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연정우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아무튼, 우리는 계약 관계일 뿐이니 너의 어머니가 어떤 태도로 나에게 대하든... 상관없어. 나를 위해 부모님과의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어.”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는 조용해졌다. 성유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손을 내저은 후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성시원은 성유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고 그녀를 저택으로 돌아가 살라고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그곳은... 그녀의 집이 아닌 지 오래다. 그녀는 다섯 살 때 길을 잃은 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성유리는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셨지만 호텔에 도착하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이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성유리는 호텔의 통유리 앞에 서서 이 낯설고도 익숙한 도시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나 또 십여 년을 살았고, 또 여기에서 결혼까지 했지만 시종 이 도시에서 자신의 소속감을 찾지 못했다.그러다가 성유리는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미화로였다.급하게 이사 왔고 또 집안에서 그런 일이 발생해서 집주인은 그녀를 매우 불만스러워했기에 성유리는 아예 1년 치 집세를 더 냈다. 다만 집주인이 그녀가 이사한 것을 알고도 다른 사람에게 집을 다시 세를 줬을지
몇 달이 지났지만 미화로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곳은 마치 번화한 도시에서 잊혀진 모퉁이처럼 고층 빌딩도 없고 고급 차도 사치품도 없이 그저 높낮이가 다른 건물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에어컨, 그리고 아래층에 사업자등록증이 있는지도 모르는 바비큐 가게가 있었다.성유리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결국 택시를 잡아 호텔로 돌아갔다.이번에 그녀는 잘 잤고 꿈도 꾸지 않았다.깨어나 보니 다음날 정오가 되었다.성유리는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난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연정우가 보낸 문자가 보였는데 저녁에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는 내용이었다.성유리는 거절하려고 답장을 작성했지만 발송하기도 전에 연정우는 두 번째 문자를 보내왔다. 그의 집에서는 그들의 감정이 깊지 않다고 생각되어 그에게 소개팅을 안배하련다는 내용이다.성유리는 거절하려고 타자했던 말들을 한 글자씩 지워버렸다. 그때 연정우가 그녀와 협력한 것은 바로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 관계에서 혜택을 받았으니 당연히 그에게 보답해야 했다.이렇게 생각한 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문자가 발송된 후 성유리는 다시 휴대전화에 뜬 시간을 보았는데 마침 저녁 식사까지 대여섯 시간이 있었다.일하기 싫었던 성유리는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졌다. 그녀는 침대에 잠시 앉아 있다가 결국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안심 병원.여기는 지화 그룹 소유의 개인병원이고 김서영은 마침 여기에 입원했다.박한빈이 미리 분부했는지 성유리는 전혀 방해받지 않고 걸어왔다. 심지어 김서영을 돌보는 간병인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까지 했다.성유리는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며 웃음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어느새 입꼬리가 굳어버려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결국 성유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앉으세요.”간병인은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옆에서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성유리는 힐끗 보며 물었다.“이 책은... 어머님께 읽어주는 거예요?”“네. 사모님께서는 이식이 있는데 스스로 깨어나는 걸 거부한다고 선생님께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