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무슨 대답을 했는지 성유리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결국 박한빈이 자신의 욕망을 참지 못해 두 사람은 위치를 바꾸었고 아침에 있던 회의는 정말로 참석하지 못했다. 성유리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정민재가 다가와 회의가 늦춰졌다고 알려줬다. 그녀는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고 정민재는 이내 다른 업무의 일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민재의 두 눈은 끝없이 성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시선에 불쾌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성유리가 화를 내려는 순간, 정민재는 성유리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컨실러 하나 준비해 드릴까요?” 정민재의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랐고 빠르게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옷깃에 남은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가린 후,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내려고 하였다. [정말 개가 되시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성유리는 입력한 문자를 보내려고 했지만 망설이다 결국 지워버렸고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옷깃을 정리했다. 정민재는 어디론가 빠르게 향하더니 컨실러 하나를 사와 성유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여자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이게 제일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는척 하며 정민재가 건네는 컨실러를 건네받았다. “저 방금 되게 흥미로운 소식 하나 접해 들었습니다.” 정민재가 반짝이는 눈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뭔데요?” “배지수 씨가 박 대표님이랑 헤어졌다고 선언했더라고요? 지금 인터넷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요?” 성유리는 전혀 놀라지 않았기에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정민재는 순간 입을 꾹 닫아버렸다. 한참을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정민재를 발견한 성유리는 손에 있던 문서를 그에게 휙 던지며 말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말하세요. 그렇게 자꾸 쳐다만 보고 있으면 잘라 버릴 거예요.” “쯧쯧. 이제 좀 급해 나시는 모양입니다?” 정민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할 일이 없으신가요? 아니면 너무 적나?” 성유리가 굳은 표정으로 정민재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민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건을 챙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성유리는 그런 정민재에게 시선 한번 주지도 않은 채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지만 업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사무실 입구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 점차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었고 침착해져 성유리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업무를 계속 보기 시작했다. 해가 어둑어둑한 저녁,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함께 밥을 먹겠냐고 묻는 문자를 보내왔다. 성유리가 답장이 없자 박한빈은 두 통의 문자를 더 보내다가 마지막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저는 아직 일이 있어서요.” 성유리가 대답했다. “무슨 일? 야근이야? 그래도 밥은 먹...” “저는 정우랑 밥 약속이 있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입을 뗐다. 수화기 너머 박한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성유리는 하루 종일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바로 통화를 끝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정말 연정우와의 약속이 있었던 터라 일부로 박한빈을 골탕 먹이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어젯밤 통화를 한 두 사람이지만 나중에 발생한 일들은 연정우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이 “일”을 하는 사이기에 성유리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연정우에게 말해줬다. “그래서?” 연정우는 피식 웃으며 계속 물었다. “이제 우리 둘의 관계를 끝내겠다는 말이야?” “끝내고 싶어?” 성유리가 되물었다. 연정우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아직 그 사람이랑 공식적인 사이가 아니야. 공식적으로 공개할 생각도 없고. 그래서 우리 사이에 있는 계약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거야.” 성유리의 말을 들은 연정우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연정우가 화가 났다고 확신한 성유리는 자신이 규칙을 위반했기에 마땅
성유리가 드림 타운에 도착했을 때에도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박한빈이 이미 떠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스위치를 켜려는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 깜짝 놀란 성유리가 펄쩍 뛰며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거실은 빠르게 환해졌고 성유리는 소파에 앉아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박한빈을 발견했다. “오늘 밤엔 어디 갔었어? 재밌었나?”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아직도 안 가셨어요?” “난 내 짐까지 다 갖고 왔는데 나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이지?”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그제야 그의 앞에 놓인 커다란 두 개의 캐리어를 발견했다. “누... 누가 당신한테 오라고 했는데요?”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박한빈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진짜 미쳤나 봐. 왜 박한빈 씨가 불쌍해 보이지?’ 성유리는 박한빈과 더 상대하기 싫어 손님이 묵는 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짐은 다 저 안에 놓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기 방으로 향하려고 발걸음을 옮겼고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의 뒤를 따랐다. “뭐 하시려고요?”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며 뒤돌아 박한빈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위 아플 때 먹는 약 있어?” 박한빈이 자신의 위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계속 말했다. “저녁을 안 먹었더니 지금 위가 좀 아프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배달시키세요, 요즘은 약도 배달해 주니까.” “난 할 줄 모르는데.” “그럼 비서님한테 사다 달라고 하시던가요.” 단호한 말투로 말을 하던 성유리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앞에 있는 성유리의 방문을 묵묵히 쳐다보다 갑자기 빠르게 변해버린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싫어졌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상황에 박한빈은 급하지 않았으니 사실 약을 배달로 시킬 필요
욕실 밖으로 쫓겨난 박한빈의 손에는 여전히 성유리가 던진 수건이 들려 있었다. 수건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와 성유리의 화난 모습이 떠오른 박한빈은 웃음이 새어 나왔고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박한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더 씻을 마음도 없어져 대충 물로 헹구고 난 뒤. 욕실 가운을 입고 나왔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발 옆에 놓인 두 개의 캐리어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안색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뭐라 화를 내기도 전,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저 방에 다른 물건들이 많아서 짐을 놓을 데가 없어.” 성유리는 순간 연정우가 이 집에서 짐을 뺄 때, 놓고 간 물건들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방으로 향해 연정우의 짐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다시 말했다. “그 물건들 다 어디 갖다 놓으려고?” “당연히 제 방이죠. 쓸데없이 이런 건 왜 묻죠?” “안 돼.” 박한빈은 망설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니면 내 짐이랑 네 짐을 같이 놓을까?”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잊지 마세요. 지금 연정우 씨야말로 제 남자 친구고 제 애인이에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입을 꾹 닫았다. 그녀는 박한빈이 자신의 말에 전처럼 노발대발 화를 내며 날뛰겠다고 예상했다. 필경 지금까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미친개 같은 모습도 보여줬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기억 속, 박한빈은 늘 잔인하고 악랄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조용히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캐리어를 들고 손님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성유리는 덤덤한 박한빈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내 앞으로 걸어가던 박한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물었다. “여기 주소는 어떻게 써야 돼? 약 사야
커다란 냄비에 담긴 면들은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너무 없었다. 성유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 정도로 맛없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당황했다. 결국 성유리는 몸을 일으켜 직접 박한빈에게 다시 면을 끓여주기를 선택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시 요리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성유리가 입을 열어 박한빈에게 나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옆에서 좀 봐두려고.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아야지.” “박 대표님, 이런 일은 대표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아요.” 성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런 음식을 해줄 여자는 널리고 널렸잖아요.” “나도 알아.” 박한빈은 성유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끓인 면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뒤돌아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늘 밤에 연정우 씨랑 말은 했어?” 박한빈이 뒤돌아있는 성유리에게 물었다. “우리 둘 사이 말이야.” “네.” “된대?” “네.” 성유리의 박한빈이 귀찮은 듯 대충 대답을 해줬고 그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걸지 몰랐다. 그녀는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고 박한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몸을 돌려 식탁 위에 있는 면을 본 순간, 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아직 자기에게 앙금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필경 전에 박한빈이 늘 성유리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만들었으니까.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이유 또한 그녀가 박한빈을 신경 쓰고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보다 그녀가 화를 내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더 나았다. 지금 두 사람이 놓인 처지는 그냥 잠시일 뿐이라고 생각한 박한빈은 사냥감을 손에 넣으려면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했다. 이 넓은 “초원”에서 “사냥감”에게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큰
“성 대표님?”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있는 성유리를 보던 정민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되죠. 박 대표님께서 수고하셨겠어요.” “다 같이 일하는 처지인데 이 정도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박한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성유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박한빈은 여전히 만인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는 능력자로 보였으니 성유리는 그와 악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한빈과 손을 맞잡은 순간, 성유리는 아무도 몰래 그의 손을 꽉 쥐었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할퀴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분명히 박한빈이 고통을 느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봤지만 짧은 인사를 마치고는 뒤돌아 나가버렸다. 박한빈이 말한 조영준은 연성 은행계의 큰 인물이었고 성유리로 놓고 말하면 직접 은행으로 향해 업무를 본다고 해도 조영준을 마주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달랐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조영준과 이번에 처음으로 손을 맞잡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꽤 좋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이번에 박한빈이 특별히 자신을 불러 조항정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도와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성유리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시간이 다가올 때쯤 박한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식당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과 상대에게 특별히 성유리 혼자만을 만나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해줬다. 성유리는 예상했던 일이기에 식당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어코 혼자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존중해주며 식당 위치를 찾기 힘들 테니 자신의 차 뒤를 바짝 따라오라고 말했다. 성유리는 아직 전에 박한빈이 술자리에 연성의 길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나 박한빈은 오늘 성유리가 뒤에 따라오고 있지만 이리저리 길을 헤매며 도통 식당으로 도착하지 못했고 성유리마저 이곳이 어딘지 몰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진짜로 그가 성유리를 많이 챙겨주는 말을 꺼냈다 해도 성유리의 짧은 한마디는 박한빈을 밤새 뒤척이게 할 수 있었다. 박한빈의 이런 모습을 상상만 하기만 해도 성유리는 기뻐할 것이 뻔했다. 성유리는 비록 자신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기에 박한빈의 가슴에 꽂힌다면 그가 아파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유리 또한 전에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를 않았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지금 자신보다 박한빈이 더 아파하기를 바랐고 고통에 몸부림치기를 원했다. 돌담길은 생각보다 더 걷기가 어려웠고 성유리는 자신의 발뒤꿈치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성유리는 하이힐을 신은 채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박한빈은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비록 시골집이지만 안에 인테리어는 도시 부럽지 않은 고풍스러웠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성유리는 벽에 걸려있는 그림 두 폭을 발견했다. 그림에 박혀있는 익숙한 도장을 본 성유리는 그 그림들이 안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직원은 두 사람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 주며 이 식당을 간단하게 소개해 줬다. 식당에서 들여오는 모든 식재는 다 뒷산에 있는 양식장에서 생산한 것이고 해산물이든 육류든 불문하고 현장에서 직접 잡아 신선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직원은 또 만약 손님이 원한다면 뒷산으로 직접 가서 먹을 식재료를 선택해도 된다고 말을 덧붙였다. “저기 있는 오리나 닭들 다 인삼을 먹으면서 큰 애들입니다. 정말 맛이 뛰어나죠.” 성유리는 인삼을 먹고 자란 닭들은 어느 정도로 맛이 좋은지는 몰랐지만 직원의 소개를 들으면 들을수록 식당 이름이 어딘가 이상했다. ‘닭들이 인삼을 먹고 자란다고? 그럼 이게 어떻게 시골집이야?’ 직원의 소개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방 입구까지 도착한 두 사람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조영준을 발견했다. 조영준은 혼자가 아니었는데 그의 옆에
“박 대표님 생각도 그러십니까? 그래도 연성 쪽 물이 좋고 산이 좋지요? 만약 이곳이 금성이었다면 이 정도로 못했을 겁니다. 이 닭곰탕 좀 드셔보십시오. 밖에서 파는 것이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 식당도 아직 시 영업 중이긴 한데 시간 좀 지나면 완전 대박 날 겁니다.” 조영준은 식당에 관한 자세한 얘기와 칭찬을 오랫동안 쏟아냈다. 성유리는 나중에야 그 식당에 조영준도 투자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이 식당의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토론하는 것을 듣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입을 뗐다. “죄송한데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조영준은 성유리를 흘깃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박한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지만 커다란 식당 안에는 손님이 그들뿐인지라 한참을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돈을 많이 투자한 식당은 다른 곳보다 인테리어가 더욱 고급지고 독특했다. 화장실 천장에 있는 큰 샹들리에와 족히 5미터는 되는 듯한 통유리 거울을 본 성유리는 화장실이 아니라 고급 헬스장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화장을 고치려던 성유리는 화장실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누군가를 발견하고도 성유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으며 거울 속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성유정은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옆에 다가와 서더니 먼저 말을 걸었다. “유리 언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는 성유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이제는 연성까지 섭렵한 거예요? 그렇게 뻔뻔하게 한빈 오빠 옆에 붙어있는 거 말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어요?” 성유리는 고치던 화장을 다 마친 뒤, 고개를 돌려 성유정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임신했다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조영준 씨랑 같이 있는 거야?” “제가 누구랑 같이 있든 그게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럼 내가 무슨 일을 하던 너랑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갔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