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말을 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웠다. 그 눈빛은 박한빈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박한빈은 김서영의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국 어머니는 박세빈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니란 거네요.” 상대방은 그의 말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다. 박한빈은 김서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려는 듯 냉정히 뒤를 돌았다. “그렇다면 이제 일은 간단해지겠네요.” 그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사실 박한빈은 마음 한구석에 아주 조금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라고, 혹은 성유리와 더 솔직해지게 하려고 그랬다고 변명이라도 해준다면 설령 그런 변명이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해도 그는 믿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고 그 순간, 박한빈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박한빈의 삶에서 낯설고 무의미했지만 “적”이라면 다룰 방법은 명확했다. 어차피 그는 어릴 적부터 늘 혼자였으니까, 익숙한 일이었다. 박한빈은 다시 차를 몰고 도연제로 돌아갔다. 의사는 이미 와 있었고 그는 성유리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고 말하며 지금은 수액을 놓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의사는 이런 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지금 환자분은 임신 중입니다. 이렇게 극심한 감정 변화는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합니다.” 의사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했다. “알겠습니다.”의사는 박한빈의 짧은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대화 주제를 돌렸다. “도련님, 손에 난 상처는... 치료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필요 없습니다.” 박한빈은 의사 말에 거절 의사를 비추며 계단을 올라가려다 문득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가 눈을 떴을 때도 그녀는 변함없이 침대에 묶여있었다. 이번에 묶인 손은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었는데 성유리가 강렬히 저항하다 손목에 난 상처를 박한빈이 본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성유리의 손목을 묶고 있는 물건은 수갑이 아닌 넥타이였다. 하나에 몇십억씩 하는 값비싼 넥타이가 성유리의 손목을 묶는 도구로 쓰이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성유리는 묶이지 않은 오른손을 힘껏 뻗어 그 넥타이를 끊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박한빈이 무슨 방법으로 넥타이를 묶었는지 성유리가 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단단하게 묶였다. 성유리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넥타이가 세게 묶이면 묶일수록 점점 이성을 잃더니 붉어진 두 눈으로 뜯어버리려고 했다. 한 손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성유리는 이빨까지 동원해 넥타이와 “승부”를 봤다. 성유리가 저도 모르게 자기 살을 물어뜯어 입에 피까지 나고 있었지만 비싼 물건이라 그런지 넥타이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퍽! 손으로도 안 되고 이로도 안 되자 성유리는 자기 손을 벽에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큰 소리에 가사도우미가 깜짝 놀라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 성유리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가위 내놔요!” 도우미는 성유리의 말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박한빈이 월급을 얼마나 주는 거죠? 제가 그 두 배를 드릴 테니 빨리 가위 내놔요!” 귀를 찌를 듯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성유리는 머리카락까지 풀어 헤쳐 정말 정신병자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 정신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 때문에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성유리가 아무리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도 가사도우미는 꿈쩍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달래주기 시작했다. “사모님, 너무 흥분하지 마셔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임신 중이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절대안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도우미의 말에 벽에 손을 힘껏 내리찍던 성유리가 하던 행동을 멈췄고 고개를 뚝 떨구더니 이를 꽉 깨물었다. 미쳐버릴
그러나 박한빈은 아무 내색도 안 하고 조용히 성유리에게 다가가 넥타이를 조금 풀어줬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살짝 닿자 서로의 온기 대신 무궁무진한 한기만 느껴졌다. 성유리는 이미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손을 움츠리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넥타이만 계속 만져댔다. “산부인과 가서 검사받아 보라면서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계속 물었다. “언제 갈 건데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성유리를 내려다보았고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눈빛을 발견했다. ‘어제는 원망이 가득 찬 눈빛이었는데.’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대답했다. “나중에. 요즘 내가 좀 바빠서.” “저 혼자서도...” “안 돼.”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채 듣지도 않더니 몸을 숙여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계속 대답했다. “원이야, 너도 알잖아. 이런 상황에 내가 너한테 자유를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럼 언제까지 저를 여기에 묶어두실 건데요?” “네가 정말 진심으로 이곳에 남고 싶을 때까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볼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너는 날 속이고 있잖아. 난 다 알아.” “근데 괜찮아. 너한테 일일이 따지지 않을게. 난 단지 너한테 이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야. 왜냐하면 넌 절대 날 속일 수 없을 테니까. 알았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없었지만 화가 나는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박한빈은 이런 성유리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잘 쉬고 있어. 밥도 잘 먹고. 안 그러면 난 의사를 매일 불러 진정제 투여할 거야.” “너도 잘 알 텐데? 진정제도 결국 약물이니까 아이한테 큰 영향을 미칠 거야. 태어나면 기형아일 확률도 꽤 높고.” “걱정하지 마. 기형아라고 해도 난 낳으라고 할 거고 키울 거야. 최선을 다해 열심히. 근데 엄마라는 사람이 아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성유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후회막심했다. 크게 분노한
박한빈은 인주 프로젝트를 박세빈에게 넘겨주는 것에 동의했다. 게다가 박한빈은 이사회에서 박세빈의 능력을 추켜세워 주는 말까지 했다. 마치 아주 사이좋은 형제처럼 말이다. 박세빈은 박한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눈치였지만 회의에서는 그저 미소만 지으며 수긍했다. 회의가 끝난 뒤, 박한빈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고 그 뒤를 박세빈이 따랐다. “이게 다 인주 프로젝트 자료들이다. 전 대표님 쪽에서 이미 받아들였어. 경험도 많으시니 무슨 문제 생기면 나 말고 전 대표님께 물어봐.” “네. 감사합니다. 형님.” 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회사에서는 박 대표님이라고 불러.” “아! 네. 알겠습니다.” 이때, 성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박한빈은 박세빈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여보세요?” “한빈아.” 수화기 너머 성시원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많이 바쁘니?” 박한빈은 성시원의 목소리를 듣고 콧방귀를 꼈다. 당연히 성시원은 박한빈에게 공손하고 열정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박한빈이 사비로 성리 그룹의 큰 “구멍”을 막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성리 그룹은 정상적으로 파산 신청도 못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돈이나 재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필경 그에게 있어 돈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성유리와의 혼인도 성사했으니 박한빈은 그 돈을 결혼자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성리 그룹은 이미 지화 그룹의 부속 회사로 자리를 잡았지만 성시원은 요즘 매일같이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자원이나 프로젝트가 있는지 물어봤다. 성시원이 말하는 새로운 자원은 요즘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 기술적으로 필요한 문제가 많아 잘하는 집은 고작 몇 곳밖에 없었다. 나머지들은 그저 그들을 따라가며 남은 “찌꺼기”들을 주워 먹는 정도였으니 성시원이 이때 참여를 한다면 “찌꺼기”도 차려지지 않을 게 뻔했다. 박한빈은 성시원의 속셈을 알아차렸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
말을 마친 박한빈은 다시 통화를 끝내버리더니 망설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박한빈.” “그 싸구려 동생분이 요즘 또다시 슬슬 부활하려고 하던데요?” ... 성유리는 요 며칠 쭉 침대에만 머물렀다. 매일이다시피 침대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기에 성유리는 이미 시간관념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이 방에 갇혀있었는지 짐작조차 못 했다. 요즘 박한빈도 아침 일찍 외출하고 저녁 늦게 돌아오니 성유리는 그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산부인과도 가야 한다는 일을 잊어버린 줄 알았지만 어느 날 깨어보니 그가 넥타이를 풀어주고 있었다. “깼어? 마침 내가 오늘 시간이 좀 있어서 너 데리고 병원 가려고.” 박한빈이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자 성유리는 멍해졌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성유리를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더니 그녀를 안고 아래로 내려갔다.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자신의 몸에 닿아있는 박한빈의 손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아냈다. 박한빈도 그런 성유리의 표정을 발견했지만 그녀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그 또한 못 본척했다. 그가 말했듯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상관이 없었다. 원한다면 박한빈을 속여도 그는 늘 하던 대로 할 생각이었으니까. 박한빈이 예약한 병원은 지화 그룹 명의로 돼 있는 개인 병원이었다. 의사에게 박한빈이 미리 말을 해놓았는지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바로 검사실로 향할 수 있었다. 박한빈은 조용히 그녀의 옆을 지켰고 의사가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아이가 아주 잘 크고 있네요.” “여기 이곳에 아기가 있어요. 보이세요?” 성유리가 의사의 말에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지만 아기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곧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아기라는 존재가 무럭무럭 클 것이라는
병원에서 나오자 박한빈은 성유리를 데리고 아침을 먹으러 향했다. 성유리는 이미 며칠 동안 밖에 못 나왔으니 햇살을 맞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박한빈과의 “거리”를 좁혔고 조용히 앉아 밥만 먹었다. “요즘 진무열 씨가 또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아?” 박한빈이 밥을 먹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 물음에 잠시 주저하던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방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있었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성유리는 박한빈을 비꼬려는 의도가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일을 벌인 시간이 고작 하루 이틀은 아닐 거야. 너 몰랐어?” “몰라요. 저도 무열이랑 연락을 안 해봐서.” “그렇군.” 박한빈은 성유리를 떠보듯 계속 물었다. “그럼 요즘 진무열 씨가 뭘 하려는지도 안 궁금해?” 성유리는 말없이 박한빈을 쳐다만 봤다. “요새 네 아버지를 꼬드겨 새로운 프로젝트에 가입시키려고 하더라. 이미 계획안 검토했는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더라고.”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릴 뿐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30퍼센트의 수익률이라... 듣기만 해도 좋아 보이지?” 그때, 성유리가 문득 박한빈에게 말했다. “이거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넌 네 아버지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야.” “성 회장님은 지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야. 진무열 씨가 회장님을 끌어들이는 게 어쩌면...”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경청하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박한빈 씨를 해하려고 그러는걸 까요?” 그녀의 물음에 박한빈은 웃으며 성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대답했다. “응. 역시 우리 원이가 제일 총명하네.” 성유리는 그의 손이 스치는 것도 극도로 혐오스러웠지만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나한테 공격을 하는 거야. 근데 이건 너무 티가 나서 나는 걸려들지 않을 거고. 성 회장님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까?”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이
박한빈의 시선은 한동안 유아용품점에 머무르다 결국 성유리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아직 박한빈이 운전석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보기도 싫다는 듯 몸을 휙 돌리며 창밖만 쳐다봤다. 성유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박한빈은 보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차가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성유리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저 안 가둬두시면 안 될까요? 걱정마세요. 저도 아이한테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이는 죄가 없잖아요.” “박한빈 씨가 계속 저를 감금한다면 안 아프던 곳도 아파질 것 같아서요.” 성유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한빈과 상의를 하려는 듯 말했다. “집에 있기 싫으면 안 있어도 돼. 앞으로 매일 너랑 같이 회사로 가면 되니까.”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마치 자신이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한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물었다. “회사의 기밀이나 중요한 서류, 혹은 문서들을 제가 훔치면 어떡하시려고요?”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담긴 의도를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절대 박한빈은 자신을 경쟁상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박한빈이 보기엔 성유리가 아직 자격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 성유리는 지금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식물로 보일 것이다. 성유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회사로 같이 출근하죠.” ... 전에 박한빈이 성유리를 들쳐 업고 회사로 온 다음부터 직원들은 그녀의 등장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박한빈도 성유리를 완전히 방어하지 않는지 그녀가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과 업무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박세빈에 대한 조정도 이미 내려온지라 그는 요즘 전 대표와 함께 연성에서 인주 프로젝트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제일 관건적
성유리의 힘은 많이 세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스킨십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 나가시려고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응. 건설 현장 쪽에 가보려고. 넌 지금 현장에 가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혼자 여기서 쉬고 있어.” “근데 저 너무 심심한데요. 영화라도 보고 싶어요.” 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이패드나 컴퓨터라도 주세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성유리만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마치 성유리의 몸을 관통하려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의 시선에 성유리가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대답해 줬다. “그래. 노트북 가져다줄게.” 박한빈은 바로 방 밖으로 나가 노트북 하나를 성유리에게 가져다줬다. 성유리는 한눈에 그 노트북이 박한빈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여기서 웬만한 건 다 볼 수 있을 거야.” 박한빈은 노트북을 성유리에게 건네며 계속 말했다. “비밀번호는 똑같아. 유리 네 생일이야. 근데 너무 오래 보지는 마.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네.” 순순히 자기 말을 따르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뒤돌아 방을 떠났다. 서훈은 이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매일 들고 있던 노트북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박 대표님, 노트북 안 챙기십니까?” “유리한테 줬습니다. 새로운 데이터 하나 준비해 주세요.” 박한빈의 대답에 서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대표님, 그 안에는 중요한 데이터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저도 압니다.” 박한빈은 여전히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박한빈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아직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빛났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직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