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시선은 한동안 유아용품점에 머무르다 결국 성유리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아직 박한빈이 운전석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지만 성유리는 보기도 싫다는 듯 몸을 휙 돌리며 창밖만 쳐다봤다. 성유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박한빈은 보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차가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성유리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저 안 가둬두시면 안 될까요? 걱정마세요. 저도 아이한테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이는 죄가 없잖아요.” “박한빈 씨가 계속 저를 감금한다면 안 아프던 곳도 아파질 것 같아서요.” 성유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한빈과 상의를 하려는 듯 말했다. “집에 있기 싫으면 안 있어도 돼. 앞으로 매일 너랑 같이 회사로 가면 되니까.” 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마치 자신이 어떤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한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물었다. “회사의 기밀이나 중요한 서류, 혹은 문서들을 제가 훔치면 어떡하시려고요?” 성유리의 물음에 박한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담긴 의도를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절대 박한빈은 자신을 경쟁상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박한빈이 보기엔 성유리가 아직 자격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 성유리는 지금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식물로 보일 것이다. 성유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회사로 같이 출근하죠.” ... 전에 박한빈이 성유리를 들쳐 업고 회사로 온 다음부터 직원들은 그녀의 등장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박한빈도 성유리를 완전히 방어하지 않는지 그녀가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과 업무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박세빈에 대한 조정도 이미 내려온지라 그는 요즘 전 대표와 함께 연성에서 인주 프로젝트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제일 관건적
성유리의 힘은 많이 세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스킨십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 나가시려고요?” 성유리가 되물었다. “응. 건설 현장 쪽에 가보려고. 넌 지금 현장에 가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혼자 여기서 쉬고 있어.” “근데 저 너무 심심한데요. 영화라도 보고 싶어요.” 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이패드나 컴퓨터라도 주세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성유리만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마치 성유리의 몸을 관통하려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의 시선에 성유리가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대답해 줬다. “그래. 노트북 가져다줄게.” 박한빈은 바로 방 밖으로 나가 노트북 하나를 성유리에게 가져다줬다. 성유리는 한눈에 그 노트북이 박한빈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여기서 웬만한 건 다 볼 수 있을 거야.” 박한빈은 노트북을 성유리에게 건네며 계속 말했다. “비밀번호는 똑같아. 유리 네 생일이야. 근데 너무 오래 보지는 마.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네.” 순순히 자기 말을 따르는 성유리를 박한빈은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뒤돌아 방을 떠났다. 서훈은 이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매일 들고 있던 노트북이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박 대표님, 노트북 안 챙기십니까?” “유리한테 줬습니다. 새로운 데이터 하나 준비해 주세요.” 박한빈의 대답에 서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대표님, 그 안에는 중요한 데이터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저도 압니다.” 박한빈은 여전히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박한빈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아직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빛났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직
그러나 성유리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자세를 바꿔 잠을 청했다. 커튼까지 쳐져 있어 휴게실 안은 어두컴컴했기에 예상은 했지만 눈을 뜬 순간 성유리는 깜짝 놀랐다. “꺅!” 그녀의 비명에 그도 놀랐는지 뒤로 물러섰더니 휴게실 조명을 켜며 말했다. “나야.” 낮은 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금방 돌아왔는데 네가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 박한빈이 놀란 성유리를 진정시키며 계속 말했다. “배 안고파? 뭐 먹고 싶어?” 성유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꾹 참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배 안 고파요.” “케이크 하나 사 왔어.” 그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박한빈이 먼저 말했다. “저번이랑 같은 집에서 샀는데 이번엔 초콜릿 맛이야. 먹어볼래?” 박한빈은 주섬주섬 케이크를 꺼냈지만 성유리는 케이크를 보자 그날 밤이 떠올라 속이 메슥거렸다.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성유리는 자기 자신이 멍청하고 우스웠다. ‘박한빈 같은 사람을 철석같이 믿고 안쓰러워하다니... 내가 미쳤지.’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거야?”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날 네가 케이크를 너무 잘 먹어서 좋아하는 줄 알고 샀는데 네가 안 좋아할 줄은 몰랐네.” 무슨 영문인지 성유리는 그의 말이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성유리의 태도를 알고 싶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유리는 한참을 침묵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깬 지 얼마 안 돼서 케이크부터 먹으면 너무 물릴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면 돼.” 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에 고민하다 말했다. “쫄면이요. 먹어도 돼요?”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돼.” 그는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쫄면을 사 오라고 부탁했고 행여나 성유리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여러 곳에 들러 하나씩 사 오라는 말도 보탰다. “새
박한빈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고 담담했다. 마치 성유리에게 슈퍼에 가서 아무거나 하나 사 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성유리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해갔고 한참 동안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응. 마침 그 사람이 너한테 못되게 굴었던 적 있잖아? 이번에 겸사겸사 복수도 해주는 셈이지.”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너 설마 그 사람한테 정이라도 남은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성유리는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조금 의외일 뿐이에요.” “그래. 그런 사람은 사실 동정할 가치도 없어.” 박한빈이 대꾸하며 케이크 상자를 열었지만 성유리가 손도 대지 않자 그는 스스로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성유리가 박한빈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음, 나쁘지 않은데.” 박한빈은 다시 한 숟가락을 떠 그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한번 먹어볼래?” 성유리는 케이크 냄새에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케이크를 먹으려고 입을 벌렸다. “맛있어?” 박한빈의 입가엔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성유리는 억지로 먹더니 맛을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박한빈이 끈질기게 맛을 물어보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박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다음에 이걸로 다시 사 줄게.”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갔다. “아참, 아침에 봤던 그 유아용품 가게 있잖아. 저녁에 한 번 들러서 구경해볼까? 필요한 것도 좀 사두고.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앞으로 바빠질 수도 있으니까 시간 있을 때 같이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박한빈의 의견을 따르기도 결정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빈은 무슨 말을 더 말하려 했지만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휴대폰 화면으로
박한빈은 이런 일상이 그저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는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금성의 계절은 겨울이 되었다. 입동 날, 김서영은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박씨 본가로 와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말했다. 성유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은 행여 그녀가 거절할까 이런 말을 보탰다. “맞다. 임신했다고 했지? 할머님도 네 임신 사실을 듣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게다가 너희들 꽤 오랜 시간 집에 안 돌아오지 않았니?” “오고 싶지 않으면 안 와도 돼. 내가 도연제로 갈게. 할머님 마음도 내가 가서 대신 전하마.” 김서영은 겉으론 성유리를 배려하는 것 같아보였지만 사실 그녀에게 거절할 이유도, 여지도 주지 않고 있다.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다 결국 김서영의 말에 따랐다. 박한빈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성유리는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된다고 했어?” “네.” “알았어. 그럼 저녁에 같이 가자.” 박한빈은 대답하며 청첩장 하나를 꺼내 성유리에게 건네더니 말을 이어갔다. “금방 받은 거야. 봐봐.” 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청첩장을 열어보았고 익숙한 누군가의 웨딩사진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신랑 자리에 있는 이름은 바로 연정우. 그리고 그 옆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정말 효자더라.” 박한빈은 창백해지는 성유리의 낯빛을 쳐다보다 말했다. “그 옆에 있는 여자가 누군지 알아?” 성유리가 대답을 차마 하지 못하자 박한빈이 하려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유 비서실장님 딸이야.”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청첩장을 닫아버리며 물었다. “그래서요?” “나는 그저 이 소식을 너한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결혼식 당일에 우리 둘이 같이 참석할까?” 성유리는 어떤 대답도 없이 청첩장을 박한빈에게 다시 버리듯 건네고는 뒤를 돌았다. 박한빈은 그녀의 뒷모습과 손에 들린 청첩장을
김난희는 박한빈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서영이 몸을 일으키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마침 나도 선물을 준비했어. 근데 위에 있어서 우리 둘이 같이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두 사람은 위층에 있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김서영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성유리에게 건넸고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수표 한 장과 메모지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메모지에는 항공편 정보가 적혀 있었다. 성유리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급히 김서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 “내 개인 비행기야. 티켓은 이미 예약해 뒀어.” 김서영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지는 한성인데 거기 도착하면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도 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 내가 따로 준비해 줄게.” 김서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렷하게 들렸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멍해졌다. “떠나고 싶지 않니?” 그러자 김서영이 또다시 물었다. “이제 성리 그룹 일은 다 정리됐잖아. 여기서 너를 붙잡을 이유도 없어졌으니 가도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마. 한빈이 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떠나는 걸 막지 못하게 할 거야.” 그제야 김서영의 의도를 알아챈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뭘 하시려는 거예요?”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말했다.“저는 어머님과 박한빈 씨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저와 그 사람 사이의 일이에요. 다른 분이 끼어드는 건 바라지 않아요.” 말을 마친 성유리는 봉투를 김서영에게 다시 내밀었다. 김서영은 봉투를 내려다보더니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내가 관여하지 않을게. 근데 명심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사모님.” 성유리가 그녀를
“그리고 박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왜 꼭 박세빈을 받아들여야 하니? 내가 이곳에 머물며 내 인생을 낭비한 이유는 한빈이가 모든 것을 물려받게 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르신께서 박세빈을 받아들이라고 협박까지 하더라.” “내가 도대체 왜 받아들여야 해? 지금 내 미래는 망가졌고 과거는 부정당했어. 그중 일부는 박한빈 때문이고. 네 말대로 내가 걔 친어머니라는 걸 기억하고 있다면 걔는 과연 내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을까?”김서영의 말이 길어질수록 눈은 점점 붉어졌고 몸도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성유리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성유리는 김서영을 보며 딴 세상에 있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마치 유리 진열장 속에 앉아 있는 완벽하지만 비현실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성유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김서영 역시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는데도 김서영은 맨발로 그 유리 위를 걸어 성유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고 김서영은 지금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모습을 하고 있다.성유리는 갑작스러운 김서영의 모습에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아래층에서 소란을 들은 박한빈이 서재로 올라왔다. 그는 김서영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성유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자신의 뒤로 보호하듯 감싸더니 화가 나 있는 김서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박한빈을 응시했다. 하지만 박한빈의 시선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로 향해있었다. 버려진 수표와 항공편 정보가 흩어져 있었고 그는 그 물건들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 “이게 성유리에게 주려던 선물인가요? 참 열과 성을 다하셨네요.” “물론이지.” 김서영은 박한빈을 보자 정신이 든 듯 다시 평소의 우아함을 되찾았고 부드럽게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알기론 유리가 가장 원하는 게 바로 이거니까.” “그래요? 그
“어머님 상태가 이상해요.” 차에 타자마자 성유리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걸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유리는 익숙한 듯 스스로 말을 다시 이어갔다. “그리고 보니까 할머님이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아요. 박세빈 씨 일은 절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그의 냉담한 태도에 성유리는 언짢아져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성유리도 지금 속으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었다. 자신도 지금 행복하지 않은 만큼 박한빈이 고통받는 것도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전 김서영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자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유리가 침묵하는 박한빈에게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어머니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은 거지?” 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 박한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 “어머니가 준비해 준 모든 물건들 왜 받아들이지 않은 건데?” 요 며칠 동안 그들 사이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그 평온함은 마치 얼마 전의 치열했던 갈등과 증오가 단지 꿈속에서 벌어진 일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먼저 며칠 전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성유리는 지화그룹의 사무실을 자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녀와 박한빈의 관계를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성유리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지속적인 거짓말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 밤, 박한빈은 더 이상 가식적인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성유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고 창밖에서 흔들리던 나뭇잎들마저 멈춰 적막을 더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성유리는 서로의 숨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네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