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희는 옆에서 박한빈의 다정한 행동을 똑똑히 지켜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을 챙겨주던 박한빈은 성유리가 식사를 거의 마쳤다고 판단이 들었고 이내 박세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서 그룹 쪽 사람들이랑 만난다던데... 지금 상황이 어때?” 박세빈은 고개를 숙인 채 음식만 먹고 있다가 박한빈의 질문을 듣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 그러더니 놀란 토끼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 한편, 김난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서 그룹? 그게 뭔데?” “아, 할머니께선 아직 잘 모르시겠군요. 그쪽은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예요.”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강서 그룹에 대한 설명의 말을 덧붙였다. “쉽게 말해 가진 지분을 담보로 거액의 현금을 빌려주는 곳입니다. 정해진 기간 안에 주식이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추가 배당도 받을 수 있지만 반대로 주식이 특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계약 조건에 따라 지분을 해체하거나 심지어 삼켜버리기도 하죠.” 그는 천천히 차도 한 모금 마시며 계속 말했다. “그럼 지금 그쪽과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네 생활에 그렇게 큰돈이 필요할 이유가 있나? 그들과 손을 잡아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박한빈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의 명확한 의도는 박세빈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 김난희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지화의 지분을 담보로 잡혔단 거니?”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다시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만나기만 했을 뿐이고 아직...”박세빈은 급히 부정했지만 대답을 다 끝내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었다.“정말일까? 근데 내가 알기로는 네가 얼마 전에 해외로 큰 금액을 송금했다던데? 해외에 네가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라도 있나? 그런 큰 금액은 대체 뭐 때문이었어?” 박한빈은 느긋한 말투로 박세빈에게 따지듯 물었다. “설마 너도 주식 같은 거에 손댄 거야? 그
김난희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박세빈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각성한 듯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박한빈의 멱살을 꽉 잡았다. “그러니까 형님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라는 말이군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제가 이렇게 되도록 그냥 놔뒀습니까? 일부러 그랬죠?” 그의 분노 섞인 말에도 박한빈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답했다.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자기 통제도 못 하는 네가 누구를 탓하겠냐?” “당신이 일부러 만든 함정이었잖아!” “그래. 하지만 그 함정에 뛰어들지 말지 선택한 건 너였어. 내가 네 머리에 총을 들이밀며 강요라도 했니?” 박한빈은 태연히 대꾸하며 그의 손가락을 천천히 하나씩 떼어냈다. “아, 참. 하나 더 알려줄 게 있어. 강서 그룹에는 사실 나도 지분이 있거든.”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네가 건 거래는 사실 내가 너를 위해 맞춤 설계한 거야. 주식을 담당했던 매니저도 내가 특별히 너를 위해 준비한 사람이었고. 그러지 않고서야 네가 어쩌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큰돈을 손에 넣다가 한순간에 다 날리게 됐겠어?” 박세빈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지 의심만 했었다.비록 그의 질문은 격앙돼 있었지만 가장 큰 가능성은 박한빈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저 방관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박한빈의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 순간, 박세빈은 박한빈의 차분하고 냉담한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 소름이 끼쳤다. “그만하고 얼른 정리해서 돌아가라.” 박한빈은 짧게 대화를 마무리하며 곧바로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가자. 이제 집에 가야지.”성유리는 박한빈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걸어가다가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아버린 박세빈이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마치 무언가가 그의 몸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버린 듯한 허탈한 모습이었다. 차에 올라탄
이 시점에서 박한빈의 마음 또한 상당히 복잡했다. 특히 성유리의 솔직한 대답을 들었을 때, 그의 미간은 더욱 많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사업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세계잖아요.” 성유리가 뜸을 들이다 대답을 덧붙였다.“그러니까 잔인하냐고 묻는 건 좀 의미 없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졌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그럼 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먼저 물었다. “누구? 박세빈 말이야?”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걱정할 이유가 있나? 어쨌든 잘 될 리는 없을 거잖아.” 그의 단호한 태도에 성유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예상대로 지화 관련 보도를 뉴스에서 접했다. 이번 일은 일부 회색 지대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이는 사실상 주식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로 그는 단순히 지화의 일반 주주가 아닌 박한빈의 동생이라는 신분까지 밝혀졌다. 이전에 지화에서 흘러나온 정보는 마치 박세빈이 박한빈의 자리를 대체할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깨달았다. 대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행동은 오히려 박한빈의 보조 역할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하다는 걸 드러냈다. 그리고 언론에 둘러싸여 도마 위에 물고기 된 박세빈은 갑자기 더 큰 폭탄을 터뜨렸다.강서 그룹의 배후에 박한빈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즉, 이번 일이 모두 박한빈의 설계였고 자신은 그 함정에 빠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 폭로로 언론은 즉각 들끓었지만 곧 강서 그룹과 박한빈 사이에 연관된 인물이 전혀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결국 박세빈의 이러한 발언은 아무런 증거도 없는 무책임한 발버둥으로 사람들에게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어리석고 못된 사람이라는 지울 수 없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한편, 박한빈은 언론 인터뷰에서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와 할머니는 세빈이를 믿었기에 회사에 들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고요한 눈빛은 성유정에게 비웃음과 경멸처럼 느껴졌다. 성유정은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뗐다. “그래?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제가 미처 몰랐군요... 그럼 늦게라도 축하라도 해줘야겠죠?” “맘대로 해.” 성유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네가 축하하든 말든 다 나한텐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말에 성유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성유리의 말과 눈빛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감정이 가득 묻어 있다는 것을. 마치 자신이 그토록 애쓰며 얻고자 한 모든 것이 성유리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현실도 그랬다. 그동안 성유정은 박한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심지어는 성유리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선택받은 사람은 성유리였다. 지금 성유리는 성유정 앞에서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군림하며 그녀를 하찮게 바라보는 듯했다. “사실 별일도 아니잖아요.” 웃음기가 싹 사라진 성유정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신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임신했다고 해서... 언니가 반드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가정주가 갑자기 나서며 대꾸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이런 말을 우리 대표님께 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있어요?” 성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되물었다. “참 대단하네요. 성유리 씨. 이제는 옆에 개까지 키우고 있나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죠? 임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참, 언니도 모르죠? 사실 저도 한빈 오빠의 아이를 임신한 적이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가정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기억나세요? 저희가 도풍국에 갔을 때 우리 마주쳤잖아요.” 성유
“네.”“순조로웠어?” “아주 순조로웠죠. 의사 말로는 아이가 아주 건강하고 상태도 좋대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박한빈의 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의 얼굴에는 어딘가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한빈 씨 오늘 바쁘지 않았나요?”성유리가 갑자기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렸다.“박세빈 씨 일은 다 처리된 건가요?”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대답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야.” “그래요?” 성유리는 아주 짧고 간결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오늘 병원에서 누구 만났어?” 성유리는 즉답하지 않고 앞에 서 있던 가정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정부는 그들 사이를 몰래 살피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시선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성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박한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박한빈 씨가 가정부를 저와 함께 보낸 건 사실 절 지켜보기 위함이었네요.”“너한테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랬어.” 박한빈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래서... 누구 만났는데?” 성유리는 더 숨기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성유정이요. 왜요?”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흰 그냥 짧게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에요. 걔가 저한테 해코지한 것도 없고 저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당신한테 굳이 보고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 더 묻고 싶은 건 없어?” 성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마치 무언가를 강요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성유리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별로 물을 것도 없죠.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성유리의 가벼운 말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박한빈의 가슴에 구멍을 내버렸다. 그러자
12월 초, 성유리와 박한빈은 함께 웨딩사진을 찍으러 향했다. 두 사람 다 경험이 있기에 이번 과정들은 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박한빈이 특별제작을 맡긴 드레스라 디자이너는 위에 박힌 보석 몇 개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월급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부러움에 가득 찬 표정과 말투로 말했지만 성유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옷으로 갈아입고 사진까지 다 찍은 성유리는 놀이공원 휴게실에서 쉬다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사실 성유리는 원래 그 여성과 모르는 사이였다. 오늘 웨딩사진을 찍기 위해 박한빈은 놀이공원을 통으로 빌렸다. 비록 놀러 오는 손님은 없지만 그래도 지나다니는 직원 몇 명은 꽤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처음에 그 여성 또한 놀이공원 직원인 줄 알았다. 그 여성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유리 씨?” 성유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저 모르시죠?” 여성은 생글생글 웃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전 유효정이라고 해요.” 성유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상대는 성유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연정우 씨랑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에요.” 유효정의 말에 성유리는 머리를 띵하고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유효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음, 보아하니 저에 대해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청첩장 본 적 있어요.” 성유리가 대답했다. “아, 맞다.” 유효정은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래도 저희 둘은 처음 만난 거 아니에요? 앞으로 알고 지내요. 성유리 사모님.” 유효정은 빠르게 태도를 바꿨지만 같은 여자로서 성유리는 그녀 눈빛에 담긴 악의를 발견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그저 그런 악수가 끝나자 유효정은 재빨리 손을 거
성유리는 사실 연정우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아마 그날 카페에서였다.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해외로 떠난다는 말을 전한 날 말이다. 그때 성유리는 앞으로 평생 연정우와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일이 펼쳐질지 몰랐다. 성유리와 연정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유효정은 성유리에게 연졍우를 한번 소개해 줬다. 박한빈은 아주 정중하게 연정우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연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연정우는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뒤, 손을 천천히 내밀며 악수를 받아줬다. 박한빈은 그의 행동에 개의치 않아 하며 웃더니 계속 말을 걸었다. “곧 결혼하신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날짜도 저희랑 똑같던데... 이런 우연도 없습니다.” “맞아요!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유효정도 옆에서 박한빈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근데 날짜는 저희가 전부터 미리 정해놓은 거예요. 청첩장도 박 대표님께 보내드렸었는데?” “아마 박 대표님도 그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셨나 보죠?” 유효정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봤지만 그 눈빛엔 조롱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효정 씨가 오해하고 계시나 본데 저랑 유리는 사실 재혼입니다.” “이번에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이유도 설명해 드릴 까요?” “전에 유리한테 못 해줬던 일들을 다시 해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결혼과 똑같은 날을 고른 겁니다.” 박한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사실 말해 이날은 저희가 2년, 아니 훨씬 전부터 정해놓은 날이죠.” 그의 말에 유효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박한빈은 이내 분위기를 바꾸려 입을 뗐다. “그렇지만 고작 날짜 하나일 뿐입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거야 그렇죠.” 유효정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연정우는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고 유
“연정우 씨, 방금 그게 무슨 뜻이었죠?” 유효정은 급히 연정우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사람들 앞에서 저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겠다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연정우의 걸음이 뚝 멈췄다. 연정우는 천천히 뒤돌아서더니 유효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유효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연정우를 쏘아붙였다.“그럼 설명해 봐요. 방금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데요?” “그저 오늘 저녁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갔을 뿐입니다.” 연정우는 별 감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의미가 없다고요? 박한빈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나요? 그 사람은 지화 그룹 총괄 매니저예요. 이 금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와 밥 한 끼 먹으려고 발버둥 치는지 알아요?” “그건 그 사람들이고 전 아닙니다.” 유효정은 한동안 연정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자기 자신이 그 잘난 교수님인 줄 알아요? 아니면 박한빈 씨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를 빼앗았기 때문인가요?” “유효정 씨.” 그녀의 말에 연정우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겁먹기는커녕 유효정은 오히려 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뭐죠? 그런 태도는?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예전에 박한빈 씨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당신이랑 성유리 씨는 벌써 결혼했겠죠? 방금 그녀를 바라보던 정우 씨의 눈빛을 보세요. 제가 약혼녀라는 사실은 기억이나 하는 거예요?” “연정우 씨, 말해두지만 제 덕이 아니었으면 당신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갔을 거예요. 이렇게 큰 문제를 해결하려고 우리 아빠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긴 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절 무시하고 억울한 척한다고요?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해요?” 유효정은 어릴 때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금성 상권에서 박씨 가문이 제일 꼭대기에 있으나 유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