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성유리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처음엔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그마한 딸아이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성유리에게 삐쳤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엄마, 왜 내가 불러도 대답 안 해요?” “미안해.” 성유리는 환풍기를 급히 끄며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화장실 다녀왔어요. 엉덩이 닦아야 돼요.” 성유리는 이미 바지를 스스로 다 입고 나온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우리 닦는 김에 바지도 바꿔 입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성유리가 아이에게 겨우 새 바지로 갈아입히자마자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이모 왔나 봐요!” 아이는 벨 소리를 듣고 잔뜩 신나 하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벨을 누른 사람을 확인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모!” “역시 우리 하늘이가 나를 제일 반겨주네.” 사하나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하늘이에게 물었다. “하늘이 요즘 이모 생각 자주 했어?” 하늘이는 사하나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모가 하나만 물어볼게. 이모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지?” 사하나가 이런 질문을 물어볼지 예상도 못 했는지 하늘이는 쭈뼛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고작 2살 된 어린아이일 뿐인 하늘이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엄마인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하늘이를 도와주려는 생각이 하나도 없는지 웃으며 옆에 물러섰고 하늘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니 사하나에게 대답해 줬다. “여기로 이모 생각했어요.” 하늘이의 대답에 사하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얼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하지만 사하나의 말에 하늘이는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저하기 시작했다.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난 엄마랑 잘래요.” 성유리는 하늘이의 의사를 확인한 뒤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눈치를 살피다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제가 소개시켜 드린 그 남자는 왜 만나러 가지 않으세요?” “그러는 넌 왜 안 만나는데?” 성유리가 되물었다. “전...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요.” “네 생각엔 난 결혼에 관심이 있어 보이나 보지?”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뒤, 사하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언니 혼자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러죠. 딱 저번처럼 말이에요. 새벽에 하늘이가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 언니 혼자 밤을 새가면서 아이를 챙겼잖아요.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도 언니한테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옆에 없고.”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리고 결혼하면 그 남자가 나를 챙겨줄 것 같아? 아마 내가 애를 둘 키우는 거랑 똑같아질걸.”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필경 그녀 본인도 남자에 대해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에 결혼을 미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도대체 웬일인지 사하나는 이런 일을 자신이 맞닥뜨린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성유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났다. 사하나는 지금 본인이 표정 관리를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성유리는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는 머릿속에 어떠한 추측이 떠올랐는지 사하나에게 물었다. “금성 쪽에 무슨 일 생겼어?” “네? 무슨 일이요? 저는 모르는데? 언니 뭐 들으셨어요?” 서로를 본 시간이 늘면 늘 수록 사하나는 성유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그럴수록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성유리가 그린 만화가 방영되는 곳은 경운시였다. 이미 이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는 성유리지만 이번에 작가 팀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본은 아직 검토 중이지만 드라마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그들은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빨리 기회를 뺏어야 했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현장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그들과 같이 있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늘이도 당연히 성유리와 함께였다. 그러나 너무 바빠 하늘이를 챙길 여력이 부족해 성유리는 가정부를 고용했다. 이러면 자신이 하늘이를 미처 챙기지 못해도 가정부가 챙기기에 안전할 뿐만 아니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일까, 큰 규모의 제작이기도 하니 영화사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배우들만 요청했다. 두 사람은 겉으론 사이가 좋은 척 하하 호호 웃었지만 팀은 하나같이 너무 실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본마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치고 바꾸기 일쑤였다. 성유리는 매일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하늘이를 며칠이나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늘이는 성유리를 원망하지도 않고 매일 호텔에서 얌전히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하나가 하늘이를 세뇌시킨 건지, 하늘이는 성유리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에게 잘생긴 삼촌이랑 사귀냐고 물었다. 성유리는 아이가 말한 잘생긴 삼촌이 누군지 안다. 그건 바로 이번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자 올해 제일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우빈이였다. 하늘이는 호텔에서 그와 두 번을 마주쳤기에 이우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는 성유리에게 저 남자가 자기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성유리는 몇 번이나 하늘이에게 설명을 해주며 안 된다고 대답했지만 아이는 새까맣게 잊은 건지 자꾸 물었고 그게 반복되자 성유리는 포기해 버렸다. 그날은 업무가 평소처럼 바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하늘이를 데리고 현장에 향했다. 이우빈을 발견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인사를 건넸다.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기에 그들은 하늘이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너무 예쁘게 생겨 그들은 아역 배우인 줄 알아 부감독을 불러오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하늘이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흔들며 걸어가는 하늘이의 모습은 잔뜩 성난 수탉 같았다. 성유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대본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가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하늘이를 보고는 잔뜩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래?” 하늘이는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자신의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양해를 구한 뒤, 하늘이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심심해서 그러는 거야?” “오늘 평소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아. 엄마가 끝나면 하늘이 데리고 백화점 가서 놀아줄게. 응?” 하늘이는 성유리를 지그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먼저 대답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줬고 한참 후,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있기 싫어. 이우빈 아저씨 보기도 싫어.” 하늘이가 계속 말했다. “집에 갈래요. 가서 이모랑 놀고 싶어.” “지금? 엄마는 지금 못 가는데.” 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이렇게 하자. 하늘이가 엄마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엄마가 이모한테 전화할게. 오늘 밤에 시간 있으면 하늘이 데리러 오라고 할까?” 성유리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하기 그지없었고 아이를 달래며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성유리의 위로를 받고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코를 쓱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자신이 일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갔고 아이를 안은 채로 업무를 봤다. 촬영은 빠르게 끝났지만 이우빈 일행은 성유리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우빈을 주위를 둘러보다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모! 꼭 그 삼촌보다 저 잘생긴 남자를 찾아야 돼요. 삼촌보다 백배, 아니 만 배 잘생긴 사람!” 어느 한 패스트푸드 점, 하늘이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사하나에게 말했다. 사하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별일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이 한 거지 이우빈 그 사람이랑 상관이 없잖아. 이모 생각엔 이우빈 씨도 네 엄마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하늘이는 사하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 돼요. 그 삼촌은 제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요.” 사하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 보였다.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던 하늘이는 갑자기 차가운 액체가 자신의 입가에 닿는 느낌을 받았고 손으로 쓱 만져보았다. 어린아인지라 하늘이는 케첩인 줄 알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하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말했다. “왜 갑자기 코피가 나는 거야? 빨리 업혀. 이모랑 병원 가자!” ... 이건 성유리가 현장에서 날밤을 샌 두 번째 날이었다. 이우빈의 설득 하에 성유리는 결국 그에게 두 장면을 더 추가해 줬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랑 상의하며 하나씩 적어 갔다. 감독마저 아주 흡족해하며 박수를 쳤지만 여자 주인공 쪽은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여자 주인공이랑 마주치기를 꺼리던 성유리는 끝나면 바로 몰래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의 매니저는 어느새 성유리를 찾아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저희 그 추가된 두 장면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매니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더니 정신없이 현장을 떠나갔다. “선생님! 성유리 선생님!” 매니저는 뒤에서 몇 번이나 성유리를 불렀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고 매니저는 화가 나 이빨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됐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하나는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리곤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언니도 결국 하늘이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전 별로 바쁜 일도 없으니까 이번에 하늘이가 다 나으면 내가 애를 데리고 금청으로 먼저 돌아가죠. 가서 우리 부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그분들도 손녀 얘기를 오래전부터 하셨거든요. 비록 의붓손녀지만 똑같이 사랑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지금 당장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일단 이렇게 합시다. 언니도 피곤할 테니 오늘 밤은 내가 있을게요. 언니는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니. 네가 먼저 들어가. 난 여기 있을게.” “하지만...” “지금 내가 들어가면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성유리의 이 질문에 사하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하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는 한참 후에야 하늘이의 침대 옆으로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아이는 오늘 채혈을 해서 그런지 팔뚝에는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작은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하늘이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혹시 깰까 봐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결국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하늘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하늘아.” 그 목소리는 아이를 깨우지 않을 만큼 작았는고 성유리 혼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며칠간 성유리는 더 바빠졌고 촬영 현장과 병원을 오가며 바삐 뛰어다녔다. 때로는 하늘이가 갑자기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호텔로 돌아가 직접 만들어 오기도 했다. 고작 일주일 만에 그녀는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고 얼굴은 많이 초췌해졌다. 사하나조차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마
2년 하고도 4개월. 성유리는 그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상상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샴페인과 꽃다발로 둘러싸인 화려한 삶이 있었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교차할 일이 없는 평행선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등장은 성유리의 그런 믿음을 단번에 깨뜨렸다. 하늘이를 안고 있던 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엄마, 저 사람 알아?” 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니, 몰라.”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들킬까 성유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한편, 박한빈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성유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들어버린 순간, 그의 발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방금 전까지 뛰던 심장은 순간 멈춘 듯 잠잠해졌고 뜨겁게 끓던 피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더 이상 박한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하늘이는 박한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혼 당시,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성유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박한빈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잠들지 못한 채로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박한빈은 심장과 위가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되였다. 버티던 박한빈이 결국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사는 그의 몸이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는 단지 “심리적 긴장”일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박한빈이 긴장했던 걸까? 아마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긴장보다
이것은 박한빈이 처음으로 그들의 아이를 직접 본 순간이었다. 흐릿한 사진도 교묘한 각도로 찍힌 이미지도 아닌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아이였다. 작은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함께 낯선 누군가를 관찰하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박한빈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고 이내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성유리와 아이의 모습이 가려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빠르게 추스르며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예상대로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박한빈은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고 그 장면은 성유리가 한 소녀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은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박한빈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옆에 둔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울리는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방금 꾼 꿈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새겼다. 박한빈은 그 꿈을 이전에도 꾼 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 같았다.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소녀가 다른 누군가를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박한빈의 심장과 위장은 다시금 은은히 아파지기 시작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 경운시로 출장 온 상황이었다.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