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성유리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기사도 당연히 성유리 말을 들을 수 없었기에 차를 세우지 못했다.박한빈은 저를 신경 쓰지 않을지 몰라도, 아니 어쩌면 박한빈 눈에 성유리는 항상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성유리는 박한빈에게만큼은 이렇게 망가진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저도 모르게 또 주먹을 꽉 쥐었다.박한빈이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조롱하고 멸시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그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성유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은 이 차에서 조용히 내리는 게 성유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그 자그마한 요구도 그냥 들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기사 역시 차를 세우지 않고 있었기에 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예상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성유리, 당장 집으로 와!”성시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와 조용한 차 안에 울려 퍼졌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고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씨 집안 저택으로 가.”성유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한빈이 기사를 향해 말했다.그에 마음이 가라앉은 성유리는 이내 옅은 웃음을 흘렸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지켜주지 않았다.하지만 생각해보면 박한빈의 행동도 이해는 갔다.박씨 집안과 결혼할 때 성씨 집안에서 그 얘기를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런 사실이 오늘 까발려 졌으니 이미 이혼을 했다 해도 앞으로 둘의 이름이 같이 떠돌게 될 것이다.그건 박한빈이 가장 질색하는 일이었으니 당장이라도 성씨 집안에 찾아가 따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언니!”성유리가 차에서 내리자 성유정이 한달음에 달려왔다.그런데 성유정은 그 뒤에 따라오는 박한빈을 보더니 다급히 하려던 말을 바꾸었다.“한빈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 설마... 오빠가 언니 데려다준 거야?”말을 하며 성유리에게로 돌린 성유정의 시선이 어딘가 날카로웠지만 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상대해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성유리는 피했다.꽃병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튄 파편이 그녀의 종아리를 스치자 곧바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성시원이 그녀에게 삿대질했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 네 이미지를 망쳐서 금성 전체에 네가 쓰레기라는 걸 알리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지? 내가 어떻게 너같이 수치심도 모르는 딸을 낳았을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네가 태어났을 때 산 채로 목을 졸라 죽여야 했어! 괜히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못하게 널 데리고 오지 말아야 했어!”주위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성시원의 목소리는 커다란 거실에 큰 소리로 계속 울려 퍼졌다.마치 성유리의 몸을 한 대씩 내리치는 칼날 같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그녀는 성시원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어딜 감히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봐? 좋아! 내가 오늘 널 때려죽이지 않으면 성시원이 아니다!”그 말과 함께 성시원이 벨트를 풀어 성유리에게 휘두르려고 할 때 문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회장님.”그 목소리를 듣자 성시원의 움직임이 멈췄고 곧바로 성유정도 놀라며 소리쳤다.“언니!”그러고는 곧장 달려와 성유리를 껴안았다.“언니, 괜찮아? 아빠, 어떻게 이럴 수가...”성유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픈 표정으로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며 입술만 다물고 있었다.박한빈은 그녀를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성시원에게 눈길을 돌렸다.“얘기 좀 하시죠.”성시원은 박한빈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렇다면 지금쯤 이미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고 날이 밝기도 전에 성유리의 못난 일들이 까밝혀진다는 건가?성시원의 얼굴은 점점 더 추해졌지만 차마 박한빈의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줄 수 없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이쪽으로 오지.”박한빈은 바로 그 뒤를 따랐다.줄곧 옆에 있던 윤청하는 조금 전 성시원이 너무 세게 때린 탓인지 이 순간
“언니,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윤청하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성유정이 먼저 다가와서 성유리를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언니를 진심으로 아끼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이젠 보기만 해도 역겨운 사람들이라 성유정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참이었다.“언니!”성유정이 쫓아오려는 듯했지만 윤청하가 말리면서 성유리의 등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좋아, 성유리! 이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네가 밖에서 굶어 죽든 말든 여기 돌아올 생각 마!”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윤청하는 성유리가 마음을 바꾼 줄 알았다.그런데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받아쳤다.“그것참 고맙네요.”성유리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하지만 그 평온함이 윤청하의 눈엔 서늘함으로 보였고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침을 뱉는 것 같았다.윤청하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며 저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섰고 성유정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엄마,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윤청하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성유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밀어내더니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자리에 서 있던 성유정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금세 사라졌고 바로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돈은 언제 줄 거야?”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성유정은 눈을 흘기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걱정 마요, 내일 카드로 돈 보낼 테니까. 하지만 명심해요. 당신은 날 본적도 없는 거고 나한테 다시는 전화도 하지 마요, 알아들었어요?”...박한빈이 저택에서 나왔을 때는 거의 새벽 열두 시쯤이었다.운전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내려서 문을 열었고 놀랍게도 성유리는 여전히 차 안에 있었다.그녀는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박한빈이 차에 타는 순간 바로 눈을 떴다.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머리를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박 대표님, 지금 그걸 묻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처음 그녀가 이혼을 제기했을 때만 해도 단순히 떼를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안 좋은 거라고 해도 딱 한 번만 참아줄 생각이었고 그래서 두 번째 언급했을 땐 그녀의 뜻대로 해주었다.홧김에? 조금은 그랬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박한빈은 그녀가 분명 후회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지금 보니 자신이 틀렸던 것 같다.박한빈은 이틀 전에 이미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다.실형을 선고받은 양아버지와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양어머니.이 모든 것들은 성유리로부터 들은 적이 없었고 박한빈은 그제야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이유가 뭐였든 이제 다 의미 없어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걱정 마요. 오늘 밤 일로 조경우는 절대 나랑 다시 만나지 않을 거고 당신이 걱정했던 일들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도 아마 더 만날 일 없겠죠. 뭐가 됐든 그래도 한때는 부부로 지냈으니 앞으로 박 대표님 하시는 일 바라는 대로 다 잘 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의 말투와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차 세워.” 그가 말하자 성유리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더 이상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섰다.그런데 그녀가 차 문을 열었을 때 박한빈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그때 일 넌 잘못 없어.”마치 길가에 버려진 불쌍한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하는 듯한 그저 동정 섞인 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벼운 한마디였다.성유리는 그가 결코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그래도 방금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래도 한때는 부부로 지냈던 두 사람이었고 결혼 이후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듣는 ‘위
성유리는 돌아와서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고 예외 없이 악몽을 꾸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베개가 상당 부분 젖어 있었고 날은 이미 밝아진 뒤였다.성유리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메시지와 전화가 폭주하듯 쏟아질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인터넷 뉴스는 물론이고 주변 지인들의 연락도 전혀 없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원유진이 이 일을 알았다면 분명 당장 달려와서 실컷 조롱하고 막말을 해댔을 텐데 그녀조차도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뉴스가 막혔다는 뜻이다.그리고 이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단번에 떠올랐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그 생각을 차단해 버렸다.어차피... 그럴 리가 없으니까.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고는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그 후에도 한동안 성유리는 비슷한 뉴스에 계속 관심을 기울였지만 자신에 대한 가십 대신 진무열이 성유정과 약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이 소식을 접한 성유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성씨 집안을 나왔으니 그쪽에서 정략결혼을 계속 원한다면 남은 건 성유정뿐이었다.진씨 집안에서도 정략결혼에 대한 소식을 내비친 적이 있었기에 그 둘의 결합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접한 소식이라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효주가 인쇄소에서 이미 책을 인쇄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성유리의 지난번 작품은 잘렸지만 앞선 두 작품의 출간 계획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책을 보낸 후에도 사인을 해야 했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배달 음식을 주문하려는데 진무열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의 이름이 뜨자 성유리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지난번 단호하게 그의 고백을 거절했던 이후로 둘은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사실 성유리는 가능하다면 여전히 그와 친구로 지내고 싶었지만 진무열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성유리가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전화는 알아서 끊겼고 성유리는 괜스
진무열은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덧붙였다.“들었어? 나 너희 집이랑 약혼해.”성유리는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려다가 그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포크를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성유정이랑.”성유리는 대답했다.“알아.”“넌 이제 성씨 집안과 인연 끊었다며?”진무열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내 정략결혼 상대가 너였을 수도 있어.”지금 진무열이 짓는 미소는 진짜였다.다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마저 속일 수 없었던 미소는 그저 씁쓸하게 입가에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원하지 않으면 가서 얘기해도 돼...”진무열은 고개를 저었다.“어떻게든 날 이용해 먹으려고 데려온 사람들이야. 그거 알아? 스무날 넘게 내가 만난 사람만 열댓 명이야.”“이용?” 성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네가 정말 정략결혼에 성공하면 그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진무열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너 아직 모르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로 진무혁은 불구가 됐어.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그러니 내가 말한 이용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성유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룸 안의 분위기도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아마 오늘이 우리 둘만 식사하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진무열이 다시 잔을 들었다.“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얘기할게. 축하해, 드디어 그곳에서 벗어나서 그 사람들과 엮이지 않게 됐잖아.”성유리도 별다른 말 없이 잔을 들어 그와 술잔을 부딪쳤다.“고마워.”...한편 성유정 역시 레스토랑에 있었고 휴대폰의 시간은 이미 8시 30분이 지났지만 맞은편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웨이터가 음식을 데워주러 세 번째 들어왔을 때 성유정은 마침내 당황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하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이미 룸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을 본 성유정의 눈이 반짝거렸다.“한빈 오빠!”짧게 대꾸한 박한빈은 자기 손을 잡으려는
박한빈이 직설적으로 묻자 성유정은 오히려 머뭇거렸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치마 끝을 만지작거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는... 언니랑 아주 친한 사이였어.”박한빈은 말이 없었고 성유정은 그가 오해할까 봐 두려운 듯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근데 진무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 가면서 언니랑 아마... 아무 사이는 아니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랑 약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오빠,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걸까? 분명 우리 집에 내가 필요한 건 알지만 난...”말을 이어가던 성유정의 눈시울이 갑자기 다시 붉어졌다.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시선만 바닥으로 보내고 있었다.성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한빈 오빠, 저번에... 우리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 나... 난 지금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어?”그 말과 함께 성유정이 손을 내밀어 박한빈의 소매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타이밍을 아주 잘 잡은 그녀는 벨 소리가 울리자 놀란 듯 재빨리 손을 거두더니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뭐라고?”성유정이 언성을 높이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홱 돌아보았다.“내... 내가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성유정의 시선이 다시 박한빈에게 향했다.“미안해 한빈 오빠, 나... 나 먼저 갈게.”“무슨 일이야?” 박한빈이 느긋한 목소리로 묻자 성유정은 이를 꽉 깨물고 속으로 한참을 망설이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유진이가 진무열을 봤다는데... 여자랑 호텔로 갔대. 나 가봐야겠어.”“그래, 누구랑?”박한빈이 계속해서 물었고 무심한 듯 들리는 말투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났다.“그게...” 성유정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듯 눈을 내리깔고 이를 꽉 깨물었다.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유진이 말로는... 우리 언니 같대.”...“유정아, 여기야!”성유정이 막 호텔에 들어왔을 때 원유진이 그녀를 끌고
“손님, 일단 진정하시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제대로...”직원이 필사적으로 원유진을 막는 순간 갑자기 눈앞의 문이 열렸고 정말 안에는 성유리가 있었다.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약간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그래, 역시 여기 있었네! 바람난 남자는 어디 있어? 진무열도 안에 있지? 내가 들어가서...”성유리는 원유진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성유정에게 다가갔고 재빠른 그녀의 움직임에 성유정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손에 든 휴대폰을 빼앗겼다.“언니...”성유정이 입을 열자마자 성유리는 방금 녹화한 영상을 삭제한 뒤 휴대폰을 바닥에 내리쳤다!“뭐 하는 거야?”들어가서 진무열을 찾으려 했던 원유진은 이 상황을 보고 성유정을 보호하려고 바로 달려들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들에게 조금도 기회를 주지 않았고 손을 들어 성유정의 뺨을 내리쳤다.“유정아!”원유진은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성유리 이 나쁜 년! 미친년! 어떻게 감히 사람을 때릴 수 있어? 네가...”“당신 바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이 총알받이로 쓰는 것도 모르고 나서서 방패를 자처해?”“뭐라고?”원유진은 순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섰고 성유리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섰다.“거기 서! 성유리, 똑바로 말해!”원유진이 쫓아가려는데 뒤에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제지했다.“아가씨, 진정하세요...”성유리는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이미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조금 전 칼로 자기 팔을 세게 긋지 않았다면 성유정 일행을 상대할 수도 없었을 거다.하지만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고 무언가가 뼈를 갉아 먹는 것 같았으며 다리가 떨리기 시작해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조금씩 앞으로 굽혔다.“아가씨, 도움 필요해요?”로비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말했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다 문 앞에 주차된 낯익은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