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있어요!” 정이가 읽어갔다.“오래도록...남은 인생...”소원 팻말의 글씨는 비바람에 다소 희미해져 정이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강민아는 고개를 들어 정이에게 말했다.“가져와. 엄마가 버릴게.”정이가 살며시 잡아당기자 소원 팻말이 뚝 떼어졌다.강민아는 소원 팻말을 들고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다.18살 때 반하준이 그녀를 정광사로 데려와 소원 팻말에 자신의 바램을 적었다.어린 나이에 고생한 강민아에게 평생 기쁘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그는 강민아를 불쌍히 여겨 그녀에게 잘해줄 거라고 다짐했다.그런데 나중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한때 진심으로 사랑했고 미친 듯이 빠져들었고 아낌없이 주었지만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이별을 마주하며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다.반하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민아에게 사랑을 줬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단호하게 아들과 함께 떠났다....이틀 후, 많은 네티즌이 인터넷에서 거듭 새로 고치며 ALI 수학 경시대회 공식 사이트를 살펴보았다.오전 10시 정각에 ALI 수학 경시 대회 최종 결과 순위가 발표되었다.ALI 그룹 공식 SNS를 통해 공개한 명단 속 결승 1등은 강민아였다.강민아의 이름이 다시 한번 검색어에 올랐다.ALI 그룹은 강민아의 열기에 힘입어 최종 순위를 발표하는 동시에 상위 20명이 최종 금, 은, 동상을 놓고 경쟁하는 챌린지에 참여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이번 대회도 역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며 JVC 채널 사회자가 직접 나서서 진행한다....부신 그룹.반하준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고급 맞춤 정장을 입은 그는 반듯한 옷차림에 당당한 걸음걸이가 타고난 리더였다. 회의실에 있던 주주와 임원들의 시선이 전부 반하준에게 집중되었다.회의실 대형 스크린에는 외국계 투자회사 대표들도 여러 명 등장했는데 그들은 카메라를 통해 반하준을
이때 회의장에 꽤 많은 사람이 더 들어왔다.주주들은 들어온 사람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르신 오셨어요?”반하준의 부친 반용훈이 들어왔다.대머리 반용훈이 들어오자마자 회의실 전체가 생기를 띠며 눈에 띄게 밝아졌다.불상처럼 생긴 반용훈은 귓불도 크고 두 눈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꼬리를 올리고 누구나 웃는 얼굴로 마주했다.반하준은 부친을 보고도 상석에 가만히 앉아 존경의 의미로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그 순간 회의실 밖에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비서가 휠체어를 밀며 거기에 앉아있던 반용화가 사람들 시선에 들어왔다.반하준은 멈칫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주주들도 서둘러 반용훈을 지나쳐 반용화에게 다가갔고, 반용훈은 고개를 돌려 주주들에게 둘러싸인 반용화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주주들은 반용화 앞에서 두세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늙어서 뻐근한 허리를 굽혔다.“반 연구원님, 안녕하세요.”“반 연구원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큰 화면으로 부신 그룹 경영진과 온라인 미팅을 하고 있던 외국 대표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와우, 닥터 반! 세상에, 내가 저 사람을 만나다니!”“놀랍군요. 반 연구원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오늘 모든 일정을 미루고 8시간 비행기로 서경에 날아갔을 텐데.”반용화는 검은색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셔츠 단추를 목 아래까지 풀었다. 매끈한 얼굴선을 지닌 그는 태연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반용화의 얼굴은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만 애석하게도 5년 전 사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반용화가 반하준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은 넓고 푸른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았다.그렇게까지 싸늘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득히 벽이 느껴진달까.반하준은 직접 반용화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작은아버지.”반용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는 휠체어를 밀고 그를 반하준 옆자리로
반하준은 강민아의 얼굴을 다시 보고 나서야 예선 1등이 단순히 강민아의 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그녀는 결승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이번 챌린지에서는 20위권 참가자들이 각자 도전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한다.참가자는 도전자의 출제에 답해야 하지만 도전자 역시 자신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참가자가 문제에 답을 하지 못하거나 논리적인 사고를 보여주지 못하면 바로 탈락이다.20위, 19위, 18위 참가자는 모두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강민아가 문제를 풀자 그들은 탈락했다.다음으로 17, 16, 15위 참가자도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계속해서 도전자에게 지목당하는 강민아의 모습을 보며 네티즌들은 모두 강민아를 응원하는 댓글을 남겼다.[왜 다 강민아한테만 도전해? 가정주부라고 무시해?][다 같이 덤벼서 공격한다는 거지?][그러기엔 너무 상대가 안 되는걸?]생방송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지 못했고,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민 그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강민아는 도전 무대에 오른 이후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반하준은 스크린 속 밝은 표정의 강민아를 바라보며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어쩐지 그녀가 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저걸 다 알고 있다고?’하지만 그녀는 고작 학사 학위만 따냈을 뿐이다.7년 동안 반씨 가문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혹시 남몰래 공부라도 한 걸까.한 주주가 말했다.“강민아 씨를 부신 그룹 CTO로 데려오죠. 능력도 뛰어난데 반 대표님 아내이니 제일 적합한 사람인 것 같네요.”반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저희는 이미 이혼했습니다.”하지만 주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이혼했어도 다시 데려와요.”“하준이 네 지위와 외모를 보고 어느 여자가 마다하겠어?”“여자는 원래 그래요. 몇 마디 구슬리면 바로 넘어온다니까요.”...결승전에서 2위를 차지한 참가자가 도전 무대에 올라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반하준은 숨이 멎었다.정말 강민아를 부신 그룹에 데려
강민아는 시상대에 올라 조직위원장이 건네준 금상 트로피를 받았다.그녀가 마이크 앞에 서자 진행자가 물었다.“강민아 씨,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금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 다들 궁금해합니다.”강민아는 녹아내릴 듯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카메라 앞에서 하얀 얼굴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심호흡한 그녀는 단상 아래 18살 자신이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검은 눈동자 속에는 별처럼 빛나는 광채가 반짝이고 있었다.“제가 트로피를 받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비결은 저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며 타인의 반응에 겁내거나 외부의 평가에 자책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를 부정하는 말들도 있겠지만 애초에 저 자신 말고 누구의 인정도 갈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인생의 주인공은 저니까요.”강민아가 봄바람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제가 살아온 인생을 자주 되돌아볼 순 있겠지만 절대 그때로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강민아가 ALI 수학 경시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하자 온 인터넷이 들썩였다.[국내 최고의 대회에서 금상을 획득한 강민아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그녀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강민아 씨에겐 더 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어요!][내가 말했지. 여자는 남자를 버린 순간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거라고.]인터넷에서는 국내 10여개의 명문 대학에서 강민아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30분도 채 되지 않아 해외 유명 대학들이 SNS를 개설하고 강민아에게 축하와 초대를 보냈다.네티즌들은 이번 ALI 대회가 얼마나 큰 관심을 받고 있는지 실감했다.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강민아를 열심히 초청하는 상황 속에 국내 주요 기업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심지어 국가 자본이 탄탄한 군사 관련 기업들도 강민아에게 연락을 보냈다.그리고 몇몇 재벌가 사모님들의 계정에 찾아가 보복성 메시지를 남기는 네티즌도 꽤 많았다.얼마 전 그들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는 소나무처럼 반듯하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강민아를 향해 쏟아지는 꽃과 박수를 바라보며 심은호의 눈동자는 웃음으로 빛났다.여러 교수가 강민아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강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학계 거물들을 맞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그녀는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인파를 헤치고 심은호를 향해 걸어갔다.심한기도 거기 있었다.강민아는 심한기 앞에 가만히 서서 심호흡한 뒤 심한기에게 말했다.“교수님, 저 돌아왔어요!”심한기가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숨을 참는 걸 보니 표정 관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쳇, 난 너 필요 없다!”심한기가 입을 삐죽거리자 강민아는 아직 장기명에게 성과를 빼앗긴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교수님...”강민아가 해명하려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심한기가 말했다.“그냥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 네가 여전히 빛나는 존재인지 나도 지켜볼 테니까.”심한기의 말에 강민아는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몇 명의 교수들이 더 모여들었다.“강민아 양, 제17회 이노베이션 서밋 포럼의 추천서인데 서경대를 대표해서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강민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특허받은 것을 좋은 가격에 팔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이노베이션 포럼에 참석하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교수들이 투덜거렸다.“하여튼 권 교수 빠르다니까.”또 다른 교수는 같은 추천서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강민아 양, 고연대를 대표해서 과학기술 서밋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고연대에서 보내드리는 추천서이니 이걸로 꼭 포럼에 오시길 바랍니다.”서경대 교수는 즉시 고연대 교수의 손을 제지했다.“이봐, 내가 먼저 추천서를 줬어. 받아도 우리 서경대 추천서로 포럼에 가야지.”두 교수가 논쟁을 벌이는 동안 다른 대학의 여러 교수가 강민아에게 추천서를 전달했다.수십 장이 넘는 추천서가 눈앞에 다가오자 강민아는 어떤 추천서를 받아들여야 할지
심은호가 손을 들어 심한기의 침이 강민아에게 튀는 것을 막았다.심한기는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어디서 구린내가 나.”다른 교수들은 그의 말에 코를 킁킁거렸다.“구린내? 난 모르겠는데?”정신을 차린 강민아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몇몇 교수들에게 보여주었다.“이미 공식 초대장을 받았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말하는 순간 귀신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방연석이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강민아와 눈이 마주친 방연석은 고양이를 본 쥐처럼 뒤돌아 도망치듯 달려갔다.방연석은 본선에서 100위 밖에 안착해 자격 미달로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다.결선에서 2위를 차지한 참가자가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도 방연석은 조직위원회가 결선 2위를 차지한 참가자에게 금상을 수여해 주기를 기도하고 있었다.그에겐 그 참가자가 강민아도 훨씬 뛰어나 보였으니까.강민아가 금상 트로피를 쥐는 순간 방연석은 당황했다.자신과 강민아의 내기가 떠올라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황급히 현장을 벗어나 그는 어디든 숨을 곳을 찾으려 했다. 이 열기가 지나가면 아무도 그와 강민아의 내기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악!”그러다 복도에서 누군가 부딪혔다.덩치가 크고 돌처럼 단단한 상대와 부딪힌 방연석은 그대로 튕겨 나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정작 당사자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방연석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 부딪힌 사람을 미처 살펴보지도 못했다. 어깨를 부딪쳐 그를 넘어뜨린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이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벽을 붙잡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 방연석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어느새 거기에 약봉지 하나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당황한 방연석이 약을 꺼내 뒷면에 적힌 설명을 확인했다.변비 해결...‘설마 설사약?’그의 주머니에 대체 언제 이런 약이 들어가 있었던 걸까.방연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런 젠장!”그는 바닥에
반하준의 전화가 뚝 끊어지고 회의실 전체에 죽음의 침묵이 감돌았다.반하준의 주위로 겹겹이 두꺼운 얼음이 쌓여갔다.강민아가 또다시 그와 대치하고 있다. 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작정인지!반하준의 차가운 얼굴과 어두운 동공엔 억눌린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다시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기계적인 음성이었다.“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강민아가 또 그를 차단했다.반하준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데 주주들이 서로 눈치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내가 민아한테 연락해 볼게.”반용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반용화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스피커 모드로 돌리자 주주들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이며 전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이윽고 통화가 연결되었다.“연구원님, 저 상 받은 거 알고 전화하셨어요?”기쁨에 가득 찬 강민아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반하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렇듯 들뜬 강민아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축하해.” 반용화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강민아!”반하준이 살벌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너 방금 내 전화 끊었어?”강민아는 3초 동안 전화기 너머로 침묵을 지켰다.“연구원님,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반하준의 날카로운 턱이 굳게 다물리며 그의 얼굴은 그을린 냄비보다 더 어둡게 변해갔다.강민아는 지금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그것도 일부러!‘그래, 꼭 내가 먼저 달래는 말을 듣고 싶다는 거지?’반하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강민아, 밥 한번 먹자.”한 번도 자신이 먼저 한발 물러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이는 강민아와 이혼한 후 그가 베푸는 최대한의 용서와 친절이었다.반용화의 휴대폰에서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연구원님, 저랑 같이 식사 한번 하실래요?”반하준은 강민아가 부끄럼을 타서 굳이 다른 사람까지 부른다는 생각에 우스웠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게 두려
처음에야 아이들도 신기해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 얘기하니 무척 지겨웠다.게다가 지난주부터 민이는 루나가 자기 집에 온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기다리기만 하니 민이를 대하는 다른 아이들의 태도도 시큰둥해졌다.민이는 정이에게 다가가는 아이를 보고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강윤정이랑 한 팀인 애들은 수업 끝나고 남아서 장비 정리하고 장비실 청소할 거야!”민이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아무도 감히 강윤정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체육 선생님은 늘 민이에게만 관대하게 대하며 체육 반장을 시켜서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남아서 청소하는 아이들을 정하게 했다.체육 선생님은 민설윤과 강윤정만 한 팀을 이룬 것을 보고는 바로 소리쳤다.“5인 1조로 배구 경기할 거야. 너희 둘은 다른 팀으로 들어가.”그가 두 아이를 각기 다른 팀으로 들여보내니 민설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팀으로 갔다.“선생님, 저희는 강윤정이랑 팀 안 할래요!”정이가 새 팀에 들어가려는 순간 팀에 있던 아이들이 손을 들고 외쳤다.체육 선생님은 다른 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강윤정은...”“선생님, 우리 팀에는 사람 다 찼어요.”“우리도 강윤정이랑 같은 팀 하기 싫어요!”“강윤정은 자기 엄마처럼 반칙할 텐데 같이 놀기 싫어요.”상대적으로 정보에 뒤처진 아이들은 부모님으로부터 강윤정 엄마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학교에 와서 서로 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민이의 영향까지 받으니 당연히 아이들은 정이를 따돌리며 아무도 한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교실에서도 쉬는 시간이 되면 민설윤과 반연주 외에 아무도 정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체육 시간에 선생님은 몸이 약한 반연주를 옆에서 쉬게만 하면서 체육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정이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강윤정이 된 후부터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여린 분홍빛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엄마와 약속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로.정이는 체육 선생님을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