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가 계단 쪽을 바라보니 민이는 그녀를 보자 작은 입을 삐죽 내밀며 쳐다보기도 싫은 듯 팔짱을 낀 채 옆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언니, 미신을 너무 믿는 것 아니야? 하루 종일 기도만 드리면 민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현이 형 말이 맞아요!” 강나현이 무슨 말을 하든 아이는 바로 거들었다.조금 전 대웅전을 돌아다닐 때 강나현이 아이에게 민이와 정이의 이름이 적힌 불패와 평안등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정이는 더 이상 반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닌데 반우정이란 이름이 반씨 가문 도련님과 함께 있으니 불길하지 않나.민씨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봐요!”아이가 강민아를 불렀다.“그쪽이 올린 평안등 꺼요. 난 더 이상 그쪽이랑 엮이기 싫으니까.”주지 스님의 얼굴이 굳어졌다.“시주님...”그는 반하준이 민이를 단속하길 바랐다.“주지 스님.”강민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지 스님은 그녀를 돌아보았다.여인의 맑고 하얀 얼굴에 맑은 샘물로 씻은 듯한 검은색 반짝이는 눈동자가 굳은 결심을 드러냈다.“반씨 가문 도련님 말씀대로 하세요. 전 더 이상 저 사람을 위해 평안등을 올리지 않을 테니까요.”주지 스님은 할 말이 많은 듯 입만 벙긋하다가 강민아와 민이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염불 한 마디를 외웠다.고즈넉한 사찰안에 산바람이 불자 버드나무에 매달린 붉은색 소원 팻말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한 계단으로 두 가족이 분리되었다.“꼬마 시주님, 따라오세요. 어머니께서 켜놓은 평안등을 원하지 않으시면 직접 끄세요.”주지 스님이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반현민!”정이의 힘차고 맑은 목소리가 절에 울려 퍼졌다.정이의 외침을 들은 민이의 얼굴이 굳어지며 주지 스님을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정이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이 순간 더 이상 말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강민아는 고개를 돌려 수천 개의 붉은 실이 매달려 있는 소원 나무를
“글씨가 있어요!” 정이가 읽어갔다.“오래도록...남은 인생...”소원 팻말의 글씨는 비바람에 다소 희미해져 정이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강민아는 고개를 들어 정이에게 말했다.“가져와. 엄마가 버릴게.”정이가 살며시 잡아당기자 소원 팻말이 뚝 떼어졌다.강민아는 소원 팻말을 들고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다.18살 때 반하준이 그녀를 정광사로 데려와 소원 팻말에 자신의 바램을 적었다.어린 나이에 고생한 강민아에게 평생 기쁘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그는 강민아를 불쌍히 여겨 그녀에게 잘해줄 거라고 다짐했다.그런데 나중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한때 진심으로 사랑했고 미친 듯이 빠져들었고 아낌없이 주었지만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이별을 마주하며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다.반하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민아에게 사랑을 줬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단호하게 아들과 함께 떠났다....이틀 후, 많은 네티즌이 인터넷에서 거듭 새로 고치며 ALI 수학 경시대회 공식 사이트를 살펴보았다.오전 10시 정각에 ALI 수학 경시 대회 최종 결과 순위가 발표되었다.ALI 그룹 공식 SNS를 통해 공개한 명단 속 결승 1등은 강민아였다.강민아의 이름이 다시 한번 검색어에 올랐다.ALI 그룹은 강민아의 열기에 힘입어 최종 순위를 발표하는 동시에 상위 20명이 최종 금, 은, 동상을 놓고 경쟁하는 챌린지에 참여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이번 대회도 역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며 JVC 채널 사회자가 직접 나서서 진행한다....부신 그룹.반하준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고급 맞춤 정장을 입은 그는 반듯한 옷차림에 당당한 걸음걸이가 타고난 리더였다. 회의실에 있던 주주와 임원들의 시선이 전부 반하준에게 집중되었다.회의실 대형 스크린에는 외국계 투자회사 대표들도 여러 명 등장했는데 그들은 카메라를 통해 반하준을
이때 회의장에 꽤 많은 사람이 더 들어왔다.주주들은 들어온 사람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르신 오셨어요?”반하준의 부친 반용훈이 들어왔다.대머리 반용훈이 들어오자마자 회의실 전체가 생기를 띠며 눈에 띄게 밝아졌다.불상처럼 생긴 반용훈은 귓불도 크고 두 눈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꼬리를 올리고 누구나 웃는 얼굴로 마주했다.반하준은 부친을 보고도 상석에 가만히 앉아 존경의 의미로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그 순간 회의실 밖에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비서가 휠체어를 밀며 거기에 앉아있던 반용화가 사람들 시선에 들어왔다.반하준은 멈칫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주주들도 서둘러 반용훈을 지나쳐 반용화에게 다가갔고, 반용훈은 고개를 돌려 주주들에게 둘러싸인 반용화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주주들은 반용화 앞에서 두세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늙어서 뻐근한 허리를 굽혔다.“반 연구원님, 안녕하세요.”“반 연구원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큰 화면으로 부신 그룹 경영진과 온라인 미팅을 하고 있던 외국 대표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와우, 닥터 반! 세상에, 내가 저 사람을 만나다니!”“놀랍군요. 반 연구원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오늘 모든 일정을 미루고 8시간 비행기로 서경에 날아갔을 텐데.”반용화는 검은색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셔츠 단추를 목 아래까지 풀었다. 매끈한 얼굴선을 지닌 그는 태연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반용화의 얼굴은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만 애석하게도 5년 전 사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하지만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반용화가 반하준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은 넓고 푸른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았다.그렇게까지 싸늘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득히 벽이 느껴진달까.반하준은 직접 반용화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작은아버지.”반용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는 휠체어를 밀고 그를 반하준 옆자리로
반하준은 강민아의 얼굴을 다시 보고 나서야 예선 1등이 단순히 강민아의 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그녀는 결승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이번 챌린지에서는 20위권 참가자들이 각자 도전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한다.참가자는 도전자의 출제에 답해야 하지만 도전자 역시 자신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참가자가 문제에 답을 하지 못하거나 논리적인 사고를 보여주지 못하면 바로 탈락이다.20위, 19위, 18위 참가자는 모두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강민아가 문제를 풀자 그들은 탈락했다.다음으로 17, 16, 15위 참가자도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계속해서 도전자에게 지목당하는 강민아의 모습을 보며 네티즌들은 모두 강민아를 응원하는 댓글을 남겼다.[왜 다 강민아한테만 도전해? 가정주부라고 무시해?][다 같이 덤벼서 공격한다는 거지?][그러기엔 너무 상대가 안 되는걸?]생방송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지 못했고,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민 그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강민아는 도전 무대에 오른 이후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반하준은 스크린 속 밝은 표정의 강민아를 바라보며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어쩐지 그녀가 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저걸 다 알고 있다고?’하지만 그녀는 고작 학사 학위만 따냈을 뿐이다.7년 동안 반씨 가문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혹시 남몰래 공부라도 한 걸까.한 주주가 말했다.“강민아 씨를 부신 그룹 CTO로 데려오죠. 능력도 뛰어난데 반 대표님 아내이니 제일 적합한 사람인 것 같네요.”반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저희는 이미 이혼했습니다.”하지만 주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이혼했어도 다시 데려와요.”“하준이 네 지위와 외모를 보고 어느 여자가 마다하겠어?”“여자는 원래 그래요. 몇 마디 구슬리면 바로 넘어온다니까요.”...결승전에서 2위를 차지한 참가자가 도전 무대에 올라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반하준은 숨이 멎었다.정말 강민아를 부신 그룹에 데려
강민아는 시상대에 올라 조직위원장이 건네준 금상 트로피를 받았다.그녀가 마이크 앞에 서자 진행자가 물었다.“강민아 씨,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금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 다들 궁금해합니다.”강민아는 녹아내릴 듯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카메라 앞에서 하얀 얼굴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심호흡한 그녀는 단상 아래 18살 자신이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검은 눈동자 속에는 별처럼 빛나는 광채가 반짝이고 있었다.“제가 트로피를 받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비결은 저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며 타인의 반응에 겁내거나 외부의 평가에 자책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를 부정하는 말들도 있겠지만 애초에 저 자신 말고 누구의 인정도 갈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인생의 주인공은 저니까요.”강민아가 봄바람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제가 살아온 인생을 자주 되돌아볼 순 있겠지만 절대 그때로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강민아가 ALI 수학 경시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하자 온 인터넷이 들썩였다.[국내 최고의 대회에서 금상을 획득한 강민아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그녀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강민아 씨에겐 더 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어요!][내가 말했지. 여자는 남자를 버린 순간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거라고.]인터넷에서는 국내 10여개의 명문 대학에서 강민아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30분도 채 되지 않아 해외 유명 대학들이 SNS를 개설하고 강민아에게 축하와 초대를 보냈다.네티즌들은 이번 ALI 대회가 얼마나 큰 관심을 받고 있는지 실감했다.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강민아를 열심히 초청하는 상황 속에 국내 주요 기업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심지어 국가 자본이 탄탄한 군사 관련 기업들도 강민아에게 연락을 보냈다.그리고 몇몇 재벌가 사모님들의 계정에 찾아가 보복성 메시지를 남기는 네티즌도 꽤 많았다.얼마 전 그들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는 소나무처럼 반듯하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강민아를 향해 쏟아지는 꽃과 박수를 바라보며 심은호의 눈동자는 웃음으로 빛났다.여러 교수가 강민아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강민아는 정신을 차리고 학계 거물들을 맞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그녀는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인파를 헤치고 심은호를 향해 걸어갔다.심한기도 거기 있었다.강민아는 심한기 앞에 가만히 서서 심호흡한 뒤 심한기에게 말했다.“교수님, 저 돌아왔어요!”심한기가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숨을 참는 걸 보니 표정 관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쳇, 난 너 필요 없다!”심한기가 입을 삐죽거리자 강민아는 아직 장기명에게 성과를 빼앗긴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교수님...”강민아가 해명하려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심한기가 말했다.“그냥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 네가 여전히 빛나는 존재인지 나도 지켜볼 테니까.”심한기의 말에 강민아는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몇 명의 교수들이 더 모여들었다.“강민아 양, 제17회 이노베이션 서밋 포럼의 추천서인데 서경대를 대표해서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강민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특허받은 것을 좋은 가격에 팔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이노베이션 포럼에 참석하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교수들이 투덜거렸다.“하여튼 권 교수 빠르다니까.”또 다른 교수는 같은 추천서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강민아 양, 고연대를 대표해서 과학기술 서밋 포럼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고연대에서 보내드리는 추천서이니 이걸로 꼭 포럼에 오시길 바랍니다.”서경대 교수는 즉시 고연대 교수의 손을 제지했다.“이봐, 내가 먼저 추천서를 줬어. 받아도 우리 서경대 추천서로 포럼에 가야지.”두 교수가 논쟁을 벌이는 동안 다른 대학의 여러 교수가 강민아에게 추천서를 전달했다.수십 장이 넘는 추천서가 눈앞에 다가오자 강민아는 어떤 추천서를 받아들여야 할지
심은호가 손을 들어 심한기의 침이 강민아에게 튀는 것을 막았다.심한기는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어디서 구린내가 나.”다른 교수들은 그의 말에 코를 킁킁거렸다.“구린내? 난 모르겠는데?”정신을 차린 강민아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몇몇 교수들에게 보여주었다.“이미 공식 초대장을 받았어요.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말하는 순간 귀신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방연석이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강민아와 눈이 마주친 방연석은 고양이를 본 쥐처럼 뒤돌아 도망치듯 달려갔다.방연석은 본선에서 100위 밖에 안착해 자격 미달로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다.결선에서 2위를 차지한 참가자가 강민아에게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도 방연석은 조직위원회가 결선 2위를 차지한 참가자에게 금상을 수여해 주기를 기도하고 있었다.그에겐 그 참가자가 강민아도 훨씬 뛰어나 보였으니까.강민아가 금상 트로피를 쥐는 순간 방연석은 당황했다.자신과 강민아의 내기가 떠올라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황급히 현장을 벗어나 그는 어디든 숨을 곳을 찾으려 했다. 이 열기가 지나가면 아무도 그와 강민아의 내기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악!”그러다 복도에서 누군가 부딪혔다.덩치가 크고 돌처럼 단단한 상대와 부딪힌 방연석은 그대로 튕겨 나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정작 당사자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방연석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비틀비틀 일어나 부딪힌 사람을 미처 살펴보지도 못했다. 어깨를 부딪쳐 그를 넘어뜨린 사람이라면 분명 자신이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벽을 붙잡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 방연석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어느새 거기에 약봉지 하나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당황한 방연석이 약을 꺼내 뒷면에 적힌 설명을 확인했다.변비 해결...‘설마 설사약?’그의 주머니에 대체 언제 이런 약이 들어가 있었던 걸까.방연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런 젠장!”그는 바닥에
반하준의 전화가 뚝 끊어지고 회의실 전체에 죽음의 침묵이 감돌았다.반하준의 주위로 겹겹이 두꺼운 얼음이 쌓여갔다.강민아가 또다시 그와 대치하고 있다. 대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작정인지!반하준의 차가운 얼굴과 어두운 동공엔 억눌린 격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다시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기계적인 음성이었다.“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강민아가 또 그를 차단했다.반하준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데 주주들이 서로 눈치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내가 민아한테 연락해 볼게.”반용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반용화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스피커 모드로 돌리자 주주들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이며 전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이윽고 통화가 연결되었다.“연구원님, 저 상 받은 거 알고 전화하셨어요?”기쁨에 가득 찬 강민아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반하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렇듯 들뜬 강민아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축하해.” 반용화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강민아!”반하준이 살벌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너 방금 내 전화 끊었어?”강민아는 3초 동안 전화기 너머로 침묵을 지켰다.“연구원님, 전에 제가 말씀드린 것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반하준의 날카로운 턱이 굳게 다물리며 그의 얼굴은 그을린 냄비보다 더 어둡게 변해갔다.강민아는 지금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그것도 일부러!‘그래, 꼭 내가 먼저 달래는 말을 듣고 싶다는 거지?’반하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강민아, 밥 한번 먹자.”한 번도 자신이 먼저 한발 물러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이는 강민아와 이혼한 후 그가 베푸는 최대한의 용서와 친절이었다.반용화의 휴대폰에서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연구원님, 저랑 같이 식사 한번 하실래요?”반하준은 강민아가 부끄럼을 타서 굳이 다른 사람까지 부른다는 생각에 우스웠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게 두려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