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야 아이들도 신기해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 얘기하니 무척 지겨웠다.게다가 지난주부터 민이는 루나가 자기 집에 온다고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기다리기만 하니 민이를 대하는 다른 아이들의 태도도 시큰둥해졌다.민이는 정이에게 다가가는 아이를 보고는 바로 소리를 질렀다.“강윤정이랑 한 팀인 애들은 수업 끝나고 남아서 장비 정리하고 장비실 청소할 거야!”민이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아무도 감히 강윤정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체육 선생님은 늘 민이에게만 관대하게 대하며 체육 반장을 시켜서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남아서 청소하는 아이들을 정하게 했다.체육 선생님은 민설윤과 강윤정만 한 팀을 이룬 것을 보고는 바로 소리쳤다.“5인 1조로 배구 경기할 거야. 너희 둘은 다른 팀으로 들어가.”그가 두 아이를 각기 다른 팀으로 들여보내니 민설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팀으로 갔다.“선생님, 저희는 강윤정이랑 팀 안 할래요!”정이가 새 팀에 들어가려는 순간 팀에 있던 아이들이 손을 들고 외쳤다.체육 선생님은 다른 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강윤정은...”“선생님, 우리 팀에는 사람 다 찼어요.”“우리도 강윤정이랑 같은 팀 하기 싫어요!”“강윤정은 자기 엄마처럼 반칙할 텐데 같이 놀기 싫어요.”상대적으로 정보에 뒤처진 아이들은 부모님으로부터 강윤정 엄마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학교에 와서 서로 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민이의 영향까지 받으니 당연히 아이들은 정이를 따돌리며 아무도 한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교실에서도 쉬는 시간이 되면 민설윤과 반연주 외에 아무도 정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체육 시간에 선생님은 몸이 약한 반연주를 옆에서 쉬게만 하면서 체육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정이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강윤정이 된 후부터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여린 분홍빛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엄마와 약속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로.정이는 체육 선생님을
함께 팀을 이룬 아이 중 누구는 손으로 땅을 지탱한 채 혀를 내밀었고 누구는 바닥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반현민, 우린 일어나지도 못하겠는데 재경기?”민이는 옆에서 체육 선생님이 정이에게 꽃 스티커를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체육 선생님이 스티커 다섯개를 가져왔고 정이가 혼자 5인 팀을 상대해 1등 했으니 꽃 다섯개는 전부 정이 몫이었다.민이는 심술 가득한 얼굴로 정이에게 삿대질하며 명령했다.“1등 한 사람이 도구 정리해!”“대체 왜?”민설윤이 정이 대신 나서자 반연주도 물었다.“왜 1등 한 사람이 도구 정리해야 하는데?”민이가 말했다.“다른 애들은 다 쟤 때문에 지쳤는데 쟤는 땀도 안 흘리잖아. 쟤가 안 하면 누가 해?”민설윤이 중얼거렸다.“반현민 너도 힘이 넘치는구먼.”민이는 친구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난 반장이니까 지친 친구들을 데려다줘야지.”민이가 친구를 부축하며 가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붉어진 얼굴로 아이는 이를 갈며 조용히 윽박질렀다.“걸어. 내가 널 부축해 줘야 해?”다른 친구들은 전부 교실로 돌아가고 민설윤과 반연주만 남아서 정이와 함께 체육 도구를 정리했다.“꺄아악, 살려줘!”갑작스러운 비명에 민설윤과 반연주는 깜짝 놀라고 정이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다.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마구 뛰어다녔다.검은 운동복에 마스크를 쓴 성인 남자가 손에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아이들을 쫓고 있었다.민설윤과 반연주는 제자리에 굳어 있는데 정이가 뛰어갔다.“정아, 돌아와!”“정아, 저쪽으로 가지 마!”두 소녀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정이는 손에 쥔 배구공을 힘껏 던졌고 날아간 배구공은 가면남의 등을 제대로 가격했다.“윽!”가면남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그 가면남이 일어나려 하자 정이는 가면남의 등을 밟고 한 손으로 나무 막대기를 잡고 있던 가면남의 손을 꽉 잡았다.손을 뒤로 꺾자 두둑 소리가 들렸다.“끄아악!”비참한 비명이 운동장 하늘
한 학부모가 그녀에게 속삭였다.“강민아 씨, 유교장 쫓아줘서 감사해요. 지금 원래 있던 교감이 교장이 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올해 우수 학생 평가는 공정하게 진행될 것 같아요.”강민아는 겸손하게 말했다.“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그날 유영호 씨가 정이를 퇴학시키겠다고 난리를 부리지 않았어도 언젠가 이렇게 됐을 거예요.”오랫동안 유영호에게 불만이 많았던 학부모와 교사들은 강민아에게 고마워했다.“민아야.”반진경이 반연주의 손을 잡은 채 웃으며 다가왔고 그녀의 옆엔 장기명도 있었다.반진경은 얼굴을 허옇게 칠하고 가는 눈썹을 날렵하게 세웠으며 꽤 넉넉한 핏의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채 손에는 은색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10억이 넘는 옥 펜던트를 차고 있었다.과거 반씨 가문에 있을 때도 반진경은 일부러 그 펜던트를 꺼내 강민아에게 과시하곤 했다.장기명은 배운 사람이기에 굳이 옆에 있는 사람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않았다.“민아야, 큰일 났어! 정이가 또 사람을 때렸대!”반진경의 목소리는 날카로워 주변 학부모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반진경은 강민아에게 다가와 눈썹을 치켜세우고 흥분한 표정으로 수다를 떨었다.“연주가 그러는데 네 딸 강윤정이 수업 시간에 또 사람을 때려서 골절시켰대.”이 말을 들은 주변 학부모들은 긴장한 채 서둘러 강민아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놓았다.몇몇은 이렇게 당부하기도 했다.“앞으로 강윤정 보면 멀리해. 알았지?”“엄마, 난 강윤정이 부러워요!”강윤정의 이름만 나와도 아이들은 신이 나서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강윤정 엄청 멋져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학부모는 아이의 말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왜 강윤정을 따라 해? 하지 마!”그런데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어댔다.“강윤정 혼자 반 애들 다 이겼어요. 혼자서 애들 다 쓰러뜨렸어요.”부모들은 자녀의 설명을 들으며 보디빌더와 비슷한 근육을 가진 소녀를 상상했다.반 아이들이 전부 대자로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들은 문득 현기증
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네, 맞아요.”선생님이 자기소개를 했다.“저는 2반 담임 선생님이에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반진경이 소리를 질렀다.“강민아, 네 딸이 오늘 2반 애들도 때렸어?”주위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등 뒤로 숨기기 바빴다.이내 선생님이 손을 내저었다.“아니에요! 오늘 강윤정 어린이가 학교 안전교육 활동에서 가면을 쓴 악당을 물리치고 2반 친구들의 안전을 지켜줘서 강윤정 어린이에게 커다란 꽃 스티커를 줬어요.”“엄마, 봐요.”정이가 받은 스티커를 귀한 보물처럼 강민아에게 보여줬다.옆에서 듣고 있던 반진경은 당황했다.강민아가 물었다.“정이 담임 선생님께선 오늘 안전 교육 활동이 있다는 얘기 없으셨던 것 같은데요.”“그래요.”반진경이 거들었다. 정이가 갑자기 커다란 꽃 스티커를 받은 게 미심쩍었다.그러자 선생님이 말해주었다.“그건 2반에서 진행하는 활동이었는데 강윤정 어린이가 용감하게 나서줬어요. 나쁜 사람과 용감히 맞서는 건 칭찬해 줘야 할 행동이죠.”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강민아에게 다가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악당을 연기한 아저씨 병원비인데 윤정 어머니께서...”강민아는 이내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제가 부담할게요.”선생님은 강민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다른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기 전에 모두 달려가 정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반연주는 반진경에게 말했다.“정이가 그 사람을 때려눕혀서 이제부터 어린이반 수호신이 됐어요.”“...”불쾌한 마음에 반진경의 얼굴엔 경멸하는 기색이 번졌다.정이는 미안한 듯 강민아에게 말했다.“엄마, 죄송해요. 오늘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그 아저씨 손을 부러뜨렸어요.”강민아는 부드럽게 아이를 달랬다.“선생님께서 정이가 용감하게 나섰다고 했잖아. 악당을 연기한 아저씨는 실수로 다치게 했지만 어린이 친구들은 지켜줬어. 주말에 엄마랑 같이 그 아저씨 보러 갈까?”정이는 강민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투박한 노란색 코트를 입은 장기명은 마치 꼬리를 흔드는 두더지처럼 보였다.강민아는 침묵하며 그가 어떤 연기를 펼칠지 지켜볼 작정이었다.장기명은 강민아가 대꾸하지 않자 심각한 표정으로 한탄했다.“국내는 뛰어난 인재가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운 환경이지. 나만 해도 그래요. 온 힘을 다해서 겨우 시골 마을을 벗어났잖아요. 민아 씨, 저도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말이에요. 학술과 연구에 종사하고 싶으면 해외에 가서 해요. 우리나라처럼 꽉 막힌 곳보다는 거기가 자유로워요.”“전 그냥 제 가족만 챙기면 돼요.”별다른 야망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장기명의 두 눈엔 미소가 번졌다. 강민아는 머리만 똑똑하고 대회에 참가할 뿐 사업적으로 큰 성과를 이루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여자니까.곧 장기명이 제안했다.“취업을 원한다면 외국계 기업에 가야겠네요. 휴가도 두 배로 주고 육아휴직도 있는데 국내 기업에 들어가면 혼자서 일하느라 정이를 언제 돌보겠어요.”마치 정말 그녀를 위하는 것 같은 모습에 강민아는 장기명이 진작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를 유도했다.“7년 동안 주부로 살아서 업계에 잘 알려진 회사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장 교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 지금 제 상황에서 어떤 회사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장기명은 그녀의 유도에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민아 씨, 옴 테크 알아요?”옴 테크는 M국 회사인데 그 배후에는 기술업계 거물인 아비타가 있다.오늘날 아비타는 세계적으로 시가총액 1위 기업이었다.강민아가 모르는 척 고개를 흔들자 장기명이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강민아 씨가 상을 받은 후 옴 테크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쪽이랑 연결해 달라는 의미로. 옴 테크가 서경대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고 내 연구 프로젝트에 투자도 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옴 테크는 강민아 씨에게 후한 연봉을 제시했어요. 연봉 2억에 프로젝트 보너스가 수억에 달하고 주식 배당금과 각종 수당도 다 챙겨줘요. 무엇보다 옴 테크는 103일의 휴가가
“아빠!”민이가 책가방을 등에 메고 반하준을 향해 신나게 뛰어갔다.웬일로 반하준이 직접 데리러 오자 민이는 유난히 신이 났다.반하준을 본 여성 학부모들도 눈을 떼지 못했다.그때 엄규민이 강민아 앞으로 가서 정중하게 제안했다.“강민아 씨, 타시죠.”강민아는 거절했다.“아니요. 정이랑 택시 타고 식당으로 갈게요.”반하준과 비좁은 공간에 함께 있기 싫었다.엄규민이 반하준의 편을 들며 사람 좋은 말을 건넸다.“대표님께서는 오늘 특별히 두 분을 데리러 오신 겁니다.”강민아가 휴대폰을 꺼내 택시를 부르려 하자 엄규민은 마이바흐 차량 문으로 다가가 반하준에게 보고했다.얼마 후 강민아의 휴대폰이 울리자 그녀는 택시 기사인 줄 알고 받았다.반하준의 목소리는 얼음 벌판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쌀쌀한 바람 같았다.“내가 주변 5km 이내 택시를 전부 보냈어. 정이랑 같이 걸어서 식당까지 가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을게.”강민아는 찬 공기를 훅 들이켰다.저 남자는 여전히 위압적이고 독단적이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고 마이바흐 쪽으로 걸어가 정이를 조수석에 앉혔다.그리고 정작 본인은 운전석으로 다가가 기사에게 말했다.“내려요.”반하준이 같이 밥을 먹으려고 직접 학교까지 데리러 온 건 운전기사의 눈에 다시 잘해보려는 신호로 보였다.강민아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는 순순히 그녀의 말대로 차에서 내렸다.운전석에 오른 강민아는 가방을 놓고 내비게이션을 켜며 반하준에게 물었다.“어디로 가?”남자는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운전해서 식당까지 가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어떻게든 그에게 잘 보이려는 것 같았다.반하준은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기사 노릇을 자처한다면 실컷 하게 내버려두지.’반하준이 말한 가게는 서경의 유명 프렌치 레스토랑인데 최소 한 달 전에 예약해야 가장 전망이 좋은 룸을 잡을 수 있었다.강민아는 내비게이션에 레스토랑 이름을 입력한 후 확 액셀을 밟았다. 강하게 떠밀리는 힘에 뒷좌석에 있던 반하준과 민이는 속절없
강나현은 묘한 쾌감이 들어 민이를 놓아주는데 옷에 찍힌 자국이 보였다.“너 방금 물 마셨어?”민이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토했어요.”“...”순간 강나현의 얼굴이 확 바뀌며 그녀는 급히 물티슈를 집어 옷을 닦았지만 그럴수록 더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강나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티 나지 않게 민이를 밀어냈다.“민아, 앉아.”강나현은 자기 옷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강성진은 강나현 옆에 앉아 민이가 딸에게 달라붙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큰딸이 반하준과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딸 중 한 명이라도 민이와 반하준의 마음을 붙잡아둔다면 강씨 가문은 여전히 반씨 가문에 의지할 수 있을 테니까.정이는 작은 얼굴에 진지한 표정으로 강나현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바라보았다.강민아가 물었다.“연구원님은?”반하준은 무심하게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일이 있어서...”“연구원님 안 오셨으면 난 이만 갈게.”강민아가 정이를 데리고 돌아섰지만 반하준은 붙잡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그는 강민아가 정말 떠날 거라고 믿지 않았다.다시 잘해보고 싶어서 직접 운전까지 해서 그들 부자를 식당까지 데려온 게 아닌가.“이봐요.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민이가 강나현 옆에 앉더니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삐죽거리며 소리쳤다.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민이의 원망 섞인 말을 들었다.“나랑 아빠를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같이 밥도 안 먹어요? 혹시 나랑 아빠가 굽신거리면서 화해하길 바라는 거예요?”강민아는 민이가 대체 어디서 저런 말버릇을 배웠는지 궁금했다.그때 강나현이 끼어들었다.“언니, 내가 싫어서 그래? 아니면 엄마, 아빠가 싫어서 그래?”그녀는 반하준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언니는 내가 보기 싫어서 밥이 안 넘어가나 봐요. 됐어요. 그냥 갈게요.”강나현이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이가 바로 손을 잡았다.“현이 형, 가지 마요! 가야 할 사람은 밥맛인 저
반용화가 올 거라 생각한 강민아는 정이를 데리고 강나현과 부모님 맞은편에 앉았다.강성진이 도민영에게 턱받이를 묶어주자 도민영은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렸다.“밥 먹자. 아기 배고파!”강성진은 반하준의 눈치를 살피고는 도민영을 달랬다.“반 연구원님 아직 안 오셔서...”“이이잉!”도민영은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눈가에 흐르지 않는 눈물을 닦는 척했다.강민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저런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사람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한다.웨이터가 들어와 그들에게 말했다.“방금 반 선생님께서 전화가 왔는데 일이 있어서 좀 늦어질 수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사하고 계시랍니다.”그러자 반하준은 웨이터에게 말했다.“음식 올리세요.”정이가 살펴보니 민이 앞에는 아기 그릇이 있는데 자기 앞에는 없었다. 그런데 도민영 앞에 아기용 그릇이 있는 게 아니겠나.식당의 아기용 그릇을 또다시 외할머니가 빼앗아 갈 줄 알았다.정이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아기 그릇으로 배가 부르지 않으니 필요 없다.웨이터가 음식을 올리자 민이와 정이는 닭갈비와 연어구이를 먹는데 강나현이 나이프를 들고 민이의 닭갈비를 잘라주었다.도민영은 아이들과 같은 어린이 세트를 먹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성진 씨, 나도 잘라줘!”“당신도 참.”강성진이 다정하게 답하며 나이트를 들고 도민영을 위해 닭갈비를 잘라주었다.민이는 먹으면서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현이 형은 나한테 너무 잘해줘요. 한 번도 날 위해 이렇게 잘라주는 사람이 없었는데.”정이가 닭갈비를 뜯으며 말했다.“반현민, 너 기억상실증이야? 엄마가 닭갈비 해줄 때 잘라줬잖아.”민이가 언성을 높였다.“현이 형이 잘라준 닭갈비가 제일 맛있어!”강나현은 주스를 들고 분위기를 북돋으려 했다.“우리 함께 민아 언니가 ALI 수학 경시대회에서 금상을 딴 걸 축하하자고요. 언니 너무 대단해요. 인터넷에서 완전히 유명해졌어요.”강성진이 또다시 아버지 노릇을 하려 했다.“상도 받았는데 인터뷰에서 부모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