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노트북으로 누군가 자신의 차를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스카이넷 시스템을 이용해 그 차의 출처를 조회했다.강민아는 순간 땀이 삐질 났다.‘미친 전남편.’반용화의 검은 눈동자에 묘한 미소가 숨겨져 있었다.“네 전남편이 너한테 관심이 많네.”그는 반하준이 조카가 아니라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낯선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그냥 미친 사람 같아요.” 반용화 앞에서 더 거칠게 반하준을 욕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고 애썼다.반용화는 비서에게 말했다.“따라오게 놔둬.”검은색 제네시스 차량이 반용화의 거처로 진입했다.차량이 저택 반경 5km 이내에 접근하면 하늘에 있는 위성이 동향을 감시하고 곳곳에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저택에서 1km 떨어진 곳에는 10미터 하나씩 초소가 있었다.강민아는 차에 앉아서 창밖으로 순찰차 행렬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제네시스 차량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지하 차고로 들어갔다.반용화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강민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기대감에 가득 차 반짝였다.“선생님,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다는 건 제가 용성에 들어가는 걸 동의하신다는 건가요?”강민아는 이미 반용화의 주택에 걸린 태극기 앞에서 영원히 배신하지 않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아니.”반용화는 곧바로 부정했고, 강민아의 환상은 단 1초 만에 깨졌다.“저 금상 받았잖아요!”강민아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작 대회 하나로 용성에 들어올 수 없어.”강민아의 온몸이 서리 맞은 가지처럼 시들시들해졌다.그녀는 윗입술을 깨물고 입김을 불어 콧등에 드리운 머리카락 한 가닥을 날려 보냈다.희미한 불빛 속에서 반용화는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본인조차 강민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퍽 너그러워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앞으로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자료 살펴봐.”자료라는 말에 강민아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당장이라도 반용화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싶었다.반용화의
하지만 강민아 앞으로 다가가자 이내 자제하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분홍빛 뺨을 들어 올려 강민아에게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여주었다.“석현아, 오랜만이야. 안아봐도 될까?”정이가 반석현을 향해 두 팔을 벌리자 반석현은 다소 긴장한 듯 작은 손가락으로 소매를 움켜잡았다.“응!”그가 정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정이가 반석현을 안더니 이윽고 아이의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정이는 반석현을 들고 몸무게를 가늠해 보았다.“석현아, 전보다 무거워졌네. 밥 잘 먹었구나?”반석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그리고 두 줄로 서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선생님, 강민아 씨, 윤정 아가씨,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정이는 반석현을 내려놓고 미처 무슨 상황인지 알 수는 없지만 뼛속 깊이 자리 잡은 교양 덕분에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강민아도 인사에 답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반용화의 저택에 이렇게 많은 여자 도우미가 있다니, 미녀가 셀 수 없이 많았다.“강민아 씨, 저희는 발렌시아 VIP 서비스 팀입니다. 이쪽은 수석 디자이너 이자벨 씨인데 선생님의 요청을 받아 드레스를 제작하러 왔어요.”세련되고 심플한 금발의 디자이너가 미소를 지으며 줄자를 꺼냈다.“민아 씨, 오랜만이네요. 그러면 바로 시작할까요?”14살 나이에 반용화의 손에 이끌려 서경에 도착한 그녀는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을 입은 채 호기심과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차창 밖 고층 빌딩들을 둘러보았다.반용화는 그녀를 발렌시아의 최고 VIP를 전담하는 부서로 데려갔는데 그때 강민아의 옷을 맞춤 제작해 준 사람도 이자벨이었다.당시 강민아는 반용화에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여기 옷 비싸지 않아요? 고연대 가려면 이렇게 비싼 옷을 입어야 해요?”영재반에 가는 것도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든다면 차라리 가지 않을 거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렇게 비싼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그때 반용화가 말했다.“난 네가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대학은 단순히
남자의 표정은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다.“넌 서밋 포럼에서 화려하게 등장해야 해.”강민아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선생님께서 사주시는 거예요?”이자벨은 웃었다.“민아 씨, 마음껏 골라요. 선생님께서 예산 생각하지 말고 모든 옷을 다 가져오라고 하셨어요.”강민아는 반용화가 그녀를 용성에 들일 거라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녀에게 예쁘게 옷을 입혀 서밋 포럼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다.이것은 반용화가 그녀에게 주는 또 다른 시험이었다.“선생님, 환영 선물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 천 배 만 배로 보답하고 제 가치를 보여드릴게요.”강민아의 환한 얼굴에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반용화가 기꺼이 그녀에게 투자해 준 만큼 그녀도 그에게 거대한 보답을 안겨줄 거다.강민아는 정이를 데리고 드레스 몇 벌을 골라 방으로 들어가선 갈아입고 나왔다.“우와!”소파에 앉은 정이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드레스를 입은 강민아의 모습은 처음 본다.강민아는 드레스를 휘날리며 멋지게 등장했고 그녀의 발치에는 은하수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엄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요!”정이가 강민아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이리 와 봐.”반용화가 말하자 강민아가 그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예뻐요?”치맛자락이 물결처럼 바닥으로 퍼져 내려가고 강민아는 마치 반용화에게 경례하는 것 같았다.반용화는 비서가 들고 있던 브로케이드 상자에서 진주 목걸이를 집어 들어 강민아의 목에 직접 걸어주었다.서늘한 남자의 손끝이 목걸이를 걸어주면서 그녀의 여린 목뒤 쪽 살갗에 슬쩍 닿았다.그 미묘한 촉감에 강민아의 가슴이 흠칫 설레었다.반용화를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의 눈빛은 마치 즉위를 받아들이는 여장군처럼 굳건했다.정이는 워치로 이 모습을 찍었다.아이는 심은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최근 정이가 돌고래를 좋아해서 심은호가 돌고래 인형을 사진 찍어 보냈다.정이는 방금 찍은 사진을 심은호에게 공유했다.[엄마
[자제해!]심한기가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아빠, 미리 말하지만 전 보수적인 남자라 민아 씨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면 전 첩이라도 할 거예요.]화면을 두드리는 심한기의 손이 떨렸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도 첩이 될 수 있나?]심은호가 침묵하자 심한기가 쓴소리로 충고했다.[아들아, 네가 도덕도 교양도 없지만 네가 원한다고 첩이 될 순 없어.]심은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10년 동안 남모르게 구석에서 지켜왔는데 첩도 될 수 없다니.아직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걸까.그는 소파에 힘없이 쓰러져 휴대폰 속 반용화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강민아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줄 수밖에. 아니, 아니지. 이럴 순 없어. 나 하나 끼어드는 게 뭐 어때서?”심은호는 손을 들어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다.그는 이를 악물었다.“반용화는 아이큐가 200이라면 난 200시간을 버틸 수 있어.”뛰어난 영혼도 훌륭하지만 그처럼 젊고 튼튼한 육체도 뜻밖의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다.생각을 정리한 심은호는 다시 기운을 내 소파에서 일어나 정이에게 문자를 보냈다.[진주 목걸이도 네 엄마 앞에서는 빛을 잃었네.]“정아, 엄마 옷 바꿔입어 볼게.”정이가 심은호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있을 때 강민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엄마, 아저씨가 너무 예쁘대요. 진주도 엄마 미모 때문에 빛을 잃었대요!”강민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심은호 씨? 그 사람이 어떻게 알고...”정이는 강민아에게 심은호와의 대화를 보여주며 말했다.“엄마가 꽃처럼 예쁜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에게 우리 엄마가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요.”딸의 칭찬에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강민아는 쭈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가 정이에게 말했다.“근데 내 사진을 은호 아저씨에게 보내는 건 좀 손해 같은데? 정이는 공유하고 싶었겠지만 엄마는 다른 남자가 휴대폰으로 감상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정
“정아.”거실에서 반용화가 나지막하게 불렀다.정이가 다가오자 반용화가 물었다.“은호 아저씨 좋아?”조금 전 정이와 강민아의 대화가 그에게도 들렸다.“좋아요!” 정이는 당당히 인정했다.“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엄마가 심씨 가문에서 수업 들을 때 전 그 집에서 잤었는데 귓가에 요정이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는 무척 좋은 사람이에요.”요정?정이의 한 마디로 반용화는 심은호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허, 여우 놈이 내 장미를 물어가려고?’그가 정이에게 말했다.“언제 한번 자는 척 요정이 네 귓가에 말하는지 들어봐. 요정이 말할 때 눈을 뜨면 바로 볼 수 있을 거야.”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정이는 반용화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종종 귓가에 몰래 속삭이던 요정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강민아는 다시 한번 방에서 나올 때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했다.마침내 그녀는 두 벌의 드레스를 골랐고 두 벌 모두 현재 사이즈에 맞게 수선했다.그리고 정이가 학교에서 용감하게 나선 것에 대한 보상으로 작은 드레스를 하나 사주었다....한 주가 지나고 강민아는 드레스를 입은 채 차에 앉아 있다가 심은호가 보낸 링크를 보게 되었다.링크를 클릭하자 서경대 포럼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글이 떴다.댄스 동아리 회장인 방연석이 기숙사에서 거꾸로 돌면서 변을 보는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기숙사 문은 닫혀 있었지만 여전히 악취가 새어 나왔다.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은 누가 규칙을 어기고 실험실의 화학물질을 기숙사로 반입했다고 생각했다. 명문대에서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곤 했으니까.학생들은 사감 선생님께 1206호에서 악취가 계속 난다며 안에서 여러 사람이 구토하는 소리도 들린다고 알렸다.사감이 곧장 방문을 열자 똥으로 골고루 얼룩진 수학과 학생과 허연 다리를 드러내놓은 방연석이 보였다.사감은 즉시 방금 먹은 점심을 모두 토하고 말았다.[현장에서 찍은 영상도 있는데 그건 안 보낼게요.]심은호는 강민아에게 말했다.[문자를 읽는 것만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반하준과 함께 서밋 포럼 환영 파티에 참석한다는 의미였다.가장 먼저 차에서 내린 사람은 강씨 가문의 큰아들 강기성이었다.강기성은 새하얀 정장을 입고 머리 윗부분을 뒤로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피부는 하얗고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염세적인 얼굴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고 윗 눈꺼풀은 자다 일어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귀에는 검은색 피어싱에 입술에도 검은색 링이 끼워져 있었다.강기성이 등장하자마자 한 취재진이 그를 바로 알아봤다.“저 사람이 강씨 가문 가짜 도련님 강기성이네. 강씨 가문 진짜 아가씨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친아들로 생각한다는 그 사람.”강기성은 18세 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그때 강씨 가문 사람들은 강기성이 특수 혈액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확인 결과 강기성은 강성진과 도민영의 아이가 아니었다.강씨 가문이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수소문한 결과, 당시 도민영이 출산한 후 누군가 아기를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강씨 가문은 곧바로 경찰을 동원해 18년 동안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다행히 강민아의 DNA가 미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돼 있었다.강씨 가문과 강민아의 혈액형이 일치하자 강씨 가문은 오랫동안 잃어버린 아이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그 후 강씨 가문 사람들은 강민아를 데려갔지만 강기성은 친부모를 아직 찾지 못했다.비록 가짜 도련님이긴 해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라 부부는 여전히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강기성은 언론의 관심과 주목을 즐기며 고개를 돌려 벤츠 내부를 들여다봤다.취재진도 차 문으로 카메라를 돌리니 안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다.서경 제일 병원에서 근무하는 강기성이 반하준을 따라 이노베이션 서밋 포럼에 참석하는데 그렇다면 그와 함께 온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한 여성의 굽이 두툼한 가죽 구두가 땅을 밟았다.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한 손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은 강나현
강나현은 강민아가 초대장을 꺼내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강민아의 초대장을 확인한 웨이터는 그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강민아 씨, 안으로 들어가시죠.”강민아는 초대장을 다시 받아 들고 강나현과 반하준 일행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홀로 들어갔다. 마치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눈 사람들과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강나현은 웨이터에게 물었다.“잘 보셨어요? 방금 들고 있던 게 진짜 초대장이 맞나요? 왜 하준 씨랑 초대장이 다른 거죠?”웨이터는 침착하게 설명했다.“저 숙녀분께서 들고 오신 건 주최 측에서 직접 보낸 특별 게스트 초대장이고, 이 신사분이 들고 있는 것은 여러 회사에 배포하는 기업 초대장입니다.”강기성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왜 특별 게스트 초대장이 기업 초대장보다 좀 더 고급스럽게 들리지?”반하준의 얼굴이 차가워졌다.“내가 알기론 서밋 포럼 주최 측에서 ALI 수학 경시대회 금상 수상자에게 특별 초대장을 준 적이 없는데요. 금상을 받은 뒤 서밋 포럼에 참석하려면 대학과 협력하여 대학의 초대장을 가지고 파티에 와야 해요.”하지만 대학 초대장은 강민아가 방금 꺼내온 것과는 달랐다.강나현이 쾌재를 부르며 눈을 번뜩였다.“설마 민아 언니가 가짜 초대장을 가져온 건 아니겠지?”그러자 웨이터가 말했다.“초대장에 보안 코드가 있는데 가짜일 리가 없습니다.”강나현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코드도 위조할 수 있어요. 파티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호텔 매니저에게 물어보면 알겠죠.”웨이터는 강나현과 강기성이 반하준과 함께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미친 사람인가.”그는 무전기를 통해 주최 측 직원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특별 게스트 강민아 씨 도착했습니다.”...회의장 2층에서 연락을 받은 직원이 금빛 대문으로 들어섰다.회의장 양쪽에 놓인 자작나무 의자에는 오늘날 국내 기술 대기업의 거물이자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장 하성훈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드론 업계 1위 회사의 기술 총괄이기도
“스타 라인은 자동차를 만들면서 왜 우리랑 경쟁해요? 내가 먼저 가야 해요!”몇 명의 덩치 큰 남자들이 싸울 기세로 문을 막아서며 아무도 내보내지 않으려 했다....강민아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쟁반을 든 웨이터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샴페인 한 병을 가져갔다.“윤정 어머니.”정이와 같은 반인 아이 학부모가 강민아를 보고 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강민아는 앞에 있는 여자가 유교장으로부터 퇴학을 당할 뻔했을 때 정이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발언을 했다가 나중에 SNS에 올린 사과문까지 지웠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그리고 그녀가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 회사 공식 계정으로 강민아에게 사과했다.파티에서 강민아를 보고 깜짝 놀란 그들은 서둘러 친해지기 위해 다가왔다.“윤정 어머니, 오늘 너무 예뻐요. 엇, 이건 발렌시아 옷인가요? 이번 SS 패션쇼에서는 못 봤는데?”“이자벨이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은 디자인이라고 했어요.”강민아가 무심하게 설명하자 여자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미공개 디자인에 발렌시아 수석 디자이너도 만났어요? 윤정 어머니, 너무 부러워요. 반 대표님이 참 잘해주네요. 이혼했는데 반씨 가문에서 여전히 VIP 대접을 받게 해주고.”강민아가 자신이 입고 있던 드레스가 반하준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설명하려던 순간, 갑자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강민아가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 한가운데 서 있던 연진숙이 서둘러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노파는 금방이라도 칼을 들고 그녀를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누가 데려왔어? 초대장이라도 받았어?”연진숙이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자 강민아는 그녀 앞에서 장미향이 진하고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을 여유롭게 한 모금 마셨다.연진숙의 미간이 들썩거렸다. 강민아의 여유로운 모습이 꼭 그녀 앞에서 과시하는 것 같았다.강민아가 잔을 내려놓고 손끝으로 잔을 톡톡 두드리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오지랖도 참 넓으시네요. 그런 것까지 참견하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