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현이 슬쩍 강성진을 돌아보며 입을 놀렸다.“아빠, 언니한테 심은호 데려오라고 할 필요는 없었어요. 언니 난감할 텐데.”강나현은 심은호가 강민아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강성진의 농담이거나 강민아가 강성진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심씨 가문 도련님은 수많은 재벌가 아가씨의 왕자님이며 이상형인데 강민아가 복권에 당첨되어도 심은호 눈에 들었을 가능성은 없었다.강나현은 고고한 심은호가 다른 미혼의 재벌 2세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16, 17살 때부터 그는 흔한 스캔들 하나 없었다.한때 업계에서 심은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가 심은호 측으로부터 고소장을 받았다.그래서 강성진이 강민아와 심은호가 만난다고 했을 때 강나현은 곧바로 이렇게 대꾸했다.“그러다 심은호가 고소장 보내겠어요.”하지만 강성진은 확신에 차서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이어 강나현은 강민아와 심은호가 동행하는 사진을 보았고, 사진 속 다정한 두 사람은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훌륭한 미모를 자랑하며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을 보였다.강나현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심은호가 어떻게 강민아를 만나?’정말 만난다고 해도 단지 심심풀이로 갖고 노는 거다.그러니 오늘처럼 강성진이 강민아에게 심은호와 함께 입사 파티에 오라고 했어도 강민아가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거겠지.심은호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일 강민아 곁을 지키겠나.“아가씨 오셨네!”“부사장님 오셨어.”정신을 차린 강나현이 입구 쪽을 돌아보니 강민아는 깔끔한 여성 정장을 입고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채 가느다란 목선과 아름다운 턱선을 자랑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팔짱을 낀 남자는 훤칠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자 주위가 환해지며 자체 발광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무거운 카메라 장비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 여러 기자가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강성진이 물었다.“민아야, 이 사람들은 누구야?”강민아는 참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담을 마구 뽐내고 싶었던 그의 행동에 지유빈은 순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이미 강승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강성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문제를 하나 내볼게요!”“...”확 느껴지는 ‘꼰대’ 기질에 지유빈은 숨이 턱 막혔다.“딸, 기자들 불러서 촬영할 거면 미리 말하지!”도민영은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카메라 렌즈는 그녀에게 흥분제와 다름없었다. 수많은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현장에 있던 임원들은 서둘러 자신의 넥타이와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카메라 앞에서 번듯한 모습을 드러냈다.지유빈은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저희는 강민아 씨 특집 기사에 쓸 소재를 찍으러 온 것이니 다른 분들은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면 됩니다.”파티장에 대형 카메라 여러 대가 설치되었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나.도민영은 연노랑의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드리운 채 크리스털 왕관까지 쓰고 있었다.그녀가 강민아의 옆으로 다가가 카메라 렌즈 앞에서 몸을 배배 꼬자 카메라맨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여사님, 강민아 씨만 찍을 수 있게 옆으로 비켜주세요.”도민영은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에 바짝 붙인 채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눈을 깜박였다.“누가 엄마고 누가 딸인지 알아요?”“...”한편, 스프링 가든의 희미한 조명이 켜진 방 한구석에는 반하준이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TV 화면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만이 그의 피곤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강민아 씨, 이쪽 봐주세요.”“민아 씨.”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말에 반하준의 눈꺼풀이 떨리며 충혈된 눈을 뜨고 눈앞의 TV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강민아와 심은호가 함께 TV에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그의 눈동자에 강민아의 온화한 얼굴이 비쳤다.그녀는 심은호와 함께 화려한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했다.‘선남선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반하준은 날카로운 가
호흡을 가다듬은 강나현은 강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구치소에서 나온 뒤 미용실에 가서 브라운으로 염색하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일부러 피부과에 가서 관리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을 거다.남성 정장을 입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은 당차 보였지만 나이 많은 임원이나 주주들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차림새였다.“언니, 축하해. 벌써 다른 사람 만나네.”강나현은 다가가 심은호를 돌아보며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빛을 감추었다.“심은호,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언니랑 만나게 됐어?”강나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심은호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대단하네.”강나현이 눈이 휘어지게 히죽 웃었다.“심은호,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뭘 칭찬하는 거야?”“사고를 내고도 벌을 받지 않았잖아. 반씨 가문 도련님이 그 정도 다쳤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왔어. 참 운도 좋네. 반하준이 아마 불길 속에서도 구해줄 거야.”강나현의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안 그래도 심은호는 존재만으로 눈에 띄고 주위에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제 그들이 전부 강나현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게다가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었다.지난달 강나현이 강변대로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건 서경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강민아에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산에 있는 불상 대신 반하준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겠네요.”강민아는 심은호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따스하고도 솔직한 심은호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에 머물렀다.“걱정되는데요.”강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리듯 말했다.“얘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요?”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강나현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거렸다.“언니는 날 뭐로 보는 거야
강나현은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해서야 이미 올렸던 영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쳐다보았다.영상을 삭제했다고 그녀를 도발했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이미 강민아와 반하준의 영상을 저장해 놓았으니까!강민아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강나현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렸다고 더더욱 확신했다.강민아는 분명 반하준이 합의서에 사인하고 아직 민이가 병원에 있는 데도 강나현이 보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거다.그래서 다시 친구 추가를 한 뒤 일부러 그녀만 볼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 기선제압을 했다.강민아는 그녀가 반하준을 좋아해서 그의 체면 때문에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겠지만, 강나현은 강민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강나현은 영상을 저장한 뒤 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꾸었다.이제 강민아에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련다.“강민아, 내가 이미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심은호와 만나고 하준 씨랑 얽혀 있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강나현의 경고가 끝나고 파티장 스피커가 울렸다.무의식적으로 단상 위를 돌아보니 강성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제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 짧게 얘기하겠습니다...”강성진은 10분 넘게 열정적으로 연설한 뒤 도민영과 두 딸까지 무대 위로 데려갔다.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셈을 품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를 했다.마침내 강성진의 연설이 끝나고 강나현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아빠의 딸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나현의 발언은 약속된 게 아니었기에 강성진은 당황한 듯 강나현을 바라봤고, 강민아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우리 중엔 직책에 걸맞지 않은 품행을 지닌 사람이 있어요. 비록 가족이지만 사생활이 난잡해 강승 테크의 임원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강나현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리고, 그는 포박당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TV 화면을 응시했다.강민아를 저격하는 말인 건 안다.대체 강민아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걸까.강민아가 강씨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위험한 짓을 한 건 그를 이곳에 가둔 것뿐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이 그가 감금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반하준은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신경이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안 돼!’절대 그가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폭로해선 안 된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확장되며 스크린에는 적나라한 영상이 재생되었다.강성진의 얼굴이 단번에 퍼렇게 질렸다.“아아악!”도민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비명을 내뱉었다.강씨 가문의 다른 친척이나 주주들도 일제히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강나현은 단상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상 아래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 다 보셨나요? 저런 사람이 강승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나요? 저렇게 사생활이 엉망인데 정말 강승 테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강나현이 눈가에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차갑게 웃었다.무죄로 석방된 후 강민아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그러게 누가 감히 도발하래?’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꿨으니 이제 강민아가 심은호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와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강나현은 심은호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무대 맨 앞줄에 서 있던 심은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강나현 씨의 가족도 서슴없이 희생하는 용기는 대단하네요!”강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심은호는 왜 저렇게 담담한 걸까.게다가 대놓고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강나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심은호는 강민아를 그저 데리고 놀 생각이었고, 어쩌면 진작 그녀가 방탕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강나현이 승리의
강나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강성진에게 설명했다.“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올린 영상이 아니라고요!”강성진은 이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과 어린 비서의 동영상이 폭로되었고, 게다가 폭로한 당사자는 그의 잘난 딸이었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 있는 임직원들에게 두 딸이 강승 테크에 입사해 온 가족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의 열정적인 연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효녀 강나현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강나현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리고 싶었다.“개자식,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강성진은 발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이대로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강나현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리며 서둘러 기어서 도망쳤다.그때 강민아를 돌아보았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런데 강민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도민영의 어깨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엄마, 일어나봐요!”강민아가 손을 뻗어 도민영의 인중을 누르자 도민영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며 강민아를 노려보았다.“아파!”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강민아는 연기라는 걸 알았다.지금 상황에서는 무고한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엄마를 걱정하는 효녀인 척 강성진에게 맞는 강나현을 무시하고 있었다.강나현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지만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강성진은 그들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으니까.임원들과 주주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강성진이 어린 비서와 놀아난 사실은 사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적나라한 영상이 공개되고 현장에 기자까지 있으니 일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강승 테크에 미칠 부정
그녀가 강기성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는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다.강기성은 이 집안에서 강성진에게 맞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강나현은 어렸을 때부터 강성진에게 매를 맞으며 점차 폭력을 동경하게 되어 여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자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마치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매 맞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처럼.“그 사람이 도민영을 아끼는 것처럼 보여도 예전에 때려서 도민영 얼굴이 부은 걸 봤어. 난 어렸을 때부터 도민영이 저 사람한테 맞아서 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어젯밤에 왜 오빠를 때린 거야?”강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내가 사람을 시켜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어.”강기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강씨 가문은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친부모에게 가면 강씨 가문 대가 끊길 거래.”말하며 강기성이 경멸하듯 비웃었다.“난 언젠가 저 사람 죽여버릴 거야.”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강성진의 피가 튀는 것조차 더러운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앞길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강민아는 숟가락으로 강기성에게 포도당 물을 먹여주었다.“언젠가 우리가 크면 저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올 거야.”도민영이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걸 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고리타분한 마인드와 강나현의 출생 이후 강성진은 큰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다.“다들 이만 돌아가세요.”직원들에게 말하던 강민아는 자리에 있던 임원들과 주주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단상 위에 꿇고 앉은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기절한 척 시늉하는 도민영이 있었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임원들도 마음을 진정시켰다.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민아의 차분한 모습은 임원들에게 구원의 지푸라기와 같았다.강민아는 심은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민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잔이 강나현의 가슴을 강타하고 뜨거운 물이 마침 강나현의 얼굴에 튀면서 그녀의 얼굴도 씻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아악! 젠장!”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강나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던 핏자국과 뒤섞이며 연분홍색으로 바뀔 때쯤 그녀가 허둥지둥 소파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김예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어두운 동공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이런 망할!”강나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에서 쿠션을 잡아 김예나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김예나는 피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강나현이 던지는 딱딱한 물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난 적도 있는데 이까짓 쿠션쯤이야.강기성이 손을 뻗어 쉽게 쿠션을 낚아채더니 김예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쿠션을 옆으로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예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그의 눈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미친개 같았다.강나현은 입에 솜을 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김예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일부러 그런 거야! 왜 아직도 우리 집에 살게 놔두는 거야? 저번에 내 그릇도 깨고, 내 옷도 잘못 빨고, 내 방 창문도 열어놔서 엄청나게 큰 벌레가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어!”김예나는 벌벌 떨며 강기성 뒤로 숨었다.강나현의 말이 맞다. 일부러 그랬다.강기성의 손에 이끌려 강씨 가문에 살게 되면서 강나현은 일부러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김예나도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했는데 청소도구를 들고 강나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강씨 가문의 다른 도우미들이 너도나도 일을 도와주는 탓에 강나현의 방을 꼼꼼히 뒤져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나현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괴롭힘을 하나하나 되갚아주는 것뿐이었다.2년 내내 강나현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강씨 가문에서 강나현에게 했던 복수는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