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현민이 불만을 터뜨렸다.“반현민.”그때 강나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반현민이 쏜살같이 달려갔다.“현이 형, 왜 이제야 와요!”“우리 민이 주려고 이거 사느라 늦었어.”강나현이 뒤에 숨겼던 기계식 석궁을 꺼냈다.“우와.”검은 기계식 석궁을 본 순간 반현민의 눈에서 빛이 날 지경이었다.강나현은 반현민이 이런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민아는 기계식 석궁을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기계식 석궁을 들고 있으니까 엄청 멋있네.”그 말에 반현민은 참지 못하고 활을 쏘는 멋진 자세를 취했다.“현이 형, 화살은요? 화살 줘요.”강나현은 반현민에게 정교하고 날카로운 금속 화살을 건넸다. 반현민은 화살을 보자마자 입이 귀에 걸렸다.“드디어 플라스틱 화살이 아니네요. 난 형이 너무 좋아요.”“남자애라면 그래도 살상력이 있는 진짜 활을 가지고 놀아야지. 그래야 남자답게 커.”반현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금속 화살을 석궁에 장착하고는 여기저기 조준했다.그때 강나현의 시선이 반우정에게 향했다.“우정아, 엄마가 아직도 데리러 안 왔어?”반우정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엄마가 바쁜 일 끝내고 금방 데리러 온댔어요.”“너희 엄마도 참.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강나현은 밖으로 나가 반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늦었는데 민아 언니 아직도 정이를 데리러 안 왔어. 애가 어찌나 배가 고팠으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다 난다니까. 지금 언니랑 연락도 안 되는데 언니네 오빠 헬스장에 가볼까?”“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지금 정이 데리러 갈게.”반하준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눈보라처럼 귀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사실 강나현이 헬스장에 간다고 해서 강민아를 만날 일은 없었다. 강민아는 심씨 저택에 들어간 후 한 번도 가지 않았다.‘대체 심은호와 뭘 하고 있길래 정이를 데리러 가는 것조차 잊어버린 거야?’...심씨 저택.강민아는 시간이 종료되기 직전에 모든 문제를 풀었다. 다른 수험생들보다 거의 세 시간이나
강민아는 7년 만에 다시 드림의 운전석에 앉았다.혈관 속의 수많은 세포들이 되살아나는 듯 엔진 소리에 맞춰 활발하게 움직였다.강민아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고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지금 이 순간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심은호는 조수석에 앉아 스피드와 강렬한 충격을 즐겼다.오늘의 드림은 예전과 달랐다. 강민아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다.“과속 딱지 끊기면 내 걸로 하면 돼요.”강민아는 흥분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아니에요. 과속으로 찍히면 내가 벌점 받을게요.”드림이 도로를 질주하면서 내는 굉음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방금 뭐가 지나가지 않았어?”“제비인가? 휙 하고 내 앞을 지나갔어.”“이 계절에 무슨 제비야. 귀신을 본 거겠지.”길 양쪽의 행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강민아는 도로에서 강나현과 어울려 다니던 부잣집 도련님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튜닝 차량, 크게 틀어 놓은 음악,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어두운 도로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드림은 교통 법규를 무시한 혼란스러운 차량들 속에서도 마음껏 누비고 다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부잣집 도련님들을 추월했다.“젠장. 뭐야, 저게?”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 누군가가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대박. 드림이야. 살아있는 드림을 봤어. 국내 최초로 국제 랠리 대회에서 3위 안에 든 여성 레이서의 레이싱카가 바로 드림이야.”벌써 흥분해서 전화하는 사람도 있었다.“지금 당장 도로 CCTV를 알아봐. 드림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해.”“드림의 원래 차주가 오래전에 차를 팔았다던데. 7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드림을 1400억에 낙찰받았다고 들었어.”“방금 속도는 프로 레이서가 낸 속도겠지?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사고 났을 거야.”“드림의 차주를 꼭 만나야겠어. 차체라도 만져보면 한이 없겠다.”“여보세요? 나현아, 나 드림을 봤어. 진짜라니까.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블랙박스에 찍
교실 문 앞,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육성민을 에워쌌고 반하준은 계단 아래에 서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육성민을 쳐다보는 눈빛은 마치 높은 곳에 있는 신이 보잘것없는 개미 새끼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정아, 이리 와. 아빠랑 집에 가자.”반하준의 말투는 무척이나 강압적이었다. 반우정이 육성민에게 다가가는 걸 본 순간 이미 딸에게 인내심을 잃어버린 상태였다.반우정이 반하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난 외삼촌이랑 집에 갈래요.”그러자 반하준이 차갑게 웃었다.“저 사람이 널 어디 데려갈 수 있는데? 집이나 있대? 정아, 저 사람을 따라가면 길바닥에서 자야 해.”“우정아.”그때 강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우정은 강민아를 보자마자 신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하지만 반하준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강민아의 옆으로 갈 수 없었다.“엄마.”강민아는 안쓰러우면서도 미안했다.“엄마가 일이 있어서 늦었어. 정아, 미안해. 엄마가 약속할게. 앞으로 절대 너 혼자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반우정은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알아요. 엄마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 그 일은 엄마의 인생을 바꿀 수 있잖아요. 우정이는 엄마한테 짐이 되지 않을 거예요.”반하준은 그 말을 왜곡해서 들은 듯했다.‘딸을 데리러 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딸을 떼어놔야만 할 수 있는 일인 건가? 게다가 강민아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다고?’반하준의 시선이 강민아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 멈췄다.‘심은호는 왜 온 거야?’반하준의 두 눈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심은호가 강민아를 데려간 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두 사람이 허둥지둥 유치원에 달려왔다는 건...“강민아, 우리 아직 이혼 도장 안 찍었어.”반하준의 가슴속에 분노가 들끓었다.“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난 당신이 하루빨리 내 삶에서 꺼져버렸으면 좋겠어. 반하준 씨, 우린 이미 이혼했어. 제발 좀 조용히 지낼 수 없어?”이 남자 때문에 하마터면 수학 경시대회에
“심은호 씨!”깜짝 놀란 강민아가 소리를 질렀다.심은호의 품에 안긴 반우정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정아, 다친 데 없지?”반우정이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서 일어나서야 심은호의 등에 금속 화살이 꽂힌 걸 보았다.반우정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반현민이 기계식 석궁을 뒤로 숨기는 걸 보았다.‘저 화살은 나현 이모가 현민이한테 준 건데.’반현민이 이런 짓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반하준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들이 사람을 다치게 한 것보다 심은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행동이 더 신경이 쓰였다.반하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반현민, 너 이리 와.”겁에 질린 반현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아빠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정이 말을 안 들어서.”반현민을 쳐다보던 반우정은 순간 움찔했다. 지금의 반현민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반하준은 반현민이 들고 있는 기계식 석궁을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쳤다.“어떻게 정이한테 화살을 쏠 수 있어? 이런 거 다시는 만지지도 마.”고개를 들자 강민아가 심은호를 부축하고 있었고 키가 훤칠한 심은호는 가냘픈 몸의 강민아에게 기대어 있었다.“심은호 씨, 괜찮아요? 구급차 부를게요.”“괜찮아요. 걸을 수 있으니까 병원에 데려다줘요.”육성민이 성큼성큼 다가와 강민아에게 말했다.“내가 부축할게.”그러자 심은호가 말했다.“민아 씨가 나보다 키가 작아서 기대고 있으면 등에 있는 상처가 땅기지 않아서요.”심은호가 반우정을 지키려다가 다친 것이었기에 강민아는 육성민에게 이렇게 말했다.“내가 부축할게.”반우정은 심은호의 옆에 바싹 붙어 다른 손을 잡았다.“아저씨,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심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정이가 손을 잡아주니까 하나도 안 아파.”반우정은 심은호의 손을 꽉 잡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그때 굉음이 들리더니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심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구급차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피가 다 말라버리겠어. 날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거야?”급박한 상황이라 강민아는 더 이상 강나현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내려. 우물쭈물하지 말고 쓸데없는 소리도 그만해.”“혹시 사고라도 나면...”강나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압력이 그녀의 온몸을 덮치는 것 같았다. 강민아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름이 돋아 오토바이에 앉아 있다가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했다.강민아에게서 이렇게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나현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언니, 무리하면 안 돼.”“왜 이렇게 우물쭈물해? 너답지 않은데?”강나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그렇게 죽고 싶다면 말릴 이유가 없지. 차라리 얼굴부터 땅에 처박아서 콧대랑 이가 싹 다 부서져 버려.’강나현이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강민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키 줘.”강민아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던진 키를 안정적으로 받고는 육성민에게 말했다.“오빠, 정이를 호텔에 데려다줘.”반우정이 말했다.“나도 병원에 가고 싶어요. 아저씨가 걱정된단 말이에요. 별로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심은호가 다정하게 말했다.“정이만 아저씨 옆에 있으면 아저씨는 하나도 안 아파.”강민아가 육성민에게 말했다.“그럼 정이를 서경 병원으로 데리고 와.”육성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반우정을 데리고 자신의 SUV로 향했다.“반우정.”반하준이 아이를 불러 세웠다.“아빠한테 와.”반우정은 무서운 눈빛으로 반하준을 쏘아보면서 잔뜩 경계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아빠, 내가 어떻게 해야 아빠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반하준은 마치 자이로드롭을 타고 있는 듯 중력이 그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정아, 왜 그런 소리를 해?”반우정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심은호는 반우정을 구하려다가 다쳤고 화살을 쏜 사람은 또 반우정과 피를 나눈 반현민이었다.수많은 감정들이 덮쳐왔지만 아직
반하준의 무서운 기운에 겁에 질린 반현민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 모습을 본 강나현이 서둘러 달랬다.“민이는 정이랑 친남매라서 정이가 무조건 용서해줄 거야.”그러고는 또 반하준을 보면서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다.“심은호가 생긴 건 친근하게 생겼어도 성격이 오빠보다 차갑잖아. 그런 심은호가 자기 몸까지 희생하면서 사람을 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그녀는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이어 말했다.“아까 민아 언니가 심은호 차에서 내리던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하준 오빠, 잠깐만.”반하준이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휙 가버리는 걸 보고는 재빨리 쫓아갔다....병원, 심은호는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수술대에 엎드려 주치의에게 말했다.“수술비에 0을 두 개 더 붙여줘. 반하준한테 청구해야 하거든.”심은호와 아는 사이인 주치의는 수술칼로 그의 옷을 찢으면서 농담을 건넸다.“그럼 네가 심하게 다쳤다고 말해줄까? 널 병원에 데려온 그 여자가 아주 엉엉 울게?”심은호는 두 손을 포개어 턱을 손등에 괴었다.“그럴 필요까진 없어. 눈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안해하는 것도 싫어.”“세상에나. 입에 꿀 발랐어? 독사의 피가 어떤지 좀 만져보자. 뭐야? 뜨겁잖아.”심은호는 고개를 돌리고 실눈을 뜬 채 주치의에게 경고했다.“고발당하고 싶어? 의사 면허 정지 3년이랑 과실 전체 정비, 둘 중에 뭐 고를래?”그러자 주치의가 콧방귀를 뀌었다.“조심해. 화살 구멍을 똥구멍처럼 꿰매버릴 수 있어.”그 시각 강민아는 수술실 밖에 서 있었다. 반우정은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강민아의 손을 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강민아가 딸을 위로하려던 그때 반하준이 반현민을 데리고 다가왔다. 반하준은 뒤에 숨어 있는 아들에게 명령했다.“정이한테 사과해.”하지만 반현민은 뒤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사과해서 무슨 소용이야? 엄마는 또 날 꾸짖고 기계식 석궁을 압수할 뿐만 아니라 엉
반우정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고 여린 마음이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내가 잘못했다고? 아빠랑 얌전히 반씨 가문으로 돌아갔다면 은호 아저씨도 다치지 않았을 거야. 근데 나한테 화살을 쏜 건 나의 쌍둥이 오빠야. 우리 한때 사이가 얼마나 좋았었는데.’점점 체격 차이가 나기 시작하면서 반우정을 대하는 반현민의 태도도 나빠졌다. 그리고 반씨 가문에서 엄마만 반현민과 반우정을 차별 없이 대했고 아빠조차도 반현민을 더욱 예뻐한다는 걸 깨달았다.“반현민, 네가 나한테 사과해도 난 널 용서하지 않아.”반우정이 소리를 지르고는 반하준에게 물었다.“아빠, 이제부터 아빠 딸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어떻게 해야 반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데요?”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그 순간 반하준의 얼굴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반우정, 넌 반 씨야. 영원히 내 딸이고 반씨 가문 핏줄이라고.”“그럼 성을 바꾸면 안 돼요?”반우정이 계속하여 말했다.“엄마 성을 따를래요.”어두운 그림자가 반하준의 몸 전체를 감쌌다. 강나현이 팔짱을 낀 채 피식 비웃었다.“언니가 딸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봐봐. 반씨 가문마저 배신하려 하다니. 어떻게 친아빠도 버릴 수 있어?”그러고는 다리에 매달린 반현민에게 말했다.“현민아, 넌 절대 우정이처럼 저러면 안 돼.”강민아는 반우정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힘을 실어주었다.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이동식 들것에 엎드려 있는 심은호를 밀고 나왔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상의를 입지 않아 넓은 등 근육과 뚜렷한 근육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데도 허리에 군살 하나 없었다.“아저씨, 괜찮아요?”반우정은 심은호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심은호는 반우정을 돌아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움푹 팬 보조개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환자 가족분 계십니까? 수술 후 관리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강민아는 심은호가 다친 사실을 심한기에게 알렸다. 심
“심은호 너...”그 자리에 있던 강나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눈을 굴리면서 웃으며 물었다.“우리 언니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아니면 하준 오빠의 아내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언니랑 오빠 아직 이혼 중이야. 이런 때 부도덕한 짓을 하면 많은 비난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강나현은 심은호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그 순간 병실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반하준이 내뿜는 위압감에 반현민은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심은호의 매력적인 두 눈에도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상상력이 아주 풍부하네.”강나현이 말을 잇지 못했다.“난...”“어떻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 있지?”순간 당황한 강나현이 창백한 얼굴로 반박했다.“너야말로 그렇겠지.”“그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심은호는 웃으면서 반하준을 보았다.“어쩜 맨날 이런 꼴통이랑 붙어 다녀? 이러니까 민아 씨가 너랑 이혼하겠다고 하지.”심은호가 계속하여 말했다.“두 사람은 아예 다른 세상 사람이야. 넌 민아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반하준이 두 눈을 부릅뜨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그가 강민아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했다. 반하준 정도라면 국내 유명 대기업의 딸과 정략결혼 할 수도 있었는데 강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으니 말이다.강씨 가문도 부유하긴 했지만 최고의 명문가는 아니었다. 다들 강민아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에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간 것이라고 했고 반하준이 인정을 베푼 것이라고 했다.게다가 강민아는 18살이 되어서야 강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연진숙은 강민아를 재벌가 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그런데 심은호는 반하준이 강민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이보다 더 가소로운 일은 없었다.‘의사가 주사를 잘못 놔줬나?’“콩깍지가 아주 제대로 씌었구나.”“네가 남이 버린 헌신짝을 좋아할 줄은 몰랐어.”반하준은 돌아서자마자 병실 문 앞에 서 있는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