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이 씨!”윤세현을 보자마자 정이의 눈이 환하게 빛나며 폴짝폴짝 윤세현을 향해 달려갔다.윤세현은 강민아에 대한 걱정에 코끝에서 열기 섞인 숨결이 흘러나왔다.“현이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정이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윤세현은 쭈그리고 앉더니 정이의 의상을 보고 자기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주었다.“정이 너무 예쁘다.”정이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빗겨주었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걸어갔다 “왔어?”지난주 윤세현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집을 나서면서 떠나기 전 곧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겼다.강민아는 윤세현에게 뭘 하러 가는 건지 묻지 않고 정이와 함께 윤세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그런데 뜻밖에도 윤세현이 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학교로 달려올 줄이야.우경아는 윤세현과 일정한 거리로 좁혀질 때쯤 말을 꺼냈다.“이번에 고생했어.”멈칫하던 윤세현의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이 엄숙하게 바뀌었다.강민아는 우경아 앞에서 유독 경직된 윤세현을 알아차렸다.윤세현은 우경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엄마, 민아는...”우경아는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고, 찬 바람에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더더욱 아름다움을 뽐냈다.“오랜만에 보는 건데 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우경아는 강민아를 쳐다보지 않고 윤세현에게만 명령했다.“오늘 밤에 호텔로 와서 보고하고.”윤세현은 공손하게 우경아를 향해 답했다.“네.”우경아가 자리를 떠나서야 굳어있던 윤세현은 긴장이 풀리며 정이의 손을 잡고 강민아를 향해 걸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우 대표가 너 힘들게 했어?”강민아는 고개를 저었다.“미린국에 간 첫해에 한 거물이 널 눈여겨보고 거둬줘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 거물이 우경아였어?”5년 전 윤세현은 강민아가 준 거금을 들고 미린국에 가면서 둘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윤세현은 나쁜 소식은 전부 감추고 좋은 소식만 전해주었다.그때 강민아는 두 아이를 낳은 터라 윤세현과
“네가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면서 우경아는 널 양딸로 데려가 네 보호자가 될 절차를 밟을 수 없게 되었어. 그러다 네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 너한테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강민아는 먼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우경아의 발목을 잡은 세력은 뭔데?”윤세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우경아도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윤세현의 맑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반짝였다.“내 생각엔 그 힘이 널 지켜주는 것 같아.”강민아도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우경아에게 내 과거에 대해 말한 적 있어?”윤세현은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몇 번이나 날 떠보긴 했어도 난 네 일에 대해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어. 미린국에 오면서 너와 완전히 갈라졌다고 했거든.”강민아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내가 볼 때 우경아는 오래전부터 날 지켜봤던 것 같아. 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너조차 모르는 내 일을 다 알고 있었어.”강민아는 더 생각하기 싫어 다시 가벼운 어투로 윤세현에게 물었다.“우경아가 나한테 무슨 짓할까 봐 학교로 온 거야?”“서경에 오자마자 너 때문에 양자 테크가 억대 손해를 봤다는 소식을 들었어. 우경아가 직접 널 만나러 학교에 온다는 얘기도... 우경아는 무자비한 사람이라 건드리기만 하면 제자리에서 상도 엎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강민아의 두 눈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난 아직 그 여자한테 거대한 이용 가치가 있어서 당분간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해.”오히려 윤세현을 달래며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 이미 우경아와 거래를 달성했거든.”윤세현은 어리둥절했다.“어떤 거래?”“내가 양자 테크의 통솔권을 가지고 우경아와 협업하는 동시에 1분기 투자금 4천억을 요구했어. 거기에 향후 양자 테크의 수익은 100% 나한테 돌아오기로 했지.”윤세현은 찬 공기를 들이켜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동의했어?”“응.”“어떻게?”강민아와 우경아가 협상한 조건은 윤세현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강민아가
잡아보니 윤세현의 깡마른 팔에 반하준의 눈에선 경멸의 빛이 번뜩였다.이렇게 깡마른 놈이 감히 그의 여자를 건드리다니.“반하준, 뭐 하는 거야!”강민아는 소리를 지르며 윤세현을 꽉 잡고 있는 반하준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손 풀어!”반하준은 윤세현을 뒤로 보내며 감싸는 강민아를 보고 왠지 모를 분노가 밀려왔다. 그는 역겨운 듯 윤세현의 팔을 뿌리치더니 강민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왜 계속 이렇게 약해빠진 놈이랑 있는 거야? 이 자식도 심은호랑 똑같이 여우짓 하면서 연약한 척 너한테 지켜달라고 하잖아.”반하준이 씩씩거려도 강민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난 이런 게 좋아.”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강민아는 그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반하준이 봤을 때 심은호와 윤세현은 지극히 닮았다. 둘 다 연약하고 그가 조금만 건드리면 손쉽게 제압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강민아의 뒤에 숨기 때문에 강민아는 점점 더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반하준의 턱이 굳게 다물리며 피부밑으로 튀어나온 핏줄이 꿈틀거렸다.그때 정이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는데 현이 씨가 저와 엄마를 지켜줬어요. 아저씨, 현이 씨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지 마세요!”정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반하준이 물었다.“이 사람이 좋아?”정이는 반하준이 윤세현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난 현이 씨가 제일 좋아요!”“그럼 이 사람이 좋아, 심은호가 좋아?”반하준은 정이에게서 답을 찾고 싶었다.“음...”정이가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난 현이 씨가 더 좋아요!”아이가 무슨 처세술을 알겠나. 그저 본인 생각대로 솔직하게 답할 뿐이었다.정이의 말을 들은 윤세현은 미소를 지으며 반하준 때문에 언짢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왜?”반하준이 묻자 정이가 동그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었다.“현이 씨는 요리도 잘하고 좋은 향기도 나요. 나랑
반하준은 강민아가 고개를 돌린 채 윤세현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멈칫했다.강민아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심은호에게도 이렇게 웃어준 적이 없는데, 마치 윤세현이 하는 말은 다 들어준다는 표정이었다.날카로운 단검이 그의 심장을 연달아 찌르는 것 같아 반하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소꿉친구가 이토록 위협적인 존재였던가.윤세현과 강민아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는 건 알지만 상대를 안중에도 둔 적이 없었다.반씨 가문의 후계자인 그가 외딴 마을에서 상경한 사람에게 눈길을 줄 리가 없으니까.강민아와 윤세현이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반하준은 윤세현을 경멸하고 있었다.그런데 강민아가 윤세현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줄이야.윤세현이 진짜 사랑이고 심은호가 남자 친구이면 그는 뭐란 말인가.7년 동안 둘의 결혼은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무거운 쇠망치가 반하준을 내리치는 듯 뻥 뚫린 가슴에 차갑고 쌀쌀한 바람이 계속 쏟아져 들어와 오장육부를 후벼팠다.“강민아!”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짙은 먹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고 미간은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이 자식이 진짜 사랑이면 심은호는 뭐야?”“당신 심은호 좋아해?”강민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남자의 눈가에 씁쓸한 기색이 담긴 게 보였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전남편을 마주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우린 모르는 사이야. 이혼할 땐 나보고 절대 돌아오지 말라더니 왜 이젠 당신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강민아의 말에 남자의 말투도 차가워졌다.“네 착각이야. 설마 내가 일부러 너랑 마주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반하준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웃더니 어두운 눈동자에 경멸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찔려서 강민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사실 일부러 강민아와 마주치려고 이곳에 나타난 거다.강민아가 정이를
강민아는 반하준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미 조금 전 강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엘리베이터가 오작동하고 반하준이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이미 뻔했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은 채 식은땀이 삐질 났다. 정말 미친놈이다. 말로는 제 딸이라고 하면서 정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본인이 엘리베이터 오작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강민아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참았다.“반진경이 정이를 노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즘 어머니랑 가깝게 지내고 있어...”다시 말해 반진경은 연진숙의 지시를 받고 학교에서 오만방자하게 날뛴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문화부 선생님 몇 명이 나타났다.그들은 반하준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정이도 그들을 안다. 별님반에서 축제에 참여할 때 그들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햇님반 강윤정이라고 합니다. 축제에서 단독으로 공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정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진지한 얼굴로 여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반하준을 돌아보며 이사장인 그가 동의하면 그들도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런 암묵적인 규칙을 정이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강민아가 반하준에게 물었다.“여기서 내가 애원하길 기다리는 거야?”반하준은 강민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깊은 동공에 웃음기가 번뜩였다.“나한테 부탁하면 정이가 축제에 참여하는 걸 쉽게 해결할 수 있지.”정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축제에 참여하고 싶지만 무슨 공연을 할지 생각은 못 했어요.”아이는 진지하게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연습하고 나서 선생님들께 보여드릴게요. 제 공연이 마음에 드시면 제가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 앞에서 공연하는 걸 응원해 주세요.”반하준은 정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이렇게 물었다.“정아, 아빠 도움은 필요 없어? 네가 아빠 딸이
반하준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고 딸에게 아빠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방송국 팀을 불러줄 수도 있고 춤추고 싶으면 아빠가 국내외 최고의 댄서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어. 정아, 뭐가 됐든 넌 내 딸이니까 최대한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정이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기억 속 반하준은 지금처럼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애정을 보이니 불편하기만 했다.“정아, 네가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 전에는 아빠가 미안했어. 넌 이제 겨우 다섯살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어.”정이는 반하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뒤에 숨은 반하준의 의도도 분석할 수 없었다.그저 자신의 직감과 감정에만 근거해서 남자에게 대꾸했다.“아저씨, 엄마랑 날 방해만 하지 마세요.”반하준은 즉시 부인했다 “내가 왜 방해해...”“하지만 아저씨는 현이 씨를 좋아하지 않고 엄마와 현이 씨가 함께 있는 걸 반대하잖아요.”반하준은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과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그는 불쑥 말을 뱉을 뻔했다.‘당연히 반대하지!’강민아 곁에 다른 남자들이 나타나고 윤세현이 강민아의 진짜 사랑이라는 데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나.‘진짜 사랑’이라는 말이 씨앗처럼 반하준의 마음에 자리 잡아 싹을 틔우고 심장을 관통하는 가시로 자랐다.반하준은 위태롭게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자기 핏줄인 딸이 강민아와 윤세현의 만남을 응원하고 있었다.젠장!반하준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네 엄마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데 네가 말하는 현이 씨가 같은 집에 살면서 엄마랑 자는 건 바람피우는 거야!”강민아의 감정사를 딸에게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아빠는 엄마가 널 잘못 가르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강민아와 윤세현은 서로를 바라봤고, 윤세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았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순진한 정이의 목소리에 반하준 뒤에 있던 선생님들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반하준은 당황하며 서둘러 해명했다.“아니야...”그는 고개를 들어 강민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아빠는 강나현이랑 잔 적 없어!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마치 강민아에게 하는 말인 듯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그런데 반하준의 해명은 정이의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하지만 이모가 아빠의 친구인 것처럼 현이 씨도 엄마의 친구인데요?”“달라!”반하준이 부정하자 정이는 볼을 부풀리며 여전히 반박하려는 반하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오히려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아저씨,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면 안 되죠. 그건 내로남불이에요!”말문이 막힌 반하준은 어른의 사생활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강민아에게 물었다.“대체 정이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강나현과 내 사이를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강민아는 콧방귀를 뀌며 설명하고 싶지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아저씨는 엄마를 오해하고 있어요.”딸이 입을 열자 반하준는 한결 마음이 풀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했던 행동 때문에 네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까 지금 확실하게 말할게. 아빠와 이모는 그저 친구 사이야. 우리는 절대 네 엄마와 이 자식처럼...”윤세현은 몸을 돌려 강민아를 끌어안고 자기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그녀는 반하준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엥? 친구랑 안은 적 없어요?”“...”반하준의 목소리가 뚝 멈추며 정이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이모랑 아저씨 안고 있는 거 봤는데?”옆에 있던 선생님들은 구석에 숨어서 구경하기 바빴다.윤세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친구 사이에 서로 안는 건 당연하지. 가까운 사이면 뽀뽀도 하고.”말하며 그녀가 강민아의 얼굴에 쪽 입을 맞추자 반하준은 순식간에 속에서 피가 끓으며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가득 느껴졌다.주먹을 불끈 쥔 그의 손등
윤세현은 강민아와 함께 정이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다.“이해가 안 돼. 반하준은 정이의 양육권을 되찾으려는 거야, 아니면 너랑 이혼한 걸 후회하는 거야?”강민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 사람 생각은 상관없어. 그 사람과 반씨 가문을 떠난 하루하루가 나한테는 자유니까.”윤세현이 걱정을 드러냈다.“반하준이 껌딱지처럼 너한테 들러붙을까 봐서 걱정이야.”강민아 역시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윤세현이 제안했다.“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해서 생활하는 범위 내에 접근 금지하는 건 어때?”“나한테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라서 신변 보호를 요청할 수가 없어. 게다가 반하준은 극단적인 사람이라 통제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더 반항할 거야.”강민아는 반하준이 자신을 납치했을 때를 떠올리며 여전히 가슴이 쿵쾅거렸다.“반하준을 상대하려면 무시가 상책이야. 나타나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 하지만 절대 가만두지는 않을 거야.”...집으로 돌아온 정이는 축제에서 탈춤을 추기로 했다.아이는 강민아에게 말을 꺼내면서 보고 배웠던 탈춤을 선보였다.강민아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손뼉을 쳤고 윤세현도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로 보다가 잠기운도 달아난 채 손뼉을 쳤다.“정아, 대단하다. 이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정이는 춤을 추고 난 후에도 얼굴이 붉어지거나 심장이 빨리 뛰지도 않았고 호흡도 안정적이었다.“TV 프로그램에서 배웠어요.” 윤세현은 깜짝 놀랐다.“그냥 TV를 보고 배웠다고?” “네!” 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쉬워서 무대에서는 꽃도 쌓아놓고 싸우는 동작도 넣으면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 같은데요?”윤세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그건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 연습할 시간이 이틀밖에 안 남았잖아.”강민아는 정이의 연습 진행이 전혀 걱정되지 않는지 윤세현에게 말했다.“TV로 발레 동작, 다리 찢기, 턴까지 다 배운 애야.”윤세현은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탈춤이 발레보다 더 힘들어. 게다가 정이는 단체 무대에 참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강기성이 들어왔다.강성진이 베개로 강나현의 얼굴을 누르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달려가 강성진을 몸으로 밀어냈다.얼떨결에 밀려나 침대 옆 탁자에 부딪힌 강성진은 여전히 양손에 베개를 움켜쥐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강성진은 강기성을 보고 그가 강나현을 혼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고함을 질렀다.강기성은 강나현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얼굴이 파래진 채 입을 벌리고 있지만 스스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다.강기성은 곧바로 앞으로 다가가 강나현에게 가슴 압박을 했고 그제야 강나현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강성진은 강기성에게 베개를 내리쳤다.“감히 날 밀쳐?”강기성은 돌아서서 낮게 윽박질렀다.“사람 죽일 뻔했어요!”강성진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내 체면만 구긴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서경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어!”강기성은 한 발짝 물러서며 비웃었다.“그럼 죽여요.”본능적으로 사람을 살리긴 했어도 강나현을 구한 뒤 곧바로 후회했다.그가 서둘러 달려오지 않고 강나현이 정말 강성진의 손에 죽었다면 그는 감옥에 갔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나서서 강나현을 구했기 때문에 기회는 사라졌다.강성진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농담이지.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기성아, 네가 나 대신 쟤 다리 좀 부러뜨려! 안 그러면 또 강씨 가문에 민폐를 끼칠 것 같으니까.”강나현은 벌벌 떨었다. 어릴 때부터 강성진을 무서워했는데 조금 전 강성진이 베개로 얼굴을 가렸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몇 초만 지나면 정말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두려움에 강나현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고 두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침대에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지에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강기성과 강성진 모두 고약한 냄새를 맡았고 강성진이 욕설을 내뱉자 강기성이 말했다.“정상적인 생리현상이니까 가서 옷 갈아입어.”강나현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문 너머로 강성진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민이가 목 놓아 울면서 무기력하게 소리를 질렀다.“난 엄마를 원해요. 아빠, 난 엄마를 원한다고요!”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그는 민이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아이 방을 나갔다.방 문이 닫히자 민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온 반하준은 적막한 방안에서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차가운 기운이 발바닥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긴 다리로 성큼성큼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모든 서랍을 열어젖히고 넥타이, 손목시계, 브로치 장신구를 모두 꺼냈다.‘이게 강민아가 준 선물이던가? 이게 사준 건가?’전부 잊어버렸다.대체 어떤 게 강민아가 사준 것이고 어떤 게 담당 코디가 매치해 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재계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준 선물은 다 기억나는데 뒤늦게 강민아가 줬던 선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그녀가 준 게 어떤 것인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반하준은 휴대폰을 꺼내 뒤적거리던 액세서리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코디에게 보내 그가 산 게 어느 것인지 구분하도록 했다.깊은 밤, 코디는 서둘러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반하준은 마침내 강민아가 선물한 넥타이와 브로치를 찾아냈다.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의 무늬와 브로치에 반짝이는 보석을 쓰다듬었다.강민아가 그에게 준 건 이렇게 많은데 심은호는 딱 하나만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들을 전용 사물함에 넣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안주인의 침실로 들어가 텅 빈 방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강민아가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옷장을 열자 안에는 강민아의 옷이 가득했다.그에게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가져가지 않은 걸까.반하준은 강민아가 늘 입던 잠옷 중 하나를 꺼내어 코끝에 대고 천에 밴 은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이게 강민아의 체취였나?’이젠 강민아의 체취가 어땠는지도 잊어버렸다.강민아가 누웠던 침대에 누워 그에겐 다소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몸을 돌려 강민아의 잠옷을 품에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미간은 찡그리고
침대에 누운 민이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흰자위만 조금 남아 희미한 불빛 속에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반하준은 입을 벌렸지만 누군가 자기 목구멍으로 종이 뭉치를 밀어 넣은 듯한 느낌에 목이 메었고, 민이는 갈망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이미 이혼했는데...”어떻게 강민아와 재결합하겠나.그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강민아와 이혼 서류에 사인할 땐 돌아와서 애원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며, 정식으로 이혼하러 갈 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강민아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애원해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민이를 위해서 최대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네 엄마가 다시 만나자고 애원하면 생각해 볼게.”스스로 되뇌듯 말하며 반하준은 주먹을 말아쥐었다.그런데 민이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는 나도, 아빠도 버렸는데 어떻게 아빠한테 와서 다시 만나자고 애원해요?”아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아빠, 엄마한테 가서 빌어요. 네? 용서해 달라고, 돌아오라고 빌어요!”민이의 눈에 반하준은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이 강민아를 붙잡지 못해도 반하준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아빠가 용서해달라고 말만 하면 엄마가 재혼해 줄 거예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내가 뭘 잘못했길래 네 엄마한테 용서를 빌어야 해?”민이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는 아빠가 현이 형한테 잘해줘서 떠난 거예요.”반하준은 목구멍으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강나현과 난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선을 넘은 적도 없어. 그 여자가 괜히 날 의심하는 거야!”민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아빠가 잘못했어요! 엄마 속상하게 했잖아요!”아이가 울부짖었다.“으아앙!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엄마가 재워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가고 며칠째 밤에 깨는데 엄마가 날 버린 것만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엄마가
“서경에 소문 다 났어. 네가 우강 그룹에서 강나현이랑 약을 먹고 뒹굴었다고. 이것 봐! 내가 있는 모든 단톡방에서 너랑 강나현 영상과 사진이 퍼지고 있어!”연진숙은 반하준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반하준은 모든 단톡방에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진 사진과 영상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문 앞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손님들이 몰래 찍은 것이 분명했다.그들 역시 재계에서 입지가 있는 인물들이라 보낸 사진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그리고 지금 사진과 영상이 하도 여러 곳에 퍼져 출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화면 속 대부분은 강나현이 차지하고 있고 일부 영상에서 반하준의 흐릿한 모습이 포착되었다.반하준은 연진숙에게 전화를 다시 건넸다.“저랑 강나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밝힐 거예요.”연진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남자 같은 애랑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네. 서경에서 우리 집 며느리가 되겠다는 재벌가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허, 강씨 가문 사람들은 발바닥도 못 미치지!”반하준은 계단을 향해 걸어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연진숙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어머니, 다시는 강씨 가문 헐뜯지 마세요!”연진숙은 당황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반하준, 너 지금 뭐라고 했어?”반하준은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목의 상처는 이미 꿰매고 의사 선생님이 거즈로 감쌌지만 손에 조금만 힘을 주자 다시 희미하게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반하준이 옷을 갈아입은 탓에 연진숙은 그의 몸에서 희미한 소독수 냄새만 맡았을 뿐 손목을 다쳤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강민아는 민이 엄마예요. 할머니가 돼서 강씨 가문 깎아내리는 소리 다신 귀에 안 들리게 하세요.”말하며 반하준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강나현과 강성진은 욕해도 되지만 강씨 가문을 욕하는 건 안 돼요. 그건 강민아를 욕하는 거니까.”연진숙이 불쑥 말했다.“강민아를 욕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홱 몸을 돌린
“내일부터 정식으로 대시해도 돼요? 언젠간 당당하게 민아 씨 사람이 되고 싶어요.”어둠이 강민아의 표정을 가렸고,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강민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둠 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심은호의 눈동자가 보였다.심은호는 강민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싫다는 건가?’그녀의 머리 옆에서 지탱하던 손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밝은 빛이 튀어나와 강민아의 얼굴과 심은호의 시야를 환하게 비췄다.그리고 남자는 벽에 기대어 있던 강민아가 입꼬리를 올린 채 눈가에 번진 미소를 볼 수 있었다.심은호의 성격상 절대 먼저 헤어지자고 할 리가 없는데, 역시나 남자는 적극적으로 다가올 생각이었다.계약 커플은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무는 관계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심은호는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림자가 힘차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자 심은호의 팔에 갇힌 강민아의 얼굴이 보였고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이봐!”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심은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뭐요? 남친이 여친한테 키스하는 거 안 보여요?”육성민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베어버릴 기세였다.“당신이랑 민아는 계약 관계일 뿐이잖아!”심은호가 피식 웃었다.“내일부터는 아니거든요.”육성민이 멈칫하는 사이 심은호가 강민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헤집으며 고개를 숙여 차가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에 진득한 입맞춤을 했다.“잘 자요. 내 여친.”깊은 눈동자가 꼭 바다 같아서 한 번만 봐도 깊숙이 빠져들어 빠져나오기 힘들 것만 같았다.심은호는 한 발짝 물러났다.“형님, 같이 가죠?”육성민은 늦게 귀가하는 강민아를 위해 정이를 챙기느라 이곳에 있었던 거다.게다가 최근 정이의 연습도 도와주면서 두 사람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조금 전 위에서 심은호의 차가 멈춰서는 걸 보고 또 강민
강민아는 황급히 대답했다.“안녕히 주무세요.”전화기 반대편에서 반용화가 전화를 끊자 강민아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심은호를 바라보다가 남자의 볼에 손을 뻗어 꼬집었다.의외로 심은호의 피부가 너무 탱글탱글해서 아무리 시도해도 뺨의 살을 꼬집을 수 없었다.심은호가 얼굴을 뒤로 젖히자 강민아의 손이 그의 턱을 잡게 되었다.꼭 선한 남자를 희롱하는 것 같았다.“내가 무슨 어르신을 학대해요? 그리고 선생님이 그쪽보다 나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선생님이 어르신이면 그쪽은 뭔데요?”심은호는 강민아의 가느다란 하얀 손목을 붙잡고 알아서 얼굴을 갖다대 비비적거렸다.“나는 젊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죠. 반용화 씨는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있는데 그게 학대가 아니고 뭐에요?”말을 마친 그가 두 눈을 반짝이나 마치 탐스러운 포도알 같았다.“연구원님이랑 통화하는 거 방해했어요? 미안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그냥 민아 씨랑 대화하고 싶어서...”강민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질투하지 마요. 그냥 선생님일 뿐이니까.”“알겠어요. 여친님!”심은호는 흔쾌히 답했다.“그렇게 할게요.”강민아는 크게 심호흡하며 밀폐된 차 안에서 산소가 부족한 것을 느꼈다.기사가 아파트 건물 아래에 차를 세우고 심은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보니 그녀는 어느새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인 채 좌석 뒤편에 기대어 있었다.“민아 씨, 도착했어요.”차마 강민아를 깨울 수 없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불렀다.“네.”강민아는 어눌하게 답했지만 취기와 졸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내가 데려다줄게요.”심은호는 차 문을 열고 손을 뻗어 강민아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부축했다.강민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뜨며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르더니 하품했다.“이제 우강 그룹 일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잠이나 푹 자고 싶어요.”“네.”강민아는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여기까지 데려다주면 돼요.”심은호는 계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