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진경이 입꼬리를 올리며 가식적인 웃음을 드러내더니 경멸하듯 말했다.“네가 뭘 하든 뽑힐 줄 알았어. 아빠가 이사장이잖아.”주변에 서 있던 학부모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고 강민아가 되물었다.“반 여사님, 반하준이 무슨 말이라도 했어요?”“아니.”반진경이 불쑥 대꾸했다.“그럼 허위 소문을 퍼뜨리는 건가요? 제 딸은 문화부 선생님의 인정을 받은 건데 그게 반씨 가문과 무슨 상관이죠?”반진경은 얼굴을 치켜들며 예리한 눈빛을 번뜩였다.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한 뒤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꼭 한낱 벌레를 보는 듯했다.“문화부 선생님이 허락한 것도 하준이가 이사장이기 때문이지.”강민아는 그저 웃었다. 트집 잡는 반진경 앞에서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딸이 반하준의 특혜를 받아 무대에 선 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쟁할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되물었다.“반 여사님, 사과문은 준비됐나요?”반진경은 잠시 당황하며 강민아가 그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진작 그녀가 물어볼 건 진작 예상하였다.“당연하지. 근데 네 딸이 사과문을 낭독하게 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네.”강민아는 반진경이 함정에 걸려들자 옅은 웃음을 지으며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우선 사과문부터 보여줘요. 직접 보지 않으면 올라가서 무슨 소리를 할지 누가 알겠어요.”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귀에는 유난히 거슬리게 들렸다.강민아가 워낙 온화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상대가 경계심을 늦추는 것도 한몫했다.반진경은 오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왜, 내가 썼다는 걸 믿지 않는 거야?”강민아가 손을 내밀었다.“가져와요.”반진경이 가방에서 종이 더미를 꺼내자 사과문을 건네받은 강민아가 단번에 허를 찔렀다.“격식도 안 맞고 단어 사용도 부적절하네요. 맞춤법도 안 맞고 문장도 틀렸어요. 반 여사님, 초등학교 국어부터 다시 배우셔야겠네요.”반진경은 얼굴을 붉혔다.“내가 뭘 잘못 썼는데?”강민아는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담임 선생님께 봐달라고 할까요?”담
반석현은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살피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경호원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무대 뒤에는 많은 사람들과 큰 소품들이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얼굴에 과장된 화장을 하고 밝은색의 공연 의상을 입고 있었다.반석현은 길가에 내놓은 작은 고양이처럼 주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무서웠다.“석현아!”정이는 그를 발견하고 밝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반석현은 사람들 틈에서 정이와 강민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검은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내 아이는 발을 떼고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정이도 반석현을 향해 달려가 그대로 아이를 안아서 높이 들어 올렸다.반석현은 제자리에서 허공에 들린 채 정이의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를 바라보며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정이는 반석현을 데리고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내려주었다.많이 돌면 그가 어지러울 테니까.“석현아, 나 너무 행복해. 내 공연 보러 왔어?”반석현은 정이를 향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정이가 입은 분홍색 의상을 보며 손을 뻗어 털을 만지더니 생긋 웃었다.마치 의상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강민아가 다가가 반석현에게 손을 내밀었다.“우린 밖에 가서 정이 공연 기다릴까?”반석현의 두 눈이 별을 박은 듯 반짝반짝 빛나며 강민아가 내민 손을 잡았다.그렇게 강민아는 반석현을 데리고 객석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설윤의 어머니 정고은은 강민아가 어린 소년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누구예요?”언뜻 봤을 땐 강민아가 민이를 데리고 오는 줄 알았다.“반석현이라고 승덕 학생은 맞는데 특수 학생이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아요.”강민아의 말에 정고은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특수 학생이니 낯선 것도 당연했다.“석현이 아주 잘생겼네. 안녕? 난 설윤이 엄마야. 설윤이를 아는지 모르겠네.”정고은이 반석현에게 손을 내밀자 반석현은 바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강민아가 말했다.“애가 낯을 많이 가려요.”정고은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석현 곁에 앉는데, 반석
반진경은 장기명 옆에 앉아서 그가 자꾸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게 눈에 띄었다.“뭘 보고 있는 거야?”반진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장기명은 순간 몸을 떨며 황급히 고개를 바로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아무것도 안 봤어!”하지만 반진경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계속 강민아를 보고 있었잖아! 왜 쳐다봐?”반진경의 두 눈에 불꽃이 튕기자 장기명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반석현을 안고 있길래 궁금해서 그랬어. 저 애가 강민아와 저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 몰라서.”이어 장기명은 반진경에게 떠들기 시작했다.“강민아가 반석현을 저렇게 챙겨주는데 저러다 하준이 숙모가 될 가능성은 없나?”말하며 장기명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반진경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어쨌든 반씨 가문 사람이라 장기명의 말에 그녀는 모욕을 느끼며 발끈했다.반씨 가문 사람으로서 앞으로 서경 상류층에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나.“반용화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강민아가 이혼한 건 둘째 치고 한때 조카며느리였는데 어떻게 쟤랑 결혼하냐고. 이건 상도덕이 아니지!”장기명은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강민아는 반하준과 이혼한 후 기댈 곳을 잃었어. 심씨 가문이 있다지만 거기서 강민아를 받아줄까? 내가 볼 땐 불가능해. 반석현에게 잘 보이려는 건 분명 반용화를 노리고 있는 거야.”말하며 장기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어린이반에서 가족 캠핑을 하러 갔던 게 떠올랐다.그에게 반용화는 하늘 같은 사람이라 닿을 수가 없는데 강민아와 반석현이 비탈길에서 넘어진 것 때문에 그가 화를 냈다.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 눈에 단지 반석현을 위해 나선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장기명은 강민아 때문에 그가 분노했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본인만이 강민아를 향해 품고 있는 속내를 잘 알기에 본능적으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만약 반용화가 정말 강민아를 원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조카며느리였던 게 뭐
반진경은 경멸하듯 코웃음을 쳤다.“강민아 같은 게 반씨 가문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수준 떨어지게!”명품이 존재하는 이유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빠르게 구분하기 때문이다.평범한 사람들도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를 살 수 있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겠나.강민아가 반씨 가문에 시집 온 이후 반진경은 자신의 수준이 한층 떨어졌다고 느꼈다.이제 그녀가 반씨 가문에서 나갔으니 다시는 재벌 명문가에 발을 들일 기회를 주지 않을 거다.장기명은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에게 당부했다.“반씨 가문에서 얘기 좀 잘해서 내가 석현이 선생님이 될 수 있게 해봐.”민이는 몸이 회복되어 집에서 엘리트 수업을 받고 있지만 반석현과 함께 수업하면 늘 반석현이 민이보다 성적이 훨씬 좋았다.장기명은 반씨 가문이 반석현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것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비록 반용화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에겐 자식이 없고 앞으로 반석현은 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다.만약 반씨 가문에서 민이가 후계자 역할을 해내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자리는 반석현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당연히 장기명은 반석현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런데 반진경이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장기명이 던진 건 난제였다. 그녀가 도저히 도와줄 수 없는 난제.반진경과 반용화는 나이가 비슷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반용화를 무서워했다.연못 속의 작은 물고기가 감히 바다의 고래를 넘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반용화 앞에서 감히 숨 한 번 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하지만 장기명은 굴하지 않았다.“일단 해봐. 반석현이 정말 반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내가 그 아이의 스승이 된다면 이걸로 반씨 가문의 핵심 인원이 될 수도 있어!”반진경은 장기명의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당연히 그녀도 반씨 가문에서 그들 부부의 입지가 커지길 바랐다.“알았어. 한번 해볼게.”그녀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공연이 시작되자 무대에는 순백의 조
반연주는 무대 중앙에 서서 허리를 굽히며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공연장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이미 반진경을 아는 학부모들이 돌아서서 반진경을 칭찬하고 있었다.“연주 엄마, 연주 정말 잘 키우셨어요.”“연주가 춤을 잘 춰요. 보는 눈이 즐겁네요.”같은 반의 다른 학부모들도 뒤이어 거들었다.“강윤정을 빠지게 한 진경 씨의 선택은 정말 현명했어요. 강윤정이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좋은 공연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맞아요. 역시 진경 씨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말하면서 모두 은근슬쩍 강민아 쪽을 바라보았다.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학부모들도 서로 급이 나뉘어 있었는데 강민아의 능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뒷배가 없었다.뒷배가 없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강민아는 서경 최고 학교의 학부모들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그리고 반씨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부모들은 모두 반진경의 편에 서기로 했다.“민아 씨, 진경 씨에게 고마워해야죠. 일부러 그쪽 딸을 저격한 게 아니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예요. 따님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발레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걸요.”강민아는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무대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제 딸이 혼자 무대에 올라 공연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맙긴 하네요.”강민아의 말이 반진경의 귀에 들리자 그녀는 다리를 꼬며 두 손을 깍지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그녀는 오만하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무대에서 공연할지 망신을 당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무대 위 공연이 하나씩 끝나갈 무렵 자녀들의 공연을 다 본 후 다른 공연에는 관심이 없다며 일어나 자리를 뜨는 부모님들이 꽤 많았다.반석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강민아의 소매를 살며시 잡았다.강민아가 고개를 숙이자 아이의 여린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단번에 반석현의 마음을 읽은 그녀가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우린
강민아는 딸아이와 함께 서둘러 호텔에 도착했다. 아들의 다섯 번째 생일 파티가 이미 시작되었다.반하준이 아들 곁을 지키고 있었고 촛불의 따스한 빛이 아이의 앳된 얼굴을 비추었다.반현민이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나현 이모가 제 새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그 시각 강민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딸과 생일 케이크가 비에 젖지 않도록 몸으로 막은 바람에 몸 절반이 흠뻑 젖어버렸다.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옷이 온몸에 찰싹 달라붙었다.강나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모 말고 형이라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나랑 네 아빠는 형제 같은 친구라서 작은 아빠밖에 못 해.”그녀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강나현의 남사친들이었다. 그들도 함께 웃긴 했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반하준에게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은 강나현뿐이었다.반현민이 강나현에게 잘 보이려고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환하게 웃었다. 강나현이 반현민의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민이는 왜 갑자기 새엄마가 갖고 싶어졌어?”그러자 반현민이 재빨리 반하준의 눈치를 살폈다.“아빠가 현이 형을 좋아하니까요.”그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강나현은 반현민을 무릎에 앉히고 반하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반하준에게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랑했다.“역시 민이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반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애들 말은 그냥 흘려 들어.”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반하준과 강나현이 죽마고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강나현이 항상 남자들과 어울려 다녀 반하준의 부모님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강민아가 18살이 되던 해에 강씨 가문으로 돌아왔는데 친정의 희망과 반하준에 대한 사랑을 가득 안고 그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길렀다.방 안의 사람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이는 엄마랑 더 친해? 현이 형이랑 더 친해?”“현이 형이
강나현이 반하준을 돌아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가 또 오해했네. 내가 가서 잘 설명할게.”“설명할 것도 없어. 쟤가 너무 예민한 거야.”반하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강민아가 두고 간 생일 케이크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말에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민아가 화를 내면서 가버린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형수 지금 화가 나서 저런 거니까 하준이가 가서 잘 달래면 돼.”“맞아. 형수가 하준이랑 이혼할 리가 없잖아. 하준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어쩌면 나가자마자 후회했을지도 몰라.”“자, 케이크나 먹자. 하준이가 집에 가면 강민아 씨가 문 앞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반하준도 그제야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벌써 강민아가 주눅이 든 채 문 앞에 서서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반현민은 강나현이 사 온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크림이 입안 가득 퍼져 혀가 얼얼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엄마가 간섭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생일 파티가 끝난 후 반하준은 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창밖의 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가 다시 꺼지곤 했다.“아빠, 몸이 가려워요.”반현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눈을 번쩍 뜨고 조명을 켰다. 반현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손으로 계속 몸을 긁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재빨리 아이의 손을 떼어내고 살펴보니 목에 붉은 반점이 가득 돋아있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반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어 입을 열려는 순간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그의 두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애가 알레르기가 생겼는데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반하준이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빨리 집으로 가.”그는 반현민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현관 쪽을 바라봤지만
사실 오소정더러 강민아에게 전화하라고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한발 물러선 반하준이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했어요.”“콜록콜록.”커피를 마시다가 그만 사레가 들려 참지 못하고 기침했다. 오소정이 뭔가 눈치채고 물었다.“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반하준의 호통에 주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겁에 질린 오소정은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반하준이 손에 든 머그컵을 꽉 쥐었다.‘안 돌아올 리가 없는데? 지금쯤이면 점심에 회사로 가져올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예전에 그가 화를 낼 때면 강민아는 직접 회사로 도시락을 가져와 화해를 청하곤 했었다....식탁에 앉은 반우정이 아침상을 보고 두 눈을 번쩍 떴다.“와. 닭죽이다.”닭죽을 좋아하는 반우정과 달리 반현민은 닭죽만 보면 헛구역질을 했다.반하준과 반현민 모두 죽을 좋아하지 않아 반씨 저택에 있을 땐 죽을 거의 끓이지 않았다.연진숙은 죽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했었다. 쌀이 부족해서 죽으로 끓여 먹는 거라고 말이다. 반씨 가문 사람들은 삼시 세끼를 과학적인 영양 균형에 맞춰 섭취했다.강민아는 죽도 영양아가 있고 아이들에게 먹이면 소화가 더 잘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에 닭고기와 야채 등을 넣으면 음식쓰레기 같다면서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그리고 반현민에게 먹이려고 야채죽을 끓여준 적이 있었는데 반현민이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로 다시는 죽을 끓이지 않았다.반현민에게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혼내자 반현민이 화를 내면서 따졌다.“이건 돼지들이나 먹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먹일 수 있어요? 역시 엄마는 촌뜨기라니까요.”옛 생각에 강민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반우정은 벌써 닭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그러고는 트림하면서 설거지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그릇을 아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할머니 집에 와야만 닭죽을 먹을 수 있는 거예요?”강민
반연주는 무대 중앙에 서서 허리를 굽히며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공연장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이미 반진경을 아는 학부모들이 돌아서서 반진경을 칭찬하고 있었다.“연주 엄마, 연주 정말 잘 키우셨어요.”“연주가 춤을 잘 춰요. 보는 눈이 즐겁네요.”같은 반의 다른 학부모들도 뒤이어 거들었다.“강윤정을 빠지게 한 진경 씨의 선택은 정말 현명했어요. 강윤정이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좋은 공연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맞아요. 역시 진경 씨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말하면서 모두 은근슬쩍 강민아 쪽을 바라보았다.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학부모들도 서로 급이 나뉘어 있었는데 강민아의 능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뒷배가 없었다.뒷배가 없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강민아는 서경 최고 학교의 학부모들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그리고 반씨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부모들은 모두 반진경의 편에 서기로 했다.“민아 씨, 진경 씨에게 고마워해야죠. 일부러 그쪽 딸을 저격한 게 아니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예요. 따님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발레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걸요.”강민아는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무대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제 딸이 혼자 무대에 올라 공연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맙긴 하네요.”강민아의 말이 반진경의 귀에 들리자 그녀는 다리를 꼬며 두 손을 깍지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그녀는 오만하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무대에서 공연할지 망신을 당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무대 위 공연이 하나씩 끝나갈 무렵 자녀들의 공연을 다 본 후 다른 공연에는 관심이 없다며 일어나 자리를 뜨는 부모님들이 꽤 많았다.반석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강민아의 소매를 살며시 잡았다.강민아가 고개를 숙이자 아이의 여린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단번에 반석현의 마음을 읽은 그녀가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우린
반진경은 경멸하듯 코웃음을 쳤다.“강민아 같은 게 반씨 가문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수준 떨어지게!”명품이 존재하는 이유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빠르게 구분하기 때문이다.평범한 사람들도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를 살 수 있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겠나.강민아가 반씨 가문에 시집 온 이후 반진경은 자신의 수준이 한층 떨어졌다고 느꼈다.이제 그녀가 반씨 가문에서 나갔으니 다시는 재벌 명문가에 발을 들일 기회를 주지 않을 거다.장기명은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에게 당부했다.“반씨 가문에서 얘기 좀 잘해서 내가 석현이 선생님이 될 수 있게 해봐.”민이는 몸이 회복되어 집에서 엘리트 수업을 받고 있지만 반석현과 함께 수업하면 늘 반석현이 민이보다 성적이 훨씬 좋았다.장기명은 반씨 가문이 반석현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것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비록 반용화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에겐 자식이 없고 앞으로 반석현은 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다.만약 반씨 가문에서 민이가 후계자 역할을 해내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자리는 반석현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당연히 장기명은 반석현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런데 반진경이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장기명이 던진 건 난제였다. 그녀가 도저히 도와줄 수 없는 난제.반진경과 반용화는 나이가 비슷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반용화를 무서워했다.연못 속의 작은 물고기가 감히 바다의 고래를 넘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반용화 앞에서 감히 숨 한 번 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하지만 장기명은 굴하지 않았다.“일단 해봐. 반석현이 정말 반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내가 그 아이의 스승이 된다면 이걸로 반씨 가문의 핵심 인원이 될 수도 있어!”반진경은 장기명의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당연히 그녀도 반씨 가문에서 그들 부부의 입지가 커지길 바랐다.“알았어. 한번 해볼게.”그녀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공연이 시작되자 무대에는 순백의 조
반진경은 장기명 옆에 앉아서 그가 자꾸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게 눈에 띄었다.“뭘 보고 있는 거야?”반진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장기명은 순간 몸을 떨며 황급히 고개를 바로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아무것도 안 봤어!”하지만 반진경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계속 강민아를 보고 있었잖아! 왜 쳐다봐?”반진경의 두 눈에 불꽃이 튕기자 장기명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반석현을 안고 있길래 궁금해서 그랬어. 저 애가 강민아와 저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 몰라서.”이어 장기명은 반진경에게 떠들기 시작했다.“강민아가 반석현을 저렇게 챙겨주는데 저러다 하준이 숙모가 될 가능성은 없나?”말하며 장기명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반진경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어쨌든 반씨 가문 사람이라 장기명의 말에 그녀는 모욕을 느끼며 발끈했다.반씨 가문 사람으로서 앞으로 서경 상류층에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나.“반용화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강민아가 이혼한 건 둘째 치고 한때 조카며느리였는데 어떻게 쟤랑 결혼하냐고. 이건 상도덕이 아니지!”장기명은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강민아는 반하준과 이혼한 후 기댈 곳을 잃었어. 심씨 가문이 있다지만 거기서 강민아를 받아줄까? 내가 볼 땐 불가능해. 반석현에게 잘 보이려는 건 분명 반용화를 노리고 있는 거야.”말하며 장기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어린이반에서 가족 캠핑을 하러 갔던 게 떠올랐다.그에게 반용화는 하늘 같은 사람이라 닿을 수가 없는데 강민아와 반석현이 비탈길에서 넘어진 것 때문에 그가 화를 냈다.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 눈에 단지 반석현을 위해 나선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장기명은 강민아 때문에 그가 분노했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본인만이 강민아를 향해 품고 있는 속내를 잘 알기에 본능적으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만약 반용화가 정말 강민아를 원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조카며느리였던 게 뭐
반석현은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살피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경호원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무대 뒤에는 많은 사람들과 큰 소품들이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얼굴에 과장된 화장을 하고 밝은색의 공연 의상을 입고 있었다.반석현은 길가에 내놓은 작은 고양이처럼 주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무서웠다.“석현아!”정이는 그를 발견하고 밝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반석현은 사람들 틈에서 정이와 강민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검은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내 아이는 발을 떼고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정이도 반석현을 향해 달려가 그대로 아이를 안아서 높이 들어 올렸다.반석현은 제자리에서 허공에 들린 채 정이의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를 바라보며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정이는 반석현을 데리고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내려주었다.많이 돌면 그가 어지러울 테니까.“석현아, 나 너무 행복해. 내 공연 보러 왔어?”반석현은 정이를 향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정이가 입은 분홍색 의상을 보며 손을 뻗어 털을 만지더니 생긋 웃었다.마치 의상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강민아가 다가가 반석현에게 손을 내밀었다.“우린 밖에 가서 정이 공연 기다릴까?”반석현의 두 눈이 별을 박은 듯 반짝반짝 빛나며 강민아가 내민 손을 잡았다.그렇게 강민아는 반석현을 데리고 객석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설윤의 어머니 정고은은 강민아가 어린 소년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누구예요?”언뜻 봤을 땐 강민아가 민이를 데리고 오는 줄 알았다.“반석현이라고 승덕 학생은 맞는데 특수 학생이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아요.”강민아의 말에 정고은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특수 학생이니 낯선 것도 당연했다.“석현이 아주 잘생겼네. 안녕? 난 설윤이 엄마야. 설윤이를 아는지 모르겠네.”정고은이 반석현에게 손을 내밀자 반석현은 바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강민아가 말했다.“애가 낯을 많이 가려요.”정고은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석현 곁에 앉는데, 반석
반진경이 입꼬리를 올리며 가식적인 웃음을 드러내더니 경멸하듯 말했다.“네가 뭘 하든 뽑힐 줄 알았어. 아빠가 이사장이잖아.”주변에 서 있던 학부모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고 강민아가 되물었다.“반 여사님, 반하준이 무슨 말이라도 했어요?”“아니.”반진경이 불쑥 대꾸했다.“그럼 허위 소문을 퍼뜨리는 건가요? 제 딸은 문화부 선생님의 인정을 받은 건데 그게 반씨 가문과 무슨 상관이죠?”반진경은 얼굴을 치켜들며 예리한 눈빛을 번뜩였다.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한 뒤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꼭 한낱 벌레를 보는 듯했다.“문화부 선생님이 허락한 것도 하준이가 이사장이기 때문이지.”강민아는 그저 웃었다. 트집 잡는 반진경 앞에서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딸이 반하준의 특혜를 받아 무대에 선 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쟁할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되물었다.“반 여사님, 사과문은 준비됐나요?”반진경은 잠시 당황하며 강민아가 그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진작 그녀가 물어볼 건 진작 예상하였다.“당연하지. 근데 네 딸이 사과문을 낭독하게 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네.”강민아는 반진경이 함정에 걸려들자 옅은 웃음을 지으며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우선 사과문부터 보여줘요. 직접 보지 않으면 올라가서 무슨 소리를 할지 누가 알겠어요.”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귀에는 유난히 거슬리게 들렸다.강민아가 워낙 온화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상대가 경계심을 늦추는 것도 한몫했다.반진경은 오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왜, 내가 썼다는 걸 믿지 않는 거야?”강민아가 손을 내밀었다.“가져와요.”반진경이 가방에서 종이 더미를 꺼내자 사과문을 건네받은 강민아가 단번에 허를 찔렀다.“격식도 안 맞고 단어 사용도 부적절하네요. 맞춤법도 안 맞고 문장도 틀렸어요. 반 여사님, 초등학교 국어부터 다시 배우셔야겠네요.”반진경은 얼굴을 붉혔다.“내가 뭘 잘못 썼는데?”강민아는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담임 선생님께 봐달라고 할까요?”담
강나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하준 씨가 왜 그런 말을...”반하준이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건 그녀를 죽이겠다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강성진이 그녀를 죽이려는 것도 당연했다!강나현은 벌벌 떨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강성진이 그녀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네 다리를 부러뜨린 다음 널 데리고 반씨 가문에 찾아가서 하준이에게 사죄할 거야.”“아빠, 안 돼요! 하준 씨가 거짓말한 거예요. 사실이 아니에요!”강성진이 정말 다리를 부러뜨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벼랑 끝에 내몰린 신세가 되었다.이내 강기성이 말했다.“지금은 반하준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야지. 진실이 어떻든 반하준이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렸다는 건 넌 더 이상 반하준에게 쓸모가 없다는 뜻이야. 이제 넌 희생양일 뿐이라고.”강나현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반하준은 반유하의 유언을 잊은 걸까.어떻게 그녀에게 이럴 수가 있나!“아빠, 전 억울해요!”강나현이 절망에 빠져 중얼거려도 강성진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누명을 썼든 아니든 지금은 네가 반씨 가문에 누를 끼쳤으니 널 반씨 가문에 데리고 가서 사죄해야 해!”강성진에게도 강나현은 이용 가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없애야 강씨 가문의 평판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강나현이 점차 감정을 추슬렀다.“아빠, 날 때리면 안 돼요. 하준 씨랑 잤으니까 그 사람 애를 임신했을지도 몰라요.”강기성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강나현을 바라봤다.강성진 역시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걸음을 멈췄다.그는 충격에 휩싸여 물었다.“뭐라고?”...승덕 어린이반 대강당. 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고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이는 털이 복슬복슬한 분홍색 사자 옷을 입고 있었다.“정아!”같은 반 아이들이 정이를 보고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옷 너무 귀엽다!”“우와, 발이 너무 귀여워!”정이가 신은 신발은 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있었는데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강기성이 들어왔다.강성진이 베개로 강나현의 얼굴을 누르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달려가 강성진을 몸으로 밀어냈다.얼떨결에 밀려나 침대 옆 탁자에 부딪힌 강성진은 여전히 양손에 베개를 움켜쥐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강성진은 강기성을 보고 그가 강나현을 혼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고함을 질렀다.강기성은 강나현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얼굴이 파래진 채 입을 벌리고 있지만 스스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다.강기성은 곧바로 앞으로 다가가 강나현에게 가슴 압박을 했고 그제야 강나현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강성진은 강기성에게 베개를 내리쳤다.“감히 날 밀쳐?”강기성은 돌아서서 낮게 윽박질렀다.“사람 죽일 뻔했어요!”강성진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내 체면만 구긴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서경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어!”강기성은 한 발짝 물러서며 비웃었다.“그럼 죽여요.”본능적으로 사람을 살리긴 했어도 강나현을 구한 뒤 곧바로 후회했다.그가 서둘러 달려오지 않고 강나현이 정말 강성진의 손에 죽었다면 그는 감옥에 갔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나서서 강나현을 구했기 때문에 기회는 사라졌다.강성진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농담이지.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기성아, 네가 나 대신 쟤 다리 좀 부러뜨려! 안 그러면 또 강씨 가문에 민폐를 끼칠 것 같으니까.”강나현은 벌벌 떨었다. 어릴 때부터 강성진을 무서워했는데 조금 전 강성진이 베개로 얼굴을 가렸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몇 초만 지나면 정말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두려움에 강나현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고 두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침대에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지에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강기성과 강성진 모두 고약한 냄새를 맡았고 강성진이 욕설을 내뱉자 강기성이 말했다.“정상적인 생리현상이니까 가서 옷 갈아입어.”강나현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문 너머로 강성진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민이가 목 놓아 울면서 무기력하게 소리를 질렀다.“난 엄마를 원해요. 아빠, 난 엄마를 원한다고요!”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그는 민이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아이 방을 나갔다.방 문이 닫히자 민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온 반하준은 적막한 방안에서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차가운 기운이 발바닥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긴 다리로 성큼성큼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모든 서랍을 열어젖히고 넥타이, 손목시계, 브로치 장신구를 모두 꺼냈다.‘이게 강민아가 준 선물이던가? 이게 사준 건가?’전부 잊어버렸다.대체 어떤 게 강민아가 사준 것이고 어떤 게 담당 코디가 매치해 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재계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준 선물은 다 기억나는데 뒤늦게 강민아가 줬던 선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그녀가 준 게 어떤 것인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반하준은 휴대폰을 꺼내 뒤적거리던 액세서리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코디에게 보내 그가 산 게 어느 것인지 구분하도록 했다.깊은 밤, 코디는 서둘러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반하준은 마침내 강민아가 선물한 넥타이와 브로치를 찾아냈다.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의 무늬와 브로치에 반짝이는 보석을 쓰다듬었다.강민아가 그에게 준 건 이렇게 많은데 심은호는 딱 하나만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들을 전용 사물함에 넣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안주인의 침실로 들어가 텅 빈 방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강민아가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옷장을 열자 안에는 강민아의 옷이 가득했다.그에게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가져가지 않은 걸까.반하준은 강민아가 늘 입던 잠옷 중 하나를 꺼내어 코끝에 대고 천에 밴 은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이게 강민아의 체취였나?’이젠 강민아의 체취가 어땠는지도 잊어버렸다.강민아가 누웠던 침대에 누워 그에겐 다소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몸을 돌려 강민아의 잠옷을 품에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미간은 찡그리고
침대에 누운 민이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흰자위만 조금 남아 희미한 불빛 속에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반하준은 입을 벌렸지만 누군가 자기 목구멍으로 종이 뭉치를 밀어 넣은 듯한 느낌에 목이 메었고, 민이는 갈망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이미 이혼했는데...”어떻게 강민아와 재결합하겠나.그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강민아와 이혼 서류에 사인할 땐 돌아와서 애원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며, 정식으로 이혼하러 갈 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강민아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애원해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민이를 위해서 최대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네 엄마가 다시 만나자고 애원하면 생각해 볼게.”스스로 되뇌듯 말하며 반하준은 주먹을 말아쥐었다.그런데 민이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는 나도, 아빠도 버렸는데 어떻게 아빠한테 와서 다시 만나자고 애원해요?”아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아빠, 엄마한테 가서 빌어요. 네? 용서해 달라고, 돌아오라고 빌어요!”민이의 눈에 반하준은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이 강민아를 붙잡지 못해도 반하준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아빠가 용서해달라고 말만 하면 엄마가 재혼해 줄 거예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내가 뭘 잘못했길래 네 엄마한테 용서를 빌어야 해?”민이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는 아빠가 현이 형한테 잘해줘서 떠난 거예요.”반하준은 목구멍으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강나현과 난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선을 넘은 적도 없어. 그 여자가 괜히 날 의심하는 거야!”민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아빠가 잘못했어요! 엄마 속상하게 했잖아요!”아이가 울부짖었다.“으아앙!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엄마가 재워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가고 며칠째 밤에 깨는데 엄마가 날 버린 것만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