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준의 차에 앉은 강나현은 드림을 향해 달려가는 두 대의 레이싱카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레이싱 경기에 참여한 재벌 2세들도 자기들만의 전략이 있었다.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레이스인 만큼 우승을 위해 일부 차량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두꺼운 헬멧을 쓴 강민아의 맑은 동공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그녀는 단호하게 기어를 바꾸고 오른쪽 차 바퀴를 들어 올렸다.심은호는 자신의 시야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쿵쾅거리는 심장에선 거센 충돌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이것이야말로 일방통행인가!레이싱카의 오른쪽 앞바퀴와 뒷바퀴가 완전히 지면을 떠나고 차량 전체가 옆으로 45도 기울어진 채 달리고 있었다.원래 드림을 추돌하려던 차량의 운전자는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재벌 2세가 고개를 돌려보니 차창 옆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섀시가 보였다.마치 늪에 숨어 있던 거대한 짐승이 그들을 향해 피 묻은 입을 벌린 것 같았다.검은 타이어는 머리 위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들의 차량 지붕 위에서 돌아갔다.이미 호랑이 굴에 들어온 그들은 상대의 차 바퀴와 그들의 차 윗부분이 곧 충돌할 것을 알았다.“이런 젠장!”그저 취미로 소소하게 레이싱을 즐기는 재벌 2세들이 언제 이런 광경을 본 적이나 있겠나.“헉!”여전히 웅성거리며 환호하던 객석의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찬 공기를 들이켰다.이건 특급 레이싱 묘기였다.드림 레이서가 얼마나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으면 크로스컨트리 레이스에서 위기 상황에 이런 묘기를 펼치겠나.드림의 차체가 옆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거대한 파도처럼 민이에게 충격을 선사했다.아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흠칫 떨리기까지 했다. 검은 눈동자도 요동치고 있었다.강민아 쪽 차량이 그녀에게 다가올 무렵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자도 옆으로 달리는 드림의 자동차 지붕과 들어 올린 바퀴를 보았다.“젠장!”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본능이 그에게 빨리 물러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더
“기어 올리고 왼쪽으로 꺾어요.”“오른쪽 세 번째 내리막길, 기어 내려요.”강민아는 지도를 통해 오프로드 구간을 머릿속으로 최대한 외웠지만 레이서는 빠른 속도에서 미처 온전한 사고를 하기 어려웠다.이때 심은호가 그녀의 두뇌가 되어줬다.짧고 간결하게 지시를 내리던 심은호는 정수산의 복잡한 오프로드를 머릿속에서 3D 모델로 구축했다.마치 체스판 앞에 앉아 전체 상황을 바라보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강민아가 전진할 방향을 알려주었다.“하준 씨, 달려!”강나현은 반하준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내비게이터로 사용하던 지도는 진작 잊어버린 채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조수석에 앉아 반하준의 동반자 역할만 했다.반하준 역시 강나현의 내비게이터 역할이 필요 없었고 자기 판단력만을 믿었다.반하준은 정수산 경기장 기획과 설계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경기장의 복잡한 도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블랙홀은 2구간에서 다른 차들과 나란히 달리면서 드림에 멀리 뒤처졌다.드림이 큰 코너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U자형 덤프를 완성하자 반하준의 검은 눈동자가 확 커졌다.그도 레이스 트랙에서 드림이 네 코너를 모두 정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반하준은 드림의 원래 주인이 루나라는 것과 여성 레이서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고, 그 외에는 외모나 구체적인 정보는 조사를 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그도 언젠가 드림과 함께 나란히 경기에 임할 줄은 몰랐다.“오빠, 루나를 우리 팀에 영입하자. 난 루나를 스승으로 모실래!”반유하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가 중간책으로 루나의 연락처를 알아냈을 때 돌아오는 건 루나가 은퇴를 준비한다는 소식이었다.나중에 드림이 경매에 오르고 그 자리엔 반하준도 있었다.드림을 사고 싶었지만 경매 시작과 동시에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다.사업가인 반하준은 레이싱카를 좋아하고 시장가치를 뛰어넘은 가격에도 살 수 있지만 그 가격에 드림을 사는 것은 그에게 손해 보는 거래였다.손해 보는 사업
심은호는 머릿속으로 코스 전체를 되뇌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눈가에 미소가 반짝였다.“루나, 앞쪽은 평지니까 망설이지 말고 달려요!”“앞길은 평탄해, 루나, 앞으로 돌진해!”전조등도 없이 드림은 어둠 속에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강민아는 심은호를 전적으로 믿었고 마침내 어둠을 뚫고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맞이했다.멀리서부터 경주용 자동차의 굉음이 들려오고 결승선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목을 쭉 뻗었다.관중석 뒤쪽의 대형 스크린도 자동차가 어둠의 구역에 진입하는 순간 칠흑같이 어두워졌다.모두가 긴장하는 순간이었다.어느 차량이 가장 먼저 어둠의 구역을 뚫고 정상 트랙으로 진입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민이는 난간을 밟고 찬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갑자기 관중들의 시야에 칠흑같이 검은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나자 대형 스크린에 불이 켜지고 관중석에서는 환호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바로 드림이었다!드림은 어둠의 구역을 돌파하고 1등을 차지했다.그리고 드림의 뒤에는 반하준이 조종하는 블랙홀이 있었다.“루나! 아빠!”민이는 목이 터지라 소리치며 두 손을 꼭 쥐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아빠와 루나가 모두 1등을 했으면 좋겠어요.’빛이 반하준의 새까만 눈동자를 비추자 드림이 눈앞에 보이며 그의 승부욕이 완전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재계에서 거듭되는 대치와 무한한 압박감에 시달릴 때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하지만 드림을 쫓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은 극도로 치솟았고, 반하준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지배당했다.침착한 가면을 벗어던지자 오직 눈앞에 있는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전속력으로 다리는 짐승만이 남았다.하지만 결승선까지 2km도 채 남지 않았다.휙-드림이 결승선을 통과하자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형형색색의 꽃가루가 황금비처럼 쏟아져 나와 드림의 차 위로 떨어졌다.“우와!”민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두 눈에는 오로지 드림만 보였다.그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심장을 움켜쥔 채 드림
강민아는 드림이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넋을 잃은 채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루나, 당신이 이겼어요!”강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헬멧을 벗은 심은호의 불사조 같은 눈동자에 별이 반짝이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그가 손을 뻗어 강민아의 헬멧을 벗기자 비단처럼 고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강민아는 극한의 운동으로 인해 크게 헐떡이는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고개를 들어 오로지 자신만 담은 심은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바라봤다.“루나, 돌아온 걸 환영해요.” 심은호의 눈에 루나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 챔피언이었어요.”확신에 찬 심은호의 목소리는 지상에서 날아갈 때의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들썩이는 그의 가슴을 따라 차 안의 온도가 상승했다.강민아는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드림을 본 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심은호 씨는 대체 어떻게 내가 루나인 걸 알았어요?”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 그녀의 이름은 육민아였고, 레이서 면허증에도 항상 육민아라는 이름을 써왔기 때문에 레이서라는 정체성을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다.심은호는 무심하게 왼쪽 어깨를 좌석 등받이에 기대고 입꼬리를 올리며 새하얀 치아를 자랑했다.“내가 문라이트 대표니까요.”강민아의 동공이 커졌다.“그러면 저를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에 영입한 게 당신이에요?”“네.” 남자는 매력적인 눈을 가늘게 뜨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강민아가 멍하니 심은호를 바라보았다.“그쪽이 날 루나로 만들어줬어요.”당시 강민아는 딱 한 가지, 자기 외모와 실명을 공개하지 말고 사생활을 보호해달라는 조건을 걸고 클럽에 들어갔다.그땐 아직 유명세를 치르기 전이었고 레이싱계에는 여성 레이서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투자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바로 문라이트 클럽의 대표였다.강민아는 이미 주식 시장에서 큰돈을 벌었지만 레이싱 때문에 무적의 ‘드림'을 만들기
반씨 가문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자란 어린 도련님은 대단한 인물과 장소에 익숙했지만 드림 앞에 서서 루나에게 인사를 건넬 땐 긴장해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그러나 차 안에 앉은 사람은 아이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루나?”민이는 발끝으로 서서 고개를 들어 호기심에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강나현은 차에서 내려 드림의 차 문 앞에 서 있는 반씨 가문 부자를 보고 가슴에 위기감이 엄습했다.그녀가 성큼성큼 다가가 말했다.“루나라고 했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듣기론 오토바이도 잘 탄다던데 나도 오토바이 레이서거든요. 우리 둘이 일대일로 겨루는 건 어때요?”반하준이 루나에게 패했기에 강나현은 그 대신 이겨주고 싶었다.루나는 프로 레이서였고 강나현은 그녀가 오토바이도 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루나의 모터사이클 실력은 프로 수준이 아니었고 크로스컨트리 경기 이후 루나의 체력이 급격히 고갈된 상태였기에 이제 그녀와 대결한다면 강나현은 자신이 이길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차에 앉은 여자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자 강나현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고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놀아요.”민이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루나가 오토바이도 타요?”아이는 루나를 더욱 동경했다.강나현은 루나가 자신에게 지면 민이의 눈빛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입술 한쪽을 들어 올렸다.반하준은 눈을 내리깔고 발밑에 놓인 명함을 바라보았다. 주제도 모르는 여자가 심은호가 떠받들어주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 같았다.“2억 줄 테니까 나현이랑 한번 놀아요.”우위에 익숙해져 있는 반하준의 눈에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강민아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반하준이 이 정도로 강나현을 아꼈던가.남자가 계좌번호를 찍으라는 듯 휴대폰을 강민아에게 내밀었지만 강민아는 무시한 채 옆으로 몸을 돌려 심은호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반하준은 그녀와 심은호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다정해 보이
민이의 말을 들은 강나현은 웃음을 터뜨렸고 반하준은 아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민이는 루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착각이 분명하다.루나를 가식적인 엄마로 착각하다니, 이건 루나에 대한 모욕이었다.재벌가 자제들은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루나와 대결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루나에게 자신의 차를 들이밀었다.“루나, 내 차를 타요!”“루나, 내걸 타요. 내걸!”자신을 둘러싼 그들을 강민아는 전부 알고 있었다. 이 헬멧만 벗으면 그들은 그녀에게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달려들지 않을 거다.강나현과 친한 그들은 강민아가 18살에 강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그녀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다.나중에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되고 반하준의 체면을 생각해 그녀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지만, 반하준의 태도가 그들이 강민아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해 버렸다.자신이 아끼는 차를 끌고 나온 강나현은 절친들이 루나 주위만 맴도는 모습을 보고 두 눈에 증오만 가득 찼다.강나현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 그녀는 인터넷에서 유명한 여성 라이더였고 루나는 다른 사람의 차를 운전하니 강나현은 자신이 우승할 확률이 더 높다고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객석 쪽을 바라보았다.관객석에서 한 여자가 강나현을 향해 손짓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눈동자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담기며 10분 뒤 루나를 끌어내릴 생각에 들떴다.강민아의 시선이 사람들을 지나쳐 심은호가 누군가와 함께 개조한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고개를 돌린 심은호가 검은색 오토바이를 슬쩍 보고는 강민아에게 말했다.“이걸 타요.”강민아가 다가가 보니 차체 한쪽에 그려진 달이 보였다.강민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마 자신을 위해 맞춤 제작된 것일까?그녀는 서둘러 괜한 착각이라며 부정해 버리고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고마워요. 내가 이기면 상금은 내가 3, 그쪽이 7로 가져가죠.”심은호는 웃었다.“그쪽이 이기는 거야말로 나와 이 차에 대한 제일 좋은 선물이에요.”그는 좌석을 부드럽게
국내 최고의 여성 라이더로 불리는 루나도 고작 이 정도라니.오늘 밤 그녀는 루나를 이기고 내일부터 명성을 떨치게 될 거다.첫 번째 코너가 다가오고 있었다.휙-검은색 오토바이가 강나현의 앞을 스쳐 지나가자 강나현은 당황했다.어쩌다 루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을 앞지른 걸까?강나현은 속도를 올리며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연속되는 코너에서 둘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세상에, 루나는 코너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아.”“대단해. 이 트랙에서 처음 달리는 거야. 연습 경기도 안 했잖아.”“이게 바로 국내 1위 여성 레이서의 실력인가? 너무 무섭네.”강나현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아무리 해도 강민아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미리 부탁했던 친구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관중석에서 생수병이 날아오르더니 갑자기 활주로에 떨어졌다.고속 운행에서는 작은 돌멩이마저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었다.무거운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지나가자 관중들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고, 다들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차가 생수병을 밟고 지나가며 큰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그 생수병이 강민아의 앞길을 막지 않더라도 강민아에게는 걸림돌이 될 테고 그걸 피하기 위해서 속도를 줄일 것이다.강민아가 생수병에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때 갑자기 오토바이가 한쪽으로 30도 정도 심하게 기울더니 강민아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생수병을 낚아챘다.관중석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생수병이 장외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에 던져졌다.문라이트가 홀연히 떠나고 나서야 관중들은 강민아가 한 행동에 반응했다.“세상에!”“꺄악!”누구는 머리를 탁 치며 입을 크게 벌렸고, 누구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루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세상에, 내가 뭘 본 거야!”“빨리, 빨리 돌려봐!”재벌가 도련님들이 소리치자 제어 콘솔에 있던 직원이 코스 옆 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을 느린 속도로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젠장, 무식한 나는 대단하다
오랫동안 오토바이를 타면서 강나현은 처음으로 무기력함과 절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루나와 그녀는 같은 레벨이 아니었고 그녀가 일방적으로 짓밟힌 게임이었다.민이는 한참 동안 루나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강나현을 발견하고는 팔짱을 낀 채 불만이 가득한 듯 투덜거렸다.“현이 형은 너무 느리잖아, 거북이야.”반하준은 여전히 무거운 레이싱 슈트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탄탄한 가슴이 함께 오르내렸다.그의 깊은 시선이 루나의 모습을 쫓았다.누구도 그의 시선을 이렇게 사로잡은 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극한 운동의 매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뗄 수 없는 순간이었다.세 바퀴를 먼저 완주한 강민아는 결승선에 멈춰 서서 심은호에게 신호를 보냈고, 심은호는 곧장 콘솔 스태프에게 연락을 취했다.스태프의 목소리가 강나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강나현 씨, 루나가 경기를 끝냈으니 약속대로 차에서 내려 결승까지 달려가세요.”강나현은 강민아보다 한 바퀴 반 정도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5km 가까이 달려야 했다.하지만 강나현은 스태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그녀에게 말하는 동시에 스태프의 목소리가 현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사람들은 강나현이 스태프의 말을 듣지 않자 야유를 보냈다.“내려! 내려!”“결과에 승복해!”“비열해. 저러면 조금이라도 적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객석에 앉아 있던 강나현의 일행들은 주변 사람들의 고함을 듣고 모두 창피함을 느꼈다.몇몇 재벌가 자제들이 콘솔로 달려가 인이어를 착용한 강나현에게 전용 채널을 통해 연락을 취했다.“강나현, 차 세워. 다들 널 욕하고 있어.”멈칫한 강나현이 차를 세우고 헬멧을 벗자 객석에서 들려오는 비난이 파도처럼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거야?”“차에서 내려! 내려!”“루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으면서 결과를 받아들일 배짱은 없나 봐?”강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조금 더 타면 적게 달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