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드림이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넋을 잃은 채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루나, 당신이 이겼어요!”강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헬멧을 벗은 심은호의 불사조 같은 눈동자에 별이 반짝이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그가 손을 뻗어 강민아의 헬멧을 벗기자 비단처럼 고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강민아는 극한의 운동으로 인해 크게 헐떡이는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고개를 들어 오로지 자신만 담은 심은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바라봤다.“루나, 돌아온 걸 환영해요.” 심은호의 눈에 루나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 챔피언이었어요.”확신에 찬 심은호의 목소리는 지상에서 날아갈 때의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들썩이는 그의 가슴을 따라 차 안의 온도가 상승했다.강민아는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드림을 본 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심은호 씨는 대체 어떻게 내가 루나인 걸 알았어요?”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 그녀의 이름은 육민아였고, 레이서 면허증에도 항상 육민아라는 이름을 써왔기 때문에 레이서라는 정체성을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다.심은호는 무심하게 왼쪽 어깨를 좌석 등받이에 기대고 입꼬리를 올리며 새하얀 치아를 자랑했다.“내가 문라이트 대표니까요.”강민아의 동공이 커졌다.“그러면 저를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에 영입한 게 당신이에요?”“네.” 남자는 매력적인 눈을 가늘게 뜨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강민아가 멍하니 심은호를 바라보았다.“그쪽이 날 루나로 만들어줬어요.”당시 강민아는 딱 한 가지, 자기 외모와 실명을 공개하지 말고 사생활을 보호해달라는 조건을 걸고 클럽에 들어갔다.그땐 아직 유명세를 치르기 전이었고 레이싱계에는 여성 레이서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투자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바로 문라이트 클럽의 대표였다.강민아는 이미 주식 시장에서 큰돈을 벌었지만 레이싱 때문에 무적의 ‘드림'을 만들기
반씨 가문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자란 어린 도련님은 대단한 인물과 장소에 익숙했지만 드림 앞에 서서 루나에게 인사를 건넬 땐 긴장해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그러나 차 안에 앉은 사람은 아이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루나?”민이는 발끝으로 서서 고개를 들어 호기심에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강나현은 차에서 내려 드림의 차 문 앞에 서 있는 반씨 가문 부자를 보고 가슴에 위기감이 엄습했다.그녀가 성큼성큼 다가가 말했다.“루나라고 했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듣기론 오토바이도 잘 탄다던데 나도 오토바이 레이서거든요. 우리 둘이 일대일로 겨루는 건 어때요?”반하준이 루나에게 패했기에 강나현은 그 대신 이겨주고 싶었다.루나는 프로 레이서였고 강나현은 그녀가 오토바이도 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루나의 모터사이클 실력은 프로 수준이 아니었고 크로스컨트리 경기 이후 루나의 체력이 급격히 고갈된 상태였기에 이제 그녀와 대결한다면 강나현은 자신이 이길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차에 앉은 여자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자 강나현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고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놀아요.”민이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루나가 오토바이도 타요?”아이는 루나를 더욱 동경했다.강나현은 루나가 자신에게 지면 민이의 눈빛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입술 한쪽을 들어 올렸다.반하준은 눈을 내리깔고 발밑에 놓인 명함을 바라보았다. 주제도 모르는 여자가 심은호가 떠받들어주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 같았다.“2억 줄 테니까 나현이랑 한번 놀아요.”우위에 익숙해져 있는 반하준의 눈에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강민아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반하준이 이 정도로 강나현을 아꼈던가.남자가 계좌번호를 찍으라는 듯 휴대폰을 강민아에게 내밀었지만 강민아는 무시한 채 옆으로 몸을 돌려 심은호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반하준은 그녀와 심은호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다정해 보이
민이의 말을 들은 강나현은 웃음을 터뜨렸고 반하준은 아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민이는 루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착각이 분명하다.루나를 가식적인 엄마로 착각하다니, 이건 루나에 대한 모욕이었다.재벌가 자제들은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루나와 대결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루나에게 자신의 차를 들이밀었다.“루나, 내 차를 타요!”“루나, 내걸 타요. 내걸!”자신을 둘러싼 그들을 강민아는 전부 알고 있었다. 이 헬멧만 벗으면 그들은 그녀에게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달려들지 않을 거다.강나현과 친한 그들은 강민아가 18살에 강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그녀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다.나중에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되고 반하준의 체면을 생각해 그녀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지만, 반하준의 태도가 그들이 강민아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해 버렸다.자신이 아끼는 차를 끌고 나온 강나현은 절친들이 루나 주위만 맴도는 모습을 보고 두 눈에 증오만 가득 찼다.강나현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 그녀는 인터넷에서 유명한 여성 라이더였고 루나는 다른 사람의 차를 운전하니 강나현은 자신이 우승할 확률이 더 높다고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객석 쪽을 바라보았다.관객석에서 한 여자가 강나현을 향해 손짓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눈동자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담기며 10분 뒤 루나를 끌어내릴 생각에 들떴다.강민아의 시선이 사람들을 지나쳐 심은호가 누군가와 함께 개조한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고개를 돌린 심은호가 검은색 오토바이를 슬쩍 보고는 강민아에게 말했다.“이걸 타요.”강민아가 다가가 보니 차체 한쪽에 그려진 달이 보였다.강민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마 자신을 위해 맞춤 제작된 것일까?그녀는 서둘러 괜한 착각이라며 부정해 버리고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고마워요. 내가 이기면 상금은 내가 3, 그쪽이 7로 가져가죠.”심은호는 웃었다.“그쪽이 이기는 거야말로 나와 이 차에 대한 제일 좋은 선물이에요.”그는 좌석을 부드럽게
국내 최고의 여성 라이더로 불리는 루나도 고작 이 정도라니.오늘 밤 그녀는 루나를 이기고 내일부터 명성을 떨치게 될 거다.첫 번째 코너가 다가오고 있었다.휙-검은색 오토바이가 강나현의 앞을 스쳐 지나가자 강나현은 당황했다.어쩌다 루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을 앞지른 걸까?강나현은 속도를 올리며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연속되는 코너에서 둘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세상에, 루나는 코너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아.”“대단해. 이 트랙에서 처음 달리는 거야. 연습 경기도 안 했잖아.”“이게 바로 국내 1위 여성 레이서의 실력인가? 너무 무섭네.”강나현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아무리 해도 강민아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미리 부탁했던 친구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관중석에서 생수병이 날아오르더니 갑자기 활주로에 떨어졌다.고속 운행에서는 작은 돌멩이마저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었다.무거운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지나가자 관중들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고, 다들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차가 생수병을 밟고 지나가며 큰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그 생수병이 강민아의 앞길을 막지 않더라도 강민아에게는 걸림돌이 될 테고 그걸 피하기 위해서 속도를 줄일 것이다.강민아가 생수병에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때 갑자기 오토바이가 한쪽으로 30도 정도 심하게 기울더니 강민아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생수병을 낚아챘다.관중석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생수병이 장외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에 던져졌다.문라이트가 홀연히 떠나고 나서야 관중들은 강민아가 한 행동에 반응했다.“세상에!”“꺄악!”누구는 머리를 탁 치며 입을 크게 벌렸고, 누구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루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세상에, 내가 뭘 본 거야!”“빨리, 빨리 돌려봐!”재벌가 도련님들이 소리치자 제어 콘솔에 있던 직원이 코스 옆 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을 느린 속도로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젠장, 무식한 나는 대단하다
오랫동안 오토바이를 타면서 강나현은 처음으로 무기력함과 절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루나와 그녀는 같은 레벨이 아니었고 그녀가 일방적으로 짓밟힌 게임이었다.민이는 한참 동안 루나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강나현을 발견하고는 팔짱을 낀 채 불만이 가득한 듯 투덜거렸다.“현이 형은 너무 느리잖아, 거북이야.”반하준은 여전히 무거운 레이싱 슈트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탄탄한 가슴이 함께 오르내렸다.그의 깊은 시선이 루나의 모습을 쫓았다.누구도 그의 시선을 이렇게 사로잡은 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극한 운동의 매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뗄 수 없는 순간이었다.세 바퀴를 먼저 완주한 강민아는 결승선에 멈춰 서서 심은호에게 신호를 보냈고, 심은호는 곧장 콘솔 스태프에게 연락을 취했다.스태프의 목소리가 강나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강나현 씨, 루나가 경기를 끝냈으니 약속대로 차에서 내려 결승까지 달려가세요.”강나현은 강민아보다 한 바퀴 반 정도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5km 가까이 달려야 했다.하지만 강나현은 스태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그녀에게 말하는 동시에 스태프의 목소리가 현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사람들은 강나현이 스태프의 말을 듣지 않자 야유를 보냈다.“내려! 내려!”“결과에 승복해!”“비열해. 저러면 조금이라도 적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객석에 앉아 있던 강나현의 일행들은 주변 사람들의 고함을 듣고 모두 창피함을 느꼈다.몇몇 재벌가 자제들이 콘솔로 달려가 인이어를 착용한 강나현에게 전용 채널을 통해 연락을 취했다.“강나현, 차 세워. 다들 널 욕하고 있어.”멈칫한 강나현이 차를 세우고 헬멧을 벗자 객석에서 들려오는 비난이 파도처럼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거야?”“차에서 내려! 내려!”“루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으면서 결과를 받아들일 배짱은 없나 봐?”강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조금 더 타면 적게 달
반하준은 늘 멋대로 행동하며 모두가 그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블랙홀, 부가티 라 부아튀르 누아르, 애스턴 마틴 발키리.”강민아는 영어로 자신이 원하는 차를 말했다. 반하준의 차고에 있는 가장 비싼 차 세 대였다.순식간에 남자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을 가린 헬멧을 뚫을 듯 날카롭고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내 차고에 누아르와 발키리가 있는 걸 어떻게 알죠?”반하준의 아우라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사람이라면 벌벌 떨었겠지만, 강민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덕에 저기압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대표님께서 블랙홀처럼 완벽한 레이싱카를 만들었다는 건 차를 사랑한다는 말이죠. 제가 짐작한 고성능 슈퍼카 두 대가 마침 차고에 있는데 기꺼이 내어주실 수 있나요?”루나의 설명은 일리가 있었다. 프로 레이서 출신으로 반하준의 차고에 어떤 스포츠카가 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런데 남자의 시선이 루나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저를 잘 아시네요.”그는 자신과 루나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반하준은 상대방의 헬멧을 벗겨서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3일 이내에 언제든 반씨 가문에 차를 가지러 오세요.”그는 헬멧과 레이싱 슈트를 벗은 루나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강민아도 주저하지 않다.“그럼 이제 블랙홀의 차 키를 저에게 주시죠?”영어로 말하며 헬멧을 뚫고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 말투와 조금 달랐다.하지만 상대는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의 핏줄인 아들도 옆에 있었다.한때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무시했으면 지금 그녀의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그녀도 점차 반하준과 두뇌 싸움을 하는 방법을 서서히 배워나갔다.반하준은 사람도 산 채로 잡아먹는 사냥개였고 그녀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호랑이 입에서 먹이를 꺼내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반하준이 무심하게 블랙홀 차 키를 던지자 타원형의 자동차 키는 공중에서 완벽한 호를 그리며 강민아의 손에
“은호 씨, 하준 씨한테 어떤 차를 세차하게 할까요?”강민아의 목소리에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심은호가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심은호가 스태프에게 말했다.“반하준이 세차할 차를 가져와요.”잠시 후 쓰레기차 한 대가 덜컹거리며 들어왔다.관중석에서 몇몇 사람들만 자리를 떴을 뿐 대부분은 여전히 앉아서 루나가 있는 방향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루나가 가기 전에 그들도 갈 생각이 없었다.더러운 쓰레기차가 들어오는 걸 본 관중들은 모두 목을 길게 빼 들고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때 조정실의 스태프가 쪽지를 건네받고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루나 씨가 우승을 차지했으니 약속대로 반 대표님께서 루나 씨한테 차 세 대를 선물하는 것 외에도 직접 세차 서비스까지 제공할 예정입니다.”스태프의 목소리가 수십억짜리 스피커를 통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오늘 밤 반 대표님께서 루나 씨를 위해 현장에서 직접 쓰레기차를 세차합니다. 자, 모두 반 대표님께 힘찬 박수를 보내드립시다.”말을 마친 스태프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사실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심씨 가문은 서경시의 오랜 명문가이고 반씨 가문 또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이렇게 기도할 뿐이었다.‘문제가 생기면 당사자를 찾아야 할 텐데. 반 대표님께서 부디 심은호 씨를 찾아가셨으면 좋겠어. 나 같은 월급쟁이를 괴롭히지 말고.’스태프가 분위기를 띄우자 관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쳐댔다.결국 반하준은 꼼짝없이 그대로 해야만 했다. 관중석의 대형 스크린이 꺼지지 않았고 카메라 감독과 피디 모두 반하준이 쓰레기차를 세차하는 전 과정을 생중계할 태세였다.그때 강나현은 아직도 오토바이를 밀면서 결승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민 게 약간 후회되었다. 뛰었더라면 20분이면 결승선에 도착했을 텐데.하지만 지금은 오토바이를 밀고 걸어가고 있다. 게다가 두꺼운 라이딩 복을 입고 있어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보기 흉해졌다.“
순간 반하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젠장.”반하준은 교양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이 거친 말을 내뱉고는 도망치듯 침대에서 내려 욕실로 달려갔다.쏟아지는 물소리가 간신히 진정된 그의 숨소리를 덮었다.그는 더 이상 혈기왕성한 어린애가 아니었고 가슴이 설렐 나이도 지났다. 아들이 벌써 훌쩍 자랐는데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 눈을 감자 물줄기가 반하준의 긴장한 얼굴을 씻어내렸다.꿈속의 장면이 기괴하고 낯설어서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여자가 고팠나? 루나를 꿈에서 봤는데 민아의 얼굴이라니.’반하준이 코웃음을 쳤다.‘어이가 없어서, 원.’...어느덧 ALI 수학 경시대회 결승전 날이 밝았다.ALI 그룹은 서경대학교에 작은 시험장을 마련하고 시험 과정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하기로 했다.네티즌들이 ALI 수학 경시대회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니 무엇이 공정하고 공평한 건지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여 ALI 그룹도 생중계의 열기를 빌려 수학 경시대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강민아가 육성민의 SUV에서 내렸다. 조금 전 정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또 그녀를 서경대학교에 데려다주었다.웅장하고 화려한 서경대학교의 대리석 문패가 눈앞에 펼쳐진 순간 강민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교를 떠날 때 다시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여기까지만 데려다주면 돼.”강민아는 뒤돌아 육성민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돌아서서 심호흡했다.‘이혼하길 정말 잘했어.’그녀는 서경대학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육성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강민아의 씩씩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오늘 베이지색 롱코트에 블랙 롱스커트를 입었고 앵클 부츠를 신었다. 거기에 울 머플러를 어깨에 둘러 매치했고 머리에는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노트북 가방을 들고 다른 서경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걸으니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육성민은 옅은 회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팔짱을 끼고 서 있었는데 추위 따위 전혀 타지 않는 것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