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원국한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딸한테 가져오라고 하면 됩니다. 편히 앉아 계시죠...”“괜찮습니다. 원씨 집안 와인 저장고도 한번 구경해 보고 싶군요.”말을 마친 하빈은 이미 일어나 슬비가 간 방향으로 걸어갔다.원국한은 입을 열어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정여진이 눈짓으로 막았다.원국한은 슬비와 하빈이 앞뒤로 복도 끝에 사라지는 모습을 미간을 찌푸린 채 바라보다 목소리를 낮췄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하빈이랑 슬비를 둘만 있게 두면 어떡해?”정여진은 찻잔을 들고 느긋하게 한 모금 마셨다.“뭘 그렇게 걱정해? 하빈이 슬비를 잡아먹기라도 하겠어?”“그래도 하빈은 하 서방 형이잖아...”“하 서방 형이니까 더 잘 대접해야지.”정여진은 찻잔을 내려놓고 원국한을 한번 봤다.“서문구 사업은 아직 하빈의 도움이 필요해. 하빈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우리는 정말 끝이야.”원국한은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간만 더 깊게 찌푸렸다....슬비는 눈을 내리깔고 지하 저장고를 향해 일정한 걸음으로 걸었다.등 뒤에 꽂힌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축축하고 서늘한 눈길은 미끄러운 뱀처럼 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해서 소름이 끼쳤다.저장고는 저택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공기는 눅눅하고 차가워졌고, 어두운 조명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고 가늘게 늘어졌다.슬비는 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와인만 챙기고 바로 올라갈 생각이었다.하빈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단 몇 초도.저장고는 크지 않았다. 세 면이 와인 선반으로 채워져 있었고 여러 빈티지의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가장 안쪽 선반에는 좋은 빈티지의 보르도 와인 몇 병이 따로 보관돼 있었다.그쪽으로 다가간 슬비가 발끝을 세우고 맨 위에 놓인 병을 집으려고 했다.손끝이 병에 닿자 뒤에서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곧 한 팔이 슬비 옆으로 뻗어 오면서 여유롭게 와인병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슬비에게 건네지는 않았다.
하빈은 찻잔을 들어 느긋하게 한 모금 마셨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제수씨 정도 외모와 분위기면 호강시에서도 손에 꼽힐 겁니다.”슬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하빈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았다.“원씨 집안에 따님이 한 분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슬비가 막 자리에 앉자 하빈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시선은 아무렇지 않은 척 슬비 쪽을 스쳤다. “이름이... 슬비라고 했던가요?”차를 따르던 정여진의 손이 잠깐 멈칫하면서, 옆에 있던 원국한의 표정도 굳어졌다.하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원슬비 씨도 제수씨만큼 예쁘다면... 지금 집에 있는 사람과 이혼하고 원슬비 씨와 결혼해도 좋겠네요.”거실의 공기가 통째로 빠져나간 듯했다.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정여진은 미소를 지은 채 얼굴이 굳어졌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정여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회장님은 농담도 잘하시네요.”하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 시선을 받은 정여진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억지로 붙들고 있던 웃음도 무너질 것 같았다.“회장님은 신분도 대단하신데 저희가 어떻게 그런 욕심을 내겠어요?”하빈이 가볍게 웃으며 슬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이미 한 번은 인연을 맺었잖습니까? 두 번이라고 안 될 건 없죠.”정여진의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슬비는 구석에 앉은 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표정은 차분하다 못해 차가웠다. 하빈이 무슨 말을 하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했다.하빈은 슬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쉽네요. 이렇게 예쁜 제수씨가 한 분뿐이라서...”하빈은 말을 돌렸다. 목소리에는 아쉬운 기색이 실렸다.“이번에 도와드린 건 제수씨를 봐서입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뿐입니다. 다음은 없습니다...”말을 마친 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슬비가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아침 식사는 이미 차려져 있었다.이재는 슬비보다 일찍 일어나서, 슬비가 내려왔을 때는 이미 집을 나간 뒤였다.식사를 하던 중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슬비는 무심코 발신자를 확인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전화를 받았다.“엄마...”[딸아!]전화 너머로 정여진의 한껏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하 회장이 우리 회사에 엄청 큰 사업을 물어다 줬어! 서문구 부지 있잖아.] [우리 원 회장이 그거 따내려고 2년이나 공들였는데 계속 안 됐거든. 그런데 하 회장이 말 한마디 하니까 바로 해결됐어!”핸드폰을 쥔 슬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서문구 부지는 원국한이 2년 동안 눈독 들이던 사업이었다. 투자 규모도 컸고 수익성도 높았지만, 경쟁이 치열해서 원씨 집안의 규모와 인맥만으로는 도저히 따내기 어려웠다.슬비는 이재에게 원씨 집안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관여한 거지?’‘설마 엄마가 이재한테 부탁한 거야?’[슬비야? 슬비야? 듣고 있어?]그제야 슬비가 정신을 차렸다. “응.”[하 회장 지금 집에 와 있어. 너도 빨리 와!]‘하이재가 엄마 집에 있다고?’하지만 도우는 오늘 이재는 회사에서 회의가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됐다, 끊을게. 얼른 와!]“엄마...”슬비가 더 말하기도 전에 정여진이 전화를 끊었다.어쩔 수 없이 슬비는 우유를 몇 모금 마시고 급하게 차 키를 챙겨서 나갔다.이재의 집에서 원씨 저택까지는 차로 약 40분 거리였다.호강시의 출근 정체는 이미 한풀 꺾여 길이 크게 막히지 않았다. 슬비는 천천히 운전했지만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았다....원씨 저택에 도착한 슬비는 차를 세우자마자 안으로 향했다.문을 열기도 전에 거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하 회장님은 역시 젊은데도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어려운 사업을 말씀 한마디로 해결하시다니, 저희가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문을 밀던 슬비의 손이 잠깐 멈췄다.슬비
정인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렸을 뿐이었다.“증명할 수 있어요?”“사람을 시켜서 다 확인했어요!”가람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과 자료를 잔뜩 띄운 뒤 정인에게 내밀었다. “보세요. 북명시에서 받아온 기록들이에요. 부슬비, 북명중학교. 학생기록부에 이름이랑 사진이 똑똑히 남아 있어요.”정인은 휴대전화를 받아 가볍게 훑어봤다.사진 속에는 중학생 시절의 슬비가 있었다.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교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운동장에 서 있었다. 미소는 맑고 환했다.지금과 이목구비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훨씬 앳돼 보였다.정인이 다음 화면으로 넘기자 가족관계 자료 사본이 나왔다. ‘부슬비’라는 이름과 부모 항목의 정보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부: 부건철][모: 정여진]정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계속 넘기던 손가락이 다음 자료에서 멈췄다.누렇게 바랜 판결문 사본이었다. 글자는 조금 흐렸지만 중요한 몇 줄에는 붉은 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피고인 부건철, 미성년자 성폭행죄로 징역 15년을 선고한다...]정인의 눈이 가늘어졌다.정인은 고개를 들어 가람을 바라봤다.가람은 바로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입가의 웃음을 억누르지 못했다.“보셨죠? 부슬비가 열 살 때 자기 친아버지를 꼬신 거예요. 그 뻔뻔한 엄마랑 똑같은 인간이죠.” “나중에 친엄마한테 들켜서 신고했고, 부건철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아직도 교도소에 있어요.”정인은 말없이 판결문만 바라봤다. 눈동자 안쪽에서 여러 감정이 스쳤지만, 이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모녀가 북명시에 더는 못 버티니까 호강시로 도망친 거예요.” “친엄마 정여진은 원국한 회장한테 붙어서 원 회장 사모님이 됐고, 부슬비도 이름을 바꾸고 원씨 집안 딸 행세를 시작했죠.”“이제는 진짜 딸 원지민 자리까지 대신해서 재벌가에 시집가려고 하잖아요. 그런 여자가 어떻게 하이재 회장님 옆에 설 자격이 있겠어요?” “부슬비가 하이재 회장님 옆에 있기만
정인은 수소문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가람의 행방을 알아냈다.가람이 머무는 아파트 앞에 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말레이시아의 저녁노을이 하늘을 짙은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낡은 아파트의 잿빛 외벽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이었다.가람은 부모에게 이끌려 밤중에 호강시를 빠져나온 뒤 여러 곳을 전전했고, 결국 말레이시아 외곽의 작은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아파트라고는 했지만 오래된 임대주택에 가까웠다. 복도의 조명은 깜빡거렸고 벽의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공기 속에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차에서 내린 정인의 미간이 단단히 일그러졌다.“정말 여기 사는 거야?”“네, 아가씨.” 곁에 있던 경호원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정인은 더 말하지 않고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경호원들이 곧바로 뒤따랐다. 한 명은 앞에서 길을 살폈고, 다른 이들은 주변을 경계했다.계단의 센서등도 고장 나 있어서 경호원들은 휴대전화 손전등까지 켜야 했다.치맛자락이 먼지 쌓인 난간에 닿자, 정인은 질색하며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표정은 갈수록 굳어졌다.‘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직접 찾아오게 된 거지?’하지만 이재의 결혼식은 이달 말이었다. 그 전에 반드시 ‘원지민’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정인이 오랫동안 ‘원지민’의 뒷조사를 했지만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신상 자료를 통째로 막아 둔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었다.가람이 유일한 실마리인데, 정인은 어렵게 가람과 연락이 닿았다.그래서 직접 이곳까지 온 것이다.마음속으로는 죽어도 오기 싫었지만.4층 복도 끝.경호원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낮은 욕설이 들렸다.“누구세요?”“문 여세요.”문이 살짝 열리며 시트 마스크를 붙인 얼굴 반쪽이 드러났다.마스크 구멍 사이로 눈을 내민 가람은 문밖의 정인을 알아보자 그대로 굳어졌다.“하... 하정인 씨?”정인은 말없이 가람을 내려다봤다. 눈빛에는 싫다는 기색이 숨김없
이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은근히 사람을 홀리는 기색이 묻어났다.“내가 그것도 따줄게.”슬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너무 다정한 말이었다.진심이라고 믿어 버릴 만큼.슬비는 눈을 내리깔고 가슴속에서 뒤엉키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괜한 생각 하지 마.’‘우린 서로 필요한 걸 얻기 위해서 결혼을 약속했을 뿐이야.’‘일 년만 지나면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거야.’‘저런 말도 그냥 장난치는 거겠지...’‘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안 돼.’슬비가 한참 말이 없자 이재가 낮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해?”슬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이재는 잠시 슬비를 바라보다 허리를 숙였다. 한 팔로 무릎 뒤를 받치고 다른 팔로 허리를 감더니 그대로 번쩍 안아 올렸다.슬비는 놀라 반사적으로 이재의 목을 끌어안았다.“뭐 하는 거예요?”“위에 올라가서 자려고.” 이재는 슬비를 안은 채 침대 쪽으로 걸었다.“놔... 놔줘요.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이재가 슬비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눈가에도 옅은 웃음이 번졌다. “안 돼. 음악감독 하고 싶다며? 그럼 이따 침대에서 제대로 한번 부탁해 봐.”슬비의 뺨이 또 달아올랐다.“장난치지 마요... 저 지금 그날이라 불편해요.”“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이재는 슬비를 침대에 내려놓고 위로 몸을 기울였다. 코끝이 맞닿을 듯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안 건드려.”목소리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잔뜩 잠겨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끝까지 눌러 참는 절제가 배어 있었다.“키스하고 안아 주는 정도는 괜찮잖아?”슬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재의 입술이 내려앉았다.전처럼 빼앗듯 거친 키스가 아니었다. 물 위를 스치는 깃털처럼, 꽃잎을 훑고 가는 봄바람처럼 아주 가볍고 부드러웠다.입가에서 뺨으로, 코끝에서 이마로 옮겨 갔다가 다시 입술로 돌아왔다.입맞춤에 슬비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근 것처럼 온몸의 힘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