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0년 지기 한로로와 장혁. 친구라는 이름 아래 감춰둔 감정은 서로의 연애와 비밀스러운 관계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혼을 원하는 연인 한기태와, 사랑을 사랑인 줄도 몰랐던 로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혁과 너무 늦게 알아버린 로로는 결국 묻게 된다. 우리 사이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View More“그러니까 민원 내용이 뭐였는데?”
한로로가 소주잔을 입술에 가져가며 물었다.
박승철은 대답 대신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청 민원실 팀장 박승철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기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가로수.”
“가로수가 왜?” “불빛이 너무 밝대.”옆에서 맥주를 마시던 장혁도 고개를 들었다.
“가로수가 빛도 나냐?”
“가로수 옆 경관조명, 이 새끼야.” “아.”승철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불빛 때문에 잠을 못 잔대. 담당 부서 연결해드린다니까 왜 자기가 통화해야 하냐고 나보고 해결하래.”
“푸흡!” “웃어?” “미안. 계속해봐.” “너 지금 존나 즐겁지?” “응.” “미친년.” “공무원이 시민한테 미친년이라고 해도 돼?” “퇴근했잖아.”금요일 밤 열 시.
세 사람이 모인 곳은 영업이 끝난 장혁의 타투숍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닭발, 족발, 피자가 뒤죽박죽 놓여 있었다.
대부분 로로가 주문한 음식이었다.
“야, 한로로.”
“왜?” “족발 먹고 싶다며. 피자는 왜 시켰어?” “피자도 먹고 싶으니까.”장혁이 작은 체구의 로로를 훑어봤다.
“뭘 봐.”
“신기해서.” “뭐가?” “연비 존나 안 좋은 경차 같아.” “뒤질래?”승철이 피식 웃었다.
“경차는 연비라도 좋지.”
“박승철, 너도 뒤질래?”두 남자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그랬다. 셋 중 가장 작은 건 로로였지만 서열까지 작은 적은 없었다.
장혁이 닭발 접시를 밀어줬다.
“먹어.”
“안 먹어.” “왜.” “경차라며.” “경차도 기름은 넣어야지.” “이 새끼가.”로로가 장혁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던 순간이었다.
딸랑.
숍 입구의 종이 울렸다.
“오빠.”
장혁의 여자친구 장서운이었다.
“아직 있었네?”
반갑게 들어오던 서운은 장혁 옆에 앉아 있는 로로를 발견하자 표정이 굳었다.
또 시작이네.
서운은 로로를 싫어했다. 20년 된 여자 사람 친구. 전화 한 통이면 새벽에도 나오고, 장혁의 부모님과도 알고 지내며 그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여자.
여자친구 입장에서 신경 쓰이는 건 이해했다. 그래서 로로는 굳이 부딪치지 않았다.
“나 먼저 갈까?”
로로가 일어나려 하자 장혁이 말했다.
“앉아.”
서운의 얼굴이 더 굳었다.
“오빠. 나랑 얘기 좀 해.”
“여기서 해.” “둘이.”승철이 소주잔을 들었다.
“나 오늘 민원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닥쳐.”결국 장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유리창 너머로 두 사람이 보였다. 서운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또 결혼 얘기인가.”
승철이 중얼거리자 로로는 피자를 베어 물었다.
“쟤 진짜 결혼 안 하려나?”
“안 한다잖아.” “서운 씨는 하고 싶어 하잖아.” “둘이 알아서 하겠지.”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로로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결혼할 생각 없으면 나랑 왜 만나는데!”
이번에는 안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뭘!” “난 결혼 생각 없다고.” “그게 언제까지인데? 우리가 몇 살인데!”서운의 눈가가 붉어졌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나랑 결혼할 거야, 말 거야?”
긴 침묵.
로로의 손에 들린 피자가 멈췄다.
장혁이 입을 열었다.
“안 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
“어.” “그럼 헤어져.”장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승철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서운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알았다고?”
“네가 헤어지자며.” “장혁, 너 진짜…….”입술을 떨던 서운이 결국 돌아섰다.
“그래. 평생 혼자 잘 살아봐.”
쾅.
차 문이 닫히고 잠시 뒤 차가 사라졌다.
정적.
딸랑.
장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들어와 소주잔을 채웠다.
승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왜.” “괜찮냐?”장혁은 소주를 한 번에 털었다.
“나 방금 헤어졌다.”
로로와 승철이 동시에 그를 봤다.
“그걸 우리가 못 봤을 것 같냐?”
“아. 봤냐?” “동네 사람도 다 봤겠다, 미친놈아.”장혁은 태연하게 족발을 집었다.
“넌 슬프지도 않냐?”
“뭐가.” “여자친구랑 헤어졌잖아.”젓가락이 잠깐 멈췄다.
“결혼 안 한다는데 어쩌라고.”
로로가 턱을 괴었다.
“그러다 진짜 평생 혼자 산다?”
장혁이 그녀를 바라봤다.
20년.
저 얼굴을 본 시간이 벌써 그만큼이었다.
장혁이 피식 웃었다.
“뭐.”
“뭐가 뭐야.” “너도 있잖아.”로로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왜 나와?”
“너도 결혼 안 한다며.” “그거랑 뭔 상관인데?”장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승철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만.”
“왜.” “뭔가 불길한데.” “뭐가?” “모르겠어. 근데 저 새끼가 방금부터 널 보는 눈깔이 마음에 안 들어.” “지랄한다.”로로는 웃어넘겼다.
그날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장서운의 한마디로 끝난 장혁의 연애가, 20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이 바뀐 적 없던 세 사람의 관계를 뒤흔드는 시작이 될 줄은.
그리고 장혁이 그날 로로에게 했던 말.
‘너도 있잖아.’
그 한마디가 언젠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돌아오게 될 줄도.
― 1년 후 ― “언니, 잠깐만요. 움직이지 마요.” 하랑이 로로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작은 보석이 박힌 은빛 티아라. 직접 디자인하고 세공한 결혼 선물이었다. “됐다!” 거울을 본 로로의 눈이 커졌다. “우와. 존나 예쁜데?” “진짜요?” “응. 완전 내 거 같아.” “다행이다. 저 이거 만들면서 세 번이나 울었어요.” 뒤에서 기태가 끼어들었다. “다섯 번.” “오빠. 세 번이거든?” “보석 떨어뜨려서 한 번, 납땜 잘못해서 한 번, 디자인 마음에 안 든다고 두 번. 완성하고 예쁘다고 울어서 한 번.” 하랑이 세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다섯 번 맞네.” 로로가 웃다가 두 사람의 같은 반지를 발견했다. “야. 너희 그거 뭐냐?” 하랑이 손을 번쩍 들었다. “커플링이요!” 기태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그만 좀 자랑해.” “오빠도 좋아했으면서. 받자마자 사진도 찍었잖아.” “…….” 로로가 웃다가 기태를 불렀다. “기태야.” “응?” “너가 가지고 싶던
한 주 뒤. 일요일 저녁. 오후 네 시, 혁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로로야, 저녁 먹으러 와. 엄마가 갈비찜 해놨어.’ “엄마, 나 그거 좋아하는데.” ‘알지. 혁이 데리고 일찍 와.’ 저녁 여섯 시 반. 엘리베이터 안에서 로로가 코를 킁킁거렸다. “벌써 음식 냄새 나는 것 같아.” “엄마가 아까 세 번 전화했어.” 띵. 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우리 로로 왔어?” “엄마!” 현관문을 활짝 연 어머니가 로로부터 끌어안았다. “아이고, 우리 막내딸. 오랜만이야.” “지난주에도 봤잖아.” “일주일이면 오래지.” 거실에서 아버지도 나왔다. “로로 왔냐?” “아빠, 나 왔어.” “얼른 들어와. 배고프지?” 뒤에 서 있던 혁이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그제야 혁을 봤다. “너도 왔냐?” “내가 운전해서 데려왔거든.” “수고했다.” “끝?” 로로가 웃었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알렸던 날에도 어머니는 진짜 막내딸이 생겼다며 좋아했었다. 식탁에는 갈비찜, 잡채, 전, 된장찌개까지 네 사람이 먹기엔 넘칠 만큼 차려져 있었다. “엄마, 이걸 다 했어?” “네가 온다는데 해야지.” “나 맨날 와도 돼?
며칠 뒤. 토요일 저녁. 혁은 하루 종일 이상했다. 로로가 샵에 들어온 뒤부터 괜히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장혁.” “왜.” “너 사고 쳤어?” “아니.” “근데 왜 눈을 피해.” “안 피하는데.” “수상해.” 혁은 대답 대신 셔터를 내렸다. “밥 먹으러 가자.” “어디?” “가면 알아.” 혁이 데려간 곳은 레스토랑도 호텔도 아니었다. 둘이 오래전부터 걷던 강변이었다. 해가 완전히 내려앉은 뒤였다. 강 건너 불빛이 검은 수면 위로 길게 번졌고, 바람에는 낮의 열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로로의 머리카락이 뺨에 붙었다 떨어졌다. “여기?” “응.” “밥은?” “조금 이따.” “나 배고픈데.” “잠깐만 참아.” 둘은 천천히 산책로를 걸었다. “근데 왜 여기 왔어?” “잠깐 걸으려고.” “너 산책 좋아하는 인간 아니잖아.” “오늘은 좋아해.” “수상하다니까.” 혁이 난간 앞에서 멈췄다. 바람이 불었다. 로로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로로야.” “응.”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혁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원래 내가 먼저 하려고 했거든.”
그날 밤. 로로는 기태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돌아갈 사람이 나였으면 했어. 그때는 왜 그 말이 무거웠을까. 기태는 자신을 가두려던 게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로로는 그 이름 안에서 자신이 사라질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 자? 혁이었다. - 아니. - 뭐 해. 로로는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야.” “그냥.” “뭔 일 있어?” “없어.” “목소리가 있는데.” 로로가 피식 웃었다. “너 진짜 나 잘 안다.” “이십 년이 장난이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혁아.” “응.” “어제 말한 거 생각해봤어?” “결혼?” “응.” “조금.” “무슨 생각 했는데?” “네가 괜히 부담 느끼는 건 아닌가.” 로로는 눈을 감았다. 역시 장혁이었다. 자기는 자기 마음부터 봤는데, 혁은 먼저 로로가 부담스러울까 생각했다. “넌?” “생각했어.” “그래서?” “아직 생각 중.” “그럼 생각해.” 재촉도 확인도 없었다. 그 말에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로로는 욕실의 칫솔 두 개를 봤다. 혁의 티셔츠는 건조대에, 그가 두고 간 슬리퍼는 현관에 있었다. 결혼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아니. 무엇이 달라질지는 둘이 정하면 되는 거 아닐까. 각자의 공간이 필요하면 지키고. 혼자 있고 싶은 날에는 혼자 있고. 일도 계속하고. 그러다 보고 싶으면 만나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늙어가고. 문득 웃음이 났다. “나 하고 싶은가 봐.” 말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회사에서도 생각은 같았다. 기태가 했던 말도 이해됐다. 계속되는 관계에 결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는 것. 로로도 장혁과 계속되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그 마음을 결혼이라 부르는 순간 겁부터 냈다. 지금은 아니었다. 결혼이 자신을 바꾸는 건 아니었다. 둘이 그 이름의 모양을 정하면 됐다. 혁과 결혼을 생각하는 건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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