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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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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유월

프롤로그. 가장 좋은 날이, 가장 나쁜 날이 되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2 07:15:54

도아윤은 그날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거라고 믿었다.

오후 네 시 십칠 분.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나온 아윤은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서서 손에 들린 원고를 내려다봤다. 두꺼운 종이 뭉치의 맨 앞장에는 익숙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사랑을 찾다》. 처음으로 끝까지 써 내려간 장편소설이었다. 수십 번씩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 문장들, 새벽마다 잠을 쫓아가며 고쳐 쓴 대사들,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도 한참 동안 컴퓨터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밤까지. 그 모든 시간이 이 원고 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교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윤아, 이건 출판사에 보내보자.”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자신이 쓴 소설을 정말 출판사에 보내도 되느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고, 교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너는 네 글을 너무 믿지 않는 게 문제야. 내가 읽어보니 이제 세상에 보여줘도 되겠다.”

그 말에 아윤은 결국 울어버렸다. 교수는 당황해 휴지를 건넸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오래 바라던 말을 들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구실에서 나와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이재율이었다.

삼 년 동안 곁에 있었던 남자. 아윤이 처음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쳐줬고, 그녀가 글 때문에 밤을 새우면 투덜거리면서도 커피를 사다 주던 사람. 원고가 좀처럼 풀리지 않아 울상을 지을 때면 자기가 대신 악당을 혼내주겠다며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아윤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재율아, 나 할 말 있어.]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읽지 않은 표시가 그대로였다. 촬영이 있나 싶어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바쁜가 보네.”

아윤은 혼잣말을 하며 원고를 품에 안았다. 괜찮았다. 직접 찾아가면 되니까. 오늘은 조금 갑작스럽게 찾아가더라도 재율이 웃으면서 맞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

재율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거의 기울어 있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온 붉은 햇살이 회색 벽을 비추고 있었고, 아윤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아까 운 탓에 눈가가 조금 붉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현관 앞에 선 그녀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철컥.

문이 열렸다.

“재율아?”

대답이 없었다.

아윤은 익숙하게 신발을 벗으려다가 멈췄다. 현관 바닥에 낯선 구두가 놓여 있었다. 굽이 높고 장식이 화려한 여자 구두였다. 재율의 스타일리스트가 두고 간 물건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는 집에서 촬영 관계자들과 미팅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웃음이었다.

“재율아, 누구 왔어?”

아윤은 현관에 선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현이?”

소아현.

같은 모임에서 알게 된 후배이자, 아윤을 볼 때마다 밝게 웃으며 언니라고 부르던 여자였다. 그녀가 왜 이 시간에 재율의 집에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윤은 천천히 거실 쪽으로 걸었다.

“재율아.”

대답이 없었다.

대신 낮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여자의 대답 뒤로 짧은 웃음이 이어졌다.

아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을 맞는다고 했다.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아윤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랬다.

그녀는 거실 입구에 섰다.

그리고 보았다.

소파에 앉은 재율.

그의 무릎 가까이에 몸을 기댄 아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추는 모습을.

아윤은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잊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고 있던 원고가 미끄러졌다.

툭.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에서 몇 장이 흩어졌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이 돌아봤다.

“……아윤아?”

재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현도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연 순간, 아윤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던 기대까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언니.”

아현은 잠깐 망설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했다.

“우리 만난 지 좀 됐어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선명했다.

만난 지 좀 됐다고.

얼마나?

언제부터?

내가 몰랐던 시간이 대체 얼마나 길었던 걸까.

아윤은 재율을 바라봤다.

그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윤아, 이건…….”

“설명해 봐.”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화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차분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무슨 설명을 할 건데?”

재율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아니라…….”

“방금 내가 본 게 뭔데?”

“아윤아.”

“내가 잘못 본 거야?”

재율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아윤은 그 침묵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이 났다.

정말 우습게도.

“와.”

그녀가 작게 웃었다.

“나 오늘 진짜 좋은 날이었는데.”

재율의 표정이 흔들렸다.

“무슨…….”

“내 소설.”

아윤이 바닥에 흩어진 원고를 내려다봤다.

“드디어 끝났어.”

그녀는 한 장씩 종이를 주웠다. 끝이 구겨진 첫 페이지를 펴고 그 위에 다음 장을 올렸다. 손이 떨려 제대로 가지런히 맞춰지지 않았다.

“교수님이 출판사에 보내보자고 하셨어. 내가 쓴 글을, 진짜 책으로 만들어볼 수도 있대.”

재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아윤아, 일단 내 말 좀…….”

“그래서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려고 왔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아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을 때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는 것도, 난처할 때 눈썹 사이를 찌푸리는 버릇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네가 제일 좋아해 줄 줄 알았거든.”

재율이 입을 다물었다.

그 뒤에서 아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저희도 일부러 이렇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아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우리?”

“…….”

“지금 우리라고 했어?”

아현의 얼굴이 굳었다.

아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너희는 우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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