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의 손은 정말 예뻤다. 길고 새하얀 손가락에 골격도 균형이 잡혀 있었다.직업상 네일아트를 하지 않아 손톱은 단정하고 깨끗했고, 둥글고 건강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지하는 침을 한 번 삼키며, 그녀의 손을 맞잡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돌아가서 맛있는 거 사 줄게.”“네.”진아가 느긋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그런 거 사양할 성격 아니에요. G시의 부 대표님이 얼마나 통 큰 사람인지, 구경 좀 해야겠어요.” “실망시키지 않을게.”두 사람은 한바탕 웃으며 얘기한 후, 출발했다. 진아가 신신당부했다.“너무 빨리 달리지 마세요. 해도 졌고, 길도 험해요. 조심해야 해요.” “그래.”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도 느긋하게 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진아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테니까. 하지만, 한참을 가던 중, 갑자기 급제동이 걸렸다. “왜 그래요?”어렴풋이 잠들었던 진아가 놀라며 깼다. 순간, 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가서 보고 올게.” 그는 차를 살펴보며 생각했다.‘설마, 차가 고장 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가장 두려운 일은 현실이 되곤 한다.차는 정말 고장 난 것이었다. “왜 그래요?”진아도 차에서 내렸다.지하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허탈하게 말했다.“문제가 생겨서 시동이 안 걸려.” “네?”순간, 진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이렇게 비싼 차도 문제가 생겨요?” “임 선생님.”지하가 어깨를 으쓱였다.“차도 기계니까 고장 날 수 있죠.”“아.”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럼 이제 어쩌죠?” 하필 이럴 때 고장이 나다니.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앞뒤로 마을도 가게도 없었다. 호텔은커녕 여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는 얼굴을 찡그렸다.“사람 불렀어. 차도 견인해야지.” “그럼 몇 시간은 걸리겠네요?”“어, 그렇지.”지하는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아의 환심을 사러 왔다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망신은 둘째치고,
진아는 어쩔 수 없이 또 멈추었다.차가 멈추자, 지하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왜 그래요?”진아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진아 씨.”지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돌아갈 때, 내가 데리러 올게, 알았지?” 순간, 진아는 멍해졌다.출장을 왔으니, 당연히 병원 차를 타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데리러 온다니, 무슨 뜻이지?’ 그녀는 대답을 망설이며 입을 다물었다. “많이 생각할 거 없어.”지하가 낮은 웃었다.“그냥 데리러 오고 싶어서 그래. 부담 갖지 말고, 진아 씨 하고 싶은 대로 해.”그는 다시 몸을 돌려 차에 올랐다. 이번엔 다시 돌아오지 않고 멀어져갔다. 하지만, 진아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후, 진아는 출장 업무를 모두 마쳤다.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짐을 다 챙기고 떠날 준비를 했다. 캐리어를 밖으로 끌고 나가자, 병원에서 보내온 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지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일 거야.’ ‘아니면... 오려고 했는데 다른 일이 생겼나?’‘하긴, 상장기업 대표가 한가할 리 없지.’ “임 선생님, 차에 짐 실어드릴까요?” 진아가 대답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지하였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지금 가는 중이야. 아침에 일이 좀 생겨서 출발이 늦었어. 아직 출발한 거 아니지?]‘뭐라고?’ 진아는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곧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안 와도 돼요.”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병원 차가 와있어요. 이거 타고 가면 돼요.” [안 돼.]지하가 다급하게 말했다.[곧 도착해. 정말이야! 최대 10분!]‘10분?’‘그럼 거의 다 온 거잖아?’‘이제 와서 그냥 가라고 하면, 너무 매정한 거겠지?’“그럼...”진아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겠어요. 조금 더 기다릴게요.” [그래!]지하는 너무 기뻐했다.[금방 갈게.]“아니요
지하는 진아의 손에 있는 꼬치를 가리켰다.“이거.”“오.”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진아는 꼬치를 들고 그의 앞에 내밀었다.“여기요.”여전히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그래서 지하는 몸을 기울여 고개를 숙였고, 입으로 꼬치를 베어 물었다.하지만 쉽지 않았고, 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힘 좀 줘봐요.” “아니...”지하가 꼬치를 문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아주 조급해 보였다. 순간, 진아는 웃음을 터뜨렸다.“외계어 하는 거예요? 도와주면 되잖아요!” 그녀는 꼬챙이를 단단히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하나, 둘, 셋!”팔에 힘을 주어 당기자, 마침내 꼬챙이가 빠졌다. “아!!”순간, 지하가 비명을 질렀다.진아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그는 코를 감싸 쥐고 있었다. “왜 그래요?”당황한 진아가 물었다. ‘웬 돼지 멱따는 소리야?” “왜냐고?” 지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꼬챙이로 찔렀잖아!” “네?”진아는 어리둥절했다.“어딜요? 어디 좀 봐요.”하지만, 지하는 입과 코를 가린 채 고개를 저었다. ‘어디를 찔렀는지 뻔히 보이지 않나?’ 진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손을 젖히려 했다.“어디를 찔린 거예요? 어디 좀 봐요. 입이에요?” “아니, 안 보여줄 거야!”지하는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아, 정말.”진아는 헛웃음이 나왔다.“저 의사예요. 좀 보여줘요. 제가 못 볼 건 또 뭐예요? 어서요!” 그래도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그녀는 최후의 방법을 썼다.“이래도 보여주기 싫다는 거죠? 그럼 우리 식사 약속은 취소예요. 앞으로 저한테 연락도 하지 마요.” “안 돼!”지하가 다급히 진아를 붙잡았다.“보여주면 되잖아!” 그러고는 손을 살며시 내렸다. 손에 가려졌던 모습은 아주 처참했다. 온 얼굴에 피가 튀어 있었다.진아는 깜짝 놀라 말했다.“피가 엄청 많이 났잖아요! 이 지경인데 왜 계속 가리고 있었어요?” “못 생겨 보일까 봐 그랬지!” 지하가 억울하다
[제가 어떻게...]진아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뭔가 깨달은 듯 멈췄다.[설마... 지금 어디예요?]지하가 웃으며 말했다.“내가 먼저 물었잖아. 그래도 진아 씨가 물으니까 대답해 줄게. 지금 병원 앞이야. 데리러 와 줄래?” ‘여기까지 오다니!’ 진아는 입이 떡 벌어졌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럼 입구에 계세요. 곧 도착해요.]“그래.”진아는 전화를 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머무는 곳은 병원 뒤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가 기다리다 지칠까 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약간 숨이 찼다. 순간, 지하가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하의 외모도 한몫했지만 차도 워낙 눈에 띄어서, 지나는 사람마다 두세 번은 돌아보았다. 멀어지면서도 뒤돌아 몰래 훔쳐볼 정도였다. 그 사람들의 눈동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멋있다.’하지만 지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진아를 놓칠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그러고는 그녀를 보자마자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진아 씨!” 그 한마디에, 사람들이 시선이 진아에게 떨어졌다. ‘기다리던 사람이 저 여자구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진아는 큰 키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긴 생머리를 뽐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소박하지만 깨끗한 인상, 또렷한 이목구비. 멋진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와 어울리는 법이었다. 그녀는 지하 앞에 멈춰 섰다. 숨이 약간 가빴다.“왜 왔어요? 무슨 일 있어요?” “왜, 일 없으면 오면 안 돼?” 지하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내가 언제는 무슨 일이 있어서 진아 씨를 찾았나? 진아 씨를 보러 오는 건 내 일이잖아.”부드럽지만 묘하게 설레는 말투.진아는 입 안이 바싹 말라서 지하를 슬며시 흘겨보았다. “그...”지하는 그녀의 뒤를 훑어보았다.성빈이 보이진 않았지만, 혹시 그가 왔을까 걱정되었다. “오늘 진아 씨 찾아온 사람 있
“야.”지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연애질하러 왔으면, 네가 어쩔 건데?”“흥.”유건이 냉소하며 말했다.“진짜 못 봐주겠네.” “그래, 너 잘났다!”지하가 웃으며 말했다.“잘난 너는 시연 씨랑 혼인신고나 하러 가지 그래?” “입 닥쳐.”유건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일하러 온 거 아니야? 할 거야, 말 거야?” “해야지, 당연히.”사실, 지하는 오늘 유건과 말다툼하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진행 중인 협력 프로젝트가 있었고, 양쪽 회사 모두 주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 둘은 이내 작은 회의실로 향했다.그곳엔 이미 이번 프로젝트의 협력사와 주관사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작하죠.”“잠깐.”지하가 유건을 붙잡고 말했다.“누군가 빠진 것 같지 않아?” “누구?”유건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진성빈이 안 왔네.” 사실, 진씨 가문의 JW그룹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요 관계자였다. 유건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이런 중요한 회의에 지각이라니.” 그러고는 주지한에게 지시했다.“당장 연락해 봐.” “예.”잠시 후, 지한이 돌아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JW그룹 쪽에서도 연락이 안 된답니다. 대신, 진하유 씨가 오는 중이랍니다.” 유건이 입꼬리를 비틀며 냉소했다.“기다릴 거 없어. 먼저 시작하자.”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진씨 가문이 G시 사교계에서 중간층에 머무르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야.’‘진성빈 같은 태도로는 가문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힘들지.’ ...회의는 예정된 시간에 시작되었고, 지하는 자리에 앉았다.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진성빈은 왜 안 오는 거지?’‘진하유도 못 찾는다니, 어디 갔길래?’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있었다. ‘설마, 진아 씨를 찾으러 간 건 아니겠지?’가능성은 충분했다. 요즘 성빈은 자주 진아의 주변을 맴돌았고, 지하가 직접 본 것만 해도 여러 번이었다.자기가 진아를 놓치고선, 아깝다며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아직도 모른다고? 티가 안 나나?”진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순간, 성빈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진아는 원래 설명하려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두자. 그래야 다시 찾아오는 일도 없을 테니까.’ “빨리 가.”진아가 다그치며 말했다. “진아야...”성빈은 아쉬운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자, 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탁자 위의 도시락이 아까워서였다.“이게 다 뭐야?”지하가 도시락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다 식었잖아. 나랑 밥 먹으러 가자. 지금 점심시간이니까 진아 씨도 밥 먹어야 하잖아, 그렇지?” 진아는 거절하지 않고 병원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카드를 꺼내 쇠고기 국수 두 그릇을 결제했다. “비싼 건 못 사줘요. 그냥 대충 먹자고요.” 그녀는 이내 국수 두 그릇이 담긴 식판을 내려놓았다.지하의 국수 위엔 달걀 프라이가 얹혀 있었다. “왜 진아 씨 거는 달걀 프라이가 없어?”지하가 물었다.“안 좋아해?” “아니요.”진아는 고개를 저었다.“방금 뭔가 먹었으니까 달걀은 안 먹으려고요. 얼른 드세요. 부 대표님 같은 도련님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지만요.” “왜 안 맞겠어?” 지하는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도련님은 사람도 아니라는 거야? 그건 분명히 해야 해.”“푸핫!”순간, 국물을 마시던 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더니 크게 웃기 시작했다.“하하하!”지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렇게 웃겨?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두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꽤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데, 관계를 발전시킬 때도 되지 않았나?” 진아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무슨 생각하는 것 같은데?” 지하는 실소를 터뜨렸다.“진아 씨가 오늘 밥 사줬잖아. 저번엔 도시락도 사줬고... 그런데 난 아직 밥 산 적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