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헤...”딸아이의 귀여운 투정에, 유건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쉿!”조이가 황급히 아빠 입을 통통한 손으로 막았다.“엄마 들으면 안 돼요! 엄마 속상해하실 거예요!”“아.”유건은 금세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잘못했네.”“흥.”옆에서 시연은 전부 다 들었다.‘뭐야, 이 둘은 내가 귀머거리라도 된 줄 아나? 내 앞에서 대놓고 비밀회의?’“그럼, 조이.”유건은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아빠가 직접 해준 거, 먹어볼래?”“와아!”조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좋아요, 좋아요!”하지만 곧,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근데... 아빠, 요리할 줄 알아요?”조이 기억 속의 유건은 단 한 번도 밥을 해준 적이 없었다. ‘혹시 엄마보다 더 맛없으면 어떡하지?’“알지.”유건은 아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못하는 건, 아빠가 해야지.”“엄마!”조이가 금세 시연을 향해 돌아섰다.“아빠가 요리해도 돼요?”한쪽은 오랜만에 만난 아빠 때문에 너무 행복해 보였고, 다른 한쪽은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시연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순간, 조이와 유건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리고 동시에 활짝 웃었다.“엄마가 허락했어요!”“응.”유건이 다시 물었다.“그럼 지금 바로 장 보러 갈까? 조이는 뭐 먹고 싶어? 시연이, 너는?”“장 볼 필요 없어요.”시연은 집 안쪽을 가리켰다.“집에 재료 있어요.”시연의 근무 일정에 맞춰, 도경미의 휴무일도 달라진다. 오늘은 시연이 쉬는 날이라 도경미에게도 휴가를 줬지만, 도경미는 떠나기 전 냉장고를 꽉 채워놓고 갔다.단지 도경미는 시연의 요리 실력을... 조금 과대평가했을 뿐이다.‘아하...’유건은 단번에 눈치를 채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수고 덜겠네. 자, 들어가자.”말을 마치자, 유건은 시연 손에 있던 우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한 손엔 조이를
유건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목소리만 차갑게 흘려보냈다.“꺼져. 더럽혀진 채로 여기 머물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가 휠체어를 타든 말든,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널 처리할 수 있어.”뒤에서 승하가 한동안 침묵했다.그리고 낮게 내뱉었다.“알았다. 갈게.”승하는 정말 사라졌다.유건은 눈을 꾹 감았다. 손이 묘비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부러질 듯 힘이 들어갔다.“엄마... 미안해요.”그 ‘미안하다’는 말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숨겨둔 원망에 대한 사죄였다.‘그땐 왜... 왜 나까지 버리고 떠난 거야. 어린 나를 두고, 살 의지도 버린 거야?’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엄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얼마나 치욕적이고 잔혹한 시간을 버텼는지.가족도, 사랑도... 결국 다 엄마를 무너뜨리고 더럽힌 것뿐이었다.그때의 심명진은 숨 쉬는 것조차 지독한 고통이었을 것이다.‘난 아들이라서 그나마 버티지만, 엄마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구나.’엄마는 유건을 버린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지켜낼 수 없었던 거였다.살아도 인간으로서 존엄조차 남지 않은 삶... 끝낼 수밖에 없었던 삶.“엄마... 엄마...”유건은 묘비에 이마를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눈가가 젖어갔다....저녁 무렵, G시에는 보슬비가 내렸다.그날 유건은 모든 술자리를 취소했다. 기사도 부르지 않고, 혼자 차를 몰았다. 목적지도 없이, 도심을 빙빙 맴돌았다.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 멈춘 곳은 지씨 저택 앞이었다.‘내가... 왜 여기까지 온 거지.’오늘 같은 날, 시연이 너무 보고 싶었다.‘시연... 지금 집에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병원일까?’‘딱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눈에 비치면... 그걸로 충분한데.’하늘이 기도를 들은 걸까?갑자기 대문이 열렸다.우산을 든 시연이 조이를 품에 안고 걸어 나왔다.모녀가 나란히... 어디를 가는 걸까?유건은 온몸이 긴장감으로 굳었다.‘안 돼. 시연이 날 보면...’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려 알아보기 힘들었다.체격만 봐서는 젊은 사람이 분명했다.유건은 눈살을 좁히며 조심스레 물었다.“저기요... 누구세요?”그제야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가려진 얼굴 사이로 드러난 건 단 한 쌍의 눈.그 눈이 유건을 똑바로 응시했다.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이 눈빛... 왜 이렇게 익숙하지?’유건의 목젖이 심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고, 숨결마저 불안정해졌다.“유건아.”먼저 입을 연 건 상대였다. 이름을 정확히 불러내는 목소리에는 익숙한 뉘앙스가 배어 있었다.유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곧, 아래를 내려다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참 질기네. 그쪽 집안, 대체 어디까지 따라붙을 건데.”심화연은 병원까지 쫓아오더니, 이번엔 고승하가 유건 어머니의 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유건은 어머니의 묘비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당장 꺼져. 지금, 여기서.”승하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웃었다. 허탈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오랜만에 왔네... 엄마가 많이 서운해하시려나. 날 원망하시진 않을까.”유건의 눈이 부릅떴다. 그동안 참고 있던 분노가 더는 가라앉지 않았다.‘이 자식... 일부러 이런 말로 날 자극하는 거야?’“입 함부로 놀리지 마! 우리 엄마 앞에서 그런 말 내뱉을 자격 없어! 엄마? 네 입에서 감히 그 단어가 나오냐?”승하는 여전히 눈빛만 드러낸 채, 담담히 받아쳤다.“태어나서 처음 부른 게 ‘엄마’였어. 내겐 처음부터 이분이 엄마였다. 그게 문제라도 있어?”“허...!”유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네가 부른다고 엄마가 너를 인정해?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 넌 이미 오래전에 우리 엄마의 아들이 아니게 됐어, 고.승.하.”순간,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승하는 긴 정적 끝에,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내 잘못이지. 그때...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
“인정 안 하신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에요! 승하는 고씨 집안의 핏줄입니다! 원한다면 DNA 검사라도 하면 돼요. 법이 알아서 증명해 줄 겁니다!”병실 문이 벌컥 열리자, 유건의 눈에 들어온 건 고상훈을 향해 고성을 지르는 심화연의 모습이었다.유건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여기가 어딘 줄 알아? 당신이 함부로 떠들어대는 곳이 아니야. 당장 꺼져!”낯선 기세에 심화연은 순간 움찔했다.“너... 유건? 너랑 승하, 정말...”“나가라 했지!”유건은 한마디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안 나가면, 내가 사람 불러 끌어낼 거야.”“네, 네가 감히?”“감히?”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힘을 더 줬다.“지금 당장 보여줄까?”“민환!”다시 문이 열리며 민환이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왔다.심화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목소리마저 떨렸다.“좋아... 네가 잘났다. 두고 봐!”“그래, 두고 보자고.”유건은 손목을 세차게 털어 그녀를 병실 밖으로 내던졌다.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여기는 G시야.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수로 판을 흔드나, 두고 보지. 꺼져!”“에휴...”고상훈은 한숨을 쉬며, 분노로 얼굴이 굳은 손자를 보았다.“봐라,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다. 저런 사람한테는, 네가 화내는 게 더 아까운 일이다.”“할아버지?”유건은 뜻밖의 반응에 놀란 눈빛을 보였다.“전혀 화 안 나세요?”“나?”고상훈은 담담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이제 화낼 나이는 지났지. 그날 그 세 사람 내쫓고 난 뒤론,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 기분을 망칠 필요가 있겠니?”말은 옳았다. 하지만 유건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난... 그렇게 쉽게 흘려보내지 못하겠는데.’고상훈은 손자의 속내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넌 아직 젊으니까. 급하게 마음 다잡으려 애쓸 것도 없어. 천천히 겪다 보면... 괜찮아진다.”“할아버지...”유건
그날 밤, 시연은 또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늘 그렇듯 약을 삼키고 억지로 눈을 붙였다.한밤중.갑자기 속이 뒤틀리며 잠에서 벌떡 깼다. 입을 틀어막은 채, 시연은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변기를 부여잡고 한참을 토해냈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거울에 비친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유령 같았다.찬물로 얼굴을 적시고서야 겨우 심호흡이 가능했다.‘왜 토한 거지?’제일 먼저 떠오른 건 임신이었다.유건과 함께일 때 늘 조심했지만, 세상에 백 퍼센트 완벽한 피임 따윈 없으니까.‘괜한 추측 말고... 내일 확인해 보면 되겠지.’그날 밤, 시연의 잠은 온통 뒤숭숭했다....다음 날 아침.시연은 강울대병원 앞 약국에서 조심스레 조기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진료 사이 짬을 내어 화장실에서 확인한 결과는 임신이 아니었다. 그녀도 안도감이 밀려왔다.‘조이는 아직 아빠랑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는데...’‘내가 어떻게 또 동생을 만들어 줄 수 있겠어. 그렇다면 구토의 이유는 뭘까?’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배를 쓸어내렸다.‘아마... 요즘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겠지. 고유건도... 언젠가는 잊게 되겠지.’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말처럼......이른 아침, 유건이 병원에 도착했다. 고상훈을 보러 온 길이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있었다.마침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고상훈이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 앉던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낯선 여자가 들어왔다.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 번쩍이는 보석을 두른 고급 정장 차림.두 걸음 다가서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빛에는 감춰지지 않는 비굴함과 주저함이 섞여 있었다.“어르신...”“음?”고상훈은 순간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곧 땅에 묻히긴 하나 보네. 이른 아침부터... 죽은 귀신을 다 보는구나.”“어르신!”심화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입술은 떨려 말을 잇기조차 힘들었다.“
“아니에요!”시연은 더는 감출 수 없어, 다급히 터져 나왔다.“우리... 헤어졌어요.”“헤어졌어도...”리슬은 자동으로 받아치다, 문득 멈췄다. 굳은 듯 시연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시연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헤... 헤어졌다고요?”“네.”시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헤어졌어요.”리슬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충격과 혼란이 얼굴에 동시에 스쳤다.“제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이 나라 말이 좀 서툴러서 그런데, 제가 잘못 이해한 거 아니죠? 헤어졌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사실은 입 밖에 꺼내기조차 힘든 말이었지만, 리슬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시연은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아마 리슬 씨가 이해한 게 맞을 거예요. 헤어졌다는 건... 다시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리슬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말도 안 돼요...”분명 농담일 거라 생각했다.“장난치지 마요!”“장난 아니에요.”시연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장난으로 해요?”“이, 이게...”너무 충격적이라, 리슬의 말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시연은 조용히 일어나며 말했다.“리슬 씨는 앉아 있어요. 제 선배가 오셔서 제가 인사드려야 할 것 같아요.”“네...”리슬은 멍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에게 이 소식은 마치 쓰나미처럼 몰아친 충격이었다.‘말도 안 돼... 두 사람이 진짜 헤어졌다고?’리슬은 믿을 수 없었다. 유건은 그렇게 쉽게 헤어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잠깐만... 두 사람이 끝났다는 건, 지금 고유건... 싱글이라는 거네?’그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리슬의 볼은 어느새 달아올라 붉게 물들어 있었다....케이크 커팅이 시작됐다.시연은 아현에게 손을 이끌려 단상 앞으로 섰다. 변이준 옆에는 아현의 아버지 최효강이 서 있었다.“아현아.”최효강이 딸에게 당부했다.“첫 조각은 이준 삼촌께 드려야지. 삼촌, 그동안 고생 많으셨잖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