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경에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사모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요, 사모님!” 시연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왕성애마저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사모님은 아직 어리세요. 갑자기 이러시면 놀라서 수명이 깎일지도 모른다고요!”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강수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서 일어나세요.” 왕성애는 불쾌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한밤중에, 그것도 울고불고하며 무릎까지 꿇다니... 대체 누구한테 겁을 주려는 거야?’ “아, 네...” 노수철이 강수희를 부축해 일으켰고, 강수희는 그 틈에 시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시연아,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무 급해서, 너무 막막해서 그랬어. 부탁이야... 우리 은범이 좀 살려줘.” ‘뭐...?’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은범이가... 왜요?” “은범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강수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범이가 손목을 그었어... 자살 시도를 했다고... 의사 말로는, 그냥...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대. 시연아, 너밖에 없어. 은범이한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너뿐이야...” “맞아.” 노수철은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듯했다. “예전에 우리가 널 힘들게 했던 거 안다. 근데 은범이도... 결국 피해자잖니.” 시연은 이미 정신이 아득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리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은범이는 어디 있어요?” “병원에 있어.” “어서 가요.” ‘지금은 묻고 따질 때가 아니야.’ 은범에게 우울증 있다는 거, 시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손목을 그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안 돼요!” 갑자기 왕성애가 가로막았다. “사모님! 가시면 안 돼요!” “왜요?” 시연은 당황했다. 왕성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답한 듯 말을 끌었다. “유건 도련님을 생각하셔야죠!” ‘고유건...’ 유건이 알게 된다면,
시연은 조용히 침대 곁에 앉았고, 모니터에 뜬 숫자들을 힐끗 봤다. 심박수, 산소포화도를 포함한 모든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은범아... 나야, 시연이.” 물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시연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은범의 손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감쌌다. “은이야...”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내가 왔어. 널 보러 왔어... 은이야...” 이어서 눈을 감자, 눈물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어...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 그동안 혼자 견디느라... 많이 힘들었지?” “포기하지 마. 지금 여기서 끝내지 마.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내가 곁에 있을게.” 시연은 계속 중얼거렸다. 우울증이 어떤 건지, 그녀는 의사지만 완전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널 도울 수 있을까?’은범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만, 시연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연아?” 문밖에 서 있던 강수희와 노수철이 놀라 그녀를 불렀다. “어디 가는 거니?” 지금 노수철 부부에게, 시연이 병실을 떠나는 건 곧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두 사람을 지나쳐, 병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정기환을 바라봤다. “기환 씨...” 그녀의 부름에 그가 다가왔다. “형수님, 무슨 일이세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뒤적였다. “예전에... 지 사장님이... 제 이름으로 집을 하나 사주셨거든요. 그 집, 어딘지 알죠?” “네, 압니다.” 그녀는 집 열쇠를 꺼내 건넸다. “거기 서재 책상 왼쪽 서랍에, 천으로 된 가방이 하나 있어요. 그거 좀 가져다주세요.” 기환은 멈칫했다.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시연은 고개를 돌려 노수철 부부를 바라봤다.
“시연아, 나 M국 도착했어. 며칠은 적응해야 해서, 학교 등록은 좀 이따가 하려고...”“오늘은 눈이 왔어. M국 날씨는 G시보다 더 오락가락하고 있어. 어제는 반 소매 입었는데, 오늘은 눈이 내려...”“오늘 장 봐서 집에서 밥해 먹었어. 햄버거랑 치킨만 먹다 보니 몸이 좀 이상하더라...”“요리가 좀 익숙해지면, 나중에 너한테도 해줄게. 넌 교수가 될 거니까 아주 바쁠 거잖아. 내가 집안일도, 너도 챙길게.” 한 문장, 또 한 문장. 은범의 글씨를 따라가던 시연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자꾸만 번졌다. ‘왜 이제야 보게 된 걸까...’ 시연의 심장이,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계속 답장이 없네. 아직도 화난 거야? 내가 갑작스럽게 떠난 건... 정말 어쩔 수 없었어. 우리 부모님이...” “지난번 내가 한 설명... 안 믿는 거야? 맹세할게. 단 한 마디도 거짓은 없어.” “시연아, 보고 싶어.”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적이 없어. 너를, 그리고 우리를 배신한 적 없어.” “나, 오늘 전액 장학금 받았어! 너도 기뻐해 줄 거지?” “내 디자인이 공모전에서 상 받았어! 앞으로... 우리 집은 내가 잘 지켜낼 수 있을 거야.” “시연아, 날 기다려줘. 제발... 나 돌아갈게.” “너무 보고 싶다. 딱 한 번만, 연락해 줄래?” “내가 잘못했어. 넌... 절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점점, 시연은 더 이상 문장을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시연은 오열했다. 이와 동시에 침대 위에 누운 은범을 바라보는 눈빛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서렸다. ‘난... 몰랐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지난 3년 동안, 시연이 은범에게 가졌던 감정은 오직 하나... 증오였다. 약속을 어긴 은범에 대한, 자신을 버린 은범에 대한, 가차 없이 떠난 은범에 대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간호사가 진료차트를 들고 병실을 나섰다. “하...” 노수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시연이가 있어야 은범이가 진정되는구나.” 어젯밤, 노수철 부부는 병실 안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유리창 너머로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다 보고 있었다. “참...” 노수철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시연이랑 은범이... 참 잘 어울렸지.” “외모든, 성격이든, 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는데...”“뭐... 이제 와서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결국, 우리가 갈라놓은 거잖아. 그 선택이, 우리 아들 인생을 망쳐놓은 거고.”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강수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데... 당신 그 얘기 들은 적 있어요? 시연이 동생 말인데...” 노수철은 고개를 돌렸다. “동생? 자폐 스펙트럼 있는 애?” 강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데 그 아이가 단순한 자폐가 아니래요... 굉장히 드문, 천재성 있는 아이라던데요?” “뭐?” 노수철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은범이가 제일 먼저 눈치챘대요. 이름이 우주라던데, 그 동생... 곧 CA국 ‘웰스’에서 전액 장학금 받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이야?” “네, 나도 최근에야 알았어요.” 노수철은 허탈하게 웃었다. “우린... 그 가족을 너무 몰랐던 거야. 3년 전에만 알았어도, 그렇게 무리하게 반대하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내, 스스로를 비웃듯 피식 웃었다. “근데 뭐 하러 그런 얘길 해? 이미 늦었잖아. 이젠 가능성도 없어.” 그러자, 강수희가 조용히 남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없어요?” “...뭐가?” “말 그대로예요. 왜 가능성이 없는데요?” 노수철은 잠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니, 시연이는... 지금 고유건이랑 결혼했잖아.” “맞아요. 근데 그 결혼, 그렇게 탄탄하지 않대요.” 강수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잖아요. 안 해보면, 정말 불가능한지 어떻게 알아요?” 강수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바로 그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욕실 문이 열렸다. 시연이었다.강수희는 얼른 남편 팔을 톡 건드렸다. “됐어요. 이제 그만 얘기해요.” 그러고는 곧장 시연을 향해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다가갔다. “시연아, 어서 와. 따뜻할 때 먹어야지. 네가 뭘 좋아하는지 잊었는데... 입에 안 맞으면 말해줘. 다음엔 네 취향에 맞춰볼게.” “사모님, 잘 먹겠습니다.” 시연은 상 위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적당한 간을 맞춘 음식이 정성스럽게 꾸려져 있었다. 딱 봐도 대충 준비한 게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아유, 뭘... 내가 너랑 무슨 예의를 따지겠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만 해. 언제든지 해줄게.” “네...” 시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꾹 다물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사모님이... 이렇게까지 다정한 사람이었나?’ 시연이 은범을 만난 지는 꽤 되었지만, 강수희에게서 이렇게 따뜻한 표정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수희는 언제나 냉정하고, 불편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너무 달라. 이 변화... 당황스러울 정도야.’ ...세 사람이 가볍게 요기를 마치고 있을 즈음, 의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상태 확인 결과, 전반적으로 상태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가족분들 덕분이네요. 계속 잘 유지해 주세요.” 강수희의 얼굴에 한 줄기 빛이 돌았다. “정말요, 교수님? 그럼... 은범이는 언제쯤 눈을 뜰까요?” 의사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건 확답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상태로 보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장기간 불면이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지금은 그냥 푹 자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강수희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곁눈질로 시연을 한 번 바라봤다. ‘역시... 은범이는 시연이 없이는 안 되
강수희의 지금 태도는, 이전에 비하면 너무도 다정했다.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나...’ 시연은 어쩐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시연아, 왜 멍하니 있어?” 강수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밥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배고프지? 어서 먹어봐.” “사모님, 저는 그냥 병원 식당에서 먹어도 돼요.” 시연은 조심스럽게 거절을 시도했다. “식당?” 강수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안 되지! 지금 넌 임신 중이니, 영양을 챙겨야 해.” 그러고는, 무심한 듯 덧붙였다. “그나저나, 점심마다 그렇게 식당에서 먹는 거야? 고 대표님은 신경도 안 쓰니?” ‘왜 고유건이 그런 걸 신경 써야 하지...?’ 시연은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아휴...” 강수희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바쁘니까 그러시겠지. 고 대표님은 워낙 일이 많으시잖니. 아무래도 널 세심히 살피긴 어려우실 거야.” ‘지금... 고유건이 나한테 무관심하단 걸 돌려 말하는 거야?’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부정하거나, 맞장구치기도 애매했다. ‘병원 식당 음식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요즘은 입덧도 거의 없어서 뭐든 잘 먹는데...’ “아직도 멍하니 있네. 어서 먹어.” 강수희가 다그치듯 말했다가, 곧 불안한 듯 덧붙였다. “입에 안 맞니? 혹시 음식이 별로야?” “아니요, 아니에요.” 시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 너무 맛있어요.” “그래, 그럼 많이 먹어. 지금 넌 두 사람 몫을 먹어야 하니까.” 강수희는 시연의 아랫배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눈빛엔 어딘가 스치는 듯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때 막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저 아이는, 우리 집 손주였을 텐데.’ 시연은 그 시선을 읽지 못한 척, 은범의 안부를 물었다. “은범이는... 좀 어때요?” “응, 괜찮아졌어.” 강수희는 활짝 웃었다. “기본적인 생체 수치는 안
“그래도, 이모...” 시연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이 옷들은, 정말 받을 수 없어요.” “이모가 주는 거잖아.” 강수희는 손을 내저었다. “너 어젯밤에 은범이 곁에서 밤새 간호했잖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이건 그에 대한 고마움이야. 너무 부담 갖지 마.”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난 은범이를 혼자 둘 수 없어서 이만 올라가 봐야겠구나. 천천히 먹고, 옷은 사이즈 안 맞으면 교환하도록 하렴. 영수증은 다 넣어뒀어.” “이모...” 시연이 일어나 말리려 했지만, 강수희는 이미 빠르게 병실 문을 나섰다. ‘하...’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방 속을 열어보곤, 손끝이 멈췄다. ‘이건... 전부 다... 임부복이잖아.’ 고급 브랜드의, 절묘하게 편하면서도 스타일을 놓치지 않은 임산부 전용 의류들. ‘정말 정성 들였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단지 은범이 옆에 하루 있어 줬다는 이유로 이 정도라니... 부모 마음이라는 게, 이런 건가?’ ...퇴근 후, 시연은 병원 가운을 갈아입고 다시 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시연아, 왔구나.” 강수희는 반갑게 맞이했다. “네, 이모. 은범 상태는 좀 어떤가요?” “아주 좋아졌어. 생체 수치도 안정됐고. 근데... 아직도 계속 자고만 있어서...” 강수희는 또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연은 부드럽게 말했다. “은범은 잠 못 자는 기간이 꽤 길었어요. 이젠 몸이 알아서 회복하려고, 푹 자는 거예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되는구나.” 강수희는 믿음 어린 눈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 왔어. 은범이 아빠가 왔는데, 짐이 많아서 내가 데리러 가야 하거든. 너만 괜찮으면, 우리 은범이 옆에 좀 있어 줄래? 말도 좀 걸어주고... 금방 올게.” “네, 괜찮아요.” 강수희
노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뭘 의미할까?’‘분명한 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겠지.’“여보, 멍하니 뭐 해요?” 강수희가 남편을 툭 찔렀다. “어서 들어가서 시연이가 깨기 전에 옮겨놔요.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그런 기회가 오겠어요?” 그 말에, 노수철은 눈치를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강수희의 뜻은 명확했다. 즉, 은범과 시연이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병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노수철은 마치 금고를 여는 사람처럼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해요. 깨우지 말고요.” 강수희가 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알았어.” 시연은 아직 깊게 잠든 상태였다. 노수철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어, 은범이의 병상 위에 살짝 눕혔다. 그리고 침대 커튼을 천천히 닫았다. 다행히 VIP 병실 침대는 넉넉한 사이즈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도 전혀 좁지 않았다. 노수철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병실을 빠져나왔다. “후... 심장 조여서 죽는 줄 알았네. 혹시 깨기라도 했으면, 그냥 끝장날 뻔했어.” “여보, 잘했어요.” 강수희가 만족스럽게 그의 팔을 툭 치며 노수철을 데리고 복도 끝 활동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병동 끝에서 지켜보던 정기환이 멀리서 노수철 부부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왜 저렇게 몰래몰래 움직이지...?’ 의심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기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에서 온 전화였다. 기환은 반사적으로 등이 쭉 펴졌다. “형님.”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유건의 낮고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연이는 퇴근했어?]“네, 퇴근했습니다.” [나 지금 강울대병원에 도착했어. 시연이가 계속 전화를 안 받던데, 내 말 좀 전해줘. 곧 도착하니까 병원 앞에서 기다리라고.]“네.” 기환은 애매한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젠장.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