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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Author: 임공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

‘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

‘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

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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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8화

    “밖은 추워. 우주야 얼른 타.” “응!” 우주는 힘차게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차는 강울대병원으로 향했다.이른 아침이지만, 건강검진 센터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시연은 미리 예약해 뒀고, 병원 소속 의사였기에, 우주를 데리고 직원 전용 통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시연은 유건에게 말했다. “당신까지 들어올 필요 없어요. 나랑 최 선생님이면 충분해요.” “알겠어.” 유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기다릴게.” 그러면서 최예민에게도 당부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줘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 대표님.” 대기실은 왁자지껄했다. 귀를 찢는 소음 속에 앉아 있으려니, 유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연이만 아니면, 이런 데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는데...’ “유건 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장소미가 간병인이 이끄는 휠체어에 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유건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여긴 왜 왔어?” 시연은 미리 신신당부했다. 장미리나 장소미, 우주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말라고... 우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었으니 말이다. 장소미도 그 뜻을 알기에 급히 말했다. “우주가 안으로 들어간 거 보고 온 거예요. 우주한테 상처 주려고 온 거 아니에요. 우주도 내 동생이니까요...” 유건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눈썹을 좁게 모았다. “설마 시연이가 우주 데리고 안 올까 봐 걱정한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시연이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한번 말하면, 반드시 지켜.” 그 말에, 소미는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람, 이렇게까지 지시연 편을 들다니...’ ‘지시연을 너무 잘 아는 거야? 아니면... 누구보다 믿고 있는 거야?’ 소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그냥... 엄마가 너무 긴장해서... 한번 보고 가면 엄마도 안심할 것 같아서요.” “됐고.” 유건은 딱 잘라 말했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7화

    다음 날 아침, 유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진아가 문을 열어줬다. “고 대표님.” 유건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집 안을 슬쩍 들여다본 그. “시연이는?” “어...” 진아는 침실 쪽을 가리켰다. “아직 자고 있어요. 안 깼어요.”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평소처럼 준비해 온 아침을 진아에게 건넸다. “너무 늦게까지 재우진 마. 식으면 데워도 맛이 떨어지고, 빈속으로 자는 건 몸에도 안 좋아.” “네, 알겠어요.” 진아는 아침을 받으며 형식적으로 물었다. “안에 들어와서 잠깐 쉬다 가실래요? 어쩌면 곧 일어날 수도 있는데요.” “괜찮아.” 유건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시연이는 절대 안 나와.” ‘시연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거, 모를 리가 없지.’ ‘내가 아침마다 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임진아를 내세운 건, 결국 나를 직접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겠지.’“시연이 잘 부탁해.” “네.” 문이 닫히고, 진아는 아침을 식탁에 내려놓은 뒤 침실로 향했다. 시연은 이미 깨어 있었고,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고 대표 가셨어.” “응.”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진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렇게 피할 거야?” “응.” “쳇.” 진아는 혀를 차며 말했다. “고 대표 은근히 끈질겨 보이던데? 쉽게 포기할 사람 같진 않아.” 시연은 살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오래 못 버틸 거야.” ‘사람 마음이란, 결국 변하게 되어 있으니까.’ 며칠 동안 유건은 아침저녁으로 시연의 집에 들렀다. 하지만 매번 문을 열어주는 건 진아였고, 시연은 늘 자고 있거나, 화장실에 있거나 했다. 유건은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또 오고, 또 왔다. ‘괜찮아, 시연이라면 기다릴 수 있어. 얼마든지.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6화

    시연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은범이는 내 첫사랑이에요. 외모도, 인품도, 집안도 빠지는 데가 없죠. 그 사람은 나만 사랑했어요. 오직 나만... 그리고 나도... 정말 사랑했어요.”“그만해!”유건은 잔뜩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네 과거 연애사 따위,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아. 나는, 지금 너와의 미래가 필요해.”“조급해하지 마요. 금방 끝나니까.”시연은 유건의 시퍼런 얼굴을 모른 척하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그렇게 미치도록 사랑했던 은범이랑 헤어지고 나서, 난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죠.”‘듣기 싫어하는 얘기인 거 알지만, 이건 꼭 들려줘야 해.’유건의 눈빛은 이미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속에서 파랗고 어두운 불꽃이 일렁였다.‘노은범... 네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한텐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만약 살인이 허락된다면, 유건은 이미 은범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지도 모른다.다행히, 시연은 그쯤에서 ‘회상’을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층 가라앉히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결국 살아남았어요. 잘 살아왔고, 지금은 은범이를 사랑하지 않아요.”시연은 유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지금의 은범이는 나한테 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이에요.”이어서 단단한 어조로 덧붙였다.“은범이도 그런데, 당신은 어떻겠어요?” 은범도 이렇게 됐는데, 하물며 당신은 어떻겠어요?”“우리가 이혼하면, 나는 금방 당신을 잊을 거고... 내 삶을 계속 살아갈 거예요.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몰라요.”시연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유건은 전부 들었지만, 반박할 말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속이 미친 듯이 아파져 왔다.‘아파... 숨 쉬는 것조차 버겁네...’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눈발이 섞인 바람이 칼날처럼 스쳤다.유건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시연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단단히 웅크리고, 입술을 앙다물었다.“추워. 곧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5화

    “저기...”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표정에는 긴장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시연아, 방금... 이혼 합의서 얘기한 거야?”너무 흥분한 나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미의 시선이 유건과 시연 사이를 계속 오갔다.“유건 씨, 정말... 이혼하려는 거예요?”시연은 소미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래.”“그게...”소미는 얼굴에 드러난 기쁨을 억누르려 애썼다. ‘이게 진짜라면... 드디어 기회가 오는 건가?’“시연아, 말도 안 돼. 유건 씨 할아버지 때문에 결혼한 거잖아? 유건 씨 할아버지가 이혼을 허락하실 리가 없잖아!”말끝마다, 소미는 시연에게 상기시키려 했다. 이 결혼은 유건의 진심이 아니었고, 강요된 거라는 걸.“소미 씨, 그만해!”유건도 그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눈을 좁히며 음울한 기운을 터뜨렸다.‘아직은 여기서 터뜨릴 수 없어.’하지만 소미는 이미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유건 씨... 나한테 화내는 거예요? 내가 틀린 말 했어요?”유건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처음엔 소미 말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달라.’그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주변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당신... 왜 그렇게 굳어 있어요?”시연이 한발 먼저 나섰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주려는 듯, 덤덤히 말했다.“당신 여자 친구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시연은 소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맞아, 우리 결혼은 할아버지 때문이었어. 근데 걱정하지 마. 이혼도 할아버지 허락받은 거니까.”소미는 눈을 크게 뜨고,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진짜? 유건 씨 할아버지가 허락하신 거야?”“응, 진짜.”시연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그러니까, 축하해. 이제 곧 떳떳하게 사귈 수 있을 거야.”‘그래... 이제 네가 다 가질 수 있어.’‘응’하고 바로 대답할 뻔한 소미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슬쩍 유건을 살핀 후, 작게 말했다.“시연아, 나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4화

    만약 검사 결과에 문제가 없다면, 시연은 우주에게 간 이식 얘기를 꺼낼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문제가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오늘, 시연은 건강검진 중간 예약 때문에 병원에 왔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하자, 지동성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미리와 장소미까지 같이 와 있었다.‘놀랍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시연아.”시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지동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장미리도 덩달아 일어났다. 장소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에 예외였지만, 모두의 시선은 똑같았다.간절하고, 어딘가 초조한 눈빛.‘나를 향한 게 아니야. 우주의 간을 향한 거지.’“시연아.”장미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정말... 고마워.”“아니에요.”시연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차갑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소미도 연이어 말했다.“고마워...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돼?”“나랑 한 약속을 기억하면 돼요. 우주 앞에서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시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아예 당신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제일 좋고요.” 과거, 장미리가 우주를 납치하고 다치게 했던 기억이 스쳤다.“알겠어, 알겠어!”장미리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우린 잘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그럼 됐어요.”시연은 안쪽 진료실을 가리켰다.“그럼 장 여사님, 저는 서류 작성하러 들어갈게요. 그쪽 식구들, 더 이상 할 일 없으면 그냥 먼저 가보세요.”말을 끝내고, 시연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진료실로 향했다.“시연아, 나도 같이 갈게!”지동성이 급히 따라붙었다.잠시 후, 두 사람은 함께 진료실에서 나왔다. 시연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니, 유건이었다.‘또 이 사람이야.’시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용히 무음으로 돌려버렸고, 받지도, 답장하지도 않았다. 이미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말이다.“어떻게 됐어요?”나오자마자, 장미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3화

    유건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 눈빛에는 잠깐의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너, 꽃... 안 좋아해?”“참...” 시연은 두어 번 짧게 웃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그러다 불쑥 말했다. “오늘, 아버지를 만났어요.”유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는 묵직한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그리고 그분한테 약속했어요. 우주한테 간 이식 얘기를 전하겠다고.”시연은 문득 웃었다. 쓸쓸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그날 당신이 했던 말들, 솔직히 듣기 끔찍했지만... 맞는 부분도 있었어요.”“시연아, 나...” 유건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끝까지 들어줘요.” 시연은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웃었다.“하지만 그분, 나랑 약속했어요. 우주한테 자기가 아버지라는 걸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요.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당신도 입조심해요.”그 말을 끝으로, 시연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마치 ‘이제 나가라’는 듯한 자세였다.“자, 이제 내가 할 말은 끝났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겠네요. 이제 당신의 목적도 이뤘으니 이만 가봐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밖에서 내리는 눈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시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끝이야. 나도, 당신도.’그때, 유건이 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얇은 입술에, 가볍고도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내 목적이 뭔데?”“됐어요, 그만해요.” 시연은 피곤한 듯 웃음을 거두었다.“더는 당신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요. 빨리 가서 장소미한테 좋은 소식 전해요. 기뻐하겠죠.”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시연에게 성큼 다가섰다.“내 목적이 뭐냐고 묻잖아. 대답해.”‘뭐야, 아직 부족해?’ 시연은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내가 못 알아듣게 말했나?’“그...” “입 다물어.”유건은 거칠게 시연의 턱을 움켜잡았다. 남자의 숨결이 거칠고 짙게,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2화

    “고마워요.”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좀 볼게.” 지동성이 메뉴를 받아 들고, 시연의 취향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많이도 골랐다.“이 정도면 될까?” “충분해요.” “그래, 부족하면 더 시키자.”딸이 먼저 식사를 제안한 건 너무 뜻밖이라, 지동성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이런저런 질문이 이어졌다.“요즘 어때? 아이는 괜찮고?” “그럭저럭이요...” 시연은 대충 답했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또 시작이야...’ 지동성의 끊임없는 질문에 시연은 은근히 짜증이 밀려왔다.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간 이식 문제는, 우주한테 말해볼게요.”지동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이 얼어붙었다.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시연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 ‘알아들었을 거야. 그것도 충분히.’ 그리고 이어갔다. “하지만, 저한테 약속 하나를 해줬으면 좋겠어요.”“시연아...” 지동성은 다급히 불렀지만, 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눈으로 지동성을 바라봤다.“저는 우주한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가족들도, 입 다물었으면 좋겠어요.”“우주는 자기 아빠도, 엄마처럼 이미 세상에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요.”말하는 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면 안 돼, 울지 마...’ 하지만, 그녀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저는 우주한테, 아버지가 그냥 자주 찾아오는 아저씨라고만 말할 거예요.”“시연아, 난...” 지동성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시연이 단호히 끊었다.“제발...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앞으로 절대, 우주를 아버지로서 대하려 하지 마세요.”“우주는 14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빠’를 불러본 적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우리 우주... 이제 와서 무너뜨릴 수 없어. 절대.’시연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약속할 수 있어요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1화

    남자는 키가 크고, 군더더기 없이 단단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유건과 체격이 비슷했던 덕분에, 시연은 그가 꾸준히 운동해 온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남자는 어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깊었고, 특히 크고 선명한 유럽풍 눈매가 눈길을 끌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 속에 은은하게 퍼지는 푸른빛이 인상적이었다.피부도 매끈했다. 아마 좋은 환경에서 자라온 덕분일까, 눈에 띄는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하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남자가 중년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시연이 잠시 귀를 기울이니,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불어였다. ‘불어...? 여기서?’ 시연은 살짝 긴장했지만, 곧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봉주르.” 시연은 조심스럽게 불어로 인사를 건넸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아.” 남자는 잠깐 놀란 듯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불어 할 줄 아세요?”“조금이요.” 시연은 겸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걸로 먹고 살았던 적도 있지만...’“정말 다행이네요.” 남자는 위쪽 메뉴판을 가리키며 서툴게 손짓했다. “저기... 저걸로...”“네.” 시연은 금세 알아차리고, 미소를 띤 채 직원에게 돌아섰다.“이분은 레모네이드, 얼음은 조금만요.”“네, 알겠습니다.” 직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라면 간신히 알아듣겠지만, 불어는 아예 포기 상태였으니까.“고객님, 여기 카드로 결제하시면 됩니다.”‘카드...? 어쩌지?’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제가 도와드릴게요.”‘좋은 일은 끝까지 해야지.’시연은 자기 카드로 대신 결제를 진행했다.‘다행이다. 그냥 레모네이드 하나라서. 비쌌으면... 내 지갑부터 걱정했을지도 몰라.’“저는 밀크티 하나요. 같이 결제해 주세요.”“네, 알겠습니다.”“정말 고맙습니다.”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

  •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제620화

    “고, 유, 건!” 시연의 인내심이 결국 터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건은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너 샤워 다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 갈게. 욕실 바닥 미끄럽잖아. 그 생각하니까 그냥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네, 진짜.’시연이 숨을 꾹 참고 머리를 홰 젖히며 돌아서자, 긴 머리카락도 그녀를 따라 허공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방에서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건이 선수를 쳤다. “머리만 말려주고 갈게. 팔 오래 들고 있으면 어깨 아프잖아.” ‘와... 이 사람 진짜 각 잡았네.’ “당신...” 시연은 유건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지금 완전 딱 쫀득한 엿 같은데요? 질척거리는 게, 떼도 안 떨어질 것 같아요.” “고마워, 나 그런 칭찬 좋아해.” 유건은 오히려 웃으며 수건을 펼쳤다. “칭찬...?” 시연은 어이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정신력은 또 뭐야...’ “자, 머리 말리자. 머리 다 말리고 자야 감기 안 걸리지.” 결국 시연은 눈을 감았다. ‘됐어... 그냥 못 본 척하자. 말하면 뭐 해? 안 먹힐 텐데.’ ...그런 날들이 계속됐다. 유건은 하루에 두 번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침엔 아침밥 들고 등장. 점심엔 직접 못 오면 민환을 통해 도시락 배달. 저녁엔 꼭 나타났다. 빠르면 같이 저녁, 늦으면 야식. 그리고 샤워 후엔 늘 자연스럽게 등장해 머리를 말려주기까지. 시연은 정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봤다.차갑게도 말해봤고, 내쫓으려 해본 적도 있었고, 문 앞에 세워두기도 해봤다. 하지만 유건은 마치 그 자리가 제자리라도 되는 듯, 늘 시연 곁을 지켰다.마치 떠날 줄 모르는 그림자처럼.어느 날 오전. 시연은 오랜만에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잠깐 들릴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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