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이 양갈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유건도 모르게 입에 군침이 돌았다. ‘이렇게 잘 먹는 건 처음 보네.’ 시연은 순식간에 한 접시를 비워버렸다. 그런데, 시연이 뼈를 깨끗이 발라내며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접시를 내려다봤다. ‘더 먹고 싶나?’ 유건은 피식 웃으며, 서빙 직원에게 손을 들었다. “소갈비 한 접시 더 주세요.” “네, 고 대표님.” 시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쑥스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 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재호?’ 화면을 확인한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호야.” 그는 잠시 시연을 보며 말했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이 창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봤다. 그 순간, 유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래, 장소미 사고 건 말이야. 이건 네가 맡아.” 순간, 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큰일 났다.’ ‘주재호... G 시 최고의 변호사. 이 사람이 맡으면, 이길 확률 100%...’ ‘이 사람이 장소미한테 주재호 변호사를 붙였다고?’ ‘그러면 성빈이는?’ 순간, 시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안 돼, 이거 은범이에게 알려줘야 해.’ 시연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유건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왜 그래?” 유건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시연은 애써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유건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가 자리를 뜨는 순간 그 미소는 차갑게 사라졌다. ‘뭐야? 지금 분명 뭔가 숨기고 있는데.’ 시연은 서둘러 식당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을 열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은범아.” 그리고, 단 몇 걸음 뒤에서. 그 목소리를 유건은 똑똑히 들었
유건이 화가 났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불길처럼 이글거렸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어디 가려고요?” “집에 가야지.” 유건은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면, 아직도 밥 먹을 기분이야?” ‘...이 분위기에, 내가 무슨 입맛이 남아 있겠어.’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차 문을 열고 그녀를 태우더니, 자신도 조용히 운전석에 앉았다. 차가 출발했다. 차 안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운전하는 내내, 유건은 전방만 똑바로 응시한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핸들을 쥐고 있는 유건의 손가락이 심하게 경직돼 있었다. “할 말 없어?” 갑자기, 유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요?” “나한테 할 말 없냐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연을 흘겨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장소미 일은 이미 다 알았을 텐데, 굳이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침묵이 유건을 더 자극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떠봤는데도, 이 여자는 끝까지 모른 척인 거야?’ ‘아주 좋아. 그럼, 나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지.’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기어를 한 단계 올렸다. 차는 빠른 속도로 본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착하자, 유건은 차에서 내렸다. 시연도 조용히 따라 내려섰다. 그러나,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유건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여자의 손목이 다시 한번 붙잡혔다. “어디 가려고?” “나... 할아버지 뵈러 가려고요.” 시연은 애써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단둘이 같이 있는 건 너무 숨 막혀.’
그날 밤, 유건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연도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일어난 일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다 새벽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 중,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은범이?’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떻게 됐어?” 반대편에서 은범이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아.] ‘역시...’ [상대방 측 입장이 워낙 강경하고, 거기다 주재호 변호사까지 붙었으니까.]‘주재호... 그 사람 능력으로 봐선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 [그래도 아직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은 시연에게 별다른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알았어.” 그녀는 힘없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고, 식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더 이상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성빈이는 결국 나 때문에 다친 거나 마찬가지야.’ ‘나라도, 직접 장소미를 만나야 해.’ ...병원, VIP 병동. 본가에서 나온 후, 시연은 곧장 강울대학교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병원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VIP 병동까지 무사히 들어왔고, 지금 병실 문 앞에서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손을 들어 노크했다. “들어와.” 시연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 장소미의 목소리였다.시연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은 조용했다. 침대 위, 오른쪽 다리에 깁스한 소미가 다리를 높이 올린 채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연을 보자마자 잠시 놀란 듯했다. “너였어?” 시연은 한 걸음씩 다가가, 침대 앞에서 멈춰 섰다. “사과하러 왔어요.” “사과?” 소미는 비웃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뭘 사과하겠다는 건데?” 시연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다치게 한 사람이 내 친구이고,
시연은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소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네가 유건 씨의 곁을 떠난다면, 고소를 취하해 주지.” 순간, 시연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러나 그녀는 막상 직접 듣게 되니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소미는 매끄러운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여유롭게 덧붙였다. “잘 생각해 봐. 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될 거야. 한쪽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 한쪽은 어릴 적부터 함께한 소중한 친구.” “이제 선택해.” 둘의 시선이 서늘하게 맞부딪혔다. 하지만, 시연은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떠날게요.” ‘...뭐?’ 소미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약속 지켜요. 고소는 반드시 취하해줘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소미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됐다. 이건 기회야. 절대 놓칠 수 없는 제일 좋은 기회!!’ ...병원을 나서자마자, 시연은 곧장 본가로 향했다. ‘약속했으니까, 최대한 빨리 떠나야 해.’ ‘고소 취하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바로 본가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아.’ 다행히, 지금은 본가에서 조용했다. 시연은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가 옷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옷가지들을 하나둘 정리하며,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짐을 전부 옮기지 않았으니까.’ 시연의 짐은 기숙사에 대부분의 물건이 남아 있어, 많이 챙길 필요도 없었다. 유건이 사준 옷들은 그녀가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애초부터 그녀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연은 그렇게 약 30분 만에 모든 정리를 끝낸 뒤, 캐리어를 조용히 끌고, 1층으로 내려왔다. 혹시라도 집사 이호민이 눈치채고 고상훈
‘이혼이라니...’전화기 너머에서 그 말이 들려온 순간, 유건은 가슴을 순간적으로 움켜쥐었다. 숨이 턱 막히고, 한순간 귓가가 먹먹해졌다. ‘...또 이혼이야? 벌써 두 번째...’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처음과는 다르게, 이 여자... 이제 진짜 내 아내인데...’ ‘하지만, 이 여자 또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이혼 이야기를 입에 올리다니!’ ‘그래, 결국 너한테는 나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은 거지?’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는, 가볍고 하찮은 존재.’ 분노, 억울함, 배신감...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이며 유건도 한순간 폭발했다. [지시연, 또 이혼하자고?] 남자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아졌다. [너 혼자 결정하면 끝이야? 내 허락도 없이?]시연은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그럼에도 목이 타들어 갔다. “...왜요?”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건 씨도 장소미 좋아하잖아요. 우리가 이혼하면, 이제 제대로 함께할 수 있잖아요.”[...헛소리하지 마.]유건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참아왔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폭발했다. [이혼?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떠날 생각 하지 마.][대체 이유가 뭐야? 갑자기 이혼하자는 이유가 뭐냐고!]시연이가 대답하지 않으면, 유건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유를 알아낼 것이다. “...그게...” 순간, 시연이가 머뭇거렸다. 예전에 유건이 자신의 병원 실습을 중단시켰던 일이 떠올랐다 ‘고유건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야.’ 그녀는 자세를 낮추고,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건에게 간절히 부탁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시연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장소미예요.” 그 순간, 유건의 눈빛이 위험하게 날카로워졌다. [장소미가 뭐라고 했는데?]시연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그가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내가... 장소미를 찾아갔어요.” “그 사
‘어쩌지?’시연은 막막했다. ‘결자해지라고 하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장소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고유건이 그렇게 장소미를 사랑하는데, 만약 장소미가 직접 부탁하면 놓아주지 않을까?’ ‘어쨌든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 해.’ 한시가 급해서 시연은 곧장 강울대학교병원의 VIP 병동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굳어버렸다. ‘이게 뭐야...’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발이 묶여버렸다. 자신이 너무 급한 나머지 생각 없이 들어왔는데, 유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유건은 병상 옆에 앉아 사과 껍질을 정성스럽게 깎고 있었고, 소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무언가 나지막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미가 먼저 시연을 봤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그녀는 시연과 시선을 맞추더니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기분 좋은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진 선생님, 어서 와요.” “아... 네.” 시연은 발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옮겨가며 두 사람 앞에 섰다. 슬쩍 유건을 봤지만, 그는 마치 시연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사과 껍질을 끝까지 깎아낸 유건은 과육을 가지런히 잘라 접시에 담아 소미에게 건넸다. “자, 먹어.” “고마워요.” 소미는 자연스럽게 받아 한 조각을 입에 넣었고, 그러고 나서야 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그게...” 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며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혹시... 소송은 이미 취하하셨나요?” “네?” 소미가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웃음기가 희미해졌다. “당연하죠. 왜요? 설마 제가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런 뜻은 아니에요.” ‘어쩌지...’ 시연은 속으로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이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은 유건을 향해 어렵게 시선을
“아, 그래요.” 유건이가 떠나자마자, 소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자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지고,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고유건... 왜 그렇게까지 진성빈을 놓아주지 않는 거야?’ ‘정말... 나를 위해 복수를 하려는 거야?’ ‘진성빈과 지시연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고유건조차 봐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데...’ ‘아니면, 지시연의 이상한 행동들 때문에 고유건이 언짢아진 걸까?’ ‘하지만 나 역시 고유건에게 ‘특별한 존재’야...’ 소미는 유건이 정성껏 깎아준 사과를 한 조각 집어 들고 천천히 씹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니까 지시연, 결국 누가 웃게 될지는 모르는 거야.” ...VIP 병동 입구. 시연은 멍하니 서서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유건이었다. 그가 시연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시연은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아직 안 갔어? 날 기다린 거야?”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미 결과가 뻔한 일을 가지고,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진 않을 거예요.” “뻔한 결과?” 유건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잠시 멈칫했다. 그는 시연이가 결국 자신에게 매달릴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이 여자, 여전히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군.’ 이렇게 생각하자 유건은 화가 치밀어 올랐고, 냉소하며 물었다. “그래? 네가 아는 게 뭔데? 한번 말해봐.” 시연은 손가락을 꼭 쥐었고, 입술을 떼며 조용히 말했다. “고 대표님은 사랑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거잖아요.”“첫째, 장소미 앞에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싶으시죠? 둘째, 장소미가 다쳤으니 고 대표님도 가슴이 아파서... 그러니까 나도 다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유건의 눈빛이 싸늘해졌고, 시
유건이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혼자만 돌아온 거냐?” 고상훈은 지팡이를 짚고, 이호민의 부축을 받으며 눈을 부라렸다. “하나만 물으마. 시연이는 어디 갔지?”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벌써 할아버지가 아셨다고? 생각보다 빠른데.’ ‘뭐, 그럴 만도 했지. 한집에 살던 사람이 사라졌는데,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고상훈이 시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유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유건 자신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네, 떠났어요. 아마 다시는 안 돌아올 거예요.” “이놈!” 고상훈은 손에 쥔 지팡이를 번쩍 들었다. “어르신!!” 이호민이 놀라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할아버지!!” 다행히 유건도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 한 발짝 물러섰다. “이 녀석이 감히 날 피해?” 고상훈은 거친 숨을 내쉬며 씩씩댔다. “솔직히 말해라. 네가 시연을 내쫓은 거냐?” “제가요?” 유건은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대체 누가 손주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 배은망덕한 여자는 신경도 안 쓸걸?’ ‘떠날 때, 할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했을까?’ 그는 기분이 더러워져 굳이 변명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요, 제가 그랬다고 치죠.” “어처구니없는 놈!” 고상훈은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올리면서 손끝을 미세하게 떨었다. “결혼할 때부터 내키지 않아 하더니만, 이럴 줄 알았어!” “시연이한테 제대로 못 해준 것도 모자라, 결국 내쫓았다고?” 노인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고상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 보고 있었다. “너, 결국 그 여배우 때문이지?” ‘...?’ 유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할아버지가 장소미까지 알고 계신다고?’ 그는 한순간 뜨끔했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할아버지, 이건 소미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헛소리 집어치워!” 고상훈은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