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폭우. 주변에는 나무들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질퍽한 진흙탕을 밟으며, 시연은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꽤 먼 거리를 걸었지만, 시야가 조금씩 트일 뿐,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길이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갈 수 있는 길은 이쪽뿐이었는데...’ 순간, 시연에게 불안이 엄습했다. ‘차에서 괜히 내렸나?’ ‘그 사람이 차에 돌아왔는데, 내가 없으면 더 큰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시연은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동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시연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맹수? 공격적인 짐승 소리 같은데...?’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울음소리. 불길한 기운에 시연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풀숲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놀란 그녀의 발이 미끄러졌다. ‘탕!’ 총소리! “꺄악!”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강한 힘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공포가 눈에 어려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여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유건 씨!” “나야.” 유건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시연을 부축하고, 다른 손으로 사냥용 총을 들고 있었다. 조금 전의 총성이 바로 그 총에서 울린 것이었다. 그는 깊게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자, 일어나. 걸을 수 있겠어?” “네, 괜찮아요.” 남자의 손을 빌려 간신히 일어나며, 시연은 민망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유건이 하지 말라고 했던 행동을 했고, 결국 위험한 상황까지 만들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유건은 전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너무 늦었어.” ‘어떻게 네 잘못이겠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잖아.’ 유건은 아직
“감사합니다, 할머니. 이제 제가 할게요.” “그래.” 할머니가 준비해 둔 방은 2층에 있었다. 유건은 시연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가득했고, 의자 위에는 목욕 가운과 갈아입을 옷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따뜻한 물에서 몸 좀 풀어. 감기 들면 안 되잖아.” 그렇게 말한 후,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그때, 시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 “유건 씨.” “응?”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요?” 유건도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난 아래층에서 씻으면 돼. 굳이 욕조에 안 들어가도 괜찮아.” “네, 알았어요.” 유건은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 시연은 조용히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전신을 감싸면서, 쌓였던 긴장과 피로가 서서히 풀려갔다. 한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온기에 몸을 맡겼다. 시연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씻고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덕분에 늘 단정했던 모습과는 달리, 묘하게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시연은 목욕 가운만 걸친 채였다.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얼굴, 희고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얇은 가운 아래 드러난 가녀린 두 다리. 유건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빨래 가지러 온 거였어.”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좀 누워 있어. 저녁은 내가 가져올게.” “그건 좀...” ‘괜찮을까? 내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신경 쓰지 마.” 유건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 말씀드렸어. 너는 아주 피곤할 거라고.”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 시연의 젖은 옷을 챙겨 방을 나섰다. 조용해진 방 안. 시연은 침대에 몸을 기댔다. 몸은 무겁고 피곤하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이불을 걷고
할머니는 정성껏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보르쉬, 구운 채소, 스테이크, 신선한 과일과 디저트까지. 해외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식사는 보통 명절이나, 귀한 손님을 초대했을 때 차려진다는 것을.그래서 유건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시연은 눈앞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들에도 전혀 식욕이 돌지 않았다. 유건은 바로 눈치챘다. “먹고 싶지 않으면 안 먹어도 돼.” “괜찮아요.” 시연이 그를 막아섰다. “어차피 뭘 먹어도 입맛이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할머니의 정성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국부터 한 입 먹어봐.” 유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 입이라도 더 먹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네.” 시연은 ‘음식을 약이라 생각하자’ 생각하고, 두 숟갈 정도 떠먹었다. “어때?” “괜찮아요...” “다행이네.” 유건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기 식사를 시작했다. “웩!” 갑자기, 시연이 입을 틀어막더니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시연아!” 유건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튕겨 나갔다. 화장실에서, 시연은 변기를 부여잡고, 방금 마신 국물을 모조리 토해냈다. 유건은 황급히 양치할 수 있도록 물을 떠 왔다.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자꾸 억지로 먹으려고 해?” 시연은 눈가가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죄송하잖아요.” ‘할머니께서 정성 들여 준비해 주셨는데, 한 입도 못 먹으면 실례잖아.’ “뭐가 미안해?” 유건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있잖아. 네가 못 먹는 건 내가 다 먹으면 돼.” 그러면서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앞으로는 무리하지 마. 알았어?” “네.” 그렇게 해서, 결국 유건 혼자 두 사람 몫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걸 조용히 바라보는 시연. 그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그녀가 신경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지역도 아닌데, 무슨 방법을 쓰겠다는 거예요?” “해보기 전엔 모르지.” 유건은 능청스럽게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진짜 간다고?’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건과 할아버지의 대화를 들었다.“그 슈퍼는 꽤 멀어. 차로 왕복하면, 날이 밝고 말 거야.”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 체력이 좋으니까요.” 그러면서, 할머니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할머니, 제 아내를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지.” 할머니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유건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남편을 향해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당신도 젊었을 때 그랬잖아요? 날 위해 뭐든 하겠다고.” 할아버지는 웃음을 지었다. “좋아, 차고에서 차를 꺼내올게.” “얘야,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비옷부터 입으렴. 공방에 있을 거야.” “네, 할머니.”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방으로 가서, 우비를 걸쳤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시연은 현관 앞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여자의 표정은 복잡하고,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왜 나왔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유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작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가지 마요.” “응?” 유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내려와 있었어? 다 들은 거야?” ‘웃을 일이야?’ 그녀는 전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기에, 진지하게 말했다. “한 끼 안 먹는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진지해하자, 유건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주지한이 못 오면, 넌 8시간 넘게 굶어야 해.” 그러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내가 그걸 알면서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 편히
현관 앞. 유건이 막 계단에 올라섰을 때,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비 온 뒤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촉촉하게 젖은 풀숲 사이에서, 이름 모를 벌레들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차 타고 갔다 온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젖었어요?” 그러면서도, 몸을 살짝 옆으로 빼며 유건을 안으로 들였다. 유건은 커다란 봉투를 안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봉투를 내려놓고, 하나씩 정리하면서 말했다. “쌀을 샀어. 그리고 생선도.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생선찜을 좋아한다고. 식초 찍어서 먹는 거.” 그러다 문득, 말이 끊겼다. ‘언제 다가온 거지?’ 시연은 어느새 손에는 수건을 들고 유건의 앞에 서 있었다. “고개 숙여요.” “아, 응.”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시연은 조용히 유건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샤워할래요?” 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몸까지 젖은 건 아니야.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습기만 좀 찼을 뿐이야.” 그는 테이블 위의 쌀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먹을래? 밥? 아니면 죽?” “음...”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밥을 더 먹고 싶어요.” “좋아.” 그는 직접 수건을 들어서 머리를 대충 털어낸 뒤, 조용히 쌀을 씻기 시작했다.시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유건이 피식 웃었다. “또 그 생각 하는 거지?” “어떤...?” “저 도련님이 저런 것도 해?” 시연은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 할 줄 아는 거 많아.” 그는 자연스럽게 찜기 대신, 노부부가 사용하던
“쌀을 팔던 그 마트 말이야, 주인 부부가 우리나라 분들이더라.” 유건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 입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모님이 자기도 임신했을 때 그랬다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이 방법을 알려주셨어.”‘그랬구나.’ 시연은 조용히 들으면서, 비 오는 깊은 밤, 유건이 낯선 사람에게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제 아내가 임신 중이라...’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그리고 묘하게 간질거렸다. 이때, 고요한 공간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시연은 반사적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핸드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곳은 조용했고, 거리도 좁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래도 몇 마디는 들렸다. “응, 아직 Y국이야.” ‘여기가 Y국이었어?’ 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 이틀 정도 더 있어야 해. 걱정하진 말고.” “너도... 몸조심해.” 유건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 그 따뜻한 배려. 장소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알겠어, 가서 이야기하자.” 전화를 끊고, 유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춰 섰다. 조금 전까지 온기가 가득했던 식탁.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따뜻한 밥과 생선이 그대로인데, 그걸 먹던 사람은 사라졌다. ...다음 날 새벽.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6시가 되기 전. 주지한이 도착했다. 정민환과 정기환도 함께였다. 그들은 차 두 대를 타고 왔다. 유건은 Y국을 떠날 때 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했기에, 한 번에 네 장을 구하지 못해서 결국 유건과 지한이 먼저 오게 되었다. 이른 시각, 노부부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건 일행은 떠나야 했다. 유건은 직접 노부부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희를 데리러 온 사
민환과 기환은 다 특수부대 출신이라 두 사람의 감각이 틀릴 리 없었다. 유건은 미간을 좁혔다. ‘CA국이라... 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나를 몇 번이나 쫓고 위협하고도, 또 뭔가를 하려는 거지?’ “형님...” 그때, 뒷좌석에서 기대어 자고 있던 시연이 살짝 움직였다. “그만.” 유건은 순간적으로 민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하지 마. 지금은 안 돼.’ 민환도 즉시 눈치를 챘다. “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뒷좌석에서, 시연은 단순히 몸을 조금 뒤척였을 뿐이었다. 다행히, 깊이 잠든 듯 보였다. 유건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깼네. 다행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 지저분한 일들은 시연이가 알 필요도 없어.’‘하지만... 시연이가 이 사실을 알면 날 걱정해 주려나?’ 사실, 시연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유건과 민환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누군가 고유건을 해치려는 건가?’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유건이 칼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저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다. 시연은 재벌가의 발이 넓을 거라 생각했다.‘하긴, 고유건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 살인범은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을 거야.’ 그런데, 아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그 배후를 찾지도 못한 거야?’이 사실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이동하는 내내 별다른 문제 없이 ‘웰스'에 도착했다. 주지한이 있었기 때문에 협상 관련된 부분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 일행은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시설을 둘러보았다. ‘웰스’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교육 기관이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다양한 첨단 산업에 기여해 왔다. “이 학생 말이에요.” 책임자인 30대의 여성은 최근 사례를 소개했다. “우주군처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무려 8개 연구소에서 합
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도시로 들어설 무렵, 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형수님을 먼저 내려드릴까요?” ‘당연한 걸 왜 묻지?’유건은 이런 질문 전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연이 먼저 거절했다. “아니에요.” “일단 유건 씨가 머무는 숙소로 가요. 괜히 집까지 돌아갈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는, 병원에 좀 들러야 해요.”지동성은 아직 입원 중이었다. 그래서 시연은 아버지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웰스'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을 그녀는 직접 전해야 했다.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유건의 미간이 본능적으로 좁혀졌다. 그는 반대하고 싶었다. “시연아...” “약속했잖아요.” 그녀는 유건의 의도를 미리 읽고, 단호하게 말했다. 유건이 ‘웰스’까지가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두 사람은 갈 길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유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마치 쓴 약을 삼킨 것처럼.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어렵게 말했다. “그래, 약속 지킬게.” 그러고는 민환에게 지시했다. “앞 사거리에서 내려줘.” “네, 형님.” 차가 멈추고, 시연이 내렸다. 문을 닫고, 그녀는 유건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시연은 ‘잘 가’라고 했고,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는 하지 않았다.때로는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보다, 더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잘 가’라는 말이었다.언젠가 다시 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 그렇게 덤덤하게 마무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픈 법이었다.“그래. 잘 가.” 유건은 아주 작게, 입술을 겨우 움직이며 읊조렸다. 차가 움직였다. 그는 거울을 통해, 시연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느낌. ‘아... 나는 정말로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